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거봉

金巨奉.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9년 10월 15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재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서 출생했다. 이명은 '김인한(金仁漢)'이다. 1919년 3월 27일 소하리에 사는 이정석 등이 독립만세시윙를 벌이다가 노온사리 주재소에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부친 이종원이 아들을 구하기 위해 최호천, 윤의병 등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최호천은 유지호, 최정성, 그리고 김거봉에게 이정석을 구출하자고 제의해 동의를 받았다.

이후 김거봉 등은 동리 사람 100여 명을 규합한 뒤 행진하다가 부근 동리 내가리대의 동민을 더 모집하여 총 200명을 확보하였다. 그날 밤 최호천이 불러모은 주민까지 합하여 총 500여 명이 결성되었고, 김거봉과 윤의병, 이종원, 최정성, 유지호, 최주환 등이 앞장서서 노온사리 주재소로 향했다. 시위대는 주재소를 포위하고 "이정석을 내놓아라"고 함성을 질렀다. 이때 일경이 "이정석은 본서로 넘겨 여기에는 없으니 본서에 가서 석방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군중은 보통학교 뒷산으로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부른 후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김거봉은 1919년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요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고, 1919년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2] 1931년 2월 1일 시흥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김거봉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