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중

金翼中. 자는 봉거(鳳擧), 호는 녹동(鹿洞).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51년 7월 4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동에서 김기홍(金基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 김씨이며, 조선 중종 ~ 명종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김인후의 12대손이다. 후에 중부(仲父) 김기흥(金基興)의 양자로 입적했고, 하동 정씨와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기우만의 저서 '호남의사열전'에 따르면, 김익중은 집안이 가난하여 학문을 익히지 못했지만 평소 선한 것을 좋아하고 의리를 숭배해 사람들로부터 '글을 읽지 않은 선비'라고 불렸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 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1896년 1월 이종형제인 기우만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포군을 모집한 뒤 나주와 광주를 오가며 종군했다. 고종의 해산 조칙이 내려오면서 의병이 해산되자, 기우만과 함께 향약을 명분삼아 매월 한 차례씩 선비들과 모여 강학을 이어갔다.

1905년 을사조약 전후 도적이 창궐해 마을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마을 주민을 무장시켰고, 1907년 9월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해 종사를 맡고 포수와 보부상 등을 의병으로 끌여들었다. 1907년 음력 9월 26일(양력 11월 11일) 고창읍성을 공략하여 상당량의 무기와 전곡을 확보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일본군이 습격하여 의병대가 패퇴하자, 그는 성을 빠져 나오다 북문루에서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시신은 며칠간 방치되었다가 고창읍민이 몰래 거두어 가매장했고, 후에 전라북도 진안군 이산묘에 배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익중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