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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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XiongnuMap.png|섬네일|흉노의 세력 판도.|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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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중국어|匈奴}})는 몽골 초원에서 최초로 유목 제국을 구성한 [[유목민]]이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각 제후국들과 [[한나라|한]]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 흉노라는 집단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그들이 어떤 집단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훈족]]과 동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 역시 아직은 설에 불과할 뿐, 증명된 바는 없다.
 
== 개요 ==
'''흉노'''({{llang|zh|匈奴}})는 몽골 초원에서 탄생한 최초의 유목 제국이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각 제후국들과 [[한나라|한]]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 흉노라는 집단 명칭이 사용되었는지, 그들이 어떤 집단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훈족]]과 동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 역시 아직은 설에 불과할 뿐, 증명된 바는 없다.


== 역사 ==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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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특]](묵돌)의 등장===
===[[묵특]](묵돌)의 등장===
'''[[묵특]]'''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묵특]]은 [[두만(흉노 선우)|두만]](頭曼) [[선우]]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두만은 [[묵특]]보다 그의 애첩의 소생, 그러니까 [[묵특]]의 이복동생을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했다. 한편으로는 [[월지]]가 힘 좀 세다고 짜증나게 구는 걸 좀 정리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월지]]가 인질을 요구하자 그는 아들 [[묵특]]을 [[월지]]에 볼모로 보낸다. [[월지]]는 볼모를 죽이려고 할 것이니, 보기 싫은 큰아들도 죽이고, [[월지]]를 손봐줄 명분도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묵특]]'''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묵특]]은 [[두만(흉노 선우)|두만]](頭曼) [[선우 (유목군주)|선우]]의 아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두만은 [[묵특]]보다 그의 애첩의 소생, 그러니까 [[묵특]]의 이복동생을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했다. 한편으로는 [[월지]]가 힘 좀 세다고 짜증나게 구는 걸 좀 정리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월지]]가 인질을 요구하자 그는 아들 [[묵특]]을 [[월지]]에 볼모로 보낸다. [[월지]]는 볼모를 죽이려고 할 것이니, 보기 싫은 큰아들도 죽이고, [[월지]]를 손봐줄 명분도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만의 예상대로 [[월지]]는 [[묵특]]이 도착하자마자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묵특]]은 천리마를 훔쳐타고 흉노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한다. 이 일로 [[묵특]]은 아버지의 신뢰를 얻어 만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된다. 그러나 [[묵특]]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안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만의 예상대로 [[월지]]는 [[묵특]]이 도착하자마자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묵특]]은 천리마를 훔쳐타고 흉노로 돌아오는 데에 성공한다. 이 일로 [[묵특]]은 아버지의 신뢰를 얻어 만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된다. 그러나 [[묵특]]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안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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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묵특]]이 부하들 앞에서 자신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쏘았다. 부하들은 머뭇거렸고, [[묵특]]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며 머뭇거린 부하들을 죄다 참수해버린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연지, 즉 부인을 향해 명적을 날린다. 