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

영창대군
永昌大君
인물 정보
본명 이의(李㼁)
출생 1606년
조선 한성부
사망 1614년 (향년 8세)
조선 강화도
국적 조선
직업 왕족
종교 유교
가족 아버지 선조, 어머니 인목왕후, 이복형 광해군, 누나 정명공주, 양자 창성군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의 막내아들이자 유일한 적자(嫡子). 제15대 국왕 광해군의 이복동생이다.

출생과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606년, 선조와 그의 계비 인목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의 첫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대신 선조는 9명의 후궁들에게서 13남 10녀를 두었고, 그중에서 공빈 김씨(恭嬪金氏) 소생의 차남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은 총명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도 크게 활약했다.

의인왕후는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인 160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선조는 1602년에 연안 김씨(延安金氏) 김제남(金悌男)의 차녀를 새 왕비로 간택하니,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이다. 당시 선조는 50세, 인목왕후는 18세, 그리고 광해군은 27세였다.

인목왕후는 왕비로 책봉된 이듬해인 1603년에 첫째 정명공주를 낳았고, 1606년에는 둘째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의 유일한 적자[편집 | 원본 편집]

조선의 제13대 국왕인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를 잃은 후, 이복형 덕흥군(德興君)[1]의 3남인 하성군(河城君)을 후계자로 삼는다. 명종이 사망한 후 하성군이 다음 국왕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선 왕실 최초의 방계 국왕인 선조이다.

선조는 자신의 혈통과 정통성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자신도 왕비에게서 적자를 얻지 못하여 후궁 소생의 서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될 처지였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게 되자, 선조의 마음은 영창대군에게 기울어진다.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선조에게 “이 아이를 ‘세자’라고 불러야 합니까, ‘대군’이라고 불러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영창대군의 의복을 세자처럼 입혔으며, 궁중 법도를 어기고 영창대군에게 규정보다 더 많은 재산과 시종을 주었다. 조정의 신하들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나뉘었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자신보다도 어린 적모(嫡母)에게서 태어난 이복남동생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광해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선조는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1608년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광해군이 다음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영창대군은 고작 2세였다.

계축옥사와 사망[편집 | 원본 편집]

광해군이 즉위하고 5년이 지난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영창대군의 외가인 연안 김씨 가문은 인목왕후가 왕비로 책봉된 이후로 부와 권세를 누렸지만, 계축옥사로 인해 한순간에 몰락한다.

연안 김씨 일가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와 ‘의인왕후의 묘지와 공빈 김씨의 묘지에서 광해군을 저주하는 주술 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 외삼촌 김내(金琜)ㆍ김규(金珪)[2]ㆍ김선(金瑄), 이모부 심정세(沈挺世)는 처형되었고, 외할머니 광주 노씨(光州盧氏)는 유배되었다.

7세였던 영창대군도 어머니 인목왕후와 떨어져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인 1614년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병으로 죽었다는 설, 방에 가두어놓고 아궁이에 불을 잔뜩 지펴서 죽게 했다는 설, 독극물을 먹여 죽였다는 설 등등이 전해진다.

인목왕후와 정명공주 모녀는 서궁(西宮)[3]에 유폐되어 불안하고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본래 신분으로 복귀한다. 어린 나이에 비명횡사한 영창대군과 달리, 누나 정명공주는 82세까지 장수하며 7남 1녀를 낳았다. 궁중으로 복귀하여 대왕대비가 된 인목왕후는, 전국의 명산대찰을 다니며 친정 가족들과 아들의 명복을 기원하며 여생을 보냈다.

묘지[편집 | 원본 편집]

본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에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인해 1971년 8월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으로 이장되었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후손[편집 | 원본 편집]

결혼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친자녀가 없으므로, 이복형 경창군(慶昌君)[4]의 4남인 창성군(昌城君)이 그의 사후 양자로 입적되었다.

각주

  1.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昌嬪安氏)의 차남
  2. 선조의 외손녀 서미생(徐梶生)과 결혼했다.
  3. 덕수궁
  4. 선조의 9남. 후궁 정빈 홍씨(貞嬪洪氏) 소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