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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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7일 (토) 02:31 판

틀:사건사고

소비에트 연방 체제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1]


개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틀:날짜/출력 1시 24분에 소련 우크라이나 SSR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폭발에 의한 방사능 누출 사고를 말한다. 이 사고로 발전소에서 누출된 방사성 강하물이 우크라이나 SSR과 벨라루스 SSR, 러시아 SFSR 등에 떨어져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다. 사고 후 소련 정부의 대응 지연에 따라 피해가 광범위화되어 최악의 원자력 사고가 되었다.

사고 진행

사고 이전의 상황

전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한 가지 점검이 예정되어 있었다. 발전소-변전소간 전력 공급이 끊길 경우 발전소의 운용 전력도 같이 날아가는 데, 이를 커버할 수 있는 비상발전기는 쓸만한 출력을 내려면 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터빈의 관성을 이용해 발전을 하여 비상발전기가 가동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을 벌어줄지 시험을 해볼 예정이었다.

그래서 새벽부터 원자로 출력을 낮추고 비상노심냉각장치(ECCS)를 차단하는 등 실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변전소로 부터 전력을 공급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와서 실험 절차가 중지되고 다시 출력을 높혔다. 이 과정에서 Xe-135가 축적되기 시작한다.

26일 새벽 1시

25일 23시 10분, 변전소의 전력 공급 요청이 끝나서 실험을 다시 재개한다. 4호기의 출력을 720MW까지 낮추는 과정에서 급격히 출력이 30MW까지 떨어져서 운전실에서 일대 혼란이 있었다. 실험은 원자로 출력 700MW에서 진행되어야 했기 때문에 제어봉을 일부 거두어 들여 다시 출력을 높히는 데, 전날 축적된 Xe-135가 중성자를 흡수하여 출력이 200MW에서 정체되는 현상이 발생된다.

원자로가 규정보다 낮은 출력에서 가동하고 삽입된 제어봉은 6개에 불과했음에도 실험은 계속되었으며, 26일 1시경에는 비상 냉각수 펌프 2개를 가동하여 원자로 노심의 수위가 높아졌다.

1시 23분 04초, 실험이 시작되어 터빈으로 향하는 증기 공급이 중단되었다. 터빈이 느려지면서 발전소 내부 전력도 감소했으며 냉각 계통의 냉각수 유량도 15%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에 따라 노심의 온도가 올라가 냉각수가 증기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중성자를 잡아줄 냉각수도, 제어봉도 없었으니 핵반응 속도가 급격히 오르기 시작한다.

1시 23분 40초, 이를 파악한 운전실에서 급히 제어봉을 투입하지만 실험 과정에서 다량의 제어봉을 꺼내둔 상태라 모두 삽입하는 데에는 18초라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고,장비를 정지합니다. 안 되잖아? 전날 축적된 Xe-135가 중성자를 흡수하면서 양이 줄어들자 원자로가 폭주하기 시작해서 30만MW까지 출력이 치솟았다. 노심의 냉각수가 죄다 증기로 바뀌어 반응로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1시 24분, 과다한 증기의 압력을 못 견딘 반응로가 2번에 걸쳐 폭발, 발전소 주변에 막대한 방사능 물질을 흩뿌렸고, 감속재인 흑연도 흩어져 산발적인 화재로 이어졌다.

1시 28분, 소방대가 도착하여 화재 진압이 시작된다. 화재는 열흘이 지나서야 완전 진압되었다.

긴급 주민 소개

소방대의 노력에 의해 화재가 열흘만에 진압되었고, 옆에 있던 3호기도 지켜냈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주변 지역이 방사능으로 심각하게 오염되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소개가 시급했고, 노심이 녹아 지하로 스며들면서 지하수와 만날 경우 일어날 대폭발을 저지해야만 했다.

26일 21시에는 진화 작업에 쓰인 물이 인화성 물질인 수소와 가연성 물질인 산소로 분해되면서 축적된 증기가 폭발해서 500m에 달하는 불기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소련 정부는 사건을 숨기기에 급급했는 데, 방사능 물질이 바람을 타고 스웨덴까지 날아가 스웨덴 정부가 강력 항의하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인정했다.

소련 정부는 26일 밤의 폭발이 터지고 나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으며 우선 27일 14시부터 약 5만명에 달하는 프리피야트, 야노프 지역의 주민 소개가 개시되었다. 30일에는 반경 10km내의 주민 소개가 개시되었으며, 5월 3일에는 반경 30km내의 주민 소개가 시작되었다. 그해 8월까지 총 11만 6천명이 터전을 떠나야만 했다.

험난한 폐로의 과정

우선 폐로를 위해서는 사고 현장의 정리가 필요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치사량을 훌쩍 넘는 방사능이 실시간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것 뿐. 이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소련 정부는 인해전술을 쓰기로 한다.

그런데 전국의 핵 관련 시설에서 방사능 방호복을 싹싹 긁어모아도 턱없이 부족했는 데, 임시 방편으로 방사능 방호가 가장 잘 되는 납판을 줄줄이 우비에 꿰어 그걸 입고 투입되었다. 물론 막대한 방사능 때문에 작업 가용 시간은 불과 30초에 불과했고 우르르 들어가서 돌무더기 몇 개 치우고 우르르 나와서 다음 팀에게 방사능 방호복을 인계한 뒤 우르르 들어가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후 현장이 정리되자 4호기를 봉인하는 석관의 공사가 시작되었고, 1986년에 석관이 완공되어 4호기의 방사능이 봉인되었다.

사고 이후

관련항목

각주

  1.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데 특히 체르노빌의 경우 고르바쵸프의 개혁 중에 일어났기에 고르바쵸프의 개혁이 문제라도 보는 의견도 있고, 브레즈네프 시기 이후 축적된 소련의 모순이 폭발한 사건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