그의 아내는 곧 고슴도치가 되었지만, 아직도 머뭇거리는 부하들이 있었다. [[묵특]]은 망설인 자들을 참수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묵특]]이 부하들 앞에서 자신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쏘았다. 부하들은 머뭇거렸고, [[묵특]]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며 머뭇거린 부하들을 죄다 참수해버린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연지, 즉 부인을 향해 명적을 날린다. 그의 아내는 곧 고슴도치가 되었지만, 아직도 머뭇거리는 부하들이 있었다. [[묵특]]은 망설인 자들을 참수한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 [[묵특]]은 마침내 사냥터에서 아버지를 향해 명적을 쏜다. 그의 부하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우]]를 향해 활을 쏘았다. 두만은 벌집이 되어 사망하였다. 그는 계모와 이복동생을 차례로 죽이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기원전 209년, [[묵특]]은 마침내 사냥터에서 아버지를 향해 명적을 쏜다. 그의 부하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우 (유목군주)|선우]]를 향해 활을 쏘았다. 두만은 벌집이 되어 사망하였다. 그는 계모와 이복동생을 차례로 죽이고 스스로 [[선우 (유목군주)|선우]]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묵특]]은 오르도스 상실 이후 위축되었던 흉노의 세를 무서운 속도로 불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묵특]]은 오르도스 상실 이후 위축되었던 흉노의 세를 무서운 속도로 불려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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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친 조약===
===화친 조약===
어쨌거나 전쟁의 결과는 한의 완벽한 패전이었다. 한과 흉노 사이의 화친 조약은 한의 입장에서는 매우 치욕적인 조건으로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쨌거나 전쟁의 결과는 한의 완벽한 패전이었다. 한과 흉노 사이의 화친 조약은 한의 입장에서는 매우 치욕적인 조건으로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 한과 흉노는 형제의 의를 맺는다.
* 한과 흉노는 형제의 의를 맺는다.
* 한나라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낸다.
* 한나라 공주를 흉노 [[선우 (유목군주)|선우]]에게 시집보낸다.
* 한은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비단을 보낸다.
* 한은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비단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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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적을 더욱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흉노는 후에 화친 조약에 한 조항을 추가한다.
이 목적을 더욱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흉노는 후에 화친 조약에 한 조항을 추가한다.
* 국경지대에 관시(関市)를 설치하여 교역한다.
* 국경지대에 관시(関市)를 설치하여 교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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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 중반 무렵, 흉노의 1차 분열이 시작된다. 이는 유목 국가들의 뿌리깊은 문제이기도 한데, 유목 국가의 후계 과정은 큰 불안 요소를 가지고 있다. 정치 제도가 발전한 정주민 국가에서는 보통 뚜렷한 왕위세습 원칙(장자상속과 같은)에 따라 왕위가 상속된다. 이는 관료제 등의 발달로 왕이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어느 정도 국가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1세기 중반 무렵, 흉노의 1차 분열이 시작된다. 이는 유목 국가들의 뿌리깊은 문제이기도 한데, 유목 국가의 후계 과정은 큰 불안 요소를 가지고 있다. 정치 제도가 발전한 정주민 국가에서는 보통 뚜렷한 왕위세습 원칙(장자상속과 같은)에 따라 왕위가 상속된다. 이는 관료제 등의 발달로 왕이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어느 정도 국가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목국가에서는 국가의 운영이 거의 전적으로 왕의 역량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선대 군주의 후손이나 형제 가운데 능력이 있는 사람 혹은 여론의 지지를 얻는 사람이 즉위하는 일이 많다. 바꿔 말하면, 여론이 모이지 않는다면 바로 국가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국가의 세력이 약화될 때 유목군주의 권위는 크게 흔들리는데, 이런 때 분열이 일어나기 쉬웠다. 기원전 60년경 흉노의 상황이 이러하였다.
그러나 유목국가에서는 국가의 운영이 거의 전적으로 왕의 역량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선대 군주의 후손이나 형제 가운데 능력이 있는 사람 혹은 여론의 지지를 얻는 사람이 즉위하는 일이 많다. 바꿔 말하면, 여론이 모이지 않는다면 바로 국가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국가의 세력이 약화될 때 유목군주의 권위는 크게 흔들리는데, 이런 때 분열이 일어나기 쉬웠다. 기원전 60년경 흉노의 상황이 이러하였다.  


