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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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대 연도 = 1957-1971
| 국대 연도 = 1957-1971
| 국대 소속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 국대 소속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 국대 경기 (득점) = 92<ref>공식적으로는 91경기가 맞다. 2001년 FIFA가 1968년의 브라질 vs FIFA 올스타 경기를 A매치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인데 당연히 브라질 축구협회(CBD)는 기록을 수정하지 않았으며 CBD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92경기로 기록하고 있다.</ref> (77)
| 국대 경기 (득점) = 92<ref>공식적으로는 91경기가 맞다. 2001년 FIFA가 1968년 브라질 vs FIFA 올스타 경기를 A매치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인데 당연히 브라질 축구협회(CBD)는 기록을 수정하지 않았으며 CBD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92경기로 기록하고 있다.</ref> (77)
| 감독 연도 =  
| 감독 연도 =  
| 감독 클럽 =  
| 감독 클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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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럽 경력 ==
== 클럽 경력 ==
=== [[산투스 FC|산투스]](1956-1974) ===
=== [[산투스 FC|산투스]](1956-1974) ===
처음에는 여러 아마추어 클럽을 거치다가 아버지 돈지뉴가 뛰었던 바우루라는 클럽의 유스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펠레를 지도한 바우지마르 지 브리투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산투스에 입단시켰고 15살의 나이로 프로계약을 맺고 데뷔까지 하게 된다.<ref>단 공식대회는 아니었고 친선경기였다.</ref> 1957년에 펠레는 16살의 나이로 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해 상 파울루와 히우 지 자네이루의 주(州)간 교류전이었던 토흐네이우 히우-상 파울루(이하 RSPS)에서 9경기 5득점을 기록했다. 상 파울루 주(州)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이하 SPS)에서는 14경기 19득점으로 득점왕, 상위스플릿에서도 15경기 17득점을 기록했으며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처음에는 여러 아마추어 클럽을 거치다가 아버지 돈지뉴가 뛰었던 바우루라는 클럽의 유스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펠레를 지도한 바우지마르 지 브리투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산투스에 입단시켰고 15살 때 프로계약을 맺고 데뷔까지 하게 된다.<ref>단 공식대회는 아니었고 친선경기였다.</ref> 1957년에 펠레는 16살 때 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해 상 파울루와 히우 지 자네이루의 주(州)간 교류전이었던 토흐네이우 히우-상 파울루(이하 RSPS)에서 9경기 5득점을 기록했다. 상 파울루 주(州)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이하 SPS)에서는 14경기 19득점으로 득점왕, 상위스플릿에서도 15경기 17득점을 기록했으며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1958 FIFA 월드컵]]에서 전설을 세운 뒤 SPS에서 38경기 58득점으로 팀의 우승과 득점왕을 거머쥐었는데 역대 최다득점 기록임은 물론이고 지금은 주리그의 경기 수가 줄었기 때문에 사실상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이다.<ref>애초에 30경기씩 뛰던 시절에도 40골 넘겨본 건 펠레뿐이다.</ref> 1959년에 RSPS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후 참가한 대회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신다. SPS에서는 [[파우메이라스]]에게 밀려서 준우승에 그쳤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이하 CP) 참가팀을 정하기 위해 생긴 전국 토너먼트 타사 브라질(이하 TB)에서는 결승전에서 바히아와 재경기 끝에 패배했다.<ref>1승 1패였고 4:3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준이라면 산투스의 우승이었겠지만 당시에는 승패 동률이면 그냥 재경기였다.</ref> 한편 이 무렵에는 비시즌 기간에 국제 친선경기가 많았는데 산투스는 적극적으로 국제 투어를 돌았고 펠레는 1959년에 처음으로 100골을 기록했다.<ref>펠레의 어마어마한 골기록에 거품이 껴있다는 건 이런 친선경기를 두고 나온 말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제경기라고는 몇경기 되지 않는 대륙대회와 이런 친선경기뿐이었기 때문에 비록 비공식경기라 하더라도 많은 화제가 되곤 했다.</ref>
[[1958 FIFA 월드컵]]에서 전설을 세운 뒤 SPS에서 38경기 58득점으로 우승과 득점을 거머쥐었는데 역대 최다득점 기록임은 물론이고 지금은 주리그 경기 수가 줄었기 때문에 사실상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ref>애초에 30경기씩 뛰던 시절에도 40골 넘겨본 건 펠레뿐이다.</ref> 1959년에 RSPS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후 참가한 대회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신다. SPS에서는 [[파우메이라스]]에게 밀려서 준우승에 그쳤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이하 CP) 참가팀을 정하기 위해 생긴 전국 토너먼트 타사 브라질(이하 TB)에서는 결승전에서 바히아와 재경기 끝에 패배했다.<ref>1승 1패였고 4:3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준이라면 산투스가 우승했겠지만 당시에는 승패 동률이면 그냥 재경기였다.</ref> 한편 이 무렵에는 비시즌 기간에 국제 친선경기가 많았는데 산투스는 적극적으로 국제 투어를 돌았고 펠레는 1959년에 처음으로 100골을 기록했다.<ref>펠레의 어마어마한 골기록에 거품이 껴있다는 건 이런 친선경기를 두고 나온 말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제경기라고는 몇경기 되지 않는 대륙대회와 이런 친선경기뿐이었기 때문에 비록 비공식경기라 하더라도 많은 화제가 되곤 했다.</ref>


1960년에는 부상 때문에 평이한 시즌을 보냈지만<ref>어디까지나 펠레 기준이다. RSPS는 3경기 출장에 그쳤다지만 SPS에서 30골로 우승+득점왕이었다.</ref> 1961년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달린다. RSPS-SPS-TB 3개의 중요 대회에서 모두 경기당 1골 이상을 기록하며 공식경기 38경기 62득점을 기록했고 SPS와 TB에서는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친선경기를 합치면 커리어 최다득점인 110골. 1962년에는 RSPS를 생략해버렸고 [[1962 FIFA 월드컵|월드컵]]에서도 부상 때문에 구경만 하며 상반기를 날려먹었지만 후반기에 그야말로 제대로 버닝했다. SPS와 TB는 물론이고 CP와 [[인터콘티넨탈컵]]까지 우승하며 4관왕에 오른다. 결승전에서 꺾었던 팀은 [[가힌샤]]가 이끄는 [[보타포구 FR|보타포구]], CP 2연패의 [[CA 페냐롤|페냐롤]], 유러피언컵 2연패의 [[SL 벤피카|벤피카]]였다. TB와 CP는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각각 2골씩 넣었고, 인터콘티넨털컵은 2경기 5득점(...) <s>[[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s>
1960년에는 부상 때문에 평이한 시즌을 보냈지만<ref>어디까지나 펠레 기준이다. RSPS는 3경기 출장에 그쳤다지만 SPS에서 30골로 우승+득점왕이었다.</ref> 1961년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달린다. RSPS-SPS-TB 3개 중요 대회에서 모두 경기당 1골 이상을 기록하며 공식경기 38경기 62득점을 기록했고 SPS와 TB에서는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친선경기를 합치면 커리어 최다득점인 110골. 1962년에는 RSPS를 생략해버렸고 [[1962 FIFA 월드컵|월드컵]]에서도 부상 때문에 구경만 하며 상반기를 날려먹었지만 후반기에 그야말로 제대로 버닝했다. SPS와 TB는 물론이고 CP와 [[인터콘티넨탈컵]]까지 우승하며 4관왕에 오른다. 결승전에서 꺾었던 팀은 [[가힌샤]]가 이끄는 [[보타포구 FR|보타포구]], CP 에서 2연패를 기록한 [[CA 페냐롤|페냐롤]], 유러피언컵에서 2연패를 기록한 [[SL 벤피카|벤피카]]였다. TB와 CP는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각각 2골씩 넣었고, 인터콘티넨털컵은 2경기 5득점(...) <s>[[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s>


