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22번째 줄: 22번째 줄:


==명의 개입==
==명의 개입==
당시 명 황제였던 [[만력제]]는 변동하는 명의 내리막길 속에서 [[중국|대국]]답게 대군을 보내어 조선을 돕는다. <ref>그렇다고 만력제를 성군으로 생각하지 말자. 명 4대 암군이다. 만력제는 선조와 닮은 점도 있다.</ref> 명의 [[이여송]]은 의주로 도착하자마자 (1593년 1월) 4차 평양 탈환 전투에서 승리하여 평양을 수복한다. 파죽지세의 명군은 서울 코앞까지 오게 되나, 일본군의 반격에 주춤하게 된다. 사실 북부는 수복하고 남부는 관군과 의병의 합작으로 활약하니,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은 꺾인 것이고, 이는 회담으로 이어진다.
{{각주}}
{{각주}}



2016년 12월 18일 (일) 10:49 판

今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 이순신, 이순신 - 명량대첩(1597)

개요

임진왜란은 1592년 음 4월,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력 20만을 거느리고 조선을 상륙하여 벌어진 7년 간[1]의 전쟁을 말한다.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짓는[2] 전쟁이다.

원인

원인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원인이 많은 건지 단정지을 수 없는 건지 모르겠는 전쟁15세기 삼포왜란이나 을묘왜변 등으로 악화된 한일 외교 관계가 틀어진 것도 있고, 일본 다이묘들의 단합과 충성도 있다.야욕이라던가 정복욕이라던가 전국시대 이후 일본 내의 질서가 잡힘으로 인해 해외로 발산된 무력 양상이라고도 설명 가능하나, 위의 원인들은 부수적 원인에 불과하고 정확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복 야욕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의 발단

1592년 음 4월 13일, 제 1군에서 제 9군까지, 그리고 수군으로 갈라진 20만 일본군이 상륙하였다. (이하 제1군(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기준))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은 부산진을 공격하였고, 절영도(현 영도구)에서 사냥하던 부산첨사 정발은 조공하러 오는 줄 알고20만 인구의 조공이면 나라 바치러 오는 수준 하지만 여기서 일본군이 출동한다면 어떨까?무시하였다가 뒤늦게 싸웠지만 패하였다. 4월 15일, 동래성에서 송상현이 戰死易街道難(: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 내어주기는 어렵다.)을 내걸고 싸웠지만, 그 역시 패전하였다. 계속해서 북상한 일본군은 상주, 충주에서 승전하였다. 그 곳에는 오랑캐를 토벌하여 조선의 명장으로 불리던 이일신립이 있었다. 그러나 이일은 일본군이 쳐들어왔음을 믿지 않았다가 군사를 잃고 충주로 가서 신립과 싸웠으나, 신립은 탄금대에서 패하여 자살하고, 이일은 도망쳐서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北向蒙塵(: 북쪽으로 피난을 가다.)을 결정하고 5월까지 개성, 황주, 평양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선조가 듣는 모든 욕의 알파이자 오메가그 때문에 분개한 백성들은 각종 시설을 불태워서 경복궁을 비롯한 수많은 시설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한편,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선조의 피난에 적잖이 당황하였고(일본은 성주가 할복을 하던가 차라리 혀 깨물어 죽던가 하기 때문에, 피난을 가지 않는다.), 전쟁의 장기화를 예상해서 추가 물자 지원을 하였으나 그분에게 털렸다. 서울에서도 해유령 전투 등의 작은 승전이 있었지만 소규모였고, 무능한 관군에게 분개한 백성들은 의병을 꾸리게 된다의벤져스.

조선의 반격

북쪽으로 피난도망[3]을 가게 된 선조는 그의 아들 광해군과 분조를 하게 된다. 선조의 조정과 광해군의 조정으로 나뉜다고 이해하면 쉽다. 그러고는 순화군, 임해군과 함께 전국(일본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북한 지역)을 돌아다니게 된다. 이에 광해군 쪽으로 민심이 몰리게 되고, 선조는 욕을 먹게 된다.장수 할 듯 선조가 먹는 욕의 알파이자 오메가(2) 의병 쪽에서는 전국에서 궐기를 하게 된다. 의병장은 주로 양반 유생이었는데, 그 외에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의병장을 맡았다. 대표 의병으로는 정문부, 서산대사, 사명대사, 김천일, 조헌, 고경명, 영규대사, 곽재우 등이 있다. 이들은 주로 게릴라전이나 관군과의 협공으로 일본군들을 공격하였다.

1592년 후반기의 임진왜란 양상

임진왜란 속 전투는 총 105번인데, 이중 1592년 에 발생한 전투는 70번이다. 그러나 초반에는 이전 내용을 보았듯이 상당히 안습한 실정이다. 은 도망가고, 관군은 무능하고, 일본군은 강려크하기에, 사실 예견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후반기는 많이 다른 양상을 띄었다.

전라도 사수

진주성에서의 양상

의병들의 활약

명의 개입

당시 명 황제였던 만력제는 변동하는 명의 내리막길 속에서 대국답게 대군을 보내어 조선을 돕는다. [4] 명의 이여송은 의주로 도착하자마자 (1593년 1월) 4차 평양 탈환 전투에서 승리하여 평양을 수복한다. 파죽지세의 명군은 서울 코앞까지 오게 되나, 일본군의 반격에 주춤하게 된다. 사실 북부는 수복하고 남부는 관군과 의병의 합작으로 활약하니,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은 꺾인 것이고, 이는 회담으로 이어진다.

각주

  1. 사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구분 짓지 않을 때 7년이고, 엄격하게 따진다면 5년이다.
  2. 사실 이 점도 의견이 분분한데, 어떤 쪽에서는 임진왜란(1592)을, 어떤 쪽에서는 병자호란(1636)을 가지고 조선의 전후기를 구분짓는다.
  3. 이것을 상당히 비판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 왕이 잡히면 종묘사직이고 뭐고 없다. 그러므로 선조의 피난은 어느 정도의 당위성이 있는 행위이다. 그 뒤가 문제지
  4. 그렇다고 만력제를 성군으로 생각하지 말자. 명 4대 암군이다. 만력제는 선조와 닮은 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