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Chj12122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7월 28일 (금) 01:51 판 (→‎사건의 전개)


乙未事變

여우사냥이 성공했다. 이제 조선은 우리 것이 되었다. - 미우라 고로

개요

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 일당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으로서 일제조선 침략 의도가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배경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조선에서 내정개혁(소위 '갑오개혁')을 강요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조선 조정은 1895년 8월민영환을 주미 전권공사로 등용하는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김가진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이완용친러파를 기용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손잡고 친일파의 거두 박영효를 축출하였다. 이로써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됐는데 조정은 친미·친러파가 주축이 되었고 이들은 명성황후와 가까운 사이였다. 이렇게 조정에서 친일파들이 몰락하자 위협을 느낀 일본은 급기야 그 해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을 강행하였다.

사건의 전개

1895년 10월 8일 새벽 도쿄대 출신 등 온갖 우익 엘리트 출신으로 구성된 암살단이 낭인으로 변장하고 일본 공사관 수비대와 우범선이 이끌던 훈련대와 함께 경복궁에 잠입했다.

광화문에 다다른 이들은 미국인 지휘관인 윌리엄 다이가 이끄는 시위대를 맞았는데 시위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무기가 꾸져서 개처발리고 조선 정부를 배신한 훈련대의 원래 대장이었던 홍계훈이 달려와 이들을 꾸짖었으나 일본군에게 살해당한다.근데 영화에선 용감히 싸우다 전사...

시위대를 몰아낸 훈련대는 흥선대원군감금된거처하던 건녕전 앞 뜰에 모여 대기탔고, 낭인들은 건청궁으로 몰려가서 명성황후를 찾으며,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잡아 행방을 캐물으며 머리채를 쥐어잡고 마구 구타를 가했다.[1] 결국 건청궁 곤녕합에서 낭인들은 명성황후를 찾아냈다.

이 긴박한 상황에 뜬금없이 멋있는 모습을 보여준 충신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었는데 스스로 두 팔을 벌려 명성황후를 죽이려는 걸 가로막다 총을 맞고 쓰러진 후 신문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에게 한쪽 팔이 잘리고, 또다른 한쪽 팔도 잘리고, 결국 허리까지 베이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후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끌려나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낭인들은 명성황후를 집단강간하다 토막살낸것도 모자라 불에 태워버리는 등 제대로 고인드립을 시전했다.[2]

한편, 명성황후의 직접적인 시해범이 누구인지도 문제되는데, 종전에는 한 일본 낭인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부 학계에서는 '우치다 사신'을 근거로 일본군 경성수비대 장교였던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3]

결과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은 사실상 고종경복궁감금하다시피 하였다. 이에 고종은 김홍집에게 지시하여 왕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하였음을 공포하도록 하여 이른바 을미의병을 일으킨다. 이에 일본군들이 지방으로 이동하자 고종은 1896년 2월 6일, 러시아 대사관으로 대피하게 되는데,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명성황후 생존설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2013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4개월 뒤 명성황후가 살아 있다는 내용을 담은 독일 외교비밀문서와 을미사변 때 탈출했다고 기록한 영국 문서를 각각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았다”고 밝혔다.[4]



각주

  1. 독립문 등을 설계한 사바친(A I S Sabatin)은 “마루는 20~25명의 양복 차림 일본인들이 일본도로 무장한 채 점거하고 있었고, 그들은 방의 안팎으로 뛰어다니며 여인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나와 마루 아래로 내던져 떨어뜨리고 발로 걷어찼다.”라고 증언하였다. 을미사변 목격했던 조선 최초의 서양인 건축가 사바친, 중앙일보, 2009.12.16.
  2. 본문과 달리 일본인들이 살해 후 범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3. "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군 미야모토 소위", 연합뉴스, 2015.6.23.
  4.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생존” 외교문서 발견, 경향신문, 201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