1963년에는 RSPS에서 우승과 득점왕을 차지했고 SPS는 부상 때문에 30경기 중 19경기밖에 못 나와 3위에 그치지만 득점왕을 차지했다. <s>1/3 정도는 접어줘도 득점왕</s> 이어지는 남은 3개대회는 부상이 없었기 때문에 <s>당연히</s> 전부 우승했다.<ref>대신 인터콘티넨털컵은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3경기 중 1경기밖에 안 뛰었다. 하지만 2골(...)</ref> 1964년에는 부상 때문에 경기를 많이 빼먹어 공식경기 출장이 31경기에 불과했으며 특히 CP는 아예 나가지도 못한채 팀이 4강에서 탈락해버렸다. 그래도 RSPS-SPS-TB 우승을 차지했으며<ref>RSPS는 [[보타포구 FR|보타포구]]와 공동우승.</ref> <s>당연히</s> 득점왕도 2개 챙겼다. <s>참 쉽죠?</s> 이듬해에는 RSPS는 팀이 꼴찌했으나 그래도 7경기 5골을 기록했고 SPS와 TB는 또 우승. CP는 우승팀 페냐롤과의 혈투 끝에 4강에서 떨어지지만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득점왕을 거머쥐었다.<ref>이후 브라질 축구협회의 참가거부, 산투스의 자체적인 포기 등으로 인해 펠레는 다시는 CP에서 뛰지 못했다.</ref>
1963년에는 RSPS에서 우승과 득점왕을 차지했고 SPS는 부상 때문에 30경기 중 19경기밖에 못 나와 3위에 그치지만 득점왕을 차지했다. <s>1/3 정도는 접어줘도 득점왕</s> 이어지는 남은 3개대회는 부상이 없었기 때문에 <s>당연히</s> 전부 우승했다.<ref>대신 인터콘티넨털컵은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3경기 중 1경기밖에 안 뛰었다. 하지만 2골(...)</ref> 1964년에는 부상 때문에 경기를 많이 빼먹어 공식경기 출장이 31경기에 불과했으며 특히 CP는 아예 나가지도 못한채 팀이 4강에서 탈락해버렸다. 그래도 RSPS-SPS-TB 우승을 차지했으며<ref>RSPS는 [[보타포구 FR|보타포구]]와 공동우승.</ref> <s>당연히</s> 득점왕도 2개 챙겼다. <s>참 쉽죠?</s> 이듬해에는 RSPS는 팀이 꼴찌했으나 그래도 7경기 5골을 기록했고 SPS와 TB는 또 우승. CP는 우승팀 페냐롤과 혈투를 벌인 끝에 4강에서 떨어지지만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득점왕을 거머쥐었다.<ref>이후 브라질 축구협회가 참가를 거부하고 산투스가 자체적으로 포기하는 등 여러 악재가 겹쳐 펠레는 다시는 CP에서 뛰지 못했다.</ref>


그러나 1966년부터 펠레와 산투스는 정상에서 내려오게 된다. 축구황제의 대관식으로 여겨졌던 [[1966 FIFA 월드컵]]에서 끔찍한 살인태클로 심각한 부상만 당하고 떨어졌으며, 이 여파로 클럽 커리어가 죄다 꼬여버린 것. 월드컵 이전에 있었던 RSPS는 우승했다지만 펠레는 1경기도 뛰지 않았으며, 월드컵 이후에 열린 SPS-TB는 둘 다 놓쳤는데 특히 SPS 득점왕 10연패에도 실패했다. <s>잠깐 10연패가 이상한 거 아냐?</s> 이후 펠레는 과거처럼 압도적인 제왕으로 군림하지 못했으며 언론으로부터 '왕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펠레니까 가능한 평가인데 1969년까지 SPS에서 64경기 60득점, RSPS와 TB를 대체한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에서는 43경기 32득점을 기록했다. <s>진짜 끝난 거 맞아?</s> 그러나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1970 FIFA 월드컵]]으로 자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보여줬으나 혹사와 부상으로 전성기가 끝난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1973년의 마지막 불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자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
그러나 1966년부터 펠레와 산투스는 정상에서 내려오게 된다. 축구황제대관식으로 여겨졌던 [[1966 FIFA 월드컵]]에서 끔찍한 살인태클로 심각한 부상만 당하고 떨어졌으며, 이 여파로 클럽 커리어가 죄다 꼬여버린 것. 월드컵 이전에 있었던 RSPS는 우승했다지만 펠레는 1경기도 뛰지 않았으며, 월드컵 이후에 열린 SPS-TB는 둘 다 놓쳤는데 특히 SPS 득점왕 10연패에도 실패했다. <s>잠깐 10연패가 이상한 거 아냐?</s> 이후 펠레는 과거처럼 압도적인 제왕으로 군림하지 못했으며 언론으로부터 '왕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펠레니까 가능한 평가인데 1969년까지 SPS에서 64경기 60득점, RSPS와 TB를 대체한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에서는 43경기 32득점을 기록했다. <s>진짜 끝난 거 맞아?</s> 그러나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1970 FIFA 월드컵]]으로 자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보여줬으나 혹사와 부상으로 전성기가 끝난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1973년에 태운 마지막 불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


