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갑오개혁

제1차 갑오개혁은 좁은 의미의 갑오개혁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1894년 7월~12월 기간 동안 일본의 군사적 압력 하에 군국기무처를 통해 이루어진 개혁 조치들을 말한다.

제1차 갑오개혁의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무력 점령한 일본은 대원군을 입궐시키고, 박영효 등 갑신정변 이후 해외 망명해 있던 개화파를 귀국시켜 친일 정권 수립을 구상했다. 기본적으로 친청 반일 성향이었던 대원군은 물론이거니와, 박영효 등 망명 개화파 인사들과 국내의 개화파 사이에도 미묘한 알력이 있는 등, 일본이 인위적으로 구성하려 한 개화 정권은 애초부터 파탄이 예견된 것이었다.

평소 조정 내 개혁파 그룹을 형성하고 있던 유길준, 조희연 등의 소장파 관료들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기회로 삼아 집권하여, 대원군을 섭정으로 추대하고, 민씨 정권 하에서 푸대접을 받아 오던 김홍집 등의 원로 개혁 정치가들을 초빙하여 개혁파 정권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들은 7월 27일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그 회의원(會議員=의원)으로 이름을 올렸고, 8월 15일에는 김홍집이 의정부 총리대신, 박정양이 학무아문대신, 조희연이 군무아문 협판 등에 제수되었으며, 대원군파의 핵심 인물인 이준용 역시 내무아문 협판 겸 통위사에 제수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정권을 장악했다.

이 당시 아직 의정부의 명칭이 내각으로 개칭되지는 않았으나, 이 시기의 각료진을 흔히 제1차 김홍집 내각 혹은 김홍집-이준용 내각이라 한다. 이 중 후자는 이 정권이 적어도 초기에는 개화파와 대원군파의 연립 내각이었음을 반영하는 명칭이다. 그러나 8월 중순 이후 친일 개화파와 대원군 사이의 균열이 노골화되면서 군국기무처 내에서 대원군파 인물들이 축출된 이후, 실질적인 개혁의 추진 세력은 김홍집 등의 개화파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군국기무처[편집 | 원본 편집]

제1차 갑오개혁은 곧 ‘군국기무처의 개혁 활동’으로도 정의된다. 군국기무처는 대원군-김홍집 정권의 비상 입법 및 정책발의기구로서, 7월 27일에 출범하여 10월 29일까지 3개월의 기간 동안 무려 210건의 정책건의안을 의결했다.

7월 30일에 공포된 <의정부관제>에 따르면 군국기무처는 의정부 산하 9개 기구 중 가장 상위의 부서로서, 그 직권에 관해서는 “국내 대소 사무를 전의(專議)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그 관할 사무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권한이 막강하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안은 국왕의 재가를 거쳐 국법으로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군국기무처 출범 초기인 7월 30일에는 ‘평민이더라도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의견을 가진 자는 군국기무처에 글을 올려 회의에 부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일반 민중에게 발의권을 부여하는 획기적인 의안이 의결되었다. 또한 10월 9일에는 군국기무처를 (행정 기구인) 의정부 산하 기구로 두는 것이 아니라, (삼권을 분립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처럼) 의정부와 독립된 입법 기구인 의회(議會)로 개편하자는 안이 가결되어 한국사 최초로 의회의 설립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의회 설립 시도는 10월 19일 회의에서 보류 및 취소되어 무산되었는데, 자세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개혁 내용[편집 | 원본 편집]

대외관계 관련[편집 | 원본 편집]

  • 독자 개국기년 사용
  • 공공 사무에서 국문(한글) 사용
    • 군인 교과서를 한글로 만들어 교육
  • 청과의 책봉 관계 청산, 불평등조약 개정, 대등 관계 외교 결의
  • 일본과의 관계 격상
    • 일본식 화폐 제도 도입
    • 의정부 산하 8아문 내에 일본인 고문 초빙
    • 신식 근위대(친위영) 창설, 일본인 교관 초빙
    • 반일 성향의 서양 고문 해임

사회 신분제도 개혁[편집 | 원본 편집]

동학농민군은 1894년 6월 11일 조정 측과 전주화약을 체결하고 자진 해산했으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7월 23일)과 청일전쟁 등의 사건을 계기로 대중의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또 9월 무렵 군국기무처에서 밀려나 실권을 잃은 대원군이 일본과 친일 내각을 몰아내려 청군 및 동학군과 내통 및 연락함에 따라, 반일 · 반개화의 기치를 내걸고 1894년 9월에 2차 봉기하였다.

