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갑오개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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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2월 17일 출범한 '''제2차 김홍집 내각'''은 크게 박영효의 갑신파, 김홍집 중심의 갑오파, 박정양 중심의 정동파 등 세 세력이 참여한 연립 내각이었다. 박영효 등 갑신파는 국내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을 갖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이들 갑신파를 이용하여 갑오파와 정동파 사이의 정쟁을 제어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1894년 12월 17일 출범한 '''제2차 김홍집 내각'''은 크게 박영효의 갑신파, 김홍집 중심의 갑오파, 박정양 중심의 정동파 등 세 세력이 참여한 연립 내각이었다. 박영효 등 갑신파는 국내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을 갖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이들 갑신파를 이용하여 갑오파와 정동파 사이의 정쟁을 제어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1895년 초부터 박영효는 일본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조선 조정 내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여 집권을 시도했다. 박영효는 갑오파의 조희연 등이 자파의 인물을 요직에 임명하려 하는 것을 방해하고 대신 자기의 측근들을 임명하려 하였으며, 김홍집을 밀어내고 자신이 총리대신직을 차지하려 하였다. 이같은 박영효의 행보와 일본의 의중이 충돌함에 따라, 박영효는 일본의 조선 이권 침탈 시도에 저항하는 독립 지향적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런데 1895년 초부터 박영효는 일본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조선 조정 내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여 집권을 시도했다. 박영효는 갑오파의 조희연 등이 자파의 인물을 군부의 요직에 임명하려 하는 것을 방해하고 대신 자기의 측근들을 임명하려 하였으며, 김홍집을 밀어내고 자신이 총리대신직을 차지하려 하였다. 이같은 박영효의 행보와 일본의 의중이 충돌함에 따라, 박영효는 일본의 조선 이권 침탈 시도에 저항하는 독립 지향적 입장에 서게 된다.


1895년 5월 무렵이 되면 국제 정세도 급변하게 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정하여 한반도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나, 일본의 지나친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5월 4일)에 굴하여 요동 반도를 반환하는 등 도리어 그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된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 내에서도 일본의 지위가 하락하고 러시아와 미국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었으므로, 박영효는 기본적으로 친미 · 친러 성향이던 고종과 민비가 평소 일본과 제휴해 오던 자신과의 제휴 관계를 청산하여 자신을 실각시키게 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따라서 박영효는 군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해야 했던 것이다.
1895년 5월 무렵이 되면 국제 정세도 급변하게 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정하여 한반도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나, 일본의 지나친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5월 4일)에 굴하여 요동 반도를 반환하는 등 도리어 그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된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 내에서도 일본의 지위가 하락하고 러시아와 미국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었으므로, 박영효는 기본적으로 친미 · 친러 성향이던 고종과 민비가 평소 일본과 제휴해 오던 자신과의 제휴 관계를 청산하여 자신을 실각시키게 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따라서 박영효는 군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해야 했던 것이다.

2018년 11월 8일 (목) 12:10 판

제2차 갑오개혁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한 1894년 12월 17일부터, 박영효가 왕궁 침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되어 실각한 1895년 7월 6일까지의 기간에 조선에서 진행된 개혁 조치들을 말한다.

제2차 갑오개혁의 배경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촉발된 청일 양국의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은 당초 청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1894년 9월 16일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이 대승을 거두고 9월 17일 황해 해전에서도 일본군이 승리를 거두자 정세가 급격히 변화했다. 일본은 더 이상 조선 조정 내의 개혁 추진에 대한 개입을 소극적으로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당초 방관 정책을 펴던 오오토리 게이스케 주한 일본 공사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임명한다.

한편 당초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할 친일 정권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갑신정변 당시의 급진 개화파인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입각하도록 하려 하였다. 박영효는 1894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조선 조정은 여전히 갑신정변을 역모로 규정하여 정변의 주동자들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박영효는 1차 갑오개혁을 추진한 정권인 1차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지 못하고 인천에서 사태를 관망해야 했다.

이같은 상황은 9월 16일 평양전투를 계기로 반전되어, 조선 조정은 더 이상 박영효를 입각시키려는 일본 이노우에 공사의 압력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12월 9일 고종이 갑신정변 당시의 주동자들을 사면함에 따라 박영효 등 갑신파 인물들에게 정치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에 따라 12월 17일에는 김홍집을 총리대신,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하는 제2차 김홍집 내각 혹은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이 출범한다.[1]

개혁 추진 세력의 변동

1894년 12월 17일 출범한 제2차 김홍집 내각은 크게 박영효의 갑신파, 김홍집 중심의 갑오파, 박정양 중심의 정동파 등 세 세력이 참여한 연립 내각이었다. 박영효 등 갑신파는 국내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을 갖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이들 갑신파를 이용하여 갑오파와 정동파 사이의 정쟁을 제어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1895년 초부터 박영효는 일본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조선 조정 내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여 집권을 시도했다. 박영효는 갑오파의 조희연 등이 자파의 인물을 군부의 요직에 임명하려 하는 것을 방해하고 대신 자기의 측근들을 임명하려 하였으며, 김홍집을 밀어내고 자신이 총리대신직을 차지하려 하였다. 이같은 박영효의 행보와 일본의 의중이 충돌함에 따라, 박영효는 일본의 조선 이권 침탈 시도에 저항하는 독립 지향적 입장에 서게 된다.

1895년 5월 무렵이 되면 국제 정세도 급변하게 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확정하여 한반도에 대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나, 일본의 지나친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5월 4일)에 굴하여 요동 반도를 반환하는 등 도리어 그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된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 내에서도 일본의 지위가 하락하고 러시아와 미국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었으므로, 박영효는 기본적으로 친미 · 친러 성향이던 고종과 민비가 평소 일본과 제휴해 오던 자신과의 제휴 관계를 청산하여 자신을 실각시키게 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따라서 박영효는 군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해야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5월 17일에는 김홍집과 조희연이 실각하여 갑신파가 주도하고 정동파가 참여하는 새로운 내각, 즉 박영효 내각이 수립된다. 이 내각에는 서재필, 윤치호 등 박영효의 측근들이 각료로 참여했으며, 총리대신 자리에는 박정양이 앉았으나 실권은 내부대신 박영효가 쥐고 있었다.

1895년 5월 하순에 출범한 박영효 내각은 이후 박영효가 실각하게 되는 7월 초까지 주로 군과 경찰 조직, 지방행정 제도에 중점을 두어 활발한 개혁 활동을 펼쳤다. 이 당시 각료 18인 중 10명이 오랜 기간의 미국 생활을 거친 사람들로서, 이 정권은 일본 지향적이라기보다는 서구 지향적인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혁의 내용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