=== 뉴욕 코스모스(1975-1977) ===
=== 뉴욕 코스모스(1975-1977) ===
비록 축구계에서 은퇴하긴 했지만 펠레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여전했다.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축구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펠레는 복귀를 결정했고, 뉴욕 코스모스와 계약을 체결한다. 축구 전파는 허울뿐인 명분이고 실제로는 돈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펠레의 존재로 인해 미국축구가 많은 화제를 불러온 것도 사실이었다. 올스타로 뽑히는 등 3시즌 동안 NASL의 간판스타로 활동했고 마지막 시즌에는 우승도 차지했다. 이 우승 이후 1977년 10월 산투스와 코스모스의 친선경기를 끝으로 완전히 은퇴했으며 이 경기에서 직접프리킥으로 마지막 골을 넣었다.
비록 축구계에서 은퇴하긴 했지만 펠레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여전했다.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축구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펠레는 복귀를 결정했고, 뉴욕 코스모스와 계약을 체결한다. 축구 전파는 허울뿐인 명분이고 실제로는 돈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펠레로 인해 미국축구가 많은 화제를 불러온 것도 사실이었다. 올스타로 뽑히는 등 3시즌 동안 NASL 간판스타로 활동했고 마지막 시즌에는 우승도 차지했다. 이 우승 이후 1977년 10월 산투스와 코스모스 간 친선경기를 끝으로 완전히 은퇴했으며 이 경기에서 직접 프리킥으로 마지막 골을 넣었다.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 경력 ==
1957년에 부활한 로카컵<ref>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교류전으로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의 이름에서 따왔다. 현재 두 국가가 맞붙는 슈퍼클라시코는 로카컵을 전신으로 한다.</ref>에서 데뷔했으며 A매치 최연소 득점기록을 세웠다. [[1958 FIFA 월드컵]]을 앞둔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정작 대회가 시작됐을 때는 무릎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펠레가 모습을 드러낸 건 3차전 소련전으로 패할 경우 탈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힌샤]] 역시 이 경기가 월드컵 데뷔전이었으며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두번째 경기이기도 했다.<ref>펠레와 가힌샤가 같이 뛴 경기에서 브라질은 28승 4무를 기록했다. <s>가힌샤 하나만으로도 49경기 연속 무패였는데?</s></ref> 펠레는 이 경기로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출장기록을 갈아치웠으며<ref>이 기록은 1982년에 북아일랜드의 [[노먼 화이트사이드]]에 의해 경신되었다.</ref> [[바바]]의 2번째 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8강에서는 웨일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4강 프랑스전에서는 후반에만 3골을 몰아넣으며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달성했다. 그리고 개최국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도 2골과 함께 우승을 차지해 축구계의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결승전에서 넣은 첫번째 골은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1957년에 부활한 로카컵<ref>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간 교류전으로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의 이름에서 따왔다. 현재 두 국가가 맞붙는 슈퍼클라시코는 로카컵을 전신으로 한다.</ref>에서 데뷔했으며 A매치 최연소 득점기록을 세웠다. [[1958 FIFA 월드컵]]을 앞둔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정작 대회가 시작됐을 때는 무릎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펠레가 모습을 드러낸 건 3차전 소련전으로 패할 경우 탈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힌샤]] 역시 이 경기가 월드컵 데뷔전이었으며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두번째 경기이기도 했다.<ref>펠레와 가힌샤가 같이 뛴 경기에서 브라질은 28승 4무를 기록했다. <s>가힌샤 하나만으로도 49경기 연속 무패였는데?</s></ref> 펠레는 이 경기로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출장기록을 갈아치웠으며<ref>이 기록은 1982년에 북아일랜드의 [[노먼 화이트사이드]]에 의해 경신되었다.</ref> [[바바]]의 2번째 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이 8강으로 진출하였다. 8강에서는 웨일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4강 프랑스전에서는 후반에만 3골을 몰아넣으며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달성했다. 그리고 개최국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도 2골과 함께 우승을 차지해 축구계의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결승전에서 넣은 첫번째 골은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1959년에는 처음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ref>정확히는 코파 아메리카의 전신인 남미선수권</ref>에 참여했는데 팀은 무패에 득점왕과 MVP를 석권하지만 준우승에 그쳤다.<ref>리그제였고 역시 무패에 승점 1점이 앞선 아르헨티나가 우승했다.</ref> 당시에는 대회가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운영되지 않았고 브라질은 2진급 선수를 내보내거나 아예 불참하기도 했다. 덕분에 펠레로서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참가였고, 코파 아메리카는 펠레가 브라질에서 뛰는 동안 우승해보지 못한 유일한 메이저대회로 남았다. 1960년에 타사 두 아틀란치쿠(아틀란틱 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나 1961년에는 A매치를 뛰지 않았다. 1962년이 되자 [[1962 FIFA 월드컵|월드컵]]을 앞두고 계속 득점포를 가동하며 본좌 등극을 예고했으나<ref>파라과이, 포르투갈, 웨일스를 상대로 6경기 7득점</ref> 정작 대회가 시작되자 부상으로 구경만 해야했다. 최종기록은 2경기 1득점 1도움. 펠레의 자리는 아마리우두가 메꿨으며 결국 1962년의 왕좌는 펠레가 아니라 그의 파트너이자 라이벌인 가힌샤가 차지했다.
1959년에는 처음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ref>정확히는 코파 아메리카의 전신인 남미선수권</ref>에 참여했는데 팀은 무패에 득점왕과 MVP를 석권하지만 준우승에 그쳤다.<ref>리그제였고 역시 무패에 승점 1점이 앞선 아르헨티나가 우승했다.</ref> 당시에는 대회가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운영되지 않았고 브라질은 2진급 선수를 내보내거나 아예 불참하기도 했다. 덕분에 펠레로서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참가였고, 코파 아메리카는 펠레가 브라질에서 뛰는 동안 우승해보지 못한 유일한 메이저대회로 남았다. 1960년에 타사 두 아틀란치쿠(아틀란틱 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나 1961년에는 A매치를 뛰지 않았다. 1962년이 되자 [[1962 FIFA 월드컵|월드컵]]을 앞두고 계속 득점포를 가동하며 본좌 등극을 예고했으나<ref>파라과이, 포르투갈, 웨일스를 상대로 6경기 7득점</ref> 정작 대회가 시작되자 부상으로 구경만 해야했다. 최종기록은 2경기 1득점 1도움. 펠레의 자리는 아마리우두가 메꿨으며 결국 1962년의 왕좌는 펠레가 아니라 그의 파트너이자 라이벌인 가힌샤가 차지했다.


