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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蒹. 이명은 허혁(許赫).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의병장 [[허위]]의 형이다. | 許蒹. 이명은 허혁(許赫).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의병장 [[허위 (1854년)|허위]]의 형이다. | ||
== 생애 == | == 생애 == | ||
허겸은 1851년 10월 23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허조(許祚)와 부인 진성 이씨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고, [[을사오적]]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제 경찰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어 몇달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동지 400여 명을 규합하여 경기도 연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섰다. | 허겸은 1851년 10월 23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허조(許祚)와 부인 진성 이씨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고, [[을사오적]]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제 경찰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어 몇달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동지 400여 명을 규합하여 경기도 연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섰다. | ||
그러나 의병 활동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그는 1912년 [[허위]]의 유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여 [[김동삼]], [[유인석]] 등과 함께 중어학원(中語學院)을 개설하여 한중 친선 및 한족의 이익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통화현 합니하에서 경학사(耕學社)를 계승하여 만주로 이주한 한인의 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초대 단장을 맡아 민생·교육·군사 등의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 그러나 의병 활동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그는 1912년 [[허위 (1854년)|허위]]의 유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여 [[김동삼]], [[유인석]] 등과 함께 중어학원(中語學院)을 개설하여 한중 친선 및 한족의 이익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통화현 합니하에서 경학사(耕學社)를 계승하여 만주로 이주한 한인의 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초대 단장을 맡아 민생·교육·군사 등의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 ||
1918년 음력 12월에는 만주와 노령의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이 참여하여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 뒤 1922년에 부하 30여 명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동대문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으며, 출옥 후에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1939년 10월 21일 지린성 주하현 하동에서 병사했다. | 1918년 음력 12월에는 만주와 노령의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이 참여하여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 뒤 1922년에 부하 30여 명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동대문경찰서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으며, 출옥 후에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1939년 10월 21일 지린성 주하현 하동에서 병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