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옥

文字의 獄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서책이나 시구 등에 나온 문구나 단어를 이유로 탄압을 가하는 공포정치 방법의 일환. 서양에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 주로 중국 왕조에서 이루어졌고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청나라이다.

이 항목에서 설명하는 문자의 옥은 강희제 시기에 시작되어 건륭제 시기에 절정을 이르고 가경제 시기까지 계속된 제국의 대규모 사상탄압 사건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근본적 원인은 당연히 청이라는 여진족, 즉 오랑캐 국가에 의한 중국대륙 통일에 있었다. 원 멸망 이래 300년 동안 한족국가 명으로 존속해온 중국인들에게 또 다시 오랑캐의 지배를 받으라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당연히 한족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이러한 한족의 집단반발은 청으로서는 심각한 국가적 위협이었고 좌시해선 안 될 일이었다.

청은 이러한 반발을 대규모 학살로 억눌렀다. 양주나 광주, 사천 등지에서 벌어진 명청교체기 대학살로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천만 명, 최대 1억에 근접하는 대규모 인구가 희생된 걸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대량학살은 원의 남송 정복때도 없던 일이며, 칭기즈칸의 화북 정벌 때에나 실행될 뻔하다가 장춘진인의 만류로 실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대량학살과 함께 변발의 강요 등 청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하는 강경책과 향신층에 대한 우대, 한족 관료의 등용 등 회유책을 동시에 실시하며 중국 전토 지배에 나섰다.

그러나 비록 힘으로는 억눌렀어도 힘으로 사람의 마음까지 굴종시킬 수는 없는 법. 어쩔 수 없이 변발을 하고 청에 충성하는 척했으나 한족들, 특히 강남 지방에서는 여전히 청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고 청을 피해 재야에 묻힌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족 중심의 반청사상이 형성되고 있었다. 청은 이러한 반청의 기반이 되는 사상 그 자체를 말살한다는 대범한 계획을 세우고, 약 1세기에 걸친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상탄압을 개시했다.

강희-옹정제 시기[편집 | 원본 편집]

명사집략 사건 (1660)[편집 | 원본 편집]

명 제국에서는 다른 왕조와 마찬가지로 자체적으로 체계적인 역사기록을 남기고 있었는데,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면서 숭정제 연간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었다. 당시 편찬을 담당했던 주국정이란 신료는 미완성된 기록들을 가지고 강남으로 피난하여 살다 죽었는데, 그의 후손이 궁핍하여 이를 지방 유력가 장정룡에게 팔았다.

장정룡은 이 명사를 자신이 완성시켜 자신의 가문을 그냥 돈 좀 있는 유력가가 아니라 학식과 덕망을 갖춘 명망가로 발전, 명성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장정룡은 초기 작업 중에 급사하고 동생 장정월이 이 작업을 마무리했는데 본인의 학식이 크게 부족한 관계로 주변의 여러 학자들과 명사들을 초빙하여 서문과 평론을 달고 미완된 부분을 보충했는데 이게 화근이 되었다.

장정월이 초빙한 학자와 명사들은 하나같이 학식과 명성이 드높았지만, 동시에 청나라에 이를 가는 반청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때다 싶어 의뢰받은 명사 편찬작업에서 신나게 명나라 만세! 청나라 오랑캐 타도하자! 수준의 글을 마구 써댔고, 장정월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책을 출간했다.

이렇게 출간된 책에는 청조로서는 당연히 아연실색할 내용들로 가득 찼는데, 우선 청 황제들을 묘호가 아닌 이름으로 호칭했고, 청의 정통성을 부정했으며, 명과 청의 전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명의 연호를 쓰고 후금/청군을 반란군으로 칭했으며 항장 출신 상가희와 경정충을 나라팔아먹은 도둑놈으로 비판했다.

지방 관아에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장정월이 막대한 뇌물을 주어서 문제가 되는 내용을 삭제하고 출간하는 선에서 해결되었으나 결국 이 책이 강희제에게까지 올라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이 책을 정독한 강희제는 격분하여 연루자를 모조리 잡아들였다. 결국 이 작업을 시작한 장정룡의 의도와는 다르게 장씨 집안은 멸족당했고, 본인도 부관참시당했으며 편찬에 관여한 학자와 명사들 본인은 물론 그 가족과 친척, 제자들까지 싸그리 다 처형당했다. 뇌물을 받고 책의 개정출간을 허용한 지방 관리들도 모조리 처형. 심지어 단순히 책을 인쇄한 사람과 책을 받아서 시장에서 판매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처형당했다.