기원전 1세기 중반,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무제의 대공세로 오르도스를 상실하고, 실크로드 도시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마저 일부 상실한 상태였다.
기원전 1세기 중반,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무제의 대공세로 오르도스를 상실하고, 실크로드 도시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마저 일부 상실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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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한의 물자와 군사적인 도움으로 호한야는 흉노를 다시금 통합할 수 있었다. 실제로 기원전 36년 질지가 전사한 전투는 서흉노와 한나라 군대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였다. 이 전투로 서흉노는 와해되었고, 호한야는 흉노를 재통합할 수 있었다. 통합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BC 33년 호한야는 재입조해 대대적인 물자 지원을 얻어갔다. 한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될 정도. [[왕소군]]의 이야기도 호한야 선우의 시절에 나온 것이다.
여튼 한의 물자와 군사적인 도움으로 호한야는 흉노를 다시금 통합할 수 있었다. 실제로 기원전 36년 질지가 전사한 전투는 서흉노와 한나라 군대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였다. 이 전투로 서흉노는 와해되었고, 호한야는 흉노를 재통합할 수 있었다. 통합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BC 33년 호한야는 재입조해 대대적인 물자 지원을 얻어갔다. 한의 재정에 큰 부담이 될 정도. [[왕소군]]의 이야기도 호한야 선우의 시절에 나온 것이다.


호한야의 통합 이후 약 100년 동안 흉노는 안정기에 들어선다. 심지어 한 때 최전성기에 버금가는 세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왕망]]이 즉위하여 [[신나라|신]]을 건국하며 주변국에 대한 예우를 격하한 일이 있었는데<ref>한 예로 신나라는 [[고구려]]의 왕을 '''하'''구려'''후'''라고 불렀다.</ref> 이를 계기로 서역과 초원에서 들끓은 신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였던 것. 그러나 후한 건국 이후에는 다시 세력이 위축된다.
호한야의 통합 이후 약 100년 동안 흉노는 안정기에 들어선다. 심지어 한 때 최전성기에 버금가는 세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왕망]]이 즉위하여 [[신나라|신]]을 건국하며 주변국에 대한 예우를 격하한 일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서역과 초원에서 들끓은 신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였던 것. 그러나 후한 건국 이후에는 다시 세력이 위축된다.


===재분열===
===재분열===
그러나 기원후 1세기 중반 재분열기가 찾아온다. 이번에도 흉노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는 가운데 터진 계승 문제가 주요 원인. 1차 분열 때 질지의 서흉노와 호한야의 동흉노가 갈등했다면 이번에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나뉜다. 남흉노는 한에 입조하여 복종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 중반 재분열기가 찾아온다. 이번에도 흉노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는 가운데 터진 계승 문제가 주요 원인. 1차 분열 때 질지의 서흉노와 호한야의 동흉노가 갈등했다면 이번에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나뉜다. 남흉노는 한에 입조하여 복종하는 길을 택하였다.


[[포노 선우]]가 이끄는 북흉노는 북몽골초원에서 한에 대항했다. 이 분열기 이후 흉노는 초원에서 그 중심적인 지위를 잃어버린다. 흉노가 쇠퇴하면서, 기원전 1세기경 처음 나타났던 [[선비 (유목민)|선비]]가 강성해졌다.
[[포노 선우]]가 이끄는 북흉노는 북몽골초원에서 한에 대항했다. 이 분열기 이후 흉노는 초원에서 그 중심적인 지위를 잃어버린다. 흉노가 쇠퇴하면서, 기원전 1세기경 처음 나타났던 [[선비 (유목집단)|선비]]가 강성해졌다. [[선비 (유목집단)]] 항목 참조.


기원후 79년에는 [[반초]]가, 89년에는 두헌이 대대적인 흉노 정벌을 감행하여 흉노를 대파했다. 이 때 흉노 일축왕을 비롯하여 21만명이 한에 투항했다고 한다.<ref>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사계절, 근간</ref> 91년에는 경기(耿夔)가 이끄는 한군이 금미산에서 북흉노를 대파했다. [[선우]]의 모친을 비롯하여 5000명이 전사한 참담한 패배였다.
기원후 79년에는 [[반초]]가, 89년에는 두헌이 대대적인 흉노 정벌을 감행하여 흉노를 대파했다. 이 때 흉노 일축왕을 비롯하여 21만명이 한에 투항했다고 한다.<ref>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사계절, 근간</ref> 91년에는 경기(耿夔)가 이끄는 한군이 금미산에서 북흉노를 대파했다. [[선우 (유목군주)|선우]]의 모친을 비롯하여 5000명이 전사한 참담한 패배였다.