그래도 펠레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셀레상]]에이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1964년의 타사 다스 나소이스<ref>브라질 축구협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브라질,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포르투갈이 참여한 대회로 월드컵의 전초전으로 여겨졌다.</ref>에 참여했으며 월드컵 직전까지 꾸준히 활약했다. 특히 [[1966 FIFA 월드컵]]은 그야말로 펠레를 위한 대회처럼 보였였다. 1962년과는 달리 1966년의 펠레는 클럽에서 모든 걸 다 이룬 상태였으며 셀레상의 멤버도 화려해서 4년 전에 이루지 못한 화룡점정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ref>비록 [[지지]]는 없다지만 가힌샤를 비롯해 [[지우마르]], [[자우마 산투스]] 등의 베테랑이 남아있었고, [[자이르지뉴]], [[지르송]], [[토스탕]] 등의 젊은 피도 합류했었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의 선수였던 펠레가 있었으니 당연히 강력한 우승후보일 수밖에 없었다.</ref> 개막전인 불가리아전에서 프리킥으로 선제결승골을 넣고 최초의 3연속 월드컵 득점 기록을 세우면서 첫 단추를 잘 꿰나 했으나 거친 태클로 인해 부상을 당했고, 이로 인해 2경기 헝가리전은 결장했다. 펠레 없이 헝가리에게 패배한 브라질은 탈락 위기에 놓였고, 비센치 페올라 감독은 포르투갈을 상대로 선발 11명 중 자이르지뉴를 제외한 10명을 모두 갈아치우고 부상중이던 펠레를 출전시키는 초강수를 둔다. 그러나 수비불안으로 브라질은 무너졌고 펠레는 거친 태클 속에서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불가리아전이 우스워보일 정도로 포르투갈전은 살인태클의 연속이었는데 특히 주앙 모라이스의 태클은 월드컵 최악의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https://www.youtube.com/watch?v=9OtnR06Z3EY 1:28부터. 이 끔찍한 태클로 인해 펠레는 오른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뛰어야 했다.<ref>당시에는 선수교체 제도가 없었고 0:2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응급처치만 받은 채 뛰었던 것. 선수교체 제도는 1970년부터 도입되었는데 펠레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ref><ref>놀랍게도 이 태클에도 불구하고 모라이스는 퇴장당하지 않았는데 당시 주심이던 조지 맥케이브는 이 일로 남은 경기 심판에서 제외되었다.</ref> 결국 브라질은 포르투갈에게 패배했고 분노에 찬 펠레는 다시는 월드컵에서 뛰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그의 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그렇게 브라질도 월드컵에서 탈락하고 말았다.<ref>한편 브라질의 부진이 펠레의 부재 때문이었는가는 논란거리 중 하나다.</ref>
그래도 펠레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셀레상]] 에이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1964년 타사 다스 나소이스<ref>브라질 축구협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브라질,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포르투갈이 참여한 대회로 월드컵의 전초전으로 여겨졌다.</ref>에 참여했으며 월드컵 직전까지 꾸준히 활약했다. 특히 [[1966 FIFA 월드컵]]은 그야말로 펠레를 위한 대회처럼 보였였다. 1962년과는 달리 1966년 펠레는 클럽에서 모든 걸 다 이룬 상태였으며 셀레상 멤버도 화려해서 4년 전에 이루지 못한 화룡점정을 달성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ref>비록 [[지지]]는 없다지만 가힌샤를 비롯해 [[지우마르]], [[자우마 산투스]] 같은 베테랑이 남아있었고, [[자이르지뉴]], [[지르송]], [[토스탕]] 같은 젊은 피도 합류했었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였던 펠레가 있었으니 당연히 강력한 우승후보일 수밖에 없었다.</ref> 개막전인 불가리아전에서 프리킥으로 선제결승골을 넣고 최초로 3연속 월드컵 득점 기록을 세우면서 첫 단추를 잘 꿰나 했으나 거친 태클로 인해 부상을 당했고, 이로 인해 2경기 헝가리전은 결장했다. 펠레 없이 헝가리에게 패배한 브라질은 탈락 위기에 놓였고, 비센치 페올라 감독은 포르투갈을 상대로 선발 11명 중 자이르지뉴를 제외한 10명을 모두 갈아치우고 부상중이던 펠레를 출전시키는 초강수를 둔다. 그러나 수비불안으로 브라질은 무너졌고 펠레는 거친 태클 속에서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불가리아전이 우스워보일 정도로 포르투갈전은 살인태클이 연속으로 일어났는데 특히 주앙 모라이스의 태클은 월드컵 최악의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https://www.youtube.com/watch?v=9OtnR06Z3EY 1:28부터. 이 끔찍한 태클로 인해 펠레는 오른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뛰어야 했다.<ref>당시에는 선수교체 제도가 없었고 0:2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응급처치만 받은 채 뛰었던 것. 선수교체 제도는 1970년부터 도입되었는데 펠레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ref><ref>놀랍게도 이 태클에도 불구하고 모라이스는 퇴장당하지 않았는데 당시 주심이던 조지 맥케이브는 이 일로 남은 경기 심판에서 제외되었다.</ref> 결국 브라질은 포르투갈에게 패배했고 분노에 찬 펠레는 다시는 월드컵에서 뛰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그의 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그렇게 브라질도 월드컵에서 탈락하고 말았다.<ref>한편 브라질이 부진한 이유가 펠레가 빠졌기 때문이었는가는 논란거리 중 하나다.</ref>


1969년 여름부터 월드컵 예선이 시작되었는데 펠레 역시 당연히 소집되었다.<ref>월드컵 이후 국가대표팀 경기를 아예 안 뛴 걸로 알려져있지만 1968년부터 A매치를 뛰고 있었다.</ref>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계속되는 설득으로 인해 결국 은퇴를 번복하고 [[1970 FIFA 월드컵]]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지역예선에서 파라과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와 같은 조가 된 브라질은 6승 23득 2실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으로 본선 티켓을 따냈다. 왕의 귀환이 다가오자 축구계가 흥분에 빠졌다.
1969년 여름부터 월드컵 예선이 시작되었는데 펠레 역시 당연히 소집되었다.<ref>월드컵 이후 국가대표팀 경기를 아예 안 뛴 걸로 알려져있지만 1968년부터 A매치를 뛰고 있었다.</ref>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계속되는 설득으로 인해 결국 은퇴를 번복하고 [[1970 FIFA 월드컵]]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지역예선에서 파라과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와 같은 조가 된 브라질은 6승 23득 2실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으로 본선 티켓을 따냈다. 왕의 귀환이 다가오자 축구계가 흥분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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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커]] 1970월드컵 특별호에서 언급된 펠레. 과연 펠레가 지난 2번의 좌절을 딛고 정상에 오를지가 축구계 최대의 화두였다.
[[키커]] 1970월드컵 특별호에서 언급된 펠레. 과연 펠레가 지난 좌절을 딛고 정상에 오를지가 축구계에서 제일 큰 화두였다.