대대적인 탄압이었으나, 사실 명사집략은 워낙 대놓고 반청기조가 강했던 책이기에 청으로서도 이정도 탄압은 당연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본격적인 문자의 옥이 시작되는 신호탄이었다.

대명세 사건 (1711년)[편집 | 원본 편집]

청 초기 산문계에서 이름높았던 대명세(戴名世)라는 사람이 명 시절 역사와 저집을 연구하고 참고하면서 자신의 저작 남산집을 냈는데, 그 과정에서 남명 최후의 황제 소종 주유랑연호인 영력(永曆)을 사용한 게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남명의 연호 사용 -> 명나라 추종 세력이네? -> 그럼 너는 역적이라는 논리로 대명세는 처형되고, 가족은 만주 외곽으로 유배보내졌다.

사사정 사건 (1726년)[편집 | 원본 편집]

옹정제 6년 향시의 감독관이던 사사정(査嗣庭)이라는 문인이 시험문제를 출제하면서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문구를 넣었다. 사실 이 문구는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에 수록된 문구라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는데…

유(維)자와 지(止)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변만 뺀 것이니, 유민소지의 뜻은 황제인 옹정제를 참수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반역음모라며 사사정을 체포하고 그 구족을 멸하였다. 사사정은 체포 이후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옥사했는데, 잠시 땅에 묻혔다가 결국 부관참시되었다.

증정-대의각미록 사건 (1728년)[편집 | 원본 편집]

옹정제 8년이던 1728년에는 천섬(사 + 서)총독 악종기(岳鍾琪)를 충동하려 한 증정이라는 인물의 반란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증정(曾點)은 반청사상가를 자처하긴 했지만 흔해빠진 백면서생으로 사실 명망높은 학자나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반청사상의 지주 중 한 명이었던 여유량(呂留良)의 저작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여유량을 추종하였고, 여유량이 이미 죽은 뒤라 그의 아들로부터 여유량의 저작 몇 권을 추가로 구해 읽으며 열렬한 여유량 추종자 & 반청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증정은 섬서총독 악종기를 충동하여 반청복명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제자 장희(張熙)를 통해 서신을 보내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다.

섬서총독 악종기는 한인팔기 출신으로 크고작은 전공을 세워 황제의 신임을 얻고 만주족만 임명되던 천섬총독 자리에 올라 만주출신 귀족들의 시기의 질투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냐면 만주귀족들이 아예 작당하고 악종기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모함을 할 지경이었고, 그럼에도 옹정제는 끝까지 악종기를 신뢰했으니 악종기가 충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청조의 충신 악종기에게 왜 증정이 선택했느냐면 악종기는 중국 역사상 악씨 성을 가진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송의 애국명장 악비의 21대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신의 조상은 한족 왕조를 위해 충성하고 끝까지 싸워 금나라 여진족 오랑캐들을 물리쳤으니, 당신도 조상을 본받아 여진족 오랑캐들을 토벌하고 한족의 증흥을 이뤄달라는 소리였다. 당연히 악종기는 즉시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 옹정제는 증정과 장희를 당장 북경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옹정제는 증정과 키배를 떠서 증정을 탈탈 쳐바르고 완벽하게 사상개조를 시켜버리는 충공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증정과 장희를 방면하고, 자신과 증정의 키배를 기록으로 남긴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출간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하여 청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증정이 갖고 있던 서찰을 모조리 압수하고, 사상개조된 증정의 진술을 토대로 여유량의 후손 및 반청사상을 가진 명망가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여유량은 부관참시되었고 여유량의 제자 엄홍규까지 걸려들어가면서 두 집안의 직계후손 중 16세 이상은 모조리 처형되었고 그 이하는 노비가 되었다. 여유량의 저작을 출판한 사람들도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그 저작을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감옥에 끌려갔다. 그리고 증정은 사상개조되어 참회록을 출간하고 벼슬을 받아 잘 먹고 잘 살다가 건륭제 원년에 이때의 일을 이유로 처형당한다.

