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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권위의 하락===
===교회 권위의 하락===
===르네상스===
===르네상스===
오직 종교만이 존재하던 중세 시대가 끝나고, 14세기부터 [[르네상스|르네상스]]가 시작되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다채로운 문화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서유럽이 점점 세속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만을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늘었던 것도 종교 개혁에 또다른 원인이다.
오직 종교만이 존재하던 중세 시대가 끝나고, 14세기부터 [[르네상스|르네상스]](문예 부흥 운동)가 시작되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다채로운 문화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서유럽이 점점 세속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만을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늘었던 것도 종교 개혁에 또다른 원인이다.


===교회의 면죄부 판매===
===교회의 면죄부 판매===

2021년 5월 25일 (화) 18:44 판

Reformation. 16세기 유럽 역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 질서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다. 일반적으로 1517년 10월 31일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95개조 반박문이 발표된 사건을 기준으로 보고 있다.

종교개혁은 통일된 교회가 기독교적인 서양에서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만든 운동이다. 이단재판을 통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로마 교황의 의도는 종교개혁운동에 동조하는 군주들의 반대에 의해 좌절되었다. 교회는 개혁적인 사고를 금하고, 그런 내용의 서적을 불태움으로써 새로운 물결에 대항하려 하였지만, 결국은 조소와 풍자만을 거두어 들였다. 새로운 것이 주목을 끌게 되었으며 모순적인 것이 눈에 띄게 되었다. 이 때 옛 교회의 붕괴를 야기시킨 것은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의 저항감을 불러일으킨 교회적 일상생활의 타락현상이었다. 맨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성직체계는 희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은 자성과 깨달음의 장소인 수도원의 문 앞에서도 멈출 줄을 몰라 뭇사람들의 이야기거리가 되고, 성직자들의 애정행각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을 담은 책자풍자적인 글들이 만들어져 나왔다.[1]

원인

교회 권위의 하락

르네상스

오직 종교만이 존재하던 중세 시대가 끝나고, 14세기부터 르네상스(문예 부흥 운동)가 시작되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다채로운 문화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서유럽이 점점 세속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만을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늘었던 것도 종교 개혁에 또다른 원인이다.

교회의 면죄부 판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로 인해 재정이 부족해진 교황청에서 면죄부[2]를 판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대해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자신이 교수직을 맡고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을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시발점으로 본다.

진행

루터 이전의 흐름

존 위클리프

영국의 교구장이었던 존 위클리프는 당시 교황청의 권력과 당시 가톨릭 교리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그는 교황만이 성서를 사유하면서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교리를 반박하면서 당시 라틴어로만 쓸 수 있고 다른 언어로의 번역이 금지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신앙의 유일한 표준은 교회가 아니라 성서라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성찬례에서의 화체설을 정면 부정하고 임재설을 주장하였으며, 교황의 사면권(면죄부/면벌부)를 비판하면서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다를바 없다는 혹평까지 하는 등 이후 종교개혁에서 나오게 되는 주장들의 기본적인 내용들은 거의 다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지지는 못했는데, 그 당시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

보헤미안 후스

에라스무스

루터의 종교개혁

다른 국가의 종교개혁

스위스

츠빙글리
칼뱅

프랑스 출신의 종교 개혁자였던 그는 루터보다도 더 강경한 개혁을 해 나갔는데,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만 가능하다는 독력주의(예정설)[3]를 강조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그는 1536년에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여 종교 개혁에 큰 사상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 덕분에 개신교 신학의 이론적인 부분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그의 신학을 교회의 기본 교리로 삼는 교회는 장로교회, 회중교회 등이 있다.

영국

기타

여파

참조

각주

  1. "토마스 뮌처", 클라우스 에버트
  2. 정확히는 죄에 대한 벌을 면제해 준다는 면벌부
  3. 후에 존 웨슬리는 이를 부정하여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소망할 자들을 미리 예지하고 계신다라는 예지예정론을 주장하였다. 이를 따르고 있는 교회는 감리교회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