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호

연호(年號) 또는 원호(元號)는 동아시아에서 고대부터 근대까지 사용된 기년법이다.

황제에 의해 연호를 선포하면, 그 해를 원년(1년)으로 삼아 이후를 {연호명} X년으로 표기하는 방식이다. 중국의 한무제 시기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연호를 선포하는 행위를 '건원(建元)'이라고 하며, 연호를 바꾸는 행위는 '개원(改元)'이라 한다.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문화권의 맹주를 자처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건원은 황제를 자칭하는 '칭제(稱帝)'와 더불어 칭제건원이라 함께 부를만큼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중국은 자신 이외의 나라에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불경하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권위가 물리적 공간과 백성들을 넘어 시간에까지 미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래는 황제가 느끼기에 국정을 쇄신할 필요가 있을 때에 바꿀 수 있었다. 따라서 황제가 변덕스러운 성향이거나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자주 바뀌었다. 혼란기에는 한 해도 사용하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몇 시간 만에 갈아치워버린 경우도 존재한다. 나라에 재해나 이변이 발생했을 때, 또는 오행에 따른 육십갑자의 순환에 따라서도 개원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대표적으로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의 경우 갑자년(甲子年)과 신유년(辛酉年)에 개원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

각국의 연호 사용[편집 | 원본 편집]

중국[편집 | 원본 편집]

명나라 이전까지는 한 군주의 치세에 여러 개의 연호가 사용되는 것이 드물지 않았으나 중국의 경우 명나라와 이를 이은 청나라는 군주 한 명이 하나의 연호를 쓰도록 하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체택하였다. 이 이후로 군주의 시대, 나아가 군주를 지칭함에 있어서 연호를 사용하면 해당 군주가 살아 있을 때와 그가 사망한 뒤에까지 동일한 명칭으로 지칭할 수가 있었으며, 군주의 이름을 직접 지칭하는 것이 불경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부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므로 황제를 지칭함에 있어서 묘호나 시호, 능호(陵號)를 부르기보다 '연호+황제'나 '연호+제(帝)'를 쓰는 게 일반화됐다.

한국[편집 | 원본 편집]

한국에서는 고구려 광개토왕 시기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이 신뢰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용례이며, 이후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고구려가 '연가(延嘉)'나 '건흥(建興)' 등의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외에는 신빙성 있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신라를 제외한 고구려나 백제에서 연호를 어떻게, 얼마나 사용했는지에 대한 전모를 밝히기는 심히 자료가 부족한 상태다.

한국 역대 왕조 중 연호의 사용에 대해 그나마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발해신라로, 발해 초기부터 중기까지 사용된 연호가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신라에서도 6세기 법흥왕이 처음 사용해서 진덕여왕 시기까지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했으나 무열왕이 즉위하면서 당나라에 외교적인 접근을 위해 당의 연호를 받아들이며 자체적인 연호의 사용을 포기했다.

이후 후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 초기까지 (주로 왕권 강화 목적으로) 자체적인 연호가 간헐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10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적 역학관계가 고착되면서 사대를 표방하며 중국 왕조의 연호를 들여와 사용하는 용법이 정착되었다. 위에 쓴 바와 같이 건원은 칭제와 함께 스스로를 제국이라 선포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며, 중국이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주도권을 공고히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 심하면 왕조의 멸망으로 직결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역대 왕조들은 개국할 때나, 중국이 내부적으로 혼란해서 주도권이 약해졌을 때를 제외하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조선 왕조에 들어서면서 명나라와 사대의 예를 맺음에 따라,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조선은 대청 관계에서만 청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을 뿐, 내부적으로는 연호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고 60간지로만 해를 표기하거나, 민간의 경우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연호인 '숭정(崇正)'을 계속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면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세운 1392년을 '개국 원년'으로 하여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새로운 연호로 도입하였다(이에 따라 1894년은 개국 503년이 된다). 1896년(개국 505년) 태양력을 도입하면서 '건양(建陽)'으로 개원(改元)하였고, 이듬해(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광무(光武)'로 바뀌었다. 이후 순종이 즉위하면서 '융희(隆熙)'로 개원하였다. 그러나 이미 나라 꼴은 망했어요 가끔 고종이나 순종을 연호를 따 "광무황제"나 "융희황제"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이지는 않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정 수립 연도인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정하여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했다. 8.15 광복 이후 1948년(대한민국 30년, 단기 4281년) 제헌 국회에서는 새 정부가 사용할 연호를 논의했는데,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자고 주장했고, 국회에서는 단기 연호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단기 연호를 사용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대한민국 연호 사용을 중지하였다. 이후 1961년(단기 4294년) 박정희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연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 1962년(단기 4295년)부터 단기를 폐지하고 서기로 전환하여 현재에 이른다. 2015년은 대한민국 97년, 단기 4348년이다.

일본[편집 | 원본 편집]

일본의 경우에는 아스카 시대 말기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이후 연호를 도입, 에도 시대까지는 심심하면 연호를 갈아치워 5년 이상 꾸준히 쓰인 연호가 드물 정도지만 메이지 천황 이후 일세일원제를 도입하여 이후로는 해당 천황의 연호를 천황 사후 그대로 천황을 가리키는 명칭(일종의 시호)으로 쓰는 용법이 정착되었다. 예를 들어 아키히토의 연호는 헤이세이이고, 사후에 헤이세이 천황이라고 불릴 예정이지만 살아 있을 당시에는 헤이세이 천황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천황이라고 하든지 금상천황(今上天皇, 곤조덴노)이라고 부른다.

일본이 연호를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을 가지고 일본이 전근세에도 중화질서에서 독립된 국가였다고 일본의 예전 황국사관, 현재의 일본 극우파를 비롯한 일부가 주장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일본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다로 고립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에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본 또한 중국과의 교류에 있어서는 번속국임을 자처한 경우가 다반사이다. 또한 조선은 단지 중국의 속국이라서 연호를 강요당한 것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참여하고 백해무익한 내부적, 외부적 분란을 피하며 조공체계 하에서 중국에 보다 가까운 포지션을 점유함으로써 더 큰 이익을 도모한 것이다.

베트남[편집 | 원본 편집]

베트남의 경우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사대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을 표방하였으므로 10세기쯤에 연호를 도입한 후 1945년까지(프랑스 식민지가 된 뒤에도 연호제는 유지) 연호를 사용하였다. 외왕내제의 체제를 표방해 중국과의 교류에 있어서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국내용과 참파를 비롯한 주변국들과의 교류에 있어서만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일본과 비슷하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