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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악가 조수미의 '나가거든' 이라는 노래가 을미사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성악가 조수미의 '나가거든' 이라는 노래가 을미사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역시 을미사변을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역시 을미사변을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다.
*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끝부분에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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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8일 (금) 12:54 판


乙未事變

여우사냥이 성공했다. 이제 조선은 우리 것이 되었다. - 미우라 고로

비록 대한제국이 설립되기 전이나, 본 문서에서는 편의상 "명성황후" 또는 "황후"라는 표현을 사용함.

개요

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 일당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으로서 일제조선 침략 의도가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다.

배경

왕실이나 세자에 대한 걱정만 없다면 여자의 몸으로 왜 정치에 가담하며 척족을 기용하려 하겠는가 - 명성황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조선에서 내정개혁(소위 '갑오개혁')을 강요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에 큰 불만을 느꼈으나, 국력의 차이가 큰 탓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편 명성황후는 일본과 협력하여 대원군을 은퇴시켰으나 이후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 등과 대립하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는 일본에 대한 견제 등의 목적으로 독일, 프랑스와 함께(이하 '3국 정부') 일본에 위력을 행사하였다. 결국 일본은 1985년 4월 11일, "3국 정부의 우호적인 권고대로 (청일전쟁의 전리품인)요동 반도의 영구적인 점령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3국 정부에 전달했다.

이를 알고 고무된 명성황후는 친러외교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균세(均勢)외교, 즉,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하였다.

1895년 8월민영환을 주미 전권공사로 등용하는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김가진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이완용친러파를 기용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손잡고 친일파의 거두 박영효를 축출하였다. 이로써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됐는데 조정은 친미·친러파가 주축이 되었고 이들은 명성황후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종은 "작년 6월(갑오경장)이래 칙령이나 재가사항은 어느 것이고 짐의 의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취소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어 1985년 5월 20일, "앞으로는 임금 자신이 매일같이 정부의 대신들과 접촉하여 대소의 정사를 심의 결정하고 친재한 다음에야 실행토록 할 것"이라는 조칙을 발표했다. 이 조처는 왕권회복과 일본지배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1]

이렇게 조정에서 친일파들이 몰락하고, 왕이 친정을 선포하자 위협을 느낀 이노우에는 그 배후에 황후가 있음을 파악하고, 황후 살해를 계획한다.[2]

사전 준비

아래 글은 을미사변을 주로 참조하였음.

우선 일본은 일본공사로 새로이 미우라를 파견한다.

미우라는 신임장 봉정을 위해 고종을 배알할 때는 단지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이 땅의 풍월이나 즐기면서 명성황후께 관음경의 일부를 청사(淸寫)하여 드릴까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를 통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를 안심시킨 미우라는 음력 8월 2일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구체화했다. 작전명은 여우사냥이었다.

그 계획은 아래와 같다.

1. 궁중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아래 대원군을 입궐시키고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2. 행동부대의 표면에는 훈련대를 내세워 조선인이 일으킨 쿠데타를 가장한다.
3. 행동의 전위대로는 일본낭인부대를 앞세우고 이들을 위한 엄호와 전투의 주력은 일본군수비대가 담당한다.

4. 대원군의 호위의 별동대로는 일본인 거류지의 경비를 담당하는 일본경관을 동원한다.

당초 예정일은 음력 8월 22일이었으나 조선 조정에서 8월 19일, 일본군이 교육해 온 조선인 훈련대의 해산을 결정하고 20일 무장해제를 단행하겠다고 미우라에게 통보하자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로 앞당겼다.

일본은 시해 전 대원군과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된 협약을 맺었는데, 주요 내용은 왕비 사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정사를 맡겨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3]

사건의 전개

시해 전날 밤(양력 10월 7일), 궁중에서는 민영준이 궁중에 등용된 것을 축하하는 파티가 벌어졌다. 당시 명성황후(이하 '황후')는 훈련대의 해산, 민영준의 등용이 이루어져 왕권의 강화 및 일본 세력의 약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만족하고 있었으며, 후원에서 달구경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황후는 일본군과 훈련대가 궁을 포위했다는 것을 알고 곤녕합으로 이동했다. 불행히도 황후는 자신이 표적임을 알지 못 했다.[4]

1895년 10월 8일 새벽 도쿄대 출신 등 온갖 우익 엘리트 출신으로 구성된 암살단이 낭인으로 변장하고 일본 공사관 수비대와 우범선이 이끌던 훈련대와 함께 경복궁에 잠입했다.

광화문에 다다른 이들은 미국인 지휘관인 윌리엄 다이가 이끄는 시위대를 맞았는데 시위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무기가 꾸져서 개처발리고 조선 정부를 배신한 훈련대의 원래 대장이었던 홍계훈이 달려와 이들을 꾸짖었으나 일본군에게 살해당한다.근데 영화에선 용감히 싸우다 전사...

