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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4일 (토) 16:42 판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5.06.07 (사망 공표 06.11)

영원한 공포 영화의 아이콘.
영화에서는 악역이었으나, 삶에서는 선역을 맡은 인물.
2013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크리스토퍼 프랭크 카란디니 리 경(Sir Christopher Frank Carandini Lee) 1922년 5월 27일2015년 6월 7일.

영국의 前 배우, 前 작가, 前 가수. 악역 연기로 유명하며, 특히 해머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드라큘라 시리즈로 유명해졌다. 이후에도 꾸준히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들과 무게감있는 선역들을 소화해 내며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대배우가 되었다. 장수, 다작한 배우로 유명하다. 그는 생전에 20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IMDB의 바이오그래피에는 "그는 그 세대의 배우 가운데에서 그토록 많은 수의 영화에 출연한 유일할 배우일지도 모른다"고 적혀 있다. [1]유명한 역할로는 1957년 해머 스튜디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1960년대 해머 스튜디오 드라큘라 시리즈에서 드라큘라 백작,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윌리 웡카의 아버지, 스타 워즈 프리퀄 트릴로지에서 두쿠 백작, 반지의 제왕호빗 삼부작에서 사루만 등이 있다. 인격적으로도, 연기자로서의 역량으로도 존경받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

배우가 되기까지

1922년 런던에서 군인 아버지 조프리 트롤로프 리와 유명한 미인이었던 어머니 콘테사 에스텔 마리[2] 슬하에서 태어났다. 형제재매로는 누나 잔드라(Xandra Lee)가 있다. 1926년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린 크리스토퍼 리는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로 이주하여 살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처음으로 연기라는 것을 접해보게 된다. 학교 연극에서 룸펠슈틸츠헨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하필 악역

이후 가족은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재혼을 하게 된다. 재혼의 상대는 나중에 007 소설 시리즈의 작가가 될 이안 플레밍의 삼촌이었다. 인맥보소 한편 크리스토퍼 리는 서머 필즈 학교에서 계속해서 학교 연극에서 연기를 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학교에 후에 대배우가 될 패트릭 맥니가 있어서 주목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한다.

서머 필즈 학교는 대부분의 학생을 이튼으로 보내는 프렙 스쿨이었다. 크리스토퍼 리도 이튼을 가려고 하였으나 그놈의 수학 성적이 떨어져 학비를 더 내야 이튼에 갈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의 양아버지는 비싸진 학비를 견딜 여유가 없었기에 그는 웰링턴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웰링턴 대학에서 그는 라틴, 그리스어 공부 등 고전 공부로 장학금을 받고 생활한다. 그러나 1939년 그의 양아버지가 파산하면서 그는 웰링턴을 떠나게 된다.

그의 누나는 이미 취직을 한 상태였으나, 그는 할 일이 없었다. 누나가 여름휴가로 유럽으로 놀러가면서 그도 유럽으로 건너간다. 여기에서 그는 러시아에서 쫓겨냔 왕공 가문들과 같이 생활하게 된다. 인맥보소 2 그는 누나가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유럽에 머물렀으나, 유럽 전역에 전운이 드리우기 시작하면서 그 역시 영국으로 돌아와 취직을 하게 된다.

세계 2차 대전

비행 장교 크리스토퍼 리. 로마 해방 직후.

크리스토퍼 리는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하여 핀란드 전장으로 향한다. 그는 자원봉사자의 지위였기에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은 채 곧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원래의 일자리에서 일하던 그는 어느 제약회사의 직원으로 이직을 한 후 그 제약회사가 런던 밖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시 방위군(Home Guard)에 지원한다. 1941년 폐렴으로 쓰러진 후, 그는 아버지처럼 육군에서 복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영국 공군에 지원한다.

크리스토퍼 리는 조종사가 되기 위하여 의욕적으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최종 훈련 중 시야 흐릿해지며 두통을 느낀다. 시신경 일부가 손상되었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이로서 리는 조종사로는 더 이상 복무할 수 없게 된다. 리는 비행장을 전전하였으나, 조종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실의에 빠져 있었다. 동료 조종사의 죽음은 그의 실의를 더욱 깊게 했다.

그래도 뭔가 전쟁에 도움이 되고 싶었던 크리스토퍼 리는 영국 왕실 공군 정보 기관(RAF Intelligence)에 지원한다. 조종 장교(Pilot Officer)로 승진된 그는 아프리카 전선에서 비행장 간에 정보를 전달해주고, 폭격 시간을 조율하는 등의 활약을 한다. 이탈리아로 재배치된 이후에는 비행 장교(Flying Officer)로 승진한다. 이후 그는 승진을 거듭했으며, SAS의 전신이 되는 Special Operations Executive, Long Range Desert Patrol에서 근무했다고 알려져 있다.

