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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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載崙.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9년 10월 26일 전라남도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고도일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경성 사립 중등학교에서 수학한 뒤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던 1919년 3월 16일, 김장환이 경성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석한 뒤 기미독립선언서 1통을 휴대한 채 제주에 내려왔다. 김장환은 천 지역 유지인 김시범(金時範)을 만나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였고, 김시범은 거사를 결심하였다. 김시범은 김시은(金時殷)·김장환과 함께 3월 17일부터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를 발의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고재륜은 김장환으로부터 이 계획을 설명받고 즉석에서 가담하기로 했다. 3월 19일까지 14명의 동지가 모였는데, 고재륜을 비롯하여 김시범·김시은·김형배(金瀅培)·김년배(金年培)·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백응선(白膺善)·김장환·박두규(朴斗圭)·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이었다. 그들은 제주 유림 사이에서 명망 높았던 김시우(金時宇)의 제삿날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계획했다.

1919년 3월 21일, 500여 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경찰관주재소 서쪽으로부터 미밋동산까지 행진했다. 고재륜은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하였고, 김시법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시위대는 조천 비석거리를 돌아 제주성 안으로 향하다 신촌에 이르러 경찰과 충돌하여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13명이 연행되었다. 이때 체포된 고재륜은 제주지청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1] 고재륜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징역 살이하며 노동을 하다 출옥할 때 약간의 노임을 받았는데, 이를 가지고 기금에 쓰자고 하여 동미회(同味會)를 구성했고, 동지 백응선의 묘비 건립에 썼다고 한다. 이후 1933년 5월 30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제주지청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2] 출옥 후 서귀포로 옮겨 지내다 1980년 11월 7일 장남 고택구의 집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고재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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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