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 편집하기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

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당신의 편집
33번째 줄: 33번째 줄:
[[1550년]] 지금의 [[남원군]] [[주생면]] [[영천]]에서 태어났다. [[1572년]]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역에서 6년을 근무하게 된다.
[[1550년]] 지금의 [[남원군]] [[주생면]] [[영천]]에서 태어났다. [[1572년]]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역에서 6년을 근무하게 된다.


[[1590년]] 자신의 친척뻘 되는 [[황윤길]]을 따라 [[조선통신사]]로서 일본에 간 후 일본의 동태를 살펴보며 일본이 곧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 생각하고 일본군들이 침략할 경우 칼로 쓸어버리겠다는 굳은 결심 하에 일본도 두 자루를 사서 조선에 돌아온다. 이때 친척이자 상관이었던 [[황윤길]]은 당시 [[일본]]에서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최첨단 신무기인 [[조총]]을 두 정 사들고 왔으니, 어찌 보면 친척끼리 닮은 구석이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1590년]] 자신의 친척뻘 되는 [[황윤길]]을 따라 [[조선통신사]]로서 일본에 간 후 일본의 동태를 살펴보며 일본이 곧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 생각하고 일본군들이 침략할 경우 칼로 쓸어버리겠다는 굳은 결심 하에 일본도 두 자루를 사서 조선에 돌아온다. 이때 친척이자 상관이었던 [[황윤길]]은 당시 [[일본]]에서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최첨단 신무기인 [[조총]]을 두 정 사들고 왔으니, 어찌 보면 친척끼리 닮은 구석이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일본에서 돌아온 황진은 제용감 주부를 거쳐 동복현감이 되었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의 공무가 끝나면 말타기와 활쏘기 등 전쟁에 필요한 무예를 부지런히 익혔다. '''이런 만반의 준비야말로 임진왜란 당시의 황진의 엄청난 활약의 원동력이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황진은 제용감 주부를 거쳐 동복현감이 되었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의 공무가 끝나면 말타기와 활쏘기 등 전쟁에 필요한 무예를 부지런히 익혔다. '''이런 만반의 준비야말로 임진왜란 당시의 황진의 엄청난 활약의 원동력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경상도]]가 빛의 속도로 무너진 후(...) 일본군이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단숨에 넘어오자 이광<s>당시 전라도 관찰사. [[권율]]도 도절제사로서 그의 밑에서 싸웠다.</s>의 휘하로 전투에 참전해 맹활약을 펼친다. 단 이광의 이해할 수 없는 [[우라돌격]] 전술로 [[용인 전투]]에서 크게 참패, 남쪽으로 후퇴하다 진안에 침입한 일본군의 선봉장을 죽이고 이어 안덕원에 침입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사실 용인 전투는 한국사 4대 참패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말 그대로 너덜너덜하게 당해 도망치는 상황에서도 이 전과를 올린 것은 놀라운 것이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경상도]]가 빛의 속도로 무너진 후(...) 일본군이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단숨에 넘어오자 이광<s>당시 전라도 관찰사. [[권율]]도 도절제사로서 그의 밑에서 싸웠다.</s>의 휘하로 전투에 참전해 맹활약을 펼친다. 단 이광의 이해할 수 없는 [[우라돌격]] 전술로 [[용인 전투]]에서 크게 참패, 남쪽으로 후퇴하다 진안에 침입한 일본군의 선봉장을 죽이고 이어 안덕원에 침입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사실 용인 전투는 한국사 4대 참패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말 그대로 너덜너덜하게 당해 도망치는 상황에서도 이 전과를 올린 것은 놀라운 것이다.  


이후 왜병의 대군이 전라도의 진산군 외곽 이치 지역을 침범하자 권율의 독려로 훈련원 판관으로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  이치성을 에워싸고 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용맹히 맞아 크게 대승을 거두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일컬어지는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에 비하면 그렇게 눈에 띄는 전과가 없어서 이 전투가 뭐 그렇게 별건가 싶겠지만 당시 일본 측에서는 이 전투를 조선의 3대 전투 중 이치 전투를 단연 원톱으로 쳤다고. 즉 당시 이 전투에서의 승리에 대한 위상이 조선과 일본에게 있어 어떤 의미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후 왜병의 대군이 전라도의 진산군 외곽 이치 지역을 침범하자 권율의 독려로 훈련원 판관으로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  이치성을 에워싸고 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용맹히 맞아 크게 대승을 거두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일컬어지는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에 비하면 그렇게 눈에 띄는 전과가 없어서 이 전투가 뭐 그렇게 별건가 싶겠지만 당시 일본 측에서는 이 전투를 조선의 3대 전투 중 이치 전투를 단연 원톱으로 쳤다고. 즉 당시 이 전투에서의 승리에 대한 위상이 조선과 일본에게 있어 어떤 의미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후 선거이를 따라 [[수원]]에서 일본군에 맞아 싸웠고 이후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안성]]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이후 죽산성에 집결해 있던 왜군이 [[안산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죽산성에서 기어나와 안성을 침략하자 어딜 감히 넘보냐는 듯 도리어 크게 무찔러 오히려 죽산성을 점령해 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성을 잃고 도망치는 일본군들을 상주까지 끈질기게 쫓아가서 완전히 궤멸시켰다.
이후 선거이를 따라 [[수원]]에서 일본군에 맞아 싸웠고 이후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안성]]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이후 죽산성에 집결해 있던 왜군이 [[안산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죽산성에서 기어나와 안성을 침략하자 어딜 감히 넘보냐는 듯 도리어 크게 무찔러 오히려 죽산성을 점령해 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성을 잃고 도망치는 일본군들을 상주까지 끈질기게 쫓아가서 완전히 궤멸시켰다.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진주성을 침략한 일본의 10만 대군을 맞아 용감히 항전했으나 어느 날 진주성 포대에서 머리를 내밀고 밖의 동향을 파악하던 도중 날아온 총알에 맞고 어이없게 전사한다. 지금까지의 활약을 보면 참으로 아쉬운 최후라 할 수 있다.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진주성을 침략한 일본의 10만 대군을 맞아 용감히 항전했으나 어느 날 진주성 포대에서 머리를 내밀고 밖의 동향을 파악하던 도중 날아온 총알에 맞고 어이없게 전사한다. 지금까지의 활약을 보면 참으로 아쉬운 최후라 할 수 있다.  


== 평가 ==
== 평가 ==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