북흉노는 서진하여 일리 강 유역으로 이주한다. 이 때 이주하지 않은 흉노 잔여 세력 10만여 락(천막)이 선비로 흡수되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ref>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사계절, 근간</ref>  일리 강 유역에서 천산 산맥에 이르는 영역에 자리잡은 북흉노는 오랫동안 그 세력을 유지했다. 2세기 전반기까지 흉노는 일부 서역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현대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한 조정과 서역의 패권을 놓고 계속해서 경쟁을 벌이면서 접촉을 했던 것도 확인된다.
북흉노는 서진하여 일리 강 유역으로 이주한다. 이 때 이주하지 않은 흉노 잔여 세력 10만여 락(천막)이 선비로 흡수되었다는 기록이 눈에 띈다.<ref>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사계절, 근간</ref>  일리 강 유역에서 천산 산맥에 이르는 영역에 자리잡은 북흉노는 오랫동안 그 세력을 유지했다. 2세기 전반기까지 흉노는 일부 서역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현대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한 조정과 서역의 패권을 놓고 계속해서 경쟁을 벌이면서 접촉을 했던 것도 확인된다.


그러다가 156년,  선비에게 패배한 흉노는 다시 서진하여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이탈한다. 이 시점에서 북흉노는 몽골 초원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선비가 몽골 초원의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그러다가 156년,  [[선비 (유목집단)|선비]]에게 패배한 흉노는 다시 서진하여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이탈한다. 이 시점에서 북흉노는 몽골 초원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선비 (유목집단)|선비]]가 몽골 초원의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이후 북흉노는 아마 흑해 근방의 초원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유럽에서 [[훈족]]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후 북흉노는 아마 흑해 근방의 초원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유럽에서 [[]]족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남흉노는 오르도스와 산서성 일대에 분포하며 중국을 다른 북방민족으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심지어는 선비, 오환, 강 등을 토벌하는 용병 역할을 한 일도 있었다.
남흉노는 오르도스와 산서성 일대에 분포하며 중국을 다른 북방민족으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심지어는 선비, 오환, 강 등을 토벌하는 용병 역할을 한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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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흉노는 내몽골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선비족|선비]]와 함께 용병으로 중원을 뛰어다니는 일도 잦았다. 흉노가 마지막으로 활약한 시대는 [[오호십육국시대]]였다. [[전조]](당시 한)를 개창한 사람은 [[유연]]인데, 유연의 집안은 [[후한]]에게서 유씨 성을 하사받은 흉노 집단이었다.
남흉노는 내몽골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선비족|선비]]와 함께 용병으로 중원을 뛰어다니는 일도 잦았다. 흉노가 마지막으로 활약한 시대는 [[오호십육국시대]]였다. [[전조]](당시 한)를 개창한 사람은 [[유연]]인데, 유연의 집안은 [[후한]]에게서 유씨 성을 하사받은 흉노 집단이었다.