김홍집 내각의 군국기무처는 2차 봉기가 일어난 9월 초 이전까지는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에 부응하는 조치를 취해 농민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고, 봉기가 일어난 이후에는 진압 대책을 강구했다. 군국기무처의 사회제도 개혁 조치들은 동학 농민운동에 대한 회유 시도의 맥락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 관리 임용에 신분 제한 철폐
  • 과부의 재혼 허용
  • 조혼 금지 : 결혼 최소 연령을 남 20세, 여 16세로 규정
  • 노비 제도 철폐, 매매 금지
  • 천인 직종이었던 '역인 · 창우 · 피공(驛人 · 倡優 · 皮工)'을 면천 : 천인 계급 자체를 철폐한 것이 아니어서, 노비 · 역인 · 창우 · 피공 외 나머지 천인 계층에 대한 차별은 철폐되지 않았다.
  • 서얼 차별 완화 : 적자가 없더라도 서자가 있다면 양자를 들일 수 없고 서자가 제사를 잇도록 의무화
  • 기술직 장인을 관료로 발탁

정부기구 개편[편집 | 원본 편집]

군국기무처의 관제안 중 거의 전부와 의정안 중 1/3이 중앙정부 기구의 개편에 관한 것이었던 만큼, 제1차 갑오개혁의 핵심은 정부기구의 개편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왕조의 통치 기구는 근대국가와 비교하여 몇 가지 비효율성을 안고 있었는데, 첫째로 각 부서의 관할 업무가 중복되거나 서로 다른 성격의 업무가 한 부서 안에서 뒤섞인 채 이루어지고 있었고 부서 간 명령 및 보고 체계도 불분명했다. 둘째로 왕실 사무를 담당하는 궁중 부서가 지나치게 비대했다. 셋째로, 근대국가의 복잡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기에 전통적 ‘6조’의 기구는 숫자도 부족하고 기능 면에서도 부적합했다. 민씨 집권 시기인 1880년대에 각종 근대 기구가 신설되기는 하였으나, 그 때 그 때의 필요에 따라 즉흥적이고 무원칙하게 설치되어 오히려 비효율성을 심화시켰다.

따라서 군국기무처는 모든 정치행정기구를 궁내부-의정부-8아문 체제로 재정비했다. 궁중 사무는 궁내부로 통합하여 일원화하고, 국가 통치와 관련된 사무는 의정부로 모아 권력을 집중시켰으며, 의정부 산하의 6조를 8아문으로 늘리면서 1880년대에 설치된 각종 근대적 기구들을 8아문으로 통폐합했다. 이에 따라 기존에 의정부가 유명무실했던 것과 달리 1차 갑오개혁 시기의 의정부는 실질적인 최고 정치 기구로 부상했다.

결과적으로 1차 갑오개혁에 따른 궁내부-의정부 체제는 1885년 이후 일본 중앙정부가 취하고 있던 궁내부-내각 체제와 유사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또한 궁내부와 의정부를 분리하고 겸직을 금지한 것, 기존에 국왕이 행사하던 인사권 · 재정권 · 군사권을 관료에게 이임하고 관료의 재량권을 확대한 것 등은 사실상 국왕의 권력을 축소 제한하는 조치로서, 이에 따른 조선의 정치 체제는 관점에 따라서는 입헌군주제로도 볼 수 있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더불어 관리의 임용에 있어서도 과거제도를 폐지하는 등 근대적 일본식 관료제도를 도입하였다.

