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라우눔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잔글 (llang|en -> 영어 변환)
 
(사용자 8명의 중간 판 15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Battle of the Catalaunum
'''카탈라우눔 전투'''({{영어|Battle of the Catalaunum}})는 서기 [[451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과 [[서로마제국]]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지휘하는 서로마 - 게르만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그때까지 무적으로 알려진 [[훈족]]이 최초로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투인 동시에 서로마 제국 군대가 군대답게 싸운 마지막 전투로 알려져 있다.
 
서기 451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과 서로마제국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지휘하는 서로마 - 게르만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그때까지 무적으로 알려진 훈족이 최초로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투인 동시에 서로마 제국 군대가 군대답게 싸운 마지막 전투로 알려져 있다.


== 전조 ==
== 전조 ==


이 당시 갈리아의 정세는 로마의 통제력이 약해짐과 동시에 수많은 게르만 족이 난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로마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이들을 상대하여 로마의 통제력을 강화시키려고 애썼고 많은 부족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언제든 복속된 게르만 족이 반란을 일으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이 당시 갈리아의 정세는 [[로마]]의 통제력이 약해짐과 동시에 수많은 [[게르만족]]이 난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로마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이들을 상대하여 로마의 통제력을 강화시키려고 애썼고 많은 부족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언제든 복속된 게르만 족이 반란을 일으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이때 훈족의 왕 아틸라는 서로마를 공격하라는 반달족의 왕 게이세릭의 부추김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나[1]인 호노리아로부터 자신과 결혼하면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주겠다는 편지와 그녀의 반지[2]를 받게된다. 이를 빌미로 아틸라는 발렌티아누스에게 호노리아와 그녀의 지참금을 자신에게 건네주라고 강요했으며,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서기 451년 봄에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진격하였다.
이때 훈족의 왕 아틸라는 서로마를 공격하라는 [[반달족]]의 왕 게이세릭의 부추김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나<ref>확실하지는 않지만, 수도승이자 역사가인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호노리아는 갈라 플라키디아가 낳은 세 아이 - 알라리크의 의제 아타울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테오도시우스, 로마 장군 콘스탄티우스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호노리아, 발렌티니아누스 - 중 두번째로 언급되어, 발렌티니아누스의 누나라는 인상을 준다. </ref>인 호노리아로부터 자신과 결혼하면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주겠다는 편지와 그녀의 반지 <ref> 이때 호노리아는 궁정에서 봉직하던 관리와 불륜관계에 빠져 임신하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그 벌로 [[낙태]]를 강제받은 뒤 수도원에 유폐된 상태였다고 한다. </ref>를 받게된다. 이를 빌미로 아틸라는 발렌티아누스에게 호노리아와 그녀의 지참금을 자신에게 건네주라고 강요했으며,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서기 451년 봄에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진격하였다.


== 서전 ==
== 서전 ==


서기 451년 4월, 아틸라는 지금의 프랑스 메츠인 디보두룸을 약탈했고 그 뒤 계속 남하하여 많은 도시들을 파괴한다. 6월이 되자 아틸라는 오를레앙에 이르러 도시를 포위했는데, 이 도시는 론 강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요새 도시였으므로 서로마에게 있어선 잃어서는 안될 요충지였다.
서기 451년 [[4월]], 아틸라는 지금의 프랑스 메츠인 디보두룸을 약탈했고 그 뒤 계속 남하하여 많은 도시들을 파괴한다. [[6월]]이 되자 아틸라는 오를레앙에 이르러 도시를 포위했는데, 이 도시는 론 강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요새 도시였으므로 서로마에게 있어선 잃어서는 안될 요충지였다.