유연의 전조 개창은 중원을 지배하는 유목민족의 왕조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흉노라는 이름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역시 5호16국시대, 흉노 혁련발발이 산시성 지역에서 하(夏)를 건국했다는 기사이다. 하의 멸망 이후 흉노라는 이름은 중국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 초원에 남았던 흉노 집단은 선비, [[유연(유목제국)|유연]] 등, 후대의 유목제국들 안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연의 전조 개창은 중원을 지배하는 유목민족의 왕조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흉노라는 이름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역시 5호16국시대, 흉노 혁련발발이 산시성 지역에서 하(夏)를 건국했다는 기사이다. 하의 멸망 이후 흉노라는 이름은 중국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다. 초원에 남았던 흉노 집단은 [[선비]], [[유연(유목제국)|유연]] 등, 후대의 유목제국들 안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원으로 유입된 흉노는 오호십육국 시대와 [[수나라|수]][[당나라|당]]시기를 거치며 중국 사회 안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중원으로 유입된 흉노는 5호16국시대와 [[수나라|수]][[당나라|당]]시기를 거치며 중국 사회 안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누구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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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에서 발견된 유골들에 대해 실시된 유전자 검사의 결과에 의하면 전체 유골의 약 11%가 "유럽계"로 나온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흉노 이전에 이미 중앙유라시아 전역의 유목, 수렵 집단들 간에 인적, 문화젹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며, 흉노는 그 과정에서 출현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고분에서 발견된 유골들에 대해 실시된 유전자 검사의 결과에 의하면 전체 유골의 약 11%가 "유럽계"로 나온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흉노 이전에 이미 중앙유라시아 전역의 유목, 수렵 집단들 간에 인적, 문화젹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며, 흉노는 그 과정에서 출현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또한 유의하여야 할 사실은, '흉노는 단순히 하나의 민족이나 혈통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흉노가 강성해져 초원 전역에 대해 정치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동안에는 초원의 다양한 유목 집단들이 스스로를 "흉노"라고 지칭했을 것이다. (혹은 흉노 제국 내에서 쓰이던 명칭으로) 흉노의 역사에 접근하는 가장 정확한 시각은 흉노 "제국"으로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흉노"족"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분명 이 제국의 중핵을 이루었겠지만, 흉노라는 명칭으로 불린 전체 집단 가운데에서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한 유의하여야 할 사실은, '흉노는 단순히 하나의 민족이나 혈통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흉노가 강성해져 초원 전역에 대해 정치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동안에는 초원의 다양한 유목 집단들이 스스로를 "흉노"라고 지칭했을 것이다.(혹은 흉노 제국 내에서 쓰이던 명칭으로) 흉노의 역사에 접근하는 가장 정확한 시각은 흉노 "제국"으로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흉노"족"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분명 이 제국의 중핵을 이루었겠지만, 흉노라는 명칭으로 불린 전체 집단 가운데에서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흉노의 언어 역시 아직은 미스터리할 뿐이다. 몽골계통설, 투르크계통설, 퉁구스계통설과 몽골과 퉁구스계통이 섞인 언어라는 설 등, 설만 무성하다. 노인 울라 16호 고분 등의 흉노 유적지에서는 흉노의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가 새겨진 유물들이 출토된다. 그러나 흉노 문자는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흉노의 언어 역시 아직은 미스터리할 뿐이다. 몽골계통설, 투르크계통설, 퉁구스계통설과 몽골과 퉁구스계통이 섞인 언어라는 설 등, 설만 무성하다. 노인 울라 16호 고분 등의 흉노 유적지에서는 흉노의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가 새겨진 유물들이 출토된다. 그러나 흉노 문자는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사회==
==사회==
흉노의 대군주는 [[선우(單于)]]라고 불렸다. 선우는 연제(戀鞮) 씨족에서 배출되었으며, 전통적으로 호연, 란, 수복 등의 씨족에서 연지, 즉 아내를 맞아들였다. 후한 대에는 구림씨족이 추가된다. 이들 인척씨족의 수령들은 "골도후(骨都侯)"라고 불리며 선우를 보좌하고, 휘하의 유목집단들을 감찰, 재판했으며, 한과의 교섭을 담당했다고 한다.
흉노의 대군주는 [[선우 (유목군주)|선우(單于)]]라고 불렸다. 선우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선우 (유목군주)]] 항목 참조. 선우는 연제(戀鞮) 씨족에서 배출되었으며, 전통적으로 호연, 란, 수복 등의 씨족에서 연지, 즉 아내를 맞아들였다. 후한 대에는 구림씨족이 추가된다. 이들 인척씨족의 수령들은 "골도후(骨都侯)"라고 불리며 선우를 보좌하고, 휘하의 유목집단들을 감찰, 재판했으며, 한과의 교섭을 담당했다고 한다.


