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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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Bayrische Räterepublik) 혹은 뮌헨 평의회 공화국은 바이에른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1919년 독일혁명으로 인해 수립되어 약 1개월간 지속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방위군군(Reichswehr)과 자유군단의 공격을 받아 뮌헨이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아이스너 내각과 호프만 내각[편집 | 원본 편집]

1918년 독일은 패전을 향해가고 있었고 전국적으로 노동자 병사 평의회가 수립되고 있었다. 바이에른 역시 노동자 병사 평의회가 수립되었으며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지도자 쿠르트 아이스너의 주도로 혁명이 일어나 루트비히 3세가 폐위되었다. 아이스너는 바이에른 자유주의 수립을 선포했으며 평의회에 의해 총리에 임명되었다. 1919년 1월 바이에른 자유주 임시헌법을 바탕으로 바이에른 주의회(Landtag)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USPD가 2.5%의 득표를 받고 패배하자 아이스너는 총리직을 사임하기 위해 주의회로 향하던 중 극우민족주의자에게 살해당했으며, 권력공백이 발생하였다. 이에 독일사민당(SPD)은 요하네스 호프만을 총리로 하는 소수당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정치적 불안정은 심화되었다. 이 와중에 헝가리에서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 수립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의 주도로 평의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에른스트 톨러 정부[편집 | 원본 편집]

4월 7일 평의회 공화국이 수립되자 바이에른 주의회 의원들이 평의회에 참여하면서 바이에른 주정부는 무력화 되었고, 호프만 내각은 뮌헨에서 탈출하여 밤베르크로 피신했다. 그러나 반볼셰비키 성향의 무장집단인 공화국 방위군은 여전히 호프만 내각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4월 12일 종려주일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공화국 방위군은 정부청사인 비텔스바허궁을 공격해 평의회의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는데 성공했으며 쿠데타는 성공한 듯이 보였다. 하지만 곧 루돌프 에겔호퍼가 이끄는 독일공산당 휘하 붉은군대가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으며 붉은군대가 뮌헨 중앙역 전투에서 승리함에 따라 쿠데타는 실패했다.

오이겐 레비네 정부[편집 | 원본 편집]

쿠데타 실패 이후 평의회 공화국의 권력은 독일 공산당에 이양되었다. 오이겐 레비네 등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적 개혁을 시도하였다. 하루 후인 4월 14일 호프만 내각은 자유군단의 투입을 허가하였으며 곧 바이에른 붉은군대와 자유군단 간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4월 16일 에른스트 톨러가 지휘하는 붉은군대가 다하우에서 자유군단을 격파하자 4월 17일 바이마르 정부는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방위군의 투입을 승인하였다.

멸망[편집 | 원본 편집]

4월 27일 논쟁 끝에 오이겐 레비네가 사임하고 다시 에른스트 톨러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다. 톨러는 밤베르크에 있는 호프만 내각과 평화협상을 시도하였으나 호프만은 이를 거부하였다. 4월 30일 뮌헨이 포위되자 평의회 정부는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을 처형하였다. 결국 5월 3일 뮌헨이 함락되면서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은 멸망하였다.

멸망 이후[편집 | 원본 편집]

뮌헨 함락 이후에도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며 뮌헨은 전쟁상태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바이에른 주정부는 여전히 밤베르크에 위치해 있었으며 8월에는 밤베르크 헌법이라 불리는 바이에른 자유주 헌법이 서명되어 바이에른 자유주는 정식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