브라질은 잉글랜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함께 3조에 속했는데 1970년의 3조는 흔히 말하는 [[죽음의 조]]의 시초로 알려져있다.<ref>독일의 키커는 [[분데스리가]] 감독 18인에게 결승 대진과 복병을 물었는데 13명이 브라질, 7명이 잉글랜드를 결승 후보로 뽑았으며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는 다크호스로 꼽혔다. </ref> 펠레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고, 잉글랜드전에서는 자이르지뉴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ref>비록 골은 아니지만 펠레의 헤딩을 [[고든 뱅크스]]가 막아낸 장면은 월드컵 역대 최고의 선방 중 하나로 꼽힌다.</ref> 루마니아전에서도 선제골과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은 3승으로 조 1위를 차지한다.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돌풍의 팀 페루였으나 브라질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펠레는 결승골인 토스탕의 3번째 골을 어시스트했고, 브라질은 4강에서 숙적 우루과이를 만났다. [[히벨리누]]의 3번째 골을 어시스트했고 비록 골은 아니지만 [[라디슬라오 마수르키비치]]를 상대로 전설이 된 명장면을 하나 남겼다. https://www.youtube.com/watch?v=-UzRsvCsC4c<ref>잘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자면 공을 터치한 게 아니라 일부러 흘려서 골키퍼를 속인 것.</ref>
브라질은 잉글랜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함께 3조에 속했는데 1970년 3조는 흔히 말하는 [[죽음의 조]]의 시초로 알려져있다.<ref>독일의 키커는 [[분데스리가]] 감독 18인에게 결승 대진과 복병을 물었는데 13명이 브라질, 7명이 잉글랜드를 결승 후보로 뽑았으며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는 다크호스로 꼽혔다. </ref> 펠레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고, 잉글랜드전에서는 자이르지뉴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ref>비록 골은 아니지만 펠레의 헤딩을 [[고든 뱅크스]]가 막아낸 장면은 월드컵 역대 최고의 선방 중 하나로 꼽힌다.</ref> 루마니아전에서도 선제골과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은 3승으로 조 1위를 차지한다.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돌풍의 팀 페루였으나 브라질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펠레는 결승골인 토스탕의 3번째 골을 어시스트했고, 브라질은 4강에서 숙적 우루과이를 만났다. [[히벨리누]]의 3번째 골을 어시스트했고 비록 골은 아니지만 [[라디슬라오 마수르키비치]]를 상대로 전설이 된 명장면을 하나 남겼다. https://www.youtube.com/watch?v=-UzRsvCsC4c<ref>잘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자면 공을 터치한 게 아니라 일부러 흘려서 골키퍼를 속인 것.</ref>


결승은 쥘리메컵의 영구소장이 걸린 이탈리아와의 대결이었다.<ref>최초의 3회 우승국가에게 우승 트로피인 쥘리메컵의 영구소장 자격을 주기로 했었다.</ref> 펠레는 선제골을 넣은 뒤 2개의 어시스트를 했고 경기는 다소 싱겁게 4:1의 스코어로 끝이 났다.<ref>이탈리아는 4강에서 서독과 '세기의 게임'으로 불리는 120분 혈투를 벌이고 올라왔었다.</ref> 브라질은 최초의 3회 우승팀으로 등극했으며 펠레는 4득점 6도움으로 골든볼 수상자가 되었다.<ref>당시에는 공식적인 골든볼이 없었고 이후에 수여했다.</ref> [[1970 FIFA 월드컵]]은 컬러TV로 중계된 최초의 월드컵이었고 펠레는 전세계의 축구팬들 앞에서 역대 최강의 팀을 이끌고 정상에 오르며 이견의 여지 없는 축구계의 제왕으로 남게 되었다.<ref>펠레의 별명 중 가장 유명한 게 O Rei(왕)이다.</ref> 혹자들은 1970년의 브라질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펠레가 없어도 우승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지만 처음에는 펠레,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토스탕, 지르송 이 5명의 '10번'이 함께 뛰는 것에 대한 우려의 시선이 많았다.<ref>선수들의 구성은 조금 다르지만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카카]], [[아드리아누]]가 함께 뛴 2006년의 브라질을 생각해보라.</ref> 속 빈 강정이 될수도 있었던 것을 펠레가 최전방에서 내려와 게임을 지휘하며 위대한 팀으로 완성시켰고, 마침내 불멸의 업적을 쌓은 것이다. 사실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성기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얘기가 있긴 하다. <s>전 경기 공격포인트를 기록하고 골든볼에 우승까지 했지만 그래도 아쉽다고? 펠레잖아? 아하!</s>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몇 경기를 더 뛰다가 1971년 유고슬라비아와의 친선경기를 끝으로 브라질 대표팀에서 은퇴한다.
결승은 쥘리메컵의 영구소장이 걸린 이탈리아와 벌인 대결이었다.<ref>최초로 3번 우승한 국가에게 우승 트로피인 쥘리메컵의 영구소장 자격을 주기로 했었다.</ref> 펠레는 선제골을 넣은 뒤 어시스트를 2번 했고 경기는 다소 싱겁게 4:1로 끝이 났다.<ref>이탈리아는 4강에서 서독과 '세기의 게임'으로 불리는 120분 혈투를 벌이고 올라왔었다.</ref> 브라질은 최초로 3회 우승팀으로 등극했으며 펠레는 4득점 6도움으로 골든볼 수상자가 되었다.<ref>당시에는 공식적인 골든볼이 없었고 이후에 수여했다.</ref> [[1970 FIFA 월드컵]]은 처음으로 러TV로 중계된 월드컵이었고 펠레는 전 세계 축구팬들 앞에서 역대 최강의 팀을 이끌고 정상에 오르며 이견 없는 축구계의 제왕으로 남게 되었다.<ref>펠레의 별명 중 가장 유명한 게 O Rei(왕)이다.</ref> 혹자들은 1970년 브라질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펠레가 없어도 우승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지만 처음에는 펠레,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토스탕, 지르송 이 5명의 '10번'이 함께 뛰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시선이 많았다.<ref>구성은 조금 다르지만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카카]], [[아드리아누]]가 함께 뛴 2006년 브라질을 생각해보라.</ref> 속 빈 강정이 될수도 있었던 것을 펠레가 최전방에서 내려와 게임을 지휘하며 위대한 팀으로 완성시켰고, 마침내 불멸할 업적을 쌓은 것이다. 사실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성기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얘기가 있긴 하다. <s>전 경기 공격포인트를 기록하고 골든볼에 우승까지 했지만 그래도 아쉽다고? 펠레잖아? 아하!</s>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몇 경기를 더 뛰다가 1971년 유고슬라비아 간 친선경기를 끝으로 브라질 대표팀에서 은퇴한다.