흉노는 영역을 크게 좌방, 중앙, 우방으로 나누었다. 동쪽의 좌방은 좌방왕장, 서쪽의 우방은 우방왕장들이 관리했다. 이렇게 영역을 삼분하는 것은 후대의 유목제국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좌방은 고조선과 예맥, 상곡(上谷)에 접했으며, 우방왕장은 상군(上郡)을 겨눈 위치에 놓였으며, [[월지]], 저, 강과 접했다고 한다. 중앙은 선우정(單于庭), 즉 선우의 직접 지배 영역이었으며, 운중(雲中)과 대(代)에 접하였다.
흉노는 영역을 크게 좌방, 중앙, 우방으로 나누었다. 동쪽의 좌방은 좌방왕장, 서쪽의 우방은 우방왕장들이 관리했다. 이렇게 영역을 삼분하는 것은 후대의 유목제국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좌방은 고조선과 예맥, 상곡(上谷)에 접했으며, 우방왕장은 상군(上郡)을 겨눈 위치에 놓였으며, [[월지]], 저, 강과 접했다고 한다. 중앙은 선우정(單于庭), 즉 선우의 직접 지배 영역이었으며, 운중(雲中)과 대(代)에 접하였다.


선우 아래의 최고위 지도층은 만기(萬旗)라고 불렸다. 사기에 의하면 만기에는 좌우현왕, 좌우록리왕,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 등 24장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만기는 분지를 직접 다스렸으며, 휘하에 천장, 백장, 십장과 비소왕(裨小王), 상봉(相封), 도위(都尉), 당호(当戸), 저거(且渠) 등의 속료를 거느렸다고 한다.<ref>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김호동, 미출판</ref> 만기란 만 명의 병력을 거느렸다는 의미이나, 몽골 등 후대의 유목제국들에서도 "만호"들이 만명의 병력을 거느리지 못했던 경우가 흔했다는 것을 고려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흉노의 실제 병력을 10만 정도로 추정한다.
선우 아래의 최고위 지도층은 만기(萬旗)라고 불렸다. 사기에 의하면 만기에는 좌우현왕, 좌우록리왕, 좌우대장, 좌우대도위, 좌우대당호, 좌우골도후 등 24장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만기는 분지를 직접 다스렸으며, 휘하에 천장, 백장, 십장과 비소왕(裨小王), 상봉(
), 도위(都尉), 당호(当戸), 저거(且渠) 등의 속료를 거느렸다고 한다.<ref>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김호동, 미출판</ref> 만기란 만 명의 병력을 거느렸다는 의미이나, 몽골 등 후대의 유목제국들에서도 "만호"들이 만명의 병력을 거느리지 못했던 경우가 흔했다는 것을 고려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흉노의 실제 병력을 10만 정도로 추정한다.


흉노는 여러 집단의 연합체로, 스스로를 흉노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목민이었다. 유목집단의 구성은 친족집단(씨족집단)부터 여러 친족집단이 정치적 상하관계로 묶여 구성된 대규모 집단들까지 다양했다.
흉노는 여러 집단의 연합체로, 스스로를 흉노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목민이었다. 유목집단의 구성은 친족집단(씨족집단)부터 여러 친족집단이 정치적 상하관계로 묶여 구성된 대규모 집단들까지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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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 기타 ==
===[[사마천]] [[고자]]되는 이야기===
===[[사마천]] [[고자]]되는 이야기===
[[한무제]] 시절 [[이릉]]이란 장군이 흉노 본대에 맞서 싸워 선우가 친히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신적인 전과를 올리다가 지구전 끝에 항복한 일이 있었다. 이릉은 당시 5천명의 보병만 가지고 8만에 가까운 흉노를 여러 차례 격파하다가 지구전 끝에 항복했다. 이때 한 무제는 이릉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이릉이 졌고, 항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분기탱천해 있었다.
[[한 무제]] 시절 [[이릉]]이란 장군이 흉노 본대에 맞서 싸워 선우가 친히 이끄는 군대를 상대로 신적인 전과를 올리다가 지구전 끝에 항복한 일이 있었다. 이릉은 당시 5천명의 보병만 가지고 8만에 가까운 흉노를 여러 차례 격파하다가 지구전 끝에 항복했다. 이때 한 무제는 이릉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는지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이릉이 졌고, 항복했다는 사실만으로 분기탱천해 있었다.


