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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에 [[잡곡]]을 섞어 먹거나, [[분식]]을 백미 대신 먹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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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때에는 일본에 쌀 퍼다주느라 쌀이 없어서, 해방 이후에는 쌀 생산량이 모자라서 백미는 항상 품귀현상을 겪었다. 정부는 막대한 외화를 들여 해외에서 쌀을 수입하는 것 보다는 국민이 쌀을 덜 먹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백미보다 잡곡, 밀가루의 영양소가 풍부해 식생활을 개선해야 한다는 취지하에 혼식을 장려했다.
일제강점기때에는 일본에 쌀 퍼다주느라 [[쌀]]이 없어서, 해방 이후에는 쌀 생산량이 모자라서 백미는 항상 품귀현상을 겪었다. 정부는 막대한 외화를 들여 해외에서 쌀을 수입하는 것 보다는 국민이 쌀을 덜 먹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백미보다 잡곡, 밀가루의 영양소가 풍부해 식생활을 개선해야 한다는 취지하에 혼식을 장려했다.


미곡 판매상은 곡물 판매시 백미에 잡곡을 일정비율 이상 섞어야 했고, 쌀을 주 재료로 하는 몇몇 음식은 대체 재료를 찾지 못하면 만들수가 없었다.(대표적으로 술) 음식점에서는 백미에 잡곡을 일정비율 이상 섞어서 조리해야 했고, 관공서 구내식당에서는 백미가 자취를 감추었다.<ref>[http://news.joins.com/article/1185973  혼식장려 강화], 중앙일보, 1969.01.24.</ref> 또한 각종 캠페인을 통해 2일 1분식, 쌀 3알에 보리 1알 등 혼식 장려에 힘썼다.
미곡 판매상은 곡물 판매시 백미에 잡곡을 일정비율 이상 섞어야 했고, 쌀을 주 재료로 하는 몇몇 음식은 대체 재료를 찾지 못하면 만들수가 없었다.(대표적으로 술) 음식점에서는 백미에 잡곡을 일정비율 이상 섞어서 조리해야 했고, 관공서 구내식당에서는 백미가 자취를 감추었다.<ref>[http://news.joins.com/article/1185973  혼식장려 강화], 중앙일보, 1969.01.24.</ref> 또한 각종 캠페인을 통해 2일 1분식, 쌀 3알에 보리 1알 등 혼식 장려에 힘썼다.

2017년 11월 20일 (월) 05:26 판

  • 混食

개요

백미잡곡을 섞어 먹거나, 분식을 백미 대신 먹는 것.

일제강점기때에는 일본에 쌀 퍼다주느라 이 없어서, 해방 이후에는 쌀 생산량이 모자라서 백미는 항상 품귀현상을 겪었다. 정부는 막대한 외화를 들여 해외에서 쌀을 수입하는 것 보다는 국민이 쌀을 덜 먹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백미보다 잡곡, 밀가루의 영양소가 풍부해 식생활을 개선해야 한다는 취지하에 혼식을 장려했다.

미곡 판매상은 곡물 판매시 백미에 잡곡을 일정비율 이상 섞어야 했고, 쌀을 주 재료로 하는 몇몇 음식은 대체 재료를 찾지 못하면 만들수가 없었다.(대표적으로 술) 음식점에서는 백미에 잡곡을 일정비율 이상 섞어서 조리해야 했고, 관공서 구내식당에서는 백미가 자취를 감추었다.[1] 또한 각종 캠페인을 통해 2일 1분식, 쌀 3알에 보리 1알 등 혼식 장려에 힘썼다.

도태

수십년 동안 유지된 혼식 장려는 70년대 초부터 쌀 가격이 안정화되자 국민들에게 외면받았으며, 73년도에는 자원 파동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밀 가격이 올라 분식은 더 이상 장려할 수 없게 되었다.

음식점의 혼식 의무는 8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나, 식단 서구화로 쌀 소비량이 줄면서 쌀 생산량 증가로 쌀을 아껴야 될 이유가 없게 되어 90년대가 넘어가면서 혼식 의무는 사라졌고, 도리어 쌀이 남아돈다는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