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제

(민제 (후 레)에서 넘어옴)
민제(愍帝)
생몰년도 1765년 ~ 1793년
즉위 전 황사손
부모 아버지 우종, 어머니 민태후
재위 1786년 ~ 1787년 (1차)
1787년 ~ 1790년 (2차)
시호 의황제(誼皇帝) / 민황제(愍皇帝)
묘호 (없음)
국적 대월 / 청

소통제(昭統帝, 1765년~1793년, 재위 기간 1786년~1789년)는 대월 후여조의 제28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다. 묘호는 없고 시호는 민황제. 본명은 여유겸(黎維Khiêm.svg)이며 현종의 태자였던 우종의 아들이다. 연호가 소통이라서 소통제라고 불렸다.

민란 세력에게 위협을 느껴 도망간 후, 청의 군을 자국에 개입시킨 암군이라는 혹평이 주를 이루며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껴 나라를 버리고 청나라로 도망갔기 때문이 멸칭인 출제(出帝)로도 불린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즉위 전[편집 | 원본 편집]

감옥애서 유년기를 보내다[편집 | 원본 편집]

여유겸은 현종의 태자인 여유의(우종)와 완씨 소생의 아들이다. 후술하겠지만 여유의는 정왕 정삼(鄭森)에게 미움을 받아 그를 모함하여 시해한다. 태자의 아들들인 여유겸과 여유유, 여유지는 황족임에도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민제는 13년동안 옥에서 자랐다.

삼형제가 옥살이를 보낸 배경은, 정삼의 아버지 정영은 태자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는데 정삼은 태자를 질투했고[1]정영이 죽자 즉위한 정삼은 태자가 정영의 첩과 사통했다고 모함해 폐서인시키고 옥에 가뒀다. 동시에 태자의 아들들도 옥에 가둬버렸고 현종에게 태자의 동생 여유근을 태자로 책봉케 했다.

당연히 태자의 지지파(신하)들은 정삼의 만행에 분노했고 진중림(陳仲林)과 완유민(阮有玟)을 비롯한 14인이 태자 구출 작전을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정삼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태자를 비롯한 14인을 죽이고 현종을 협박해 태자의 생모이자 황후인 진씨(陳氏)의 시호를 폐지시켜 태자와 장손의 정통성을 없애버렸다.

정통성이 없어진 삼형제는 무려 13년을 차가운 감옥에서 보냈다. 그러던 1782년 정삼의 장남이자 폐세자인 정종이 삼부군과 연합해 난을 일으켜 정간[2]을 죽이고 정종이 집권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반란으로 집권한 삼부군은 민심 확보를 위해 옥으로 쳐들어가 삼형제를 석방시켰고 현종에게 건의해 기존의 태자였던 여유근을 폐위시킨 후 17세의 장손인 여유겸을 황사손으로 책봉했다.

황사손 시기의 정국[편집 | 원본 편집]

그를 석방시키고 민심을 확보한 삼부군은 시간이 지나자 백성들의 물품을 빼앗는걸 업으로 삼는 탐관오리로 전락하였다. 삼부군은 정종을 도와 정종이 집권하게끔 만든 지지파이기에 정종 자신도 삼부군을 어찌할수 없었다. 정종의 측근들인 완간(阮侃), 양광(楊匡), 완점(阮霑)은 삼부군의 만행을 더이상 눈뜨고 볼수 없어 그들을 축출하고자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당해 오히려 완점은 삼부군에게 처형당하고 정왕 정종이 삼부군에게 감금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3]

또한 북하(北河)[4]엔 삼부군의 난과 자연재해, 기아가 겹치자 민심이 흉흉해졌고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난다. 마침내 1786년 떠이선 왕조완혜가 형의 명을 받고 순화를 공격하고 이어서 탕롱을 공격하자[5] 방비가 안되있던 정주군은 도미노처럼 무너졌고 정왕 정종이 서산에게 압송당해 자살하자 정씨 정권은 붕괴하였다.

이어서 완혜는 완유정(阮有整)의 건의로 황제 현종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그를 접견한 뒤 정주왕이 황제를 보좌하는 자리에 앉았고 공주 여옥흔을 아내로 맞이하는등 정주왕의 대접을 받았다.