== 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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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코스모스'''
'''뉴욕 코스모스'''
* 북미축구리그(NASL)<ref>현재의 NASL은 MLS의 2부리그지만 당시에는 NASL이 1부리그였다.</ref> : 1977
* 북미축구리그(NASL)<ref>현재 NASL은 MLS의 2부리그지만 당시에는 NASL이 1부리그였다.</ref> : 1977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2015년 6월 25일 (목) 18:04 판

틀:축구선수 정보

축구의 대명사, 축구라는 스포츠를 상징하는 축구의 神
저주의 달인

클럽 경력

산투스(1956-1974)

처음에는 여러 아마추어 클럽을 거치다가 아버지 돈지뉴가 뛰었던 바우루라는 클럽의 유스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펠레를 지도한 바우지마르 지 브리투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산투스에 입단시켰고 15살 때 프로계약을 맺고 데뷔까지 하게 된다.[1] 1957년에 펠레는 16살 때 팀의 주전 자리를 차지해 상 파울루와 히우 지 자네이루의 주(州)간 교류전이었던 토흐네이우 히우-상 파울루(이하 RSPS)에서 9경기 5득점을 기록했다. 상 파울루 주(州)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이하 SPS)에서는 14경기 19득점으로 득점왕, 상위스플릿에서도 15경기 17득점을 기록했으며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1958 FIFA 월드컵에서 전설을 세운 뒤 SPS에서 38경기 58득점으로 우승과 득점을 거머쥐었는데 역대 최다득점 기록임은 물론이고 지금은 주리그 경기 수가 줄었기 때문에 사실상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2] 1959년에 RSPS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만 이후 참가한 대회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신다. SPS에서는 파우메이라스에게 밀려서 준우승에 그쳤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이하 CP) 참가팀을 정하기 위해 생긴 전국 토너먼트 타사 브라질(이하 TB)에서는 결승전에서 바히아와 재경기 끝에 패배했다.[3] 한편 이 무렵에는 비시즌 기간에 국제 친선경기가 많았는데 산투스는 적극적으로 국제 투어를 돌았고 펠레는 1959년에 처음으로 100골을 기록했다.[4]

1960년에는 부상 때문에 평이한 시즌을 보냈지만[5] 1961년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달린다. RSPS-SPS-TB 3개 중요 대회에서 모두 경기당 1골 이상을 기록하며 공식경기 38경기 62득점을 기록했고 SPS와 TB에서는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친선경기를 합치면 커리어 최다득점인 110골. 1962년에는 RSPS를 생략해버렸고 월드컵에서도 부상 때문에 구경만 하며 상반기를 날려먹었지만 후반기에 그야말로 제대로 버닝했다. SPS와 TB는 물론이고 CP와 인터콘티넨탈컵까지 우승하며 4관왕에 오른다. 결승전에서 꺾었던 팀은 가힌샤가 이끄는 보타포구, CP 에서 2연패를 기록한 페냐롤, 유러피언컵에서 2연패를 기록한 벤피카였다. TB와 CP는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각각 2골씩 넣었고, 인터콘티넨털컵은 2경기 5득점(...)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1963년에는 RSPS에서 우승과 득점왕을 차지했고 SPS는 부상 때문에 30경기 중 19경기밖에 못 나와 3위에 그치지만 득점왕을 차지했다. 1/3 정도는 접어줘도 득점왕 이어지는 남은 3개대회는 부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부 우승했다.[6] 1964년에는 부상 때문에 경기를 많이 빼먹어 공식경기 출장이 31경기에 불과했으며 특히 CP는 아예 나가지도 못한채 팀이 4강에서 탈락해버렸다. 그래도 RSPS-SPS-TB 우승을 차지했으며[7] 당연히 득점왕도 2개 챙겼다. 참 쉽죠? 이듬해에는 RSPS는 팀이 꼴찌했으나 그래도 7경기 5골을 기록했고 SPS와 TB는 또 우승. CP는 우승팀 페냐롤과 혈투를 벌인 끝에 4강에서 떨어지지만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득점왕을 거머쥐었다.[8]

그러나 1966년부터 펠레와 산투스는 정상에서 내려오게 된다. 축구황제대관식으로 여겨졌던 1966 FIFA 월드컵에서 끔찍한 살인태클로 심각한 부상만 당하고 떨어졌으며, 이 여파로 클럽 커리어가 죄다 꼬여버린 것. 월드컵 이전에 있었던 RSPS는 우승했다지만 펠레는 1경기도 뛰지 않았으며, 월드컵 이후에 열린 SPS-TB는 둘 다 놓쳤는데 특히 SPS 득점왕 10연패에도 실패했다. 잠깐 10연패가 이상한 거 아냐? 이후 펠레는 과거처럼 압도적인 제왕으로 군림하지 못했으며 언론으로부터 '왕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펠레니까 가능한 평가인데 1969년까지 SPS에서 64경기 60득점, RSPS와 TB를 대체한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에서는 43경기 32득점을 기록했다. 진짜 끝난 거 맞아? 그러나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1970 FIFA 월드컵으로 자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보여줬으나 혹사와 부상으로 전성기가 끝난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1973년에 태운 마지막 불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은퇴를 선언한다.

뉴욕 코스모스(1975-1977)

비록 축구계에서 은퇴하긴 했지만 펠레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여전했다.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축구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펠레는 복귀를 결정했고, 뉴욕 코스모스와 계약을 체결한다. 축구 전파는 허울뿐인 명분이고 실제로는 돈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펠레로 인해 미국축구가 많은 화제를 불러온 것도 사실이었다. 올스타로 뽑히는 등 3시즌 동안 NASL 간판스타로 활동했고 마지막 시즌에는 우승도 차지했다. 이 우승 이후 1977년 10월 산투스와 코스모스 간 친선경기를 끝으로 완전히 은퇴했으며 이 경기에서 직접 프리킥으로 마지막 골을 넣었다.

