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선

康學善.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2년 8월 11일 평안북도 벽동군 성남면 성상리에서 출생했다. 1919년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했으며, 3월 8일 벽동군 성남면 성상리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일으키려고 교회당에서 신도 40명에게 선천군의 만세시위 상황을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체포하면서,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으나 평양지방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 공소 기각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상고 취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본인은 선천에서 3월 1일 만세를 부르고 학교에 유숙하는 중 학교 선생, 학생 등이 포박되고 다른 학생들의 재교를 금지당함에 따라 부득이하게 그달 7일 집으로 돌아왔는데, 너는 무슨 일로 돌아왔느냐고 놀라서 물음에 선천에서의 사변을 답했는데, 부모 및 같은 마을의 사람은 믿지 못하고 퇴학 명령을 받고 온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가운데, 3월 8일은 일요일이어서 회당에 갔는데, 또 신자 등도 위 사실을 믿지 않았고 관리가 본인의 언동을 듣고 헌병소장에게 선천에서 온 자가 회당에서 연설했다고 말했다.

위는 어떠한 연설이었는지에 대해 헌병 분견소에서 강제적으로 심문함에 견디지 못하고 기억되지 않으나 그 연설한 것을 변명한즉, 각 재판소에서 선동자로 인정되었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본인이 선동하기 위해 간 것이라고 하면, 선언서 하나를 휴대하고 만약 본인에게 이러한 언동에 있다고 들리면 그때 포박당하지 않을 리 없다. 또 본인은 진실로 6일이 지날 때까지 만세를 부르지 않겠는가.

본인이 관청에서의 신청은 강제적 심문에 견디지 못하고 시말서에 날인한 적이 있다. 증인 김봉신은 보고 듣지 못한 것을 보고 들은 것처럼 말하여 죄를 뒤집어씌우고 악형을 가하고 문취서에 날인하게 했으나, 피고는 결고 부정한 말을 한 마디도 토로한 적이 없다. 따라서 정당한 처분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1919년 5월 15일 고등법원은 "피고가 불온한 연설을 하고 타인을 선동한 사실이 없다고 논하는 것은 피고 한 개의 주장에 불과하며, 피고가 선천읍에서의 시위에 참가하고 벽동군 야소교 교회당에서 선동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명확하며, 김봉신이 허위 공술을 하고 경찰관이 피고를 강압하여 조서를 날인하게 했음을 인정하는 증거의 흔적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상고 기각 판결을 내렸다.[1]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강학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