한편, 아에티우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진입한다. 그에겐 아틸라와 맞설만한 충분한 병력이 없었으므로 비시고트의 왕인 테오도릭 1세[3]에게 연합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릭은 아틸라를 두려워하고 있긴 했으나 아에티우스에게 맞설만한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아에티우스는 당시 갈리아에서 영향력이 높았던 원로원 의원 아비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테오도릭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테오도릭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아에티우스의 군대와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아에티우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진입한다. 그에겐 아틸라와 맞설만한 충분한 병력이 없었으므로 비시고트의 왕인 테오도릭 1세 <ref> 로마 약탈을 주도했던 알라리크 1세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ref>에게 연합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릭은 아틸라를 두려워하고 있긴 했으나 아에티우스에게 맞설만한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아에티우스는 당시 갈리아에서 영향력이 높았던 원로원 의원 아비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테오도릭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테오도릭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아에티우스의 군대와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오를레앙을 점령하기 직전이었던 아틸라는 로마와 비시고트의 연합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를레앙과 연합군 사이의 양면공격 가능성을 우려했기에 포위를 풀고 철수키로 결정한다. 곧바로 훈족의 왕과 그의 장군들은 서로마의 연합군과 맞설만한 지대를 찾았고, 트루아로 물러나 그곳의 주교 루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카탈라우눔 평야에 진을 쳤다.  
오를레앙을 점령하기 직전이었던 아틸라는 로마와 비시고트의 연합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를레앙과 연합군 사이의 양면공격 가능성을 우려했기에 포위를 풀고 철수키로 결정한다. 곧바로 훈족의 왕과 그의 장군들은 서로마의 연합군과 맞설만한 지대를 찾았고, 트루아로 물러나 그곳의 주교 루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카탈라우눔 평야에 진을 쳤다.


같은 시기 아에티우스는 휘하의 로마군 이외에 테오도릭이 이끄는 서고트군,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등과도 연합군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틸라를 요격하기 위해 그가 있는 장소로 진격하였고 6월 20일에 양진영은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조우하게 처절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같은 시기 아에티우스는 휘하의 로마군 이외에 테오도릭이 이끄는 서고트군,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등과도 연합군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틸라를 요격하기 위해 그가 있는 장소로 진격하였고 [[6월 20일]]에 양진영은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조우하게 처절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 전투 ==
== 전투 ==
24번째 줄: 22번째 줄:
역사가 조나데스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아아티우스 편의 프랑크 분대가 아틸라 편의 게피드 족의 분대와 싸움을 벌여 1만 5천여 가량의 전사자를 냈다고 서술하나 이 일이 실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역사가 조나데스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아아티우스 편의 프랑크 분대가 아틸라 편의 게피드 족의 분대와 싸움을 벌여 1만 5천여 가량의 전사자를 냈다고 서술하나 이 일이 실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또 이날 밤 아틸라는 훈족의 관습대로 전투가 어떻게 될 것인지의 점을 치게 하였다. 점을 친 결과 [4] 훈족에게 재앙이 일어날 것이고 적의 리더가 죽을 것이다라는 점괘가 나왔는데 이 리더가 아에티우스를 지칭한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전투를 하기로 결정한다.
또 이날 밤 아틸라는 훈족의 관습대로 전투가 어떻게 될 것인지의 점을 치게 하였다. 점을 친 결과 <ref> 당시 점을 치는 방식은 희생제물의 내장을 검시하는 방식이었다 </ref> 훈족에게 재앙이 일어날 것이고 적의 리더가 죽을 것이다라는 점괘가 나왔는데 이 리더가 아에티우스를 지칭한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전투를 하기로 결정한다.


그 평야는 완만하게 경사진 곳이었다. 양측 모두 이 높은 부분을 한쪽 익에 낮은 부분을 다른 쪽 익에 낀 상태로 포진하고 있었으므로 양측 모두 높은 경사의 지리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였다.  
그 평야는 완만하게 경사진 곳이었다. 양측 모두 이 높은 부분을 한쪽 익에 낮은 부분을 다른 쪽 익에 낀 상태로 포진하고 있었으므로 양측 모두 높은 경사의 지리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관습대로 군대를 좌익, 중앙, 우익으로 나눠 각각 적과 맡붙게 하였다. 로마-비시고트 연합 측에선 다음과 같이 포진하였다. 비시고트족이 우익을 담당하고 이들은 높은 경사에서 싸우기로 하였다. 아에티우스는 좌익을 맡아 낮은 경사에서 싸우기로 하였고 중앙은 상기반 족이 맡았다. 상기반 족에게 중앙을 맡긴 것은 아에티우스와 비시고트족 모두 상기반 족을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한쪽 익을 맡기면 달아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관습대로 군대를 좌익, 중앙, 우익으로 나눠 각각 적과 맡붙게 하였다. 로마-비시고트 연합 측에선 다음과 같이 포진하였다. 비시고트족이 우익을 담당하고 이들은 높은 경사에서 싸우기로 하였다. 아에티우스는 좌익을 맡아 낮은 경사에서 싸우기로 하였고 중앙은 상기반 족이 맡았다. 상기반 족에게 중앙을 맡긴 것은 아에티우스와 비시고트족 모두 상기반 족을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한쪽 익을 맡기면 달아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틸라는 다음과 같이 포진하였다. 자신의 좌익은 오스트로고트 족에게 맡겨 비시고트족과 상대케 하였다. 우익은 게피드 족과 나머지 게르만 족에게 맡겨 아이티우스의 로마군과 상대케 하였다. 그리고 최정예인 훈족을 중앙에 포진하여 자신이 직접 지휘키로 하였다.  
아틸라는 다음과 같이 포진하였다. 자신의 좌익은 오스트로고트 족에게 맡겨 비시고트족과 상대케 하였다. 우익은 게피드 족과 나머지 게르만 족에게 맡겨 아이티우스의 로마군과 상대케 하였다. 그리고 최정예인 훈족을 중앙에 포진하여 자신이 직접 지휘키로 하였다.