이때 [[사마천]]이 한 무제에게 이릉을 그렇게 막 까는 건 아니지 않냐고 진언을 올렸다가 [[고자|잘린다.]] 관직에서도 잘리고 [[음경]]도 잘리고.
이때 [[사마천]]이 한 무제에게 이릉을 그렇게 막 까는 건 아니지 않냐고 진언을 올렸다가 [[고자|잘린다.]] 관직에서도 잘리고 [[음경]]도 잘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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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라 왕실이 스스로를 흉노와 연관지은 것은 7세기경에 등장한 위의 두 비문 뿐이다. 엄청난 시기적 괴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고대에는 스스로의 가문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하여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영웅이나 제후와의 친연성을 날조하는 일이 흔했다.
또한 신라 왕실이 스스로를 흉노와 연관지은 것은 7세기경에 등장한 위의 두 비문 뿐이다. 엄청난 시기적 괴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고대에는 스스로의 가문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하여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영웅이나 제후와의 친연성을 날조하는 일이 흔했다.


흉노의 일파가 신라로 이동해왔음을 증명할 고고학적 자료가 없고, 중요한 근거로 꼽혔던 [[돌무지덧널무덤]]과 쿠르간의 유사성이 부정되면서, 현대 학계에서는 신라 왕실에서 김일제를 스스로의 조상으로 내세운 것도 같은 목적으로 날조된 것이라고 본다.
흉노의 일파가 신라로 이동해왔음을 증명할 고고학적 자료가 없고, 중요한 근거로 꼽혔던 [[돌무지덧널무덤]]과 쿠르간의 유사성이 부정되면서, 현대 학계에서는 신라 왕실에서 김일제를 스스로의 조상으로 내세운 것도 같은 목적으로 날조된 것이라고 본다.  


다만, 하나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경주김씨]] 족보에 기록된 [[김알지]] 설화와 문무왕비와 신문왕비에 기록된 성한왕의 설화가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문의 대수를 타고 올라가면 성한왕은 김알지의 2세손인 "세한"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게다가 한자를 통해 우리말을 구성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성한과 세한이 같은 발음이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만, 하나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경주김씨]] 족보에 기록된 [[김알지]] 설화와 문무왕비와 신문왕비에 기록된 성한왕의 설화가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문의 대수를 타고 올라가면 성한왕은 김알지의 2세손인 "세한"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게다가 한자를 통해 우리말을 구성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성한과 세한이 같은 발음이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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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역사에 훈이 확실하게 등장하는 시기는 4세기경인데, 370년 흑해 연안으로 이동해 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훈]] 항목 참조.
유럽 역사에 훈이 확실하게 등장하는 시기는 4세기경인데, 370년 흑해 연안으로 이동해 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훈]] 항목 참조.


[[파일:Hun üstök.jpg|섬네일|200px|훈의 동복]]
[[파일:Hun_üstök.jpg|섬네일|200px|훈의 동복]]


어쨌거나 유럽 학계에서 훈의 유래는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 유럽 역사에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세기 훈과 흉노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었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현재까지도 훈-흉노 동족설은 완전히 증명되지도, 완전히 부정되지도 않은 채 역사학계의 떡밥으로 남아 있다.
어쨌거나 유럽 학계에서 훈의 유래는 오랫동안 미스터리였다. 유럽 역사에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세기 훈과 흉노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었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현재까지도 훈-흉노 동족설은 완전히 증명되지도, 완전히 부정되지도 않은 채 역사학계의 떡밥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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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흉노의 동복(의례용 구리 솥)과 훈의 동복이 매우 유사하며,  몽골리아의 합성궁이 유럽에 전해진 시기가 훈의 등장 시기와 일치한다. 최소한 흉노와 훈 사이에 문화적 연관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
또한, 흉노의 동복(의례용 구리 솥)과 훈의 동복이 매우 유사하며,  몽골리아의 합성궁이 유럽에 전해진 시기가 훈의 등장 시기와 일치한다. 최소한 흉노와 훈 사이에 문화적 연관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