시위대를 몰아낸 훈련대는 흥선대원군감금된거처하던 건녕전 앞 뜰에 모여 대기탔고, 흉도들은 건청궁으로 몰려가서 명성황후를 찾으며,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잡아 행방을 캐물으며 머리채를 쥐어잡고 마구 구타를 가했다.[5] 결국 건청궁 곤녕합에서 흉도들은 명성황후를 찾아냈다.

이 긴박한 상황에 뜬금없이 멋있는 모습을 보여준 충신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었는데 스스로 두 팔을 벌려 명성황후를 죽이려는 걸 가로막다 총을 맞고 쓰러진 후 신문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에게 한쪽 팔이 잘리고, 또다른 한쪽 팔도 잘리고, 결국 허리까지 베이며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후 명성황후는 일본 흉도들에게 최후를 맞이한다. 황후는 이경직이 시간을 끄는 사이 뜰 아래로 피신하였으나 결국 흉도들에게 붙잡혔다. 흉도들은 수차례 황후의 가슴을 내리 짓밟으며 칼로 거듭 황후를 찔렀다. 흉도들은 실수없이 해치우기 위해 황후와 용모가 비슷한 여러 궁녀들도 살해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간 혹은 강간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일본측의 조사기록에는 '죽은 명성황후의 얼굴이 너무 젊어(20대 중반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젖가슴을 살펴보고 확인했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6]

흉도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녹원(鹿園) 숲속으로 운반한 뒤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계속 석유를 부어가며 뼈만 남을 때까지 이를 반복했다.

한편, 명성황후의 직접적인 시해범이 누구인지도 문제되는데, 종전에는 한 일본 낭인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부 학계에서는 '우치다 사신'을 근거로 일본군 경성수비대 장교였던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7]

결과

황후는 시해당했고, 폐비되었으나, 1897년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일본군은 사실상 고종경복궁감금하다시피 하였다. 이에 고종은 김홍집에게 지시하여 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하였음을 공포하도록 하여 이른바 을미의병을 일으킨다. 이에 일본군들이 지방으로 이동하자 고종은 1896년 2월 6일, 러시아 대사관으로 대피하게 되는데,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한편, 일본은 국제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우라 공사 외 관계자 전원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석방하였다.[8]

명성황후 생존설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2013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4개월 뒤 명성황후가 살아 있다는 내용을 담은 독일 외교비밀문서와 을미사변 때 탈출했다고 기록한 영국 문서를 각각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았다”고 밝혔다.[9] 정상수 교수는 러시아 대사관에서 조기 게양을 거부한 사실을 들어명성황후가 살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취지로 발언하였다.[10]

이에 대하여 소설가 김진명 씨는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당시 분명히 사망하였을 것이라며, 에조 보고서에 살해 정황 및 살해 이후 침입자들의 만행까지 자세히 나와 있고, 독일 및 영국의 해당 문서는 심지어 일제의 만행을 덮기 위한 의도가 있음을 의심해볼 수도 있는, 당시의 소문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였다.[11]

학계에서는 위 문서 내용의 진위를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정설(살해설)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주류의견이라고 한다.[12]

매체에서의 을미사변

  • 성악가 조수미의 '나가거든' 이라는 노래가 을미사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역시 을미사변을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다.
  •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끝부분에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각주

  1. 을미사변, 명성황후생가
  2.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고종의 정치·외교 대리인, 명성황후, 조선pub, 2016.10.10.
  3.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고종의 정치·외교 대리인, 명성황후, 2016.10.10.
  4.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서울신문, 2012.9.3.
  5. 독립문 등을 설계한 사바친(A I S Sabatin)은 “마루는 20~25명의 양복 차림 일본인들이 일본도로 무장한 채 점거하고 있었고, 그들은 방의 안팎으로 뛰어다니며 여인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나와 마루 아래로 내던져 떨어뜨리고 발로 걷어찼다.”라고 증언하였다. 을미사변 목격했던 조선 최초의 서양인 건축가 사바친, 중앙일보, 2009.12.16.
  6. 을미사변, 명성황후생가
  7. "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군 미야모토 소위", 연합뉴스, 2015.6.23.
  8.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고종의 정치·외교 대리인, 명성황후, 조선pub, 2016.10.10.
  9.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생존” 외교문서 발견, 경향신문, 2013.7.1.
  10. 방통대 정상수 교수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당시 시해당하지 않았다", SBS뉴스, 2013.7.2.
  11. 김진명 "명성황후 생존? 일제가 잔혹 살해한 것이 진실", 중앙일보, 2013.7.4.
  12.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고종의 정치외교 대리인, 명성황후, 조선일보, 201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