이렇게 배치하는 동안 비시고트 족의 왕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르시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의 꼭대기를 점거한다.  
이렇게 배치하는 동안 비시고트 족의 왕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르시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의 꼭대기를 점거한다.


이 포진에서 양측이 상반된 전략을 엿볼 수 있는데 아이티우스는 양익에 정예를 포진시켜 적을 포위하고자 하였고 아틸라는 정예인 훈족으로 중앙을 돌파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 포진에서 양측이 상반된 전략을 엿볼 수 있는데 아이티우스는 양익에 정예를 포진시켜 적을 포위하고자 하였고 아틸라는 정예인 훈족으로 중앙을 돌파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배치를 마친 뒤 이들은 서로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두 군대가 천천히 접근고 있을때 아틸라는 갑자기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양 윙이 교전하기 전에 이미 아틸라 군과 상기반 족은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배치를 마친 뒤 이들은 서로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두 군대가 천천히 접근고 있을 때 아틸라는 갑자기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양 윙이 교전하기 전에 이미 아틸라 군과 상기반 족은 싸우기 시작하였다.


중앙이 치열하기 교전하는 동안 전진하고 있던 우익의 비시고트 족과 훈족의 좌익을 맡은 오스트로고트족이 전투에 돌입하였다. 이들의 싸움은 매우 치열하여 비시고트족을 직접 지휘하던 테오도릭 1세가 전사해버린다. 이 때문에 비시고트 족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언덕 위에서 이를 지켜본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리스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와 오스트로고트족의 좌측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때문에 용기를 되찾은 비시고트 족은 다시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중앙이 치열하기 교전하는 동안 전진하고 있던 우익의 비시고트 족과 훈족의 좌익을 맡은 오스트로고트족이 전투에 돌입하였다. 이들의 싸움은 매우 치열하여 비시고트족을 직접 지휘하던 테오도릭 1세가 전사해버린다. 이 때문에 비시고트 족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언덕 위에서 이를 지켜본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리스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와 오스트로고트족의 좌측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때문에 용기를 되찾은 비시고트 족은 다시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44번째 줄: 42번째 줄:
이를 본 아에티우스는 즉시 병력을 쪼개 훈족의 후미를 향해 돌격하게 하였다. 갑작스러운 후미의 공격에 훈족은 혼란에 빠지고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 이를 본 아틸라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패주하여 달아난다. 이때 훈족군의 우익이었던 오스트로고트족도 비시고트족의 맹공에 밀리고 있었는데 중앙이 무너지는 것을 보자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아이티우스 군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게피드 족도 후퇴하였다. 이에 아에티우스 군과 비시고트족, 그리고 중앙의 상기반 족이 이들을 추격하였다. 많은 수의 훈족군은 자신의 진영으로 들어가 이곳을 굳게 지켰다.
이를 본 아에티우스는 즉시 병력을 쪼개 훈족의 후미를 향해 돌격하게 하였다. 갑작스러운 후미의 공격에 훈족은 혼란에 빠지고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 이를 본 아틸라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패주하여 달아난다. 이때 훈족군의 우익이었던 오스트로고트족도 비시고트족의 맹공에 밀리고 있었는데 중앙이 무너지는 것을 보자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아이티우스 군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게피드 족도 후퇴하였다. 이에 아에티우스 군과 비시고트족, 그리고 중앙의 상기반 족이 이들을 추격하였다. 많은 수의 훈족군은 자신의 진영으로 들어가 이곳을 굳게 지켰다.