건륭제 시기[편집 | 원본 편집]

강희, 옹정제 시기에는 그래도 명사집략 사건처럼 청조의 지배체제에 전면으로 도전하거나, 증정 사건처럼 반란을 모의한 경우가 명백한 경우를 중심으로 탄압이 이루어졌기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능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건륭제 시기에는 그냥 일반인들이 실수로 쓴 단어 하나하나까지 트집을 잡으며 닥치는 대로 탄압을 가하고 처형하니 그 사례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적을 수 없을 지경이다.

대표적으로 시문을 적으면서 탁청(濁淸)이란 문구를 썼는데, 감히 국호인 청 앞에 탁이라는 부정적 글자를 썼다는 이유로 반역혐의로 처형당한 사건이 있고, 강희자전의 문자가 너무 어렵다고 한탄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처형당하기도 했으며, 그보다 더 막장인 사례로는 순치제 시기 시인이 쓴 구절에 순치제보다 후대인 건룡제의 시호와 어명을 피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시인의 고손자가 끌려와 고문을 당한 경우가 있다.

즉, 강희제와 옹정제 시기의 문자옥은 일부 억지사례도 있긴 하지만 실제 반청복명사상에 기반한 사건이 많았고, 청 왕조의 존립과 정통성 확보를 위해 당연히 처벌해야 했던 경우가 많았지만 건륭제 시기에는 그냥 황권 강화를 이유로 그냥 걸리면 다 죽이는 탄압이 되었다. 실제 건륭제 시기 피해자들은 반청복명과는 거리가 먼 일반 순수 학자나 시인이 대다수였다. 애당초 건룡제 시기는 명이 멸망하고 1세기나 지난 후인데 반청복명 세력이 대규모로 존재하기도 힘든 시기였다.

이런 건룡제 시기 문자의 옥이 극에 달한 건 사고전서 편찬이다. 건륭제는 사고전서 편찬을 위해 전국의 모든 서책과 기록을 긁어모으도록 지시하고, 그중에 청조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불리한 기록은 모조리 불태웠다. 단순히 당대의 서책, 기록만이 아니라 명말엽의 기록들도 그 대상이었는데, 명 말기 장수들이 여진족과 후금/청을 상대로 하면서 이민족, 오랑캐, 반란군이라 쓴 표현이 있는 경우는 모조리 날려버린 게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명 말기 명의 장수가 명의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이니 당연히 반란군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걸 날렸다. 간혹 당대의 기록 중에 그런 기록이 보이면 즉시 저자는 끌려가서 처형.

탄압이 이처럼 가혹하고 온갖 트집을 잡아대니 정상적인 문학창작활동이나 학문연구가 될리가 없었다. 당대 지식인층은 아예 교우 목적의 단순한 서신조차도 보내기를 꺼려했을 정도고, 설사 서신을 주고받더라도 보는 즉시 불태울 지경이었다. 서신 내용이 불순해서가 아니라 여기서 어느 글자 갖고 어떻게 트집잡을지 몰라서 그랬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강희-옹정제 시기의 대규모 탄압으로 화남지방에 기반한 반청복명세력의 사상적 기반은 거의 뿌리째 뽑혔다. 그리고 뒤이은 건륭제의 탄압으로 얼마 안남은 복명사상가들과 수많은 저작저술들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문자의 옥에는 한족, 만주족을 가리지 않았고 서로들 황제 혹은 반대파에게 무슨 트집을 잡혀 역적으로 몰릴지 모르다보니 무조건 몸을 숙이고 조심하게 되면서 황제 독재권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그러나 한족들의 마음을 굴종시키겠다는 청조의 의지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아무리 탄압을 가하고 사상자들을 죽이고 서책을 불태워도, 한족들은 겉으로만 굴종할 뿐 속으로는 이를 아득아득 갈며 멸만흥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건룡제 말기 백련교도의 난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반란의 연속으로 증명된다.

한편, 문자옥은 청 중기 이후 조성된 청의 자유로운 학문연구 환경을 송두리째 뽑아갔다. 당연한 게, 자유롭게 학문연구하고 토론하다가 또 트집잡혀 죽게 될게 뻔한데 누가 연구에 나설까? 대신, 지식인층들은 트집잡힐 염려가 거의 없는 머나먼 과거의 기록이나 유물 대상으로 하는 고증학에 빠져들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