경제 개혁[편집 | 원본 편집]

  •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
  • 왕실 재정을 궁내부 산하 진공회사(進供會社)에서 담당하게 하여 왕실의 독자적 재정권을 박탈
  • 홍삼 · 금광 · 진상품에 대한 관리 권한을 국왕으로부터 탁지아문으로 이임
  • 금납제 실시 : 공납 등 물건으로 납부하던 세금을 폐지하고 화폐로 일원화.
    • 금납제를 운영할 '미상회사(米商會社)' 설립
  • 근대 은행 설립
  • 근대적 화폐제도 수립
    • 신식화폐 주조량이 충당되기 전까지 "잠시 외국 화폐를 혼용할 수 있다"고 명시하여, 일본 화폐가 조선 내에 침투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여 조선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도록 함

이상과 같은 군국기무처의 경제 개혁은 토지 재분배나 토지세 제도의 근본적 개편은 시도하지 않아 혁명적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 또한 공무아문과 농상아문을 설치하여 근대적 산업화의 의지를 표방하였으나 이를 위한 실제적 조치를 의결하지는 않았다. 개혁 추진을 위해 필요한 재정 수요를 일본의 차관에 의존하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혁 요구에 부응하여 기존 징세 제도 운영 상의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세제를 개편하여 농민 부담을 줄이는 조치를 시행했다.

  • 관리들의 횡령과 착복에 대해 조사하여 부당 이익을 국고에 환수
  • 부당하게 강탈당한 농지, 삼림, 가옥을 피해 사실이 증명되는 피해자에게 환원
  • 동학 농민군 봉기 지역의 세율 조정
  • 지방 잡세 혁파
  • 환곡제 개혁
    • 환곡제 운영에 있어서 관이 이자 수익을 수취하지 않도록 함
    • 사창(社倉) 설립을 허가하여, 농민들이 환곡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식량을 저장하여 재해 등에 대비할 수 있게 함으로써 환곡제의 점진적 폐지를 계획

군사 개혁[편집 | 원본 편집]

조선은 1881년 이후 외국인 교관을 초빙하는 등 군대의 근대화를 추진해 왔으나 그 방식은 체계적이지 못했다. 초빙한 군사 교관들이 일본, 청, 미국인으로 뒤섞여 있었고, 조직 면에서도 조선의 전통적 부대, 청국식 부대, 미국식 부대가 산재했다. 이렇게 조직된 조선군은 1894년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에 패퇴하면서 그 허약함을 드러냈다.

군국기무처는 각 영을 통합하여 친위영(親衛營)을 설치함으로써 군 조직을 일원화하려 했다. 그러나 8월과 9월 두 차례 의결된 군국기무처의 안은 고종이 결재를 보류함에 따라 실현되지 못했다. 이는 군국기무처가 초빙하려 한 교관은 일본인인 데 비해 고종은 서양 교관의 초빙을 원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친위영 설치가 미뤄진 이후로 군국기무처는 더 이상 군제개혁을 위해 별다른 시도를 하지 않게 되는데, 이유는 조선의 상황이 군사력을 증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일본 역시 조선의 군사력을 강화해 줄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대 경찰제도 도입[편집 | 원본 편집]

군국기무처는 초기에 일반 국민이 군국기무처에 의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군국기무처의 개혁 과정에서 국민의 정치에 대한 참여는 신장되기보다는 오히려 위축되었다. 중앙 정부 기구 개편 과정에서 사간원 · 사헌부 · 홍문관 등 대간 기관이 철폐되어 비판 기능이 무력화되었고, 또한 근대적 경찰제도가 억압적인 형태로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군국기무처는 의정부 내무아문 산하에 경무청(警務廳)을 설치했다. 경무청은 국민 보호를 위한 치안 업무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결사, 집회, 신문잡지, 도서, 기타 판인 등"에 관해서 "국법을 범하고자 하는 자를 은밀한 가운데 탐포(探捕)"하도록 명시되어 있어 민간인에 대한 정치 사찰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경무청은 위경죄(違警罪; 경범죄)에 대한 즉결 처분권과 한성부 내의 재판권도 갖고 있었는데, 경무청의 즉결 처분권은 당시에도 문제가 될 정도로 남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 9일 군국기무처 회의에서 채택된 의안에 따르면,

