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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자면 명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인상적인 역량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차범근이 독일에서 축구를 배워오긴 했지만 90년대를 지나면서 독일축구는 전술적으로 뒤처지고 있었고, 차범근은 그 독일축구조차 재해석하지 못하고 과거의 독일축구에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K리그가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된 리그도 아니었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기에 차범근이 자연스럽게 도태된 것. 이것은 차범근보다 1년 앞서 [[인천 유나이티드|인천]]의 초대 감독으로 화제를 모았던 독일의 [[베르너 로란트]]가 아쉬움만 남긴채 K리그를 떠난 것과 유사하다.<ref>재밌게도 로란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과 3시즌 동안 같이 뛰었었다.</ref> 여기에 대표팀 감독일 때의 일화를 보면 차범근 본인이 요구하던 플레이를 선수들이 따라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s>야, 이게 안 돼?</s>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선수가 지도자로서는 범용한 경우가 많다는 속설에 부합하는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ref>여담이지만 명선수가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건 편견이다. 지도자로 실패한 스타플레이어도 많지만, 지도자로 성공한 스타플레이어도 무수히 많으며 현장에서는 웬만큼의 커리어가 없으면 감독으로 써주지도 않는다. 선수경력이 일천한 감독들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감독이 선수들한테 무시받는다는 루머가 나올 정도.</ref> | 엄밀히 말하자면 명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인상적인 역량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차범근이 독일에서 축구를 배워오긴 했지만 90년대를 지나면서 독일축구는 전술적으로 뒤처지고 있었고, 차범근은 그 독일축구조차 재해석하지 못하고 과거의 독일축구에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K리그가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된 리그도 아니었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기에 차범근이 자연스럽게 도태된 것. 이것은 차범근보다 1년 앞서 [[인천 유나이티드|인천]]의 초대 감독으로 화제를 모았던 독일의 [[베르너 로란트]]가 아쉬움만 남긴채 K리그를 떠난 것과 유사하다.<ref>재밌게도 로란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과 3시즌 동안 같이 뛰었었다.</ref> 여기에 대표팀 감독일 때의 일화를 보면 차범근 본인이 요구하던 플레이를 선수들이 따라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s>야, 이게 안 돼?</s>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선수가 지도자로서는 범용한 경우가 많다는 속설에 부합하는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ref>여담이지만 명선수가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건 편견이다. 지도자로 실패한 스타플레이어도 많지만, 지도자로 성공한 스타플레이어도 무수히 많으며 현장에서는 웬만큼의 커리어가 없으면 감독으로 써주지도 않는다. 선수경력이 일천한 감독들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감독이 선수들한테 무시받는다는 루머가 나올 정도.</ref> | ||
다만 감독으로서는 부족하지만 축구지도자로서의 차범근은 충분히 높게 평가받을 만 하다. 차범근 축구교실과 차범근 축구상을 통해 유소년축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독일에서 배워온 유스시스템을 도입해 한국 유소년축구의 선구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다만 감독으로서는 부족하지만 축구지도자로서의 차범근은 충분히 높게 평가받을 만 하다. 차범근 축구교실과 차범근 축구상을 통해 유소년축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독일에서 배워온 유스시스템을 도입해 한국 유소년축구의 선구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
[[파일:차범근축구교실.jpg]] | [[파일:차범근축구교실.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