[[파일:0511 Turmschädel Württembergisches Landesmuseum Stuttgart anagoria.JPG|섬네일|300px|왼쪽|편두를 한 두개골]]
[[파일:0511_Turmschädel_Württembergisches_Landesmuseum_Stuttgart_anagoria.JPG|섬네일|300px|왼쪽|편두를 한 두개골]]


그러나 훈에서 확실히 행해진 편두(어릴 때 머리를 묶어 두개골이 길쭉하게 자라도록 함)가 흉노에서 행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훈의 관습 가운데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은 스스로의 얼굴을 긁어 상처를 내는 관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흉노에 이런 관습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두 집단 간에 분명히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는 것.
그러나 훈에서 확실히 행해진 편두(어릴 때 머리를 묶어 두개골이 길쭉하게 자라도록 함)가 흉노에서 행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훈의 관습 가운데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은 스스로의 얼굴을 긁어 상처를 내는 관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흉노에 이런 관습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두 집단 간에 분명히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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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은어로서의 사용==
==인터넷 은어로서의 사용==
신라왕족 흉노설을 근거로 [[백제]]=[[전라도]](사실 백제는 [[서울]] 지방을 근거지로 발전한 정권이다), [[신라]]=[[경상도]], 신라의 시조가 흉노이니 경상도는 흉노(족) 라는 편협하고 자의적인 역사인식을 가진 지역 패권주의자들 혹은 반 영남 정서를 가진 네티즌들 사이에서 한때 회자되었던 [[지역드립]]이다.
신라왕족 흉노설을 근거로 [[백제]]=[[전라도]](사실 백제는 [[서울]]지방을 근거지로 발전한 정권이다), [[신라]]=[[경상도]], 신라의 시조가 흉노이니 경상도는 흉노(족) 라는 편협하고 자의적인 역사인식을 가진 지역 패권주의자들 혹은 반 영남 정서를 가진 네티즌들 사이에서 한때 회자되었던 [[지역드립]]이다.


이미 과거의 글에서나마 볼 수 있는, 약발이 다 된 [[드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드립을 치는 경우가 아주 간간히 보인다.
이미 과거의 글에서나마 볼 수 있는, 약발이 다 된 [[드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드립을 치는 경우가 아주 간간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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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흉노는 불의 민족이니 경상도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답게 흉포하다느니 하는 궤변과 함께 세트로 사용된다.
대체로 흉노는 불의 민족이니 경상도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답게 흉포하다느니 하는 궤변과 함께 세트로 사용된다.


[[통구이 (은어)|최근엔 너무나 강렬하면서 비극적인 어떤 사건을 비하하는 드립]]이 흥하면서 그것으로 완벽하게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입에 차마 담을 수 없는 패륜적 [[고인드립]]이라 여기에 지면을 할애하기조차 아깝다.
최근엔 너무나 강렬하면서 비극적인 어떤 사건을 비하하는 드립이 흥하면서 그것으로 완벽하게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입에 차마 담을 수 없는 패륜적 [[고인드립]]이라 여기에 지면을 할애하기조차 아깝다.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정치적 신념을 가진 위키러라면 "흉노"를 이런 뜻으로 사용하지 말자. 의미 없는 지역감정 조장일 뿐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정치적 신념을 가진 위키러라면 "흉노"를 이런 뜻으로 사용하지 말자. 의미 없는 지역감정 조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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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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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유목민]]
[[분류: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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