국가대표 경력

1957년에 부활한 로카컵[9]에서 데뷔했으며 A매치 최연소 득점기록을 세웠다. 1958 FIFA 월드컵을 앞둔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정작 대회가 시작됐을 때는 무릎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펠레가 모습을 드러낸 건 3차전 소련전으로 패할 경우 탈락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힌샤 역시 이 경기가 월드컵 데뷔전이었으며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두번째 경기이기도 했다.[10] 펠레는 이 경기로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출장기록을 갈아치웠으며[11] 바바의 2번째 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이 8강으로 진출하였다. 8강에서는 웨일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웠으며, 4강 프랑스전에서는 후반에만 3골을 몰아넣으며 최연소 해트트릭 기록을 달성했다. 그리고 개최국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도 2골과 함께 우승을 차지해 축구계의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결승전에서 넣은 첫번째 골은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1959년에는 처음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12]에 참여했는데 팀은 무패에 득점왕과 MVP를 석권하지만 준우승에 그쳤다.[13] 당시에는 대회가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운영되지 않았고 브라질은 2진급 선수를 내보내거나 아예 불참하기도 했다. 덕분에 펠레로서는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참가였고, 코파 아메리카는 펠레가 브라질에서 뛰는 동안 우승해보지 못한 유일한 메이저대회로 남았다. 1960년에 타사 두 아틀란치쿠(아틀란틱 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나 1961년에는 A매치를 뛰지 않았다. 1962년이 되자 월드컵을 앞두고 계속 득점포를 가동하며 본좌 등극을 예고했으나[14] 정작 대회가 시작되자 부상으로 구경만 해야했다. 최종기록은 2경기 1득점 1도움. 펠레의 자리는 아마리우두가 메꿨으며 결국 1962년의 왕좌는 펠레가 아니라 그의 파트너이자 라이벌인 가힌샤가 차지했다.

그래도 펠레가 셀레상 에이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1964년 타사 다스 나소이스[15]에 참여했으며 월드컵 직전까지 꾸준히 활약했다. 특히 1966 FIFA 월드컵은 그야말로 펠레를 위한 대회처럼 보였였다. 1962년과는 달리 1966년 펠레는 클럽에서 모든 걸 다 이룬 상태였으며 셀레상 멤버도 화려해서 4년 전에 이루지 못한 화룡점정을 달성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16] 개막전인 불가리아전에서 프리킥으로 선제결승골을 넣고 최초로 3연속 월드컵 득점 기록을 세우면서 첫 단추를 잘 꿰나 했으나 거친 태클로 인해 부상을 당했고, 이로 인해 2경기 헝가리전은 결장했다. 펠레 없이 헝가리에게 패배한 브라질은 탈락 위기에 놓였고, 비센치 페올라 감독은 포르투갈을 상대로 선발 11명 중 자이르지뉴를 제외한 10명을 모두 갈아치우고 부상중이던 펠레를 출전시키는 초강수를 둔다. 그러나 수비불안으로 브라질은 무너졌고 펠레는 거친 태클 속에서 제대로 뛰지도 못했다. 불가리아전이 우스워보일 정도로 포르투갈전은 살인태클이 연속으로 일어났는데 특히 주앙 모라이스의 태클은 월드컵 최악의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https://www.youtube.com/watch?v=9OtnR06Z3EY 1:28부터. 이 끔찍한 태클로 인해 펠레는 오른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뛰어야 했다.[17][18] 결국 브라질은 포르투갈에게 패배했고 분노에 찬 펠레는 다시는 월드컵에서 뛰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그의 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그렇게 브라질도 월드컵에서 탈락하고 말았다.[19]

1969년 여름부터 월드컵 예선이 시작되었는데 펠레 역시 당연히 소집되었다.[20]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계속되는 설득으로 인해 결국 은퇴를 번복하고 1970 FIFA 월드컵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지역예선에서 파라과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와 같은 조가 된 브라질은 6승 23득 2실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으로 본선 티켓을 따냈다. 왕의 귀환이 다가오자 축구계가 흥분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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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커 1970월드컵 특별호에서 언급된 펠레. 과연 펠레가 지난 두 좌절을 딛고 정상에 오를지가 축구계에서 제일 큰 화두였다.

브라질은 잉글랜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와 함께 3조에 속했는데 1970년 3조는 흔히 말하는 죽음의 조의 시초로 알려져있다.[21] 펠레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고, 잉글랜드전에서는 자이르지뉴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22] 루마니아전에서도 선제골과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은 3승으로 조 1위를 차지한다.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돌풍의 팀 페루였으나 브라질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펠레는 결승골인 토스탕의 3번째 골을 어시스트했고, 브라질은 4강에서 숙적 우루과이를 만났다. 히벨리누의 3번째 골을 어시스트했고 비록 골은 아니지만 라디슬라오 마수르키비치를 상대로 전설이 된 명장면을 하나 남겼다. https://www.youtube.com/watch?v=-UzRsvCsC4c[23]

결승은 쥘리메컵의 영구소장이 걸린 이탈리아와 벌인 대결이었다.[24] 펠레는 선제골을 넣은 뒤 어시스트를 2번 했고 경기는 다소 싱겁게 4:1로 끝이 났다.[25] 브라질은 최초로 3회 우승팀으로 등극했으며 펠레는 4득점 6도움으로 골든볼 수상자가 되었다.[26] 1970 FIFA 월드컵은 처음으로 러TV로 중계된 월드컵이었고 펠레는 전 세계 축구팬들 앞에서 역대 최강의 팀을 이끌고 정상에 오르며 이견 없는 축구계의 제왕으로 남게 되었다.[27] 혹자들은 1970년 브라질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펠레가 없어도 우승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지만 처음에는 펠레, 자이르지뉴, 히벨리누, 토스탕, 지르송 이 5명의 '10번'이 함께 뛰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시선이 많았다.[28] 속 빈 강정이 될수도 있었던 것을 펠레가 최전방에서 내려와 게임을 지휘하며 위대한 팀으로 완성시켰고, 마침내 불멸할 업적을 쌓은 것이다. 사실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성기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얘기가 있긴 하다. 전 경기 공격포인트를 기록하고 골든볼에 우승까지 했지만 그래도 아쉽다고? 펠레잖아? 아하!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몇 경기를 더 뛰다가 1971년 유고슬라비아 간 친선경기를 끝으로 브라질 대표팀에서 은퇴한다.

위상

우승 경력

산투스 FC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29] : 1961, 1962, 1963, 1964, 1965, 1968; 준우승 : 1959, 1966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1958, 1960, 1961, 1962, 1964, 1965, 1967, 1968, 1969, 1973; 준우승 : 1957, 1959
  • 토흐네이우 히우-상 파울루 : 1959, 1963, 1964[30], 1966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 1962, 1963
  • 인터콘티넨털컵 : 1962, 1963
  • 인터콘티넨털 슈퍼컵 : 1968-69

뉴욕 코스모스

  • 북미축구리그(NASL)[31] : 1977

브라질

  • 월드컵 : 1958, 1962, 1970
  •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 1959
  • 타사 다스 나소이스; 준우승 : 1964
  • 타사 두 아틀란치쿠 : 1960