약 200년만의 친정[편집 | 원본 편집]

완혜의 지지로 즉위하다[편집 | 원본 편집]

조부 현종은 완혜와 대면한지 2일만에 세상을 떠났다.[6] 현종의 어린 공주이자 완혜의 왕후[7]인 여옥흔은 조카인 여유겸을 싫어했기에 즉위시키고 싶지 않았고 남편인 완혜에게 태손을 험담했다. 이에 대신들이 여옥흔을 비판하자 두려워진 여옥흔은 여유겸을 즉위하게 하였고 여유겸은 여유기로 개명한뒤 완혜의 도움을 받아 조부의 뒤를 이었다.

한편 완혜가 독단적으로 탕롱을 공격해 실권을 쥐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덕은 동생의 권세가 커질것을 두려워해 군사를 이끌고 탕롱으로 갔다. 태덕은 여씨 황제를 폐위시킬 생각이였는지 정주의 부처를 점령했지만 민심 문제로 인해 민제의 제위를 인정하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갔다.

정씨의 복벽[편집 | 원본 편집]

서산군이 철수한 뒤 민제는 서산이 여씨왕조를 멸망시킬것이라 생각해 그들을 견제할 방법을 생각한다. 당시 정종이 서산한테 압송된뒤 자살해 정주의 통치구조가 멸망했다 하지만 정주의 잔존 세력(지지파)이 결코 작지 않았고 그 지지파들을 불러 수도 탕롱을 지키도록 명했다. 그러자 일부 세력들이 군사를 일으켰고 정영의 차남이자 정종의 숙부인 정체(鄭棣)가 탕롱을 점거하고 정왕을 참칭한다. 민제는 그의 참칭을 책망하며 조서를 보냈으나 정체의 신하 양중제(楊仲濟)가 그 조서를 찢어버렸다.

반대로 정종의 5촌 숙부이자 먼 곳에서 은거하던 정봉이 공손하게 민제에게 인사하자 민제는 그를 신임하고 탕롱으로 입궁해 자신을 보좌하도록 명하자 정봉은 군사를 일으켜 정체를 축출하고 탕롱으로 돌아오자 민제는 그를 정왕으로 봉했다.

그를 정왕으로 책봉한건 단순히 서산을 견제하기 위함이지 예전처럼 꼭두각시 황제가 되기 위함이 아니였다. 모든 권한은 민제가 갖고 있었으나 얼마 안되 정석양(丁錫壤)[8]과 황마기(黃馮基)가 민제를 협박해 전권을 정봉에게 넘기게 만들었다.

민제는 이 정변에 굴욕을 느꼈고 비밀리에 완유정을 불러 정봉을 공격하였다. 완유정은 탕롱으로 진격해 정봉을 축출하고 정주의 부처를 불태워 정씨의 흔적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약 100년만에 허수아비 여씨 황제가 간신을 없애고 황제로써 체면을 찾은 것이다.

다시 실권을 되찾은 민제는 정주의 건물들을 부수고 그것들의 동을 녹여 소통통보(화폐)를 주조하고 과거제를 부활시켰다.

완유정의 독주[편집 | 원본 편집]

황제의 품위를 되찾는데 기여한 일등공신 완유정은 여러 작위에 봉해진다. 그러나 우두머리가 축출되었다고 그 밑의 부하들마저 축출되는건 아니였다. 북하 각지의 장수들은 여전히 정씨의 지지파로 남았고 정석양이 축출된 정봉을 다시 세웠고 완유정은 그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진압에 실패했다. 정봉의 신하인 범정선(范廷僐)이 각지에 격문을 돌려 완유정을 토벌할 것을 요구했고 탕롱에 있던 여조의 신하 배시윤(裴時潤)과 내통했다.

그러나 배시윤은 발각되 처형당하고 완유정은 부장을 파견해 정주의 남은 세력을 공격한다. 정주에겐 이번 패배는 더이상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른 지지파들이 완유정을 공격했으나 모두 패배했다.

