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6번째 줄: 26번째 줄:
고종 실록과 순종 실록 그리고 순종 실록 부록은 [[일제강점기]] 때 편찬되어 일제의 날조가 들어간 정황이 의심되어 실록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고종 실록과 순종 실록 그리고 순종 실록 부록은 [[일제강점기]] 때 편찬되어 일제의 날조가 들어간 정황이 의심되어 실록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중간에 반정으로 퇴위당해 왕에서 '군'으로 강등당했기 때문에 연산군과 광해군의 기록을 담은 실록은 '실록'이라 칭하지 않고 각각 '연산군 일기'와 '광해군 일기'로 불린다. 사실 [[단종]]도 [[세조]]의 반정에 의해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당했을때는 하마터면 단종의 실록도 '노산군 일기'가 될 뻔 했지만 나중에 [[중종]]대에 복권되어 단종으로 모셔졌기 때문에 '단종 실록'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중간에 반정으로 퇴위당해 왕에서 '군'으로 강등당했기 때문에 연산군과 광해군의 기록을 담은 실록은 '실록'이라 칭하지 않고 각각 '연산군 일기'와 '광해군 일기'로 불린다. 사실 [[단종]]도 [[세조]]의 반정에 의해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당했을때는 하마터면 단종의 실록도 '노산군 일기'가 될 뻔 했지만 나중에 [[숙종]]대에 복권되어 단종으로 모셔졌기 때문에 '단종 실록'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남을 수 있게 되었다.


== 기타 ==
== 기타 ==

2015년 7월 18일 (토) 17:23 판

틀:세계기록유산 보러가기

개요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서력 1392년~서력 1863년까지 총 471년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다.
서력 1997년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략 34만 개의 기사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1]

설명

사실 실록을 편찬하는 문화는 전대 왕조인 고려 왕조부터 존재해왔던 문화였다. 참고로 고려왕조실록은 불행히도 수차례 소실을 거쳐 현재는 남아있지 않고 있다(다만 고려왕조실록을 기반으로 서술한 '고려사'라는 역사서는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은 고려 시대에 정립된 실록 문화를 좀 더 보강을 거쳐 만든 문화라 할 수 있다.

기본적인 특징은 역대 조선 임금들의 모든 언행을 100% 날것 그대로 기록한 기념비적인 역사서이다. 물론 다른 국가나 문화권에서도 이런게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상술한 고려 또한 예시 중 하나), 대부분 최고권력자 눈치가 보여 제대로 서술할 수 없었거나, 최고권력자를 곁에서 제대로 보고 들으며 서술한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증언이나 정황등을 종합하여 서술하는 등 객관성이 부족하거나, 기록자가 자의적으로 일부 서술을 제외하거나 추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사실과 달라지는 등 문제가 종종 있어 교차검증이 필요한 대부분의 다른 역사서들과는 달리 실록은 절대권력자의 눈치를 절대 보지 않았으며 절대권력자를 말 그대로 코 앞에서 보고 들으며 기록할 수 있었고 일단 모든 것들을 100% 되는대로 죄다 기록하고 나중에 가서 불필요한걸 쳐내어 정립을 하는 등 여러모로 객관성을 철저히 지키며 방대한 자료를 그대로 담아두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역사서라 자부할 수 있다.

위의 실록의 장점들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우선 실록에 기록되는 대상자인 임금은 단어 그대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실록의 내용을 절대 볼 수 없었다. 이는 태조 이성계때부터 만들어지고 지켜져온 철칙으로 만약 임금이 실록을 보려 했다간 감히 태조의 뜻을 거스를 셈이냐며 상하좌우 막론하고 개까였기 때문에 아무리 무소불위의 존재인 임금일지라도 차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실제로 태조나 세종 등 몇몇 임금들이 선대 임금들의 실록이 보고 싶다고 말을 꺼낸적이 있는데 그 때 마다 신하들에게 잔소리를 듣고 그만두었던 적이 있었다. 세종의 경우는 집요하기까지 해서 수차례나 보고 싶다고 요청했는데 결국은 태조실록을 한번 보는 것에서 그치고 그 외엔 전부 다 신하들의 반대에 걸려 뜻을 접어야 했다. 기사