저는 때때로 SAS와 연관되어 있었지만 저희는 지금까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와 관련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냥 제가 특수 부대(Special Forces)에 있었다고만 말하도록 하죠. 원한다면 더 의미를 부여하세요.[3]

연기자로서

초기

초보 연기자 시절.

종전 후 크리스토퍼 리는 원래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원래 직장에서 봉급을 올려주었으나,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는 자신을 상상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당국은 참전용사들을 대학으로 돌려보내 고전 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는 라틴어를 너무 많이 잊었고, 통금을 지키기 싫다며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백수가 되어 할 일이 없던 크리스토퍼 리에게 사촌 니콜로 카란디니는 "배우가 돼보지 그러니, 크리스토퍼?"라며 배우가 될 것을 제안한다. 배우가 되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 리는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배우되면 굶어죽기 딱 좋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리는 어머니의 친척 가운데에서 배우로 인기를 얻은 사람들이 많다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특히 어머니쪽의 증조할머니였던 마리 카란디니는 오페라 가수로서 유명세를 떨쳤다.

어머니를 설득한 이후 그는 7년 계약으로 '매력학교(Charm School)'라고도 불리는 Company of Youths에 들어가 훈련을 받게 된다. 매력학교는 Rank organisation에서 운영하는 스타 양성소였다. 이곳에서 크리스토퍼 리는 10년 동안 단역과 엑스트라를 전전하며 연기 훈련을 받는다. 초보 배우였던 그에게 가장 방해가 된 것은 195cm에 달하는 그의 키였다고 한다.

저는 거기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 거의 십 년을 보냈네요. 처음에는 저를 보고 배우를 하기에는 너무 키가 크다고 하더군요. 참 어리석은 말이죠. 피아노를 치기에는 너무 키가 작다는 말과 같습니다. "두고 봐라..."라고 생각했죠.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서의 기술을 전혀 몰랐지만, 그 10년 동안 저는 매일 정말 중요한 일 한 가지를 했습니다.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었죠. 그러다 보니, 때가 왔을 때 저는, 참 이상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는 캐릭터(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역)를 연기할 준비가 되어 있더군요.[4]

리는 1952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무명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지인이었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British National Studios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역할을 많이 맡게 된 것이다. 크리스토퍼 리는 1952년 한 해 동안 페어뱅크스의 영화 중 16개에 등장했다. 물랑 루즈에 그가 출연한 것도 이 해였다. 이후 50년대 동안 크리스토퍼 리는 액션 배우로서 조금씩 입지를 넓혀나갔다.

1957~1976: 스타로 부상하다

해머 스튜디오와 만나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 괴물 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리.

1957년은 공포 영화 팬들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피터 쿠싱과 크리스토퍼 리가 처음으로 해머 스튜디오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기 때문이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의 탄생이었다. 이로서 해머 스튜디오가 이끄는 공포 영화의 동의 시대(Bronze Age)가 시작되었다.청동을 떠올리면 안된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리는 괴물 역을, 피터 쿠싱은 프랑켄슈타인 박사 역을 맡았다. 이 둘은 이후 20편 이상의 영화에 공동 출연했으며,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후 리는 원조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던 보리스 칼로프1958년작 "피의 복도"에 같이 출연하기도 했다.

Dracula 1958 c.jpg
드라큘라(1958)에서 크리스토퍼 리와 피터 쿠싱.

1958년, 크리스토퍼 리는 그의 인생 배역(?)이라고 할 만한 드라큘라 배역을 처음으로 맡았다. 드라큘라 (1958년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드라큘라 연기와 피터 쿠싱이 보여준 반 헬싱 연기는 벨라 루고시보리스 칼로프의 뒤를 잇는 새로운 공포 아이콘들이 탄생했음을 알렸다.

