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택

金文澤.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9년 12월 29일 평안남도 진남포 억양기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1929년 진남포 득신소학교에 입학하여 1936년에 졸업하였고, 1936년경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1941년에 입학했다. 1942년 일본으로 유학가서 도쿄 주오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1943년 7월 초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귀향한 그는 사촌동생이자 진남포상공학교 졸업반인 김윤택, 득신학교 동문 한태봉과 함께 조선의 비참한 현실과 일본의 번영을 비교하면서 조국의 앞날에 비분강개했다.

이후 고향의 청년들을 모아놓고 "우리가 굶주리는 것은 '왜적 쪽발이' 때문이다. 왜놈들은 우리의 나라를 빼앗고 우리에게서 입을 것, 먹을 것을 모두 강탈해갔다"는 등 반일 연설을 하다 1943년 7월 22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43년 12월 25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다 학병 출정을 조건으로 출감되어 일본 규슈로 이송되었고, 1944년 1월 20일 일본군 구마모토 사단 서부 제17부대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사쓰마에 배치되었다.

1944년 9월 26일 기회를 틈타 탈영하여 목선과 기차 등을 통해 중국 안휘성 부양현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한국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했다. 이후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 제1분대장, 훈련교관 등으로 활동하면서 초모 활동, 광복군 훈련, 국내 공작원 파견, 일본군 무장 해제, 교포들의 국내 귀환 임무 등을 수행하였고, 1945년 6월 참령을 맡았다.

8.15 광복 후 한동안 중국에 남아서 한인 동포를 국내로 귀환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다 1946년 4월 귀국하였다. 1950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국립체신고등학교 교사, 국립체신대학 국제법 교수를 역임하였고, 1962년에서 1977년까지 한국전력주식회사에서 일하였으며, 1966년과 1984년 광복회 이사로 활동했다. 1988년 1월 8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문택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1년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저서[편집 | 원본 편집]

김문택은 생전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사쓰마에 배치되었다가 탈영한 후 중국으로 이동하여 광복군으로 복무한 행적에 관하여 장편의 수기를 집필했다. 이 수기는 1995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 의해 <광복군 김문택 수기> '탈출기', '광복군'으로 발간되었다. 이 수기는 역사학계로부터 한국 광복군의 행적을 연구하는 데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현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김문택의 수기 전문을 볼 수 있다.[1]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