수상 경력


펠레의 저주

통산 기록

시즌 클럽 SPS RSPS[36] 전국[37] 대륙 총계 비고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1957 산투스 FC 29 36 9 5 - - - - 38 41
1958 산투스 FC 38 58 8 8 - - - - 46 66
1959 산투스 FC 32 45 7 6 4 2 - - 43 53
1960 산투스 FC 30 33 3 0 - - - - 33 33
1961 산투스 FC 26 47 7 8 5 7 - - 38 62
1962 산투스 FC 26 37 0 0 5 2 6[38] 9[39] 37 48
1963 산투스 FC 19 22 8 14 4 8 5[40] 7[41] 36 51
1964 산투스 FC 21 34 4 3 6 7 0 0 31 44
1965 산투스 FC 30 49 7 5 4 2 7 8 48 64
1966 산투스 FC 14 13 0 0 5 2 - - 19 15
1967 산투스 FC 18 17 - - 14 9 - - 32 26
1968 산투스 FC 21 17 - - 17 11 - - 38 28
1969 산투스 FC 25 26 - - 12 12 - - 37 38
1970 산투스 FC 15 7 - - 13 4 - - 28 11
1971 산투스 FC 19 8 - - 21 1 - - 40 9
1972 산투스 FC 20 9 - - 16 5 - - 36 14
1973 산투스 FC 19 11 - - 30 19 - - 49 30
1974 산투스 FC 10 1 - - 17 9 - - 27 10
종합 브라질 412 470 53 49 173 100 18[42] 24[43] 656 643

각주

  1. 단 공식대회는 아니었고 친선경기였다.
  2. 애초에 30경기씩 뛰던 시절에도 40골 넘겨본 건 펠레뿐이다.
  3. 1승 1패였고 4:3이었기 때문에 지금 기준이라면 산투스가 우승했겠지만 당시에는 승패 동률이면 그냥 재경기였다.
  4. 펠레의 어마어마한 골기록에 거품이 껴있다는 건 이런 친선경기를 두고 나온 말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제경기라고는 몇경기 되지 않는 대륙대회와 이런 친선경기뿐이었기 때문에 비록 비공식경기라 하더라도 많은 화제가 되곤 했다.
  5. 어디까지나 펠레 기준이다. RSPS는 3경기 출장에 그쳤다지만 SPS에서 30골로 우승+득점왕이었다.
  6. 대신 인터콘티넨털컵은 재경기 끝에 우승했는데 3경기 중 1경기밖에 안 뛰었다. 하지만 2골(...)
  7. RSPS는 보타포구와 공동우승.
  8. 이후 브라질 축구협회가 참가를 거부하고 산투스가 자체적으로 포기하는 등 여러 악재가 겹쳐 펠레는 다시는 CP에서 뛰지 못했다.
  9.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간 교류전으로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의 이름에서 따왔다. 현재 두 국가가 맞붙는 슈퍼클라시코는 로카컵을 전신으로 한다.
  10. 펠레와 가힌샤가 같이 뛴 경기에서 브라질은 28승 4무를 기록했다. 가힌샤 하나만으로도 49경기 연속 무패였는데?
  11. 이 기록은 1982년에 북아일랜드의 노먼 화이트사이드에 의해 경신되었다.
  12. 정확히는 코파 아메리카의 전신인 남미선수권
  13. 리그제였고 역시 무패에 승점 1점이 앞선 아르헨티나가 우승했다.
  14. 파라과이, 포르투갈, 웨일스를 상대로 6경기 7득점
  15. 브라질 축구협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브라질,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포르투갈이 참여한 대회로 월드컵의 전초전으로 여겨졌다.
  16. 비록 지지는 없다지만 가힌샤를 비롯해 지우마르, 자우마 산투스 같은 베테랑이 남아있었고, 자이르지뉴, 지르송, 토스탕 같은 젊은 피도 합류했었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였던 펠레가 있었으니 당연히 강력한 우승후보일 수밖에 없었다.
  17. 당시에는 선수교체 제도가 없었고 0:2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응급처치만 받은 채 뛰었던 것. 선수교체 제도는 1970년부터 도입되었는데 펠레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18. 놀랍게도 이 태클에도 불구하고 모라이스는 퇴장당하지 않았는데 당시 주심이던 조지 맥케이브는 이 일로 남은 경기 심판에서 제외되었다.
  19. 한편 브라질이 부진한 이유가 펠레가 빠졌기 때문이었는가는 논란거리 중 하나다.
  20.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팀 경기를 아예 안 뛴 걸로 알려져있지만 1968년부터 A매치를 뛰고 있었다.
  21. 독일의 키커는 분데스리가 감독 18인에게 결승 대진과 복병을 물었는데 13명이 브라질, 7명이 잉글랜드를 결승 후보로 뽑았으며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는 다크호스로 꼽혔다.
  22. 비록 골은 아니지만 펠레의 헤딩을 고든 뱅크스가 막아낸 장면은 월드컵 역대 최고의 선방 중 하나로 꼽힌다.
  23.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자면 공을 터치한 게 아니라 일부러 흘려서 골키퍼를 속인 것.
  24. 최초로 3번 우승한 국가에게 우승 트로피인 쥘리메컵의 영구소장 자격을 주기로 했었다.
  25. 이탈리아는 4강에서 서독과 '세기의 게임'으로 불리는 120분 혈투를 벌이고 올라왔었다.
  26. 당시에는 공식적인 골든볼이 없었고 이후에 수여했다.
  27. 펠레의 별명 중 가장 유명한 게 O Rei(왕)이다.
  28. 구성은 조금 다르지만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카카, 아드리아누가 함께 뛴 2006년 브라질을 생각해보라.
  29. 브라질 챔피언을 의미하는데 본문에도 나오지만 1959년부터 1968년까지는 타사 브라질이라는 주리그 챔피언들의 토너먼트로 우승팀을 정했고, 1967년부터 1970년까지는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라는 리그가 존재했다. 대회가 두 개였던 67년과 68년에는 챔피언이 두 팀 존재했으며 지금과 같은 전국 각지의 클럽들이 참여하는 리그는 1971년부터 시작되었다.
  30. 보타포구와 공동우승
  31. 현재 NASL은 MLS의 2부리그지만 당시에는 NASL이 1부리그였다.
  32. 타사 브라질
  33. 골든볼의 공식적인 시상은 1982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은 소급적용해서 FIFA에서 인정해주고 있다.
  34. 1994년에 있었던 역대 올스타팀, 2002년에 있었던 드림팀에도 선정되었다.
  35. 기자단 투표와 FIFA매거진 독자 투표에서 1위를 했으며 인터넷 투표 1위 마라도나와 공동으로 선정되었다.
  36. 1966년을 끝으로 폐지.
  37. 타사 브라질 + 토흐네이우 호베르투 고미스 페드로자 포함
  38.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39.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40.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41.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42. 인터콘티넨털컵 포함
  43. 인터콘티넨털컵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