1965년, "프린스 오브 다크니스"에서 그는 다시 드라큘라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드라큘라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양이 하악질 하는 소리(...)를 낸다크리스토퍼 리는 원래에는 대사가 있었으나 자신이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사 처리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다만 작가였던 지미 생스터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드라큘라에게는 대사가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영화의 중심은 드라큘라를 부활시키는 과정이며, 드라큘라가 출연하는 시간 자체가 짧았기에 대사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사 없이도 크리스토퍼 리는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며 "드라큘라"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시작으로 후속 드라큘라 영화들에서 드라큘라 백작 본인 대신 백작을 부활시키는 과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서 백작은 점점 평면적이고 의미없는 캐릭터로 변해갔다. 크리스토퍼 리는 드라큘라 역할에 대한 애정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드라큘라 역할을 맡았다. 크리스토퍼 리의 말에 따르면, 해머 스튜디오는 반 애원, 반 협박으로 그를 계속해서 출연시켰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리의 출연료는 계속 올라가는데, 대규모 스튜디오가 아니었던 해머는 제대로 출연료를 줄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크리스토퍼 리 스스로도 "드라큘라" 이미지를 탈피하여 연기 도전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해머 스튜디오는 "당신이 드라큘라 역할을 안 맡아주면 저 사람들은 모두 실업자 신세라고!"를 외치며 그를 억지로 출연시켰다.(...)

대충 이런 과정이었죠. 전화가 울리고 제 에이전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지미 카레라스(해머 스튜디오의 회장)가 전화 했습니다. 또 드라큘라 영화에요." 그리고 제가 말하죠. "집어치워! 드라큘라 영화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지미 카레라스가 발작적인 상태로 저한테 전화를 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짐, 하고 싶지 않아, 해야 할 의무도 없고." "아니, 자네는 이 역할을 맡을 의무가 있어!" 그리고 제가 말했죠. "왜?" 그가 대답하더군요. "이미 자네가 이 역할을 맡는다고 하면서 미국 배급업자한테 영화를 넘겼단 말일세. 이 역할을 맡지 않으면 자네도 잘 아는 사람들이 실직자가 될 것일세!" 심리적 협박이었죠. 그게 제가 그 영화들을 찍은 유일한 이유였습니다.[5]
— 크리스토퍼 리,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그는 드라큘라가 무덤에서 부활했다(Dracula has Risen From the Grave, 1968), 드라큘라의 환생 (1970), 드라큘라의 흉터 (Scars of Dracula, 1970), 드라큘라 A.D. 1972 (1972), 드라큘라 백작과 그의 뱀파이어 신부 (1974) 등 총 일곱 편의 드라큘라 영화에 출연했다. 원래 소설 드라큘라의 팬이었던 크리스토퍼 리였지만, 드라큘라 역할이 그의 배우 경력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1973년 이후에는 드라큘라 역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말년까지도 그를 만나러 가는 사람들에게는 지인들이 "드라큘라 영화들을 언급하지 마세요!"라는 경고를 할 정도로 드라큘라 배역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다.

미이라 (1959)에서의 크리스토퍼 리

그는 드라큘라 이외에도 해머 스튜디오가 제작한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1959년, "미이라"에서 미라 캐리스 역할을 맡았으며, "지킬 박사의 두 얼굴"(The Two Faces of Dr. Jekyll, 1960)에서는 지킬의 아내와 바람을 피는 지킬의 친구 역할을 맡았다. 그 후에는 "라스푸틴:미친 수도승"(Rasputin:The Mad Monk, 1966)에서 라스푸틴 역할을, "배스커빌 가문의 개" (1959)에서는 셜록 홈즈(피터 쿠싱 분)의 형, 마이크로프트 홈즈 역을 맡았다. 1976년, "악마에게 딸을"(To the Devil a Daughter, 1976)을 끝으로 해머 스튜디오가 공포 영화 제작을 중단할 때까지 크리스토퍼 리와 해머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다른 배역들

셜록 홈즈로 분한 크리스토퍼 리.

크리스토퍼 리가 해머 스튜디오 영화에 계속 출연하던 시기에도 그는 더욱 흥미로운 배역을 찾아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악역, 선역을 가리지 않았다.

1959년 "배스커빌 가문의 개"로 시작된 홈즈와 리의 인연은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 해머 스튜디오 영화는 아니었지만 1960년 "셜록 홈즈와 죽음의 목걸이"(Sherlock Holmes and the Deadly Necklace, 1960)에서 직접 셜록 홈즈 역할을 맡았다. 그는 영화 자체는 "가만히 내버려두는게 좋은(A movie well worth leaving alone)" 영화가 되어버렸다고 평했으나, 자신의 셜록 홈즈 연기에는 만족감을 표했다.

