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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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은 [[2003년]] [[11월 11일]]부터 [[2007년]] [[8월 20일]]까지 존속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창당 후 당이 해산할 때까지 줄곧 [[여당]]이었다. 창당할 때는 100년 정당을 만들자는 포부를 가졌으나…….
'''열린우리당'''은 {{날짜/출력|2003-11-11}}부터 {{날짜/출력|2007-8-20}}까지 존속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창당 후 당이 해산할 때까지 줄곧 [[여당]]이었다. 창당할 때는 100년 정당을 만들자는 포부를 가졌으나…….


영문으로는 Opened Our Party지만, 그냥 Uri Party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열린우리당에 반대하고 비야냥거리는 쪽에서는 닫힌너네당이라는 속어를 쓰기도 했다. 그 외에 약어로 '''우리당'''을 사용했는데, 타 정당에서는 '''우리'''라는 일반명사를 독점하는 행태라고 비판하며 약어로 열우당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약어는 또 열등한 거 같다는 [[늬앙스]]라서 우리당의 반발이 있었는데 두 의견 모두 일리 있어서 결국 우리당에서는 계속 우리당으로, 다른 당에서는 열우당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서로 묵인한 듯.<del>그냥 린우당으로 하면 어떨까?</del>
영문으로는 Opened Our Party지만, 그냥 Uri Party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열린우리당에 반대하고 비야냥거리는 쪽에서는 닫힌너네당이라는 속어를 쓰기도 했다. 그 외에 약어로 '''우리당'''을 사용했는데, 타 정당에서는 '''우리'''라는 일반명사를 독점하는 행태라고 비판하며 약어로 열우당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약어는 또 열등한 거 같다는 [[늬앙스]]라서 우리당의 반발이 있었는데 두 의견 모두 일리 있어서 결국 우리당에서는 계속 우리당으로, 다른 당에서는 열우당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서로 묵인한 듯.<del>그냥 린우당으로 하면 어떨까?</del>


== 창당 배경 ==
== 창당 배경 ==
근원적 배경을 올라가자면 [[19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야당진영에서 민주화운동의 거두로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한 [[김대중]]의 복귀에 대하여 찬반으로 양분되어 찬성측은 [[새정치 국민회의]]로 이동했고, 반대측은 [[민주당 (1991년)|민주당]]에 잔류했다. 이후 15대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되자, 反3김, 反DJ를 외치던 인사들은 한나라당으로 향했고<ref>빈민운동의 대부라 불리던 故제정구 의원이 대표였다.</ref> 反DJ보다 反한나라당을 선택한 인사들은 국민회의에 합류했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노무현]]이다.
근원적 배경을 올라가자면 [[19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야당진영에서 민주화운동의 거두로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한 [[김대중]]의 복귀에 대하여 찬반으로 양분되어 찬성측은 [[새정치 국민회의]]로 이동했고, 반대측은 [[민주당 (1991)|민주당]]에 잔류했다. 이후 15대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되자, 反3김, 反DJ를 외치던 인사들은 한나라당으로 향했고<ref>빈민운동의 대부라 불리던 故제정구 의원이 대표였다.</ref> 反DJ보다 反한나라당을 선택한 인사들은 국민회의에 합류했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노무현]]이다.


이후 노무현은 새천년 민주당 16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 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지만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참패<ref>민주당은 광역단체장 중 호남 3곳과 제주도에서만 승리했고, 한나라당은 수도권 석권을 포함하여 광역단체장 11곳을 차지한다. [[자민련]]은 충청남도 1곳에서만 승리. 서울의 경우 구청장 25개 중 22개를 한나라당이 차지했다.</ref> 이 패배로 노무현의 대선후보 위치가 흔들리고 야당의 대안후보로 [[정몽준]]이 떠오르면서 민주당 내에서 일부가 탈당하거나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여 정몽준을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후보단일화 논의 끝에 노무현이 단일후보가 되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때의 앙금은 상당히 오래 가게 된다.
이후 노무현은 새천년 민주당 16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 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지만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참패<ref>민주당은 광역단체장 중 호남 3곳과 제주도에서만 승리했고, 한나라당은 수도권 석권을 포함하여 광역단체장 11곳을 차지한다. [[자민련]]은 충청남도 1곳에서만 승리. 서울의 경우 구청장 25개 중 22개를 한나라당이 차지했다.</ref> 이 패배로 노무현의 대선후보 위치가 흔들리고 야당의 대안후보로 [[정몽준]]이 떠오르면서 민주당 내에서 일부가 