하지만 아직 전장터엔 진영으로 못들어간 많은 병사들이 남아있었고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합군측의 이들을 계속 추격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밤이 되어 어두어졌고 이때 연합군 측은 추격을 중지하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 도중 비시고트의 왕자 토리스먼드는 실수로 아틸라의 캠프로 들어갔고 뒤이어 벌어진 싸움에서 그는 부상을 입었으나 무사히 빠져나온다. 아에티우스는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지 못했는데 따라서 그는 비시고트족의 진영에서 그날 밤을 보내기로 한다.
하지만 아직 전장터엔 진영으로 못들어간 많은 병사들이 남아 있었고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합군측의 이들을 계속 추격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밤이 되어 어두어졌고 이때 연합군 측은 추격을 중지하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 도중 비시고트의 왕자 토리스먼드는 실수로 아틸라의 캠프로 들어갔고 뒤이어 벌어진 싸움에서 그는 부상을 입었으나 무사히 빠져나온다. 아에티우스는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지 못했는데 따라서 그는 비시고트족의 진영에서 그날 밤을 보내기로 한다.
 
다음날 동이트자 연합군 측은 아틸라 군의 진영을 포위하였다. 이렇게 되자 아틸라의 상황은 매우 안좋아 졌고 절망한 아틸라는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그 위에 안장을 얹어놓았다. 그리고 만일 연합군 측이 자신의 진영을 공격하고 이를 당해낼 수 없다면 그 위에 앉고 불을 질러 자결할 생각이었다.


이때 비시고트족은 시체더미 속에서 그들의 왕의 시체를 찾아낸다. 아버지인 왕의 주검을 본 토리스먼드는 분노하며 아에티우스에게 아틸라의 진영을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에티우스가 이에 반대하며 토리스먼드에게 빨리 비시고트의 수도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면 그의 동생이 왕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을 소멸 시키길 원치 않았는데 만일 그렇게 된다면 비시고트족이 너무 강해질 것이며 이는 훈족보다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틸라는 생명을 건지는데 이는 아틸라가 일년 뒤 북이탈리아를 침공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5]
다음날 동이트자 연합군 측은 아틸라 군의 진영을 포위하였다. 이렇게 되자 아틸라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아 졌고 절망한 아틸라는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그 위에 안장을 얹어놓았다. 그리고 만일 연합군 측이 자신의 진영을 공격하고 이를 당해낼 수 없다면 그 위에 앉고 불을 질러 자결할 생각이었다.


이윽고 비시고트족이 포위를 풀고 철수하고 뒤이어 아에티우스의 로마군도 철수하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아틸라는 위 연합군이 철수하는 것이 자신을 평야로 유인하려는 함정이라고 생각하여 한동안 진에서 나가지 않다가 정찰병을 통해 이들이 멀리 떠난 것을 확인한 뒤 비로소 군을 이끌고 진영을 정리한 뒤 갈리아에서 철수하였다.
이때 비시고트족은 시체더미 속에서 그들의 왕의 시체를 찾아낸다. 아버지인 왕의 주검을 본 토리스먼드는 분노하며 아에티우스에게 아틸라의 진영을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에티우스가 이에 반대하며 토리스먼드에게 빨리 비시고트의 수도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면 그의 동생이 왕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을 소멸 시키길 원치 않았는데 만일 그렇게 된다면 비시고트족이 너무 강해질 것이며 이는 훈족보다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틸라는 생명을 건지는데 이는 아틸라가 일년 뒤 북이탈리아를 침공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ref> 뿐만 아니라 아에티우스는 훈족에게 빌린 병력을 꾸준히 주력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훈족의 소멸은 더 이상 그가 훈족에게 병사를 제공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틸라는 상상 이상으로 적대적이었고 또한 예상외의 빠른 회복력을 보였으므로 아에티우스는 군사력의 제공도 받지 못했고 또한 훈족이 다음해에 곧바로 이탈리아 북부를 약탈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ref>이윽고 비시고트족이 포위를 풀고 철수하고 뒤이어 아에티우스의 로마군도 철수하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아틸라는 위 연합군이 철수하는 것이 자신을 평야로 유인하려는 함정이라고 생각하여 한동안 진에서 나가지 않다가 정찰병을 통해 이들이 멀리 떠난 것을 확인한 뒤 비로소 군을 이끌고 진영을 정리한 뒤 갈리아에서 철수하였다.