참 아쉬운 영화였지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요. 영국 감독과 영국 미술 감독을 데리고 독일에서, 독일 배우들로 영화를 찍는게 아니었습니다. 독일 제작자들이 이런 저런 스토리들을 뒤죽박죽으로 합쳐 놓은 것이 영화를 망쳤다고 생각해요. 제 홈즈 연기는, 제 생각이지만, 제가 연기한 최고의 역할 중 하나였어요. 홈즈가 쓰인 그대로를 표현하려고 했거든요, 참을성 없고, 시비를 잘 걸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그리고 분장을 하고 나니 저는 놀랄 정도로 그와 닮았었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들 해석에서나 외모에서나, 저의 홈즈 연기는 다른 배우들의 연기와 비교해도 홈즈와 정말 유사하다고 말해요.[6]

— 크리스토퍼 리

크리스토퍼 리에게 셜록 홈즈 영화들은 그가 악역만을 맡는 배우에서 탈출하기 시작한 계기였다. "그 영화들 이후로는 배역이 다양해졌지요.[7] 아, 물론 무거운 배역들도 많이 맡았지요. 하지만 앤서니 홉킨스의 말처럼, '저는 인간을 연기하지, 악역을 연기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수많은 영화를 찍는 와중에 소프트코어 포르노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었다. 해리 타워스라는 영화 제작자의 부탁으로 유지니(Eugenie, 1970)라는 스페인 영화에 해설자 역으로 출연했던 것이다. 물론 포르노 영화라는 사실은 모르고 출연한 것이었다. 정사 장면들은 따로 촬영되어 영화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유지니가 포르노 영화라는 사실을 안 후 크리스토퍼 리는 노발대발했다.

저는 그 배역을 맡기로 동의했을 때 그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사드 후작에 대한 영화라고 말해주더군요. 저는 스페인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하루 동안 해설자 배역을 맡았습니다. 붉은색 디너 재킷을 입어야 했어요. 제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옷을 갖춰 입고 있었죠. 딱히 이상하다나 의아한 점은 없어 보였습니다. 친구 한 명이 "너, 올드 콤프턴 거리에서 상영하는 영화에 나오던데, 알고 있어?"라고 말해줬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변태(mackintosh brigade)들이 성인 영화를 보는 곳이었거든요. "웃기지도 않네"라고 대답했죠. 그래서 선글라스랑 스카프로 변장한 다음 그 영화관을 찾았는데 제 이름이 거기에 있더군요. 저는 노발대발했죠! 큰 소동이 있었어요. 제가 그 날 스페인을 떠난 후에 제 뒤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옷을 벗었던 거예요.[8]
푸 만추로 분한 크리스토퍼 리.

물론 해머 스튜디오 밖에서도 이 시기 그의 커리어에서 공포 영화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는 영국과 유럽 본토를 오가며 많은 수의 공포 영화들에 출연했다. 1965년에서 1969년 사이에는 푸 만추 시리즈에서 동양인 분장을 하고 푸 만추 역할을 했으며, "살아 있는 죽은 자의 성" (1964), "사디즘 박사의 고문실" (The Torture Chamber of Dr. Sadism, 1967) 등에 출현했다. I, Monster (1971)년에서는 지킬 박사 역을 맡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영화 중 최고라고 꼽은 "위커 맨" (Wicker Man, 1973)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위커 맨에서 서머아일 경으로 분한 크리스토퍼 리

드라큘라 이미지를 탈피하고 더 재미있는 배역을 찾던 크리스토퍼 리는 작가 안토니 셰퍼와 만나 같이 영화를 만들 것을 약속한다. 감독으로는 로빈 하디가 선임되었다. 셰퍼와 하디는 "오래된 종교"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해머 스튜디오가 주도하던 당시의 공포 영화계에서 매우 색다른 소재였다. 소재를 찾던 중 셰퍼는 자신이 읽은 소설을 떠올린다. 데이비드 피너 작 "Ritual"이었다. 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경찰관이 어느 섬 마을에서 종교 의식으로 여자아이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제보로 수사를 진행한다는 줄거리의 소설이었다. 셰퍼와 리는 15000파운드를 주고 소설의 영화 판권을 구입했다. 소설의 직접 영화화는 힘들 것 같다는 판단 하에 셰퍼는 소설의 기본 줄거리만 남기고 이야기를 새로 작성했다. 그렇게 위커 맨의 대본이 완성되었다. 크리스토퍼 리는 저예산 영화였던 위커 맨의 제작을 돕기 위해 무료로 출연해주었다.

