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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교구장이었던 존 위클리프는 당시 교황청의 권력과 당시 가톨릭 교리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그는 교황만이 성서를 사유하면서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교리를 반박하면서 당시 라틴어로만 쓸 수 있고 다른 언어로의 번역이 금지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신앙의 유일한 표준은 교회가 아니라 성서라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성찬례에서의 화체설을 정면 부정하고 임재설을 주장하였으며, 교황의 사면권(면죄부/면벌부)를 비판하면서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다를바 없다는 혹평까지 하였었다.
영국의 교구장이었던 존 위클리프는 당시 교황청의 권력과 당시 가톨릭 교리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그는 교황만이 성서를 사유하면서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교리를 반박하면서 당시 라틴어로만 쓸 수 있고 다른 언어로의 번역이 금지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신앙의 유일한 표준은 교회가 아니라 성서라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성찬례에서의 화체설을 정면 부정하고 임재설을 주장하였으며, 교황의 사면권(면죄부/면벌부)를 비판하면서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다를바 없다는 혹평까지 하였었다.


====보헤미안 후스====
====[[보헤미안 후스]]====
====[[에라스무스]]====


===루터의 종교개혁===
===루터의 종교개혁===

2021년 5월 25일 (화) 09:35 판

  • Reformation

개요

16세기 유럽 역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 질서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다. 일반적으로 1517년 10월 31일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95개조 반박문이 발표된 사건을 기준으로 보고 있다.

종교개혁은 통일된 교회가 기독교적인 서양에서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만든 운동이다. 이단재판을 통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로마 교황의 의도는 종교개혁운동에 동조하는 군주들의 반대에 의해 좌절되었다. 교회는 개혁적인 사고를 금하고, 그런 내용의 서적을 불태움으로써 새로운 물결에 대항하려 하였지만, 결국은 조소와 풍자만을 거두어 들였다. 새로운 것이 주목을 끌게 되었으며 모순적인 것이 눈에 띄게 되었다. 이 때 옛 교회의 붕괴를 야기시킨 것은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의 저항감을 불러일으킨 교회적 일상생활의 타락현상이었다. 맨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성직체계는 희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은 자성과 깨달음의 장소인 수도원의 문 앞에서도 멈출 줄을 몰라 뭇사람들의 이야기거리가 되고, 성직자들의 애정행각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을 담은 책자풍자적인 글들이 만들어져 나왔다.[1]

원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공식적 원인은 두 번에 걸쳐 일어난 프라하 투척 사건이다.

진행

루터 이전의 흐름

위클리프

영국의 교구장이었던 존 위클리프는 당시 교황청의 권력과 당시 가톨릭 교리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그는 교황만이 성서를 사유하면서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교리를 반박하면서 당시 라틴어로만 쓸 수 있고 다른 언어로의 번역이 금지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신앙의 유일한 표준은 교회가 아니라 성서라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성찬례에서의 화체설을 정면 부정하고 임재설을 주장하였으며, 교황의 사면권(면죄부/면벌부)를 비판하면서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다를바 없다는 혹평까지 하였었다.

보헤미안 후스

에라스무스

루터의 종교개혁

다른 국가의 종교개혁

스위스

츠빙글리
칼뱅

영국

기타

여파

참조

각주

  1. "토마스 뮌처", 클라우스 에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