"경무청에 피계(被繫; 체포)된 자는 혹 법사(法司)의 재판을 거치지 않은 채 처단하는 경우가 있어 인명을 중히 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는 길이라 할 수 없으므로 금후 중죄의 결안은 법사의 공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생명을 거해(遽害; 급히 해함)치 못하게 함으로써 계하(啓下) 안건의 실효를 거두도록 한다."[1]

고 되어 있어, 당시 경찰제도가 어느 정도로 억압적이었는지를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근대 사법제도 도입[편집 | 원본 편집]

  • 고문 폐지, 재판 판결 없이 형벌을 가하지 못하게 함
  • 연좌제 폐지, 죄인의 자손들의 관리 임용을 허용
  • 법무아문을 설치하여 "사법 · 행정경찰 · 사유(赦宥; 사면)를 관리하며 고등법원 이하 각 지방재판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경무청의 권한이 법무아문을 넘어서게 됨으로써, 사법권이 행정권으로부터 독립되지 못하고 재판권이 행정부에 사실상 귀속되었다.

교육제도 개혁[편집 | 원본 편집]

기존 6조 체제에서 예조가 외교 · 문화사업과 더불어 교육 관련 사무도 맡았던 것과 달리, 8아문 체제에서는 학무아문을 설치하여 교육행정 사무를 전담하도록 했다. 학무아문은 9월 2일 '학무아문고시(學務衙門告示)'를 발표하여, 먼저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서울부터 세워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후 대학교와 전문학교도 세울 계획을 발표했다. 교육과정 면에서는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전통적 유학 교육을 폐지하고, 국어, 한국사, 세계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수학, 물리, 외국어, 체육 등 근대적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또한 한글 교과서를 편찬했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송했다.

전체적으로, 군국기무처에서 채택한 교육 관련 의안은 4개에 불과하여, 군국기무처의 개혁 사업에서 교육 부문은 중요 순위가 떨어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학 농민군의 반응[편집 | 원본 편집]

군국기무처는 동학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지역에 선유사(宣諭使)를 파견하여, 개화 정책을 홍보하는 한편 "일병(日兵; 일본군)이 각 지방에 유주(留駐; 진주, 주둔)하는 것은 청병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어서 조금도 악의가 없다”고 선전하여 일본군의 부당한 한반도 침입을 변호하고 민중의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이같은 기만적 선전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고, 9월 초부터는 반일 · 반개화를 기치로 내건 농민군의 2차 봉기가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9월 23일 무렵에는 군국기무처의 정책 방향이 동학에 대한 회유에서 강경 진압으로 완전히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1차 갑오개혁의 종료[편집 | 원본 편집]

일본군이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여 친일 내각을 수립하고서도 내정 개혁 자체에 직접적 개입은 하지 않은 채 방임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은, 청일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되도록이면 조선 조정과 민중의 반감을 사지 않고 협조를 얻을 필요가 있었으며, 또한 러시아 등 주변국에 간섭의 빌미를 주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894년 9월 16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대(對) 한반도 정책은 방관주의에서 적극 간섭으로 선회한다. 이 날짜는 일본군과 청군이 전면으로 충돌한 평양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를 거둔 날짜로서, 청일전쟁에서 예상 외로 일본군이 우위를 보이자 군국기무처 내에서 대원군파와 박영효파 · 친일 개화파 등 정파 간 정쟁이 격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청일전쟁 진행 상황에 있어서 자신감이 생기자 한반도에 대해 더 적극적인 간섭을 자행할 여유가 생겼고, 또 경복궁 점령을 통해 수립한 정권이 예상과 달리 내부 정쟁으로 인해 손쉽게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조선 조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1894년 10월 17일은 군국기무처의 거의 마지막 회의일이었다고 언급되어 있어[2], 10월 말 이후에는 사실상 군국기무처의 기능이 정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2월 17일에는 군국기무처가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각주

  1. ≪일성록(日省錄)≫, 고종 31년 (음력)9월 11일
  2.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