== 평가 ==
== 평가 ==




위의 전투의 중요성에 대해선 두가지 시각이 있는데 전통적인 시각은 위의 전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위의 전투의 중요성에 대해선 두 가지 시각이 있는데 전통적인 시각은 위의 전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의 경우 위의 시각의 옹호자로 그는 위의 전투에서 훈족이 이겼다면 훈족은 갈리아를 통치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는 직접적으로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말을 낼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훈족의 무적신화는 더욱 높아질 것이며 이는 훈족의 멸망이 훨씬 뒤로 미루어지게 되며 이는 서유럽의 기독교 왕조의 성립이 늦춰지는 결말이 초래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전투는 유럽 역사에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드 기번의 경우 위의 시각의 옹호자로 그는 위의 전투에서 훈족이 이겼다면 훈족은 갈리아를 통치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는 직접적으로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말을 낼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훈족의 무적신화는 더욱 높아질 것이며 이는 훈족의 멸망이 훨씬 뒤로 미루어지게 되며 이는 서유럽의 기독교 왕조의 성립이 늦춰지는 결말이 초래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전투는 유럽 역사에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61번째 줄: 57번째 줄:
이에 반해 J.B Bury의 경우 위의 시각은 과장된 것으로 당시 훈족은 수많은 민족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이들 민족은 언제 배신할 지 모르므로 훈족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정 하였으며 따라서 아틸라와 같은 능력자가 통치하지 않는 이상 이들이 훈족을 배반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훈족이 설령 위 전투를 이겨 갈리아의 지배를 확립한다 하더라도 훈족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J.B Bury의 경우 위의 시각은 과장된 것으로 당시 훈족은 수많은 민족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이들 민족은 언제 배신할 지 모르므로 훈족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정 하였으며 따라서 아틸라와 같은 능력자가 통치하지 않는 이상 이들이 훈족을 배반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훈족이 설령 위 전투를 이겨 갈리아의 지배를 확립한다 하더라도 훈족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의 다른 시각과는 별개로 위의 전투에서 아에티우스는 장군으로써의 유능함을 보여주었다. 이때까지 훈족은 무적신화를 자랑하였으며 아틸라가 직접 이끄는 훈족은 매우 용맹한 부대였는데 이들을 약한 보병과 맞붙게 하여 시간을 끄는 한편 그의 부대로 후방을 협공하여 이 훈족을 무력화 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위의 다른 시각과는 별개로 위의 전투에서 아에티우스는 장군으로써의 유능함을 보여주었다. 이때까지 훈족은 무적신화를 자랑하였으며 아틸라가 직접 이끄는 훈족은 매우 용맹한 부대였는데 이들을 약한 보병과 맞붙게 하여 시간을 끄는 한편 그의 부대로 후방을 협공하여 이 훈족을 무력화 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후방을 협공을 위해 아에티우스는 상기반 족과 그의 로마군의 포지션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훈족이 밀어붙이면 자연스럽게 로마군에게 그들의 후방을 노출되게끔 하였다. 또한 상기반 족과 훈족의 전투력의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훈족이 상기반 족을 밀어붙이면 어디까지 밀려 후방이 노출 될것인가를 예측하였고 이것이 시기적절한 후방의 협공을 가능케 하였다.
이런 후방을 협공을 위해 아에티우스는 상기반 족과 그의 로마군의 포지션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훈족이 밀어붙이면 자연스럽게 로마군에게 그들의 후방을 노출되게끔 하였다. 또한 상기반 족과 훈족의 전투력의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훈족이 상기반 족을 밀어붙이면 어디까지 밀려 후방이 노출 될것인가를 예측하였고 이것이 시기적절한 후방의 협공을 가능케 하였다.
69번째 줄: 65번째 줄:
따라서 아에티우스는 지형의 활용을 극대화 하고 자신 부대와 적의 군대의 장단점을 정확히 고려한 배치를 하였으며 또한 전황이 어떻게 흐를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하여 적시에 협공하는 뛰어난 지휘능력을 보였다. 따라서 위의 전투는 아에티우스의 군사적 재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싸움이었다.
따라서 아에티우스는 지형의 활용을 극대화 하고 자신 부대와 적의 군대의 장단점을 정확히 고려한 배치를 하였으며 또한 전황이 어떻게 흐를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하여 적시에 협공하는 뛰어난 지휘능력을 보였다. 따라서 위의 전투는 아에티우스의 군사적 재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싸움이었다.


