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숙 (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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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淑. 호는 회을(悔乙).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인.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6월 4일 전라남도 제주도 대정면 가파리(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도)에서 김용석(金龍錫)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 향리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상경 후 1915년 4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이던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여기에 뛰어들었으며,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제주 출신 고수선, 최정숙, 강평국을 설득해 만세시위에 함께 하게 하였다. 이후 동창생인 홍순기의 하숙집에 숨었다 3월 5일 형 김성춘(金成春)이 상경한 걸 맞이하려고 남대문역에 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30일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에 기소되었으나 증거가 없어서 면소 방면되었다.[1]

출옥 후 학교를 졸업하였고, 1921년 고향으로 돌아온 뒤 가파도에 신유의숙(辛酉義塾: 현재 가파초등학교)을 개설하여 민족의식을 위한 교육에 힘썼다. 신유의숙은 학교 모표(帽標)를 무궁화로 도안하고, “화려하다 우리 학교여/ 무궁화 새 가지의 꽃이 아닌가/ 아 잘 배양합시다”'라는 후렴구가 들어가 있는 교가를 만들었다. 이 일로 일제 당국의 감시를 받았고, 1932년 4월부터 1933년 1월까지 서귀포 경찰서의 명령에 의해 임시 폐교되기도 했다.

1924년 신유의숙을 김한정 교사에게 맡긴 뒤 일본으로 유학가서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26년 7월 조선민중의 구제를 사명으로 삼은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와세다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협동조합운동사에서 활동하였으며, 1929년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대 초반에는 협동조합운동사 활동의 실천방향에 대하여 신문과 잡지에 다수의 글을 게재하였다.

한편, 1929년 신간회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0년 1월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조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며칠간 구류되었다.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에 관해 널리 알리면서, "이 사건은 일제의 조작에 현혹된 중국인들이 죄없는 한인들을 공격한 것이다"라며 일제를 규탄하는 격문을 작성, 배포했다. 이 일로 또다시 체포되어 48일간 구금되기도 했다.

8.15 광복김규식의 중도 우파 노선에 동조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족자주연맹 후보로 제주도 남제주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5년 조봉암, 서상일, 이동화(李東華) 등과 함께 진보당 창당 추진위원을 맡았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제주도 남제주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0년 전진한(錢鎭漢)과 함께 한국사회당을 창당하고 7.29 국회의원 총선거 때 남제주군 선거구에 재차 출마하여 당선되어 민정구락부에 소속되어 의정 활동을 하였다.

1961년 1월 20일 서상일, 이동화, 윤길중(尹吉重), 조헌식(趙憲植), 정화암(鄭華巖) 등의 사회대중당과 고정훈(高貞勳)·한왕균(韓旺均) 등의 사회혁신당이 통합하여 통일사회당을 창당할 때 이에 가담하였으나 5.16 군사정변 직후 구속되었고 당은 해산되었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 1979년 12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김성숙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2006년 10월 12일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