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레 현종 (28대)

현종(顯宗)
생몰년도 1717년 ~ 1786년
즉위 전 왕자
부모 아버지 순종, 어머니 유신태후
재위 1740년 ~ 1786년
시호 영황제(永皇帝)
묘호 현종(顯宗)
국적 대월

베트남 후여조 제28대 군주. 묘호는 현종(顯宗), 시호는 영황제(永皇帝). 생전 재위중 존호는 연의흠공자인덕수황제(淵懿欽恭仁慈德壽皇帝).

휘는 유조 또는 유단(維𥚻). 전임인 의종(懿宗)의 조카로 순종(純宗)의 아들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735년 아버지 순종이 사망하자 장자의 신분이었으니 뒤를 이어 즉위해야 했지만 정왕태비 무씨(武氏)의 압력에 의해 정주의 왕 정장이 여유조의 즉위를 취소하고, 순종의 동생이자 여유조에겐 숙부인 여유신(의종)을 황제로 옹립한다. 5년 후에야 숙부 의종이 양위하여 황제로 즉위한다.

즉위 이후 정왕의 허수아비 노릇을 했기에 별 다른 행적은 없지만 재위 말기에 베트남 역사상 최대 농민 규모인 떠이선 농민 운동이 일어나 광남국찐씨 정권이 축출당한다. 찐씨가 축출당하자 외형상 현종은 친정을 시도했지만 며칠 후 사망한다.

재위기간은 가장 길었으나 오랫동안 실권을 잡지 못했으며 그의 치세 동안 정영, 정삼, 정종이 실권을 잡고 대신 통치했다.

서산 농민 봉기[편집 | 원본 편집]

경흥(景興)[1] 46년 명목상 제후국인 광남국에서 완악이 농민봉기를 일으킨다.

애초 실권이 없어 중립을 유지했고 떠이선 세력의 완혜(광중제)가 정씨를 축출하자 그를 정왕처럼 대우했으며 공주와 혼인시킨다. 명목상으론 정씨가 없어지니 레 왕조가 서서히 힘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찐씨가 축출되고 완혜를 대면한 후, 명목상 실권을 잡은지 며칠만에 사망한다. 《대월사기전서》에는 현종의 사인을 단순 병사라고 하나 《청사고》 『월남전』에는 현종이 농민봉기로 놀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죽게 된 것이라고 적혀있다.

시신은 반석릉(磐石陵)에 매장되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여조의 황제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46년)했다. 하지만 실권을 갖지 못하였기에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떠이선 농민 운동이 일어난 후 찐씨가 축출되어 명목상 친정을 시행하지만 그마저도 몇일 하고 사망한다. 찐씨가 축출된 이후 레 왕조는 실권을 회복하여 민제 대에는 정식으로 친정을 시행한다.
  • 승려 원소(元紹)[2]에게 행단(行端)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 그의 손자 민제는 완복영서산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왕조를 건국하자 가경제의 배려로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되어 반석릉 아래에 매장되었다.

연도별 기록[편집 | 원본 편집]

  • 영우[3] 6년 (1740년 6월 14일) 즉위하고 연호를 경흥(景興)으로 개원하다.
  • 경흥 46년 (1785년) 신하들이 존호 '연의흠공인자덕수황제'를 올리다
  • 경흥 46년 (1785년 9월) 광남국에서 봉기가 일어나다.
  • 경흥 47년 (1786년 7월) 완혜를 원수부정익운위국공(元帥扶正翊運威國公)으로 책봉하다.
  • 경흥 47년 (1786년 8월 10일) 황제가 만수전(萬壽殿)에서 죽다.

가계도[편집 | 원본 편집]

  • 부: 순종(純宗) 여유상
  • 모: 도씨(陶氏)
    • 현종(顯宗) 여유조
      • 장남: 우종(佑宗) 여유의
        • 손자: 민제(愍帝) 여유기
      • 차남: 숭양공 여유근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둘러보기[편집 | 원본 편집]

중흥여조의 황제
27대 의종 여유신 28대 현종 여유조 29대 민제 여유기

각주

  1. 현종의 연호.
  2. 월남불교 원소선파의 시조.
  3. 永佑. 의종의 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