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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이 그 세력을 펼쳐가던 시기, 그 중심지 중 하나였던 북이탈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가정은 독실한 [[가톨릭]]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코 자신도 어린 시절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가톨릭 교육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청소년기는 파시즘과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이는 자신의 에세이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문장 실력이 뛰어났기에 아버지는 변호사가 되길 기대했으나, 에코 자신은 어린 시절 받았던 교육의 영향 때문인지 [[토리노]] 대학에서 중세 철학 및 문학을 전공하였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논문으로 1954년 철학 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 에코는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무신론자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토리노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고, 기호학자로서 자신의 명성을 알리기 시작하였다.1962년 결혼하여 이후 1남 1녀를 두었다. | 1932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이 그 세력을 펼쳐가던 시기, 그 중심지 중 하나였던 북이탈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가정은 독실한 [[가톨릭]]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코 자신도 어린 시절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가톨릭 교육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의 청소년기는 파시즘과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이는 자신의 에세이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문장 실력이 뛰어났기에 아버지는 변호사가 되길 기대했으나, 에코 자신은 어린 시절 받았던 교육의 영향 때문인지 [[토리노]] 대학에서 중세 철학 및 문학을 전공하였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논문으로 1954년 철학 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 에코는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무신론자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토리노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고, 기호학자로서 자신의 명성을 알리기 시작하였다.1962년 결혼하여 이후 1남 1녀를 두었다. | ||
그는 기호학자로서 자신의 스승인 루이지 파레이손의 이론을 이어 해석 기호학(Interpretative semiotics)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50대에 들어선 1980년에 첫 작품 <장미의 이름>을 출판하면서 소설가로서도 데뷔하였다. 이 소설은 그의 주된 관심 분야인 중세 철학, 종교 역사, | 그는 기호학자로서 자신의 스승인 루이지 파레이손의 이론을 이어 해석 기호학(Interpretative semiotics)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50대에 들어선 1980년에 첫 작품 <장미의 이름>을 출판하면서 소설가로서도 데뷔하였다. 이 소설은 그의 주된 관심 분야인 중세 철학, 종교 역사, 기호 해석학을 총망라하고 있으며, 여기에 추리소설의 장르적 특성을 녹여내 만든 것이다. 이 책은 그에게 소설가로서도 큰 명성을 주었다. 이후 그는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등의 소설을 연달아 출판하였다. | ||
또한 그는 현대 사회와 정치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주력 일간지 <레스프레소>에 칼럼을 연재하였으며, 이 칼럼은 이후 에세이집으로 여러차례 출간되기도 했다. 2008년 볼로냐 대학 석좌교수로 취임하여 강의와 집필 활동을 이어가면서 <중세> 시리즈의 총편집을 맡았다. | 또한 그는 현대 사회와 정치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주력 일간지 <레스프레소>에 칼럼을 연재하였으며, 이 칼럼은 이후 에세이집으로 여러차례 출간되기도 했다. 2008년 볼로냐 대학 석좌교수로 취임하여 강의와 집필 활동을 이어가면서 <중세> 시리즈의 총편집을 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