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홍석

高衡鎭. 창씨명은 다카야마 코시(高山洪錫).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0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0년 10월 6일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유천리(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다 전사한 고제봉의 후손이란 것에 깊은 긍지를 가졌고,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7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보통학교 교육과정을 독습했다. 19살 때 김모(金某)의 강연을 듣던 중 "조선인은 약한 민족이므로 공부하여 강한 민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에 깊이 감명하여 이듬해 4월 광주부 소재 사립 보통학교 흥학관에 입학했다. 이때 교사 김재명으로부터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것은 조선 동포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니 아무쪼록 공부에 힘써 조선을 강대한 국가로 만들어달라"는 말을 듣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25년 흥학관을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가서 도쿄시 소재 여러 학교를 전전한 후 살비 동경수의학교에서 공부하였지만 가사 정리를 위해 중도 퇴학하고 1928년 1월 조선으로 돌아와서 양복점 외교원 및 대서인 사무원 등을 거쳐 1936년 이래 전주부 상생정에서 재목상을 경영했다. 그러나 영업이 부진에 빠지자 자신이 조선인이기 때문에 일본인과 같이 영업이 융성하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고, 조선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다. 1938년 10월 하순경 상업상의 용무로 숙박하고 있던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월평리 육학정에서 자신이 품고 있던 사상의 일부분을 공시할 목적으로 육학정 입구 오른쪽 옆 도리(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에 연한 연필을 사용하여 " 대한독립만세, 동포여 깨어나라"라는 내용을 가로로 크게 적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42년 4월 2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1982년 6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고홍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2002년 10월 3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유해를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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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