완전하게 정주를 축출한 완유정은 날로 그 권한이 커져갔다. 민제는 완유정을 견제하기 위해 신하들을 불러 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무정(武楨)의 건의로 그만두었지만 완유정은 그 사실을 알았고 사이가 벌어진 완유정은 다신 민제를 보러가지 않았다. 그리고 정주의 부저처럼 자신의 부저를 지어 정왕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나라를 두 번 잃다[편집 | 원본 편집]

완혜의 북벌과 도주[편집 | 원본 편집]

서산의 완혜는 완유정의 만행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이전에 완혜가 남진할때 완예(阮裔)를 예안에 남겨 예안을 지키도록 한 적이 있었는데, 완예는 다른 뜻을 품고 탕롱의 완유정과 내통했다. 완유정은 서산의 신하임에도 불구하고 예안을 빼앗기 위해 진공찬(陳功燦)을 완혜에게 보내 예안을 후여조에 할양할 것을 요구했으나 완혜는 크게 노했고 진공찬이 귀환할때 배를 뒤집어 익사시킨다. 이러한 일들이 있은 뒤로 완혜는 완유정을 기회주의자로 여겨 그의 인성을 매우 증오하였다.

이어서 완혜는 완유정이 다른 뜻이 있음을 짐작하고 사신을 보내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명했지만 완유정은 북하의 정세가 혼란함을 이유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완혜는 무문임(武文任)을 보내 탕롱전을 벌였고 민제 역시 완유정에게 서산군을 막으라고 명했다. 전쟁 도중 완유정은 도저히 이길 기미가 보이지 않자 탕롱을 버리고 황실 가족들을 데리고선 박닌성으로 도망갔다. 무문임은 계속 진격하여 완유정을 처형하고 황제가 도망가 옥좌가 일시적으로 비자 이전의 폐태자이자 민제의 숙부 여유근을 감국으로 옹립했다.

도망간 민제는 완유정의 부하 황일선(黃曰選)의 도움을 받아 진정(眞定)에 도착해 장등규(張登揆)의 집을 임시 궁궐로 삼아서 복위하려 했으나 황일선이 무문임에게 패하자 경북(京北)으로 달아나 유신들과 서산에 대항했고, 민태후[9]는 고평(高平)[10]으로 달아나 청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청조의 지원과 복위[편집 | 원본 편집]

동시에 무문임은 탕롱에서 자립을 꾀했으나 그것도 알아챈 완혜가 병사를 보내 그를 죽여 무문임의 무리를 심복 오문초(吳文楚)에게 넘겼다. 한편 여씨의 구원 요청이 청나라의 남녕(南寧)에 도착하자 손사의는 이를 건륭제에게 보고했다. 건륭제는 손사의를 지휘관으로 하는 대군을 파견해 민제를 지원하였다.

청나라의 대군이 침입한다는 소식이 서산에게 전해지자 서산군은 놀라 두려워 분분히 흩어졌다. 민제와 그 동생 및 유신들은 청군에 협조했고 탕롱의 오문초는 여조의 유신들마저 청조에 협조했다는걸 알자 방어가 힘듦을 예상하고 탕롱을 버리고 물러난다.