[1]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도승이자 역사가인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호노리아는 갈라 플라키디아가 낳은 세 아이 - 알라리크의 의제 아타울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테오도시우스, 로마 장군 콘스탄티우스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호노리아, 발렌티니아누스 - 중 두번째로 언급되어, 발렌티니아누스의 누나라는 인상을 준다.
{{주석}}
[2] 이때 호노리아는 궁정에서 봉직하던 관리와 불륜관계에 빠져 임신하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그 벌로 낙태를 강제받은 뒤 수도원에 유폐된 상태였다고 한다.
[[분류:전투]]
[3] 로마 약탈을 주도했던 알라리크 1세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분류:고대 로마]]
[4] 당시 점을 치는 방식은 희생제물의 내장을 검시하는 방식이었다
[[분류:5세기 분쟁]]
[5] 뿐만 아니라 아에티우스는 훈족에게 빌린 병력을 꾸준히 주력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훈족의 소멸은 더 이상 그가 훈족에게 병사를 제공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틸라는 상상 이상으로 적대적이었고 또한 예상외의 빠른 회복력을 보였으므로 아에티우스는 군사력의 제공도 받지 못했고 또한 훈족이 다음해에 곧바로 이탈리아 북부를 약탈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2022년 3월 6일 (일) 01:25 기준 최신판

카탈라우눔 전투(영어: Battle of the Catalaunum)는 서기 451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서로마제국의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지휘하는 서로마 - 게르만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투로, 그때까지 무적으로 알려진 훈족이 최초로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투인 동시에 서로마 제국 군대가 군대답게 싸운 마지막 전투로 알려져 있다.

전조[편집 | 원본 편집]

이 당시 갈리아의 정세는 로마의 통제력이 약해짐과 동시에 수많은 게르만족이 난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로마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이들을 상대하여 로마의 통제력을 강화시키려고 애썼고 많은 부족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언제든 복속된 게르만 족이 반란을 일으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이때 훈족의 왕 아틸라는 서로마를 공격하라는 반달족의 왕 게이세릭의 부추김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나[1]인 호노리아로부터 자신과 결혼하면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주겠다는 편지와 그녀의 반지 [2]를 받게된다. 이를 빌미로 아틸라는 발렌티아누스에게 호노리아와 그녀의 지참금을 자신에게 건네주라고 강요했으며, 황제가 이를 거부하자 서기 451년 봄에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진격하였다.

서전[편집 | 원본 편집]

서기 451년 4월, 아틸라는 지금의 프랑스 메츠인 디보두룸을 약탈했고 그 뒤 계속 남하하여 많은 도시들을 파괴한다. 6월이 되자 아틸라는 오를레앙에 이르러 도시를 포위했는데, 이 도시는 론 강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요새 도시였으므로 서로마에게 있어선 잃어서는 안될 요충지였다.

한편, 아에티우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진입한다. 그에겐 아틸라와 맞설만한 충분한 병력이 없었으므로 비시고트의 왕인 테오도릭 1세 [3]에게 연합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릭은 아틸라를 두려워하고 있긴 했으나 아에티우스에게 맞설만한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아에티우스는 당시 갈리아에서 영향력이 높았던 원로원 의원 아비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테오도릭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테오도릭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아에티우스의 군대와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오를레앙을 점령하기 직전이었던 아틸라는 로마와 비시고트의 연합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를레앙과 연합군 사이의 양면공격 가능성을 우려했기에 포위를 풀고 철수키로 결정한다. 곧바로 훈족의 왕과 그의 장군들은 서로마의 연합군과 맞설만한 지대를 찾았고, 트루아로 물러나 그곳의 주교 루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카탈라우눔 평야에 진을 쳤다.

같은 시기 아에티우스는 휘하의 로마군 이외에 테오도릭이 이끄는 서고트군,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던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등과도 연합군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틸라를 요격하기 위해 그가 있는 장소로 진격하였고 6월 20일에 양진영은 카탈라우눔 평야에서 조우하게 처절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전투[편집 | 원본 편집]

역사가 조나데스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아아티우스 편의 프랑크 분대가 아틸라 편의 게피드 족의 분대와 싸움을 벌여 1만 5천여 가량의 전사자를 냈다고 서술하나 이 일이 실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또 이날 밤 아틸라는 훈족의 관습대로 전투가 어떻게 될 것인지의 점을 치게 하였다. 점을 친 결과 [4] 훈족에게 재앙이 일어날 것이고 적의 리더가 죽을 것이다라는 점괘가 나왔는데 이 리더가 아에티우스를 지칭한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전투를 하기로 결정한다.