참고로 세종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 한~ 참 전의 실록은 국왕도 업무에 있어 선대왕들이 어떻게 하였었는지 참고용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실록을 기록한 당사자들이 모두 죽고 없을때 같은 아주 먼 예전 실록만 열람이 가능한 수준이며 아직 실록을 기록한 당사자들이 살아있을 만큼 가까운 시대의 실록은 절대 열람할 수 없었다. 실제로 세종이 그렇게 보고싶어 했던 실록은 아버지인 태종의 실록이였는데 세종이 태종실록의 열람을 요청할 때 마다 '전하가 그걸 한번 보고 나면 좋든싫든 사관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할 것이고 사관들도 그 때문에 눈치가 보여 제대로 기록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연산군 대에서 결국 이 철칙이 깨지고야 마는데 연산군이 꼭 필요해서 그러니 반드시 자기 실록을 봐야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리자 결국 신하들이 연산군 자신의 실록을 보여준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임금의 경우 실록이 완성된게 아니라 기록본만 있는 상황이라 진짜 있는 모든 기록을 100% 날것으로 기록한 상황이라 임금의 치부 등도 많이 적혀있는데다가, 여기에 사관 자신의 주관적 생각이 담긴 논평[2]까지 섞여 있어 이게 임금 눈에 들어가면 여러사람 목 날아갈 판국이라 신하들이 급하게 필티링을 가해 최대한 순화한 버전으로 보여주었다.

이 때부터 사관들이 위기를 느껴서 행한 작업이 바로 '세초'이다. 이것은 실록 정식 버전 편찬이 끝나면 기록본을 물에다 씻어 없애는 작업으로, 이는 물론 물자가 부족한 고대 사회에서 귀한 물품인 종이를 재활용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런 100% 날것이 그대로 기록된데다가 사관의 주관적 논평이 적혀있는 기록본이 임금의 손에 넘어가 여러 사람 피 보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던 것이다.

그나마 사관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이런 막장짓을 한 연산군이 나중에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는 점으로, 이 때 부터 임금이 실록을 열람하고자 하면 신하들이 '실록을 열람한 연산군이 무슨 꼴 났는지 아시죠?'라며 임금의 실록 열람을 반대할 강려크한 래퍼토리를 하나 추가해주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연산군 이전까지만 해도 사실 임금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실록을 볼 수 있는 상황이였으나(단지 그동안 임금들이 개념이 있어서 그러지 않았을 뿐) 연산군 이후 임금이 실록을 보겠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연산군과 동급입니다'라고 자폭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한편으로 일단 100% 전부 다 기록하고 사관의 개인적 논평까지 적되, 정식본으로 바꿀때는 기록본에서 불필요한 부분들은 쳐내고, 객관성이 떨어져 보이는 부분은 제거나 수정을 하는 식으로 최대한 객관성을 살려 편찬하였기에 이런 사건들을 거치면서 실록의 객관성은 더욱 강력하게 보장받을 수 있고 그것이 오늘날 조선왕조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근간이다. 또한 이는 한국에서 '고대 사회' 하면 조선을 연상시킬 정도로, 조선의 영향이 현대 사회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바탕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대한민국 직전 국가가 조선이였다는 점도 작용하긴 하지만)

실록으로 인정되지 않는 실록

고종 실록과 순종 실록 그리고 순종 실록 부록은 일제강점기 때 편찬되어 일제의 날조가 들어간 정황이 의심되어 실록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연산군광해군은 중간에 반정으로 퇴위당해 왕에서 '군'으로 강등당했기 때문에 연산군과 광해군의 기록을 담은 실록은 '실록'이라 칭하지 않고 각각 '연산군 일기'와 '광해군 일기'로 불린다. 사실 단종세조의 반정에 의해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당했을때는 하마터면 단종의 실록도 '노산군 일기'가 될 뻔 했지만 나중에 숙종대에 복권되어 단종으로 모셔졌기 때문에 '단종 실록'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기타

각주

  1. 고종 실록, 순종 실록, 순종 실록 부록 포함.
  2. 실록의 경우 기록본에서는 '사관은 논한다(史臣曰 / 사관왈)'라고 쓰고 당시 상황에 대해 자신의 주관적인 논평을 적는 경우가 있었다. (예: '사관은 논한다. 임금이 오늘 무리한 세금 증세 정책을 추진하는 정말 바보같은 선택을 했다.' 등) 물론 이 논평은 임금이 서거하여 기록이 완료되고 기록본을 정식 버전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쳐내 없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