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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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晥鎭. 호족명은 정완진(鄭完鎭). 창씨명은 야마모토 세이지(山本淸次).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생애

1927년 3월 1일 경상북도 김천군 구성면 광명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3년 4월 동교생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서상교 등이 앞서 조직했던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 활약하였다. 그해 5월에는 그 동안 가입한 단원 전원이 대구시 앞산인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갖고,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써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관방국(官房局)·체육국(體育局)·과학국(科學局) 등 3국을 두고 그밑에 10여부(部)를 두어 조직을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정광해와 함께 정단원(正團員)으로 임명되었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 각종 체육회를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노력하였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는 학교에서 수업도중 다른 단원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일경의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동년 10월 대구형무소로 옮겨졌다가 1943년 10월 26일 기소유예로 출옥하였다.[1]

8.15 광복 후 경북여자고등학교와 대건고등학교 등에서 20년 간 교사로 재직했고, 경북산업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23년 간 재직하다 퇴임하였다. 이후 대전광역시 유성구 계산동에 거주했다.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014년 2월 27일 충청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망언 주장에 대해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민국 고유의 영토임에도 마치 자기네 땅인 것처럼 우기고 있어 환장할 노릇”이라며 “후손들에게 있는 그대로 사실들을 얘기해야지 왜 역사를 왜곡하느냐”고 비판했다. 그리고 “앞으로 북한과 관계를 개선시켜 분단이 종결됐으면 하는 게 마지막 바람”이라고 밝혔다.[2]

2021년 4월 14일 대구의 한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94세.[3]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6묘역에 안장되었다.

외부 링크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