그 평야는 완만하게 경사진 곳이었다. 양측 모두 이 높은 부분을 한쪽 익에 낮은 부분을 다른 쪽 익에 낀 상태로 포진하고 있었으므로 양측 모두 높은 경사의 지리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관습대로 군대를 좌익, 중앙, 우익으로 나눠 각각 적과 맡붙게 하였다. 로마-비시고트 연합 측에선 다음과 같이 포진하였다. 비시고트족이 우익을 담당하고 이들은 높은 경사에서 싸우기로 하였다. 아에티우스는 좌익을 맡아 낮은 경사에서 싸우기로 하였고 중앙은 상기반 족이 맡았다. 상기반 족에게 중앙을 맡긴 것은 아에티우스와 비시고트족 모두 상기반 족을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한쪽 익을 맡기면 달아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틸라는 다음과 같이 포진하였다. 자신의 좌익은 오스트로고트 족에게 맡겨 비시고트족과 상대케 하였다. 우익은 게피드 족과 나머지 게르만 족에게 맡겨 아이티우스의 로마군과 상대케 하였다. 그리고 최정예인 훈족을 중앙에 포진하여 자신이 직접 지휘키로 하였다.

이렇게 배치하는 동안 비시고트 족의 왕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르시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의 꼭대기를 점거한다.

이 포진에서 양측이 상반된 전략을 엿볼 수 있는데 아이티우스는 양익에 정예를 포진시켜 적을 포위하고자 하였고 아틸라는 정예인 훈족으로 중앙을 돌파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배치를 마친 뒤 이들은 서로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두 군대가 천천히 접근고 있을 때 아틸라는 갑자기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돌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양 윙이 교전하기 전에 이미 아틸라 군과 상기반 족은 싸우기 시작하였다.

중앙이 치열하기 교전하는 동안 전진하고 있던 우익의 비시고트 족과 훈족의 좌익을 맡은 오스트로고트족이 전투에 돌입하였다. 이들의 싸움은 매우 치열하여 비시고트족을 직접 지휘하던 테오도릭 1세가 전사해버린다. 이 때문에 비시고트 족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언덕 위에서 이를 지켜본 테오도릭 1세의 아들 토리스먼드가 기병을 이끌고 언덕에서 내려와 오스트로고트족의 좌측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때문에 용기를 되찾은 비시고트 족은 다시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좌익에 포진된 아에티우스의 로마군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것을 본 훈족의 우익의 게피드 족은 아에티우스의 군에게 덤비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은 공격할 기회를 엿보며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이렇게 대치하는 동안 중앙의 훈족은 상기반 족을 뒤로 계속 밀어붙였다. 시간이 지나자 어느덧 훈족은 아이티우스의 군보다 더 뒤쪽에 위치하게 되었고 그러자 훈족의 후미가 아에티우스 군에게 노출된다.

이를 본 아에티우스는 즉시 병력을 쪼개 훈족의 후미를 향해 돌격하게 하였다. 갑작스러운 후미의 공격에 훈족은 혼란에 빠지고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 이를 본 아틸라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패주하여 달아난다. 이때 훈족군의 우익이었던 오스트로고트족도 비시고트족의 맹공에 밀리고 있었는데 중앙이 무너지는 것을 보자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아이티우스 군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게피드 족도 후퇴하였다. 이에 아에티우스 군과 비시고트족, 그리고 중앙의 상기반 족이 이들을 추격하였다. 많은 수의 훈족군은 자신의 진영으로 들어가 이곳을 굳게 지켰다.

하지만 아직 전장터엔 진영으로 못들어간 많은 병사들이 남아 있었고 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합군측의 이들을 계속 추격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밤이 되어 어두어졌고 이때 연합군 측은 추격을 중지하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 도중 비시고트의 왕자 토리스먼드는 실수로 아틸라의 캠프로 들어갔고 뒤이어 벌어진 싸움에서 그는 부상을 입었으나 무사히 빠져나온다. 아에티우스는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가지 못했는데 따라서 그는 비시고트족의 진영에서 그날 밤을 보내기로 한다.

다음날 동이트자 연합군 측은 아틸라 군의 진영을 포위하였다. 이렇게 되자 아틸라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아 졌고 절망한 아틸라는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그 위에 안장을 얹어놓았다. 그리고 만일 연합군 측이 자신의 진영을 공격하고 이를 당해낼 수 없다면 그 위에 앉고 불을 질러 자결할 생각이었다.

