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익영

高益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4년생이며, 평안남도 평원군 동두면 부백리 출신이다. 1919년 3월 7일 평원군 석암면 석암시위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형 1,200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때 석암리 경찰주재소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주모자 고사영(高士英) 목사를 체포하기 위해 그가 숨어 있는 김대준(金大俊)의 집을 급습하였다. 이때 김대준은 저항하며 주민들을 불러모았고, 일본 순사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도움을 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대준이 일본군의 칼에 찔려 상처를 입자, 시위에 참여하였던 장로 고익영을 비롯한 주민 100여 명이 일본군과 순사를 포위하며 돌을 던졌다. 이에 일본군은 총격을 가했고, 고익영을 비롯한 5명은 부상당했다.

이 일로 체포된 고익영은 1심과 2심 모두 유죄판결을 받자 상고하였지만,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1]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고익영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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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