손사의는 탕롱에 쉽게 진입했으며 민제도 탕롱으로 돌아와 손사의를 맞이했다. 손사의는 군영에서 건륭제의 조서를 낭독했고 동시에 민제도 정식 안남국왕(安南國王)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이는 이름뿐인 복위였다. 손사의의 도움을 받았기에 모든 행동은 손사의의 제약을 받았고 모든 권한을 빼앗겼다. 또한 손사의는 청의 신하였기에 민제는 자신의 연호인 소통을 사용할수 없었고 청조의 연호를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민제는 황제이지만 매일 손사의의 군영에 가서 그를 방문하는 신하 노릇을 했고 행차할때도 의장대가 없었으며 탕롱의 백성들은 민제의 행차를 보고서도 그가 황제임을 몰랐을 정도였다. 우연히 민제를 알아본 자들은 몰래 안남에 이렇게 비굴한 황제가 나타난 적이 없었다며 비난했다. 손사의는 민제를 접견하지 않을 땐 간단히 신하를 시켜 별 일은 없다며 통보하고 민제를 돌려보내 쉬도록 했다. 여조의 유신들은 민제에게 실망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외에도 여러 유신들이 서산에 붙은 자들을 처벌할걸 건의했고 민제는 서산에 붙은 자들을 옥에 가두거나 면직시켰다. 대월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은 대월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모욕을 가했으며 민제는 논공행상을 벌일때도 자기와 같이 도망간 자들에게만 신하로써 대우했으므로 다른 공을 세운 신하들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 일은 유신들의 신임을 잃게 만들었고, 또한 민제는 성격이 치졸해 서산 장수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들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죽였으며 숙부 세 명의 발을 도끼로 잘라내 저잣거리에 걸어놓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그 모습을 본 민태후가 고평에서 탕롱으로 돌아왔는데 화가나 궁으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이후 완휘숙(阮輝宿)의 건으로 그제야 궁으로 돌아갔다.

다시 나라를 잃고 도망가다[편집 | 원본 편집]

손사의는 탕롱을 점거한 뒤부터 매일 음주와 향략을 즐겼고 방비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서산의 완혜는 방비를 철저히 했고 북상해 손사의군과 총공세를 펼쳤다. 손사의 세력은 방비가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했고 손사의는 패잔병만 긁어모아 청나라로 도망간다. 동시에 손사의의 꼭두각시였던 민제도 모친과 아들을 데리고 청으로 도망갔으며 민제의 동생 여유지(黎維祗)도 황후 완김(阮金)을 보좌하며 청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서산군에게 길이 막혀 유신들을 규합해 봉기를 일으켰지만 패배해 처형당하고 황후는 민간으로 숨어들었다.

손사의의 패전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건륭제는 크게 노했고 그를 해임한뒤 복강안(福康安)에게 손사의의 지위를 맡겼다. 그리고 복강안에게 대월을 정벌하라 했으나 복강안은 서산의 강함을 염려해 출병하지 않았고 동시에 완혜도 복강안에게 뇌물을 바쳐 화친을 구해 부장을 자신처럼 위장한뒤 건륭제를 맞이하게 한 다음 정식으로 안남국왕에 책봉된다. 이로써 여씨 왕조가 멸망하였다.

복강안은 연회를 열어 민제를 초대했고 다음과 같은 불가론과 조건을 내세워 출병을 미루었다.

  • 안남은 매우 덥고 때는 한여름이니 출병하기 적합치 않음
  • 가을이 오면 즉시 출병할 것
  • 후여조의 유신들이 선봉에 서기를 희망함
  • (민제가) 암살당할 것을 우려하니 청나라처럼 변발을 하고 청의 의복을 갖추기를 건의함

유신들 역시 민제가 변발하고 청의 의복을 입는걸 보고 똑같이 했다. 다만 유신중 한명이 이 의식을 거부했는데 여동(黎侗)이란 자였다.

「我輩頭可斷、髮不可薙;皮可削,服不可易也。」
"우리들의 머리는 잘라도 좋으나 머리카락은 깎을 수 없다. 피부도 발라내도 좋으나 의복은 바꿀 수 없다."

의식을 거부한 그는 광서(廣西)로 안치되었다가 건륭제에게 소식이 전해지자 옥에 같혔다.

어쨌든 불가론과 조건들은 복강안이 건륭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고 출병할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복강안은 그 모습을 근거로 들어 건륭제에게 (독단적으로 민제의 물음이 없이) 민제가 복위를 포기하고 중국에서 편히 살기를 원한다고 독단적으로 말한다. 건륭제는 민제 일행을 북경으로 옮겨 거주하게끔 했다.

망명 생활과 사망[편집 | 원본 편집]

북경으로 옮겨진 민제 일행은 팔기에 편입되었고 청조의 지원으로 식량을 지급받았고 민제는 금관(金簡)의 도움으로 청의 좌령직(관직)을 받았다. 하지만 민제는 나라를 되찾으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금관의 부저에 가서 청이 서산군을 토벌할 병사를 내주길 청했다. 하지만 이 서신들은 화신이 다 가로챘고 황제가 알지 못하게 한 다음 민제에겐 대충 얼버무려댔다.