이때 비시고트족은 시체더미 속에서 그들의 왕의 시체를 찾아낸다. 아버지인 왕의 주검을 본 토리스먼드는 분노하며 아에티우스에게 아틸라의 진영을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에티우스가 이에 반대하며 토리스먼드에게 빨리 비시고트의 수도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지 않으면 그의 동생이 왕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을 소멸 시키길 원치 않았는데 만일 그렇게 된다면 비시고트족이 너무 강해질 것이며 이는 훈족보다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틸라는 생명을 건지는데 이는 아틸라가 일년 뒤 북이탈리아를 침공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5]이윽고 비시고트족이 포위를 풀고 철수하고 뒤이어 아에티우스의 로마군도 철수하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아틸라는 위 연합군이 철수하는 것이 자신을 평야로 유인하려는 함정이라고 생각하여 한동안 진에서 나가지 않다가 정찰병을 통해 이들이 멀리 떠난 것을 확인한 뒤 비로소 군을 이끌고 진영을 정리한 뒤 갈리아에서 철수하였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위의 전투의 중요성에 대해선 두 가지 시각이 있는데 전통적인 시각은 위의 전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의 경우 위의 시각의 옹호자로 그는 위의 전투에서 훈족이 이겼다면 훈족은 갈리아를 통치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는 직접적으로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말을 낼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훈족의 무적신화는 더욱 높아질 것이며 이는 훈족의 멸망이 훨씬 뒤로 미루어지게 되며 이는 서유럽의 기독교 왕조의 성립이 늦춰지는 결말이 초래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전투는 유럽 역사에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J.B Bury의 경우 위의 시각은 과장된 것으로 당시 훈족은 수많은 민족을 통제하고 있었으나 이들 민족은 언제 배신할 지 모르므로 훈족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정 하였으며 따라서 아틸라와 같은 능력자가 통치하지 않는 이상 이들이 훈족을 배반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훈족이 설령 위 전투를 이겨 갈리아의 지배를 확립한다 하더라도 훈족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의 다른 시각과는 별개로 위의 전투에서 아에티우스는 장군으로써의 유능함을 보여주었다. 이때까지 훈족은 무적신화를 자랑하였으며 아틸라가 직접 이끄는 훈족은 매우 용맹한 부대였는데 이들을 약한 보병과 맞붙게 하여 시간을 끄는 한편 그의 부대로 후방을 협공하여 이 훈족을 무력화 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후방을 협공을 위해 아에티우스는 상기반 족과 그의 로마군의 포지션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훈족이 밀어붙이면 자연스럽게 로마군에게 그들의 후방을 노출되게끔 하였다. 또한 상기반 족과 훈족의 전투력의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훈족이 상기반 족을 밀어붙이면 어디까지 밀려 후방이 노출 될것인가를 예측하였고 이것이 시기적절한 후방의 협공을 가능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시고트족과 오스트로고트족과의 싸움에서 아에티우스는 기병으로 언덕을 점령한뒤 전투가 무르익자 좌측을 협공하는 기동전술을 짰고 이러한 기동은 지형활용에 대한 뛰어난 지식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아에티우스는 지형의 활용을 극대화 하고 자신 부대와 적의 군대의 장단점을 정확히 고려한 배치를 하였으며 또한 전황이 어떻게 흐를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하여 적시에 협공하는 뛰어난 지휘능력을 보였다. 따라서 위의 전투는 아에티우스의 군사적 재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싸움이었다.

각주

  1.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도승이자 역사가인 파울루스 디아코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호노리아는 갈라 플라키디아가 낳은 세 아이 - 알라리크의 의제 아타울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테오도시우스, 로마 장군 콘스탄티우스 3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호노리아, 발렌티니아누스 - 중 두번째로 언급되어, 발렌티니아누스의 누나라는 인상을 준다.
  2. 이때 호노리아는 궁정에서 봉직하던 관리와 불륜관계에 빠져 임신하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그 벌로 낙태를 강제받은 뒤 수도원에 유폐된 상태였다고 한다.
  3. 로마 약탈을 주도했던 알라리크 1세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4. 당시 점을 치는 방식은 희생제물의 내장을 검시하는 방식이었다
  5. 뿐만 아니라 아에티우스는 훈족에게 빌린 병력을 꾸준히 주력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훈족의 소멸은 더 이상 그가 훈족에게 병사를 제공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틸라는 상상 이상으로 적대적이었고 또한 예상외의 빠른 회복력을 보였으므로 아에티우스는 군사력의 제공도 받지 못했고 또한 훈족이 다음해에 곧바로 이탈리아 북부를 약탈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