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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되어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하야할 것을 권유, 설득하였다. |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되어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하야할 것을 권유, 설득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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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양주시|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은 [[4월 27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당시 그의 장남 [[이강석 (이기붕의 아들)|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8일]] 새벽 0시경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 한편, [[양주시|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은 [[4월 27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당시 그의 장남 [[이강석 (이기붕의 아들)|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8일]] 새벽 0시경에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 ||
이승만은 [[이기붕]] 가족을 조문한 다음날 [[5월 29일]] 비밀리에 [[ | 이승만은 [[이기붕]] 가족을 조문한 다음날 [[5월 29일]] 비밀리에 [[하와이 주|하와이]]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민중당 (1965년)|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ref name="운구1">[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842&C_CC=AC 弔辭/朴正熙가 李承晩에게] - 조갑제</ref> 작가 [[최인호]]는 그의 연재소설 《가족》에서 이승만의 죽음에 대해 '독재자다운 비참한 말로'라고 비평하였다. | ||
===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 === | ===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