로슈포르 백작으로 분한 크리스토퍼 리

1973년에는 영화 삼총사에서 로슈포르 백작 배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칼싸움 장면에서 피를 보여주고, 등장인물들이 지쳐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액션 영화에서 현실성을 한 단계 높여놓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삼총사 촬영 과정에서 무릎을 다쳤는데, 말년까지도 무릎은 완치되지 않았다. 1989년에 크리스토퍼 리는 다시 로슈포르 백작 역에 복귀했다. 크리스토퍼 리에게 이 영화는 셜로 홈즈 배역과 함께 드라큘라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 영화였다. 이 영화 이후 그가 맡은 배역들을 보면 이는 매우 확연해진다.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1973년 이후 크리스토퍼 리는 공포 영화 배역을 거의 거부하기 시작했다. 73에서 77년 사이 크리스토퍼 리가 맡은 가장 중요한 배역은 007 시리즈 영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의 악당 프란시스코 스카라망가 역할이었다. 007과 크리스토퍼 리의 인연은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크리스토퍼 리의 사촌이자 007 소설 시리즈의 작가 이언 플레밍이 1962년 이미 007 살인번호의 악당 노 박사(Dr.No) 역할을 제안했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리는 쌍수를 들고 이 배역을 환영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리가 배역을 수락했을 때는 이미 영화 제작사에서 조셉 와이즈만과 계약을 체결한 후였다. 결국 1974년이 되어서야 크리스토퍼 리는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바라고 바라던 007 악당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플레밍의 소설에서 그(프란시스코 스카라망가)는 서인도 출신의 깡패에 불과하지만, 영화에서는 매력적이고, 재미있고, 위험하죠. ... 저는 그를 제임스 본드의 어두운 모습처럼 표현했어요.[9]

미국으로의 이주

2000년대: 두쿠와 사루만

죽음

개인사

성우 활동

가수 활동

각주

  1. http://www.imdb.com/name/nm0000489/bio
  2. 당시 그의 어머니는 여러 화가들이 그릴 정도로 미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조각상도 제작되었다!
  3. Sir Christopher Lee interview: 'I’m softer than people think'"I was attached to the SAS from time to time but we are forbidden – former, present, or future – to discuss any specific operations. Let's just say I was in Special Forces and leave it at that. People can read in to that what they like."
  4. The Total Film Interview - Christopher Lee "I was around a long time – nearly ten years. Initially, I was told I was too tall to be an actor. That's a quite fatuous remark to make. It's like saying you're too short to play the piano. I thought, "Right, I'll show you..." At the beginning I didn't know anything about the technique of working in front of a camera, but during those 10 years, I did the one thing that's so vitally important today – I watched, I listened and I learned. So when the time came I was ready... Oddly enough, to play a character who said nothing."
  5. Landis, John (2011). Monsters in the Movies: 100 Years of Cinematic Nightmares. Dorling Kindersley. p. 45. ISBN 978-1-4053-6697-7. 영문 위키백과에서 재인용 후 번역. "The process went like this: The telephone would ring and my agent would say, "Jimmy Carreras [President of Hammer Films] has been on the phone, they've got another Dracula for you." And I would say, "Forget it! I don't want to do another one." I'd get a call from Jimmy Carreras, in a state of hysteria. "What's all this about?!" "Jim, I don't want to do it, and I don't have to do it." "No, you have to do it!" And I said, "Why?" He replied, "Because I've already sold it to the American distributor with you playing the part. Think of all the people you know so well, that you will put out of work!" Emotional blackmail. That's the only reason I did them"
  6. Davies, David Stuart. Holmes of the Movies: The Screen Career of Sherlock Holmes. Bramhall House, 영문 위키백과에서 재인용.
  7. I've never been typcast since
  8. Farndale, Nigel (2011년 2월 12일). "Sir Christopher Lee interview". 런던: The Telegraph. "I had no idea that was what it was when I agreed to the role. I was told it was about the Marquis de Sade. I flew out to Spain for one day's work playing the part of a narrator. I had to wear a crimson dinner jacket. There were lots of people behind me. They all had their clothes on. There didn't seem to be anything peculiar or strange. A friend said: 'Do you know you are in a film in Old Compton Street?' In those days that was where the mackintosh brigade watched their films. 'Very funny,' I said. So I crept along there heavily disguised in dark glasses and scarf, and found the cinema and there was my name. I was furious! There was a huge row. When I had left Spain that day everyone behind me had taken their clothes off!"
  9. "The Total Film Interview – Christopher Lee". Total Film. 1 May 2005.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7-06-12. Retrieved 25 August 2013. " In Fleming’s novel he’s just a West Indian thug, but in the film he’s charming, elegant, amusing, lethal… I played him like the dark side of B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