민제는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청조에게 청해 청나라가 출병해 뚜옌꽝, 흥호아 일대를 점령해 그 지역에 괴뢰 정권을 세워 이전의 막 왕조처럼 명맥을 이어갈수 있게 청했다. 이번에도 응답하지 않으면 바다를 건너 가정으로 간 다음 멸망한 완주의 후예 완복영에게 의탁하려고 했다. 화신은 이전에 그들의 변발의식의 진상을 건륭제가 알게 될까 두려워해 일련의 행위들은 민제의 본의가 아닌 후여조의 유신들이 뒷공작을 펼친것이라 조작해 대부분의 유신들을 유배보낸다. 민제의 곁에는 범정선(范廷僐), 정아형(丁迓衡) 두 문신들만 시중을 들었다. 한때 일국의 황제였던 자라곤 믿을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이였다.

1792년 민제의 장자인 여유전(黎維詮)이 천연두로 사망하자 민제 본인도 병에 걸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병수발을 든 여휘왕(黎輝旺)의 공을 높게 사 그에게 새로 이름을 선사한 뒤(黎維康, 여유강) 양자로 삼았다. 얼마 안가 1793년 민제는 향년 28세로 사망했다. 그의 좌령직은 양자 여유강이 계승했고 공작의 신분으로 무덤에 매장되었다.

이후 완복영이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자 여씨 황제를 세우기 위해 민제의 소식을 찾았으나 민제는 이미 죽은지 6년이 흐른 뒤였다. 그리고 1802년 완복영이 서산을 멸망시키자 후여조의 유신들이 대월로 돌아가길 청했고 민제 일행의 유해들을 모시고 대월로 돌아갔다. 유신들이 관을 열었을 때 시신은 이미 백골이 된지 오래지만, 오직 검붉은 심장만이 썩지 않고 남아있었다 한다. 민중으로 숨어든 황후 완김은 부군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조문하고 독약을 먹어 절개를 지켰다. 일행을 비롯한 민제는 돌아와선 할아버지 현종의 능에 같이 묻혔다.

이후 1884년 완조의 건복제 때, 민황제(愍皇帝)의 정식 시호가 뒤늦게 추시되었다. 그래서 민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진중김은 겨우 대권을 장악해 왕조를 재건할 수 있는 드문 기회가 찾아왔으나 민제의 우유부단함과 당시 조정의 인재 부족으로 인해 혼란을 막을 수 없었고 왕조마저 무너졌다고 평했다.

또한 황려일통지에는 민제의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으며 사람을 잘 다루지 못해 망했다고 하며 베트남 공산당의 학자들은 비열하고 백성들에게 잔인했던 폭군으로 평가했다.

참고항목[편집 | 원본 편집]

둘러보기[편집 | 원본 편집]

중흥여조의 황제
28대 현종 여유조 29대 민제 여유기 서산태조 광중제
청의 좌령직
신규 책봉 여유기 여유강
여씨 황실 수장
28대 현종 여유조 29대 민제 여유기 30대 여유강

각주

  1. 시기 말고도 정삼과 태자가 식사를 함께 할뻔 했는데, 정삼의 어머니가 군신과의 관계가 어긋난다고 정삼을 다그쳐 나가도록 차별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2. 정종의 동생
  3. 양광은 왕태비(정종의 모친)의 동생이라 왕태비의 부탁으로 목숨을 건졌고 완간은 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정종이 옥에 갇히자 소리소문 없이 계획을 포기했다.
  4. 황제가 있고 정왕의 통치력이 미치는 범위
  5. 탕롱 공격은 독단적인 행위였다.
  6. 대월사기전서속편엔 단순히 노령으로 인한(사망 당시 70세였다.)병사라고 하나 청사고의 월남전에는 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죽었다고 한다.
  7. 이때는 태덕의 제후왕 신분이였다.
  8. 연충후. 정주의 신하
  9. 민제의 모친
  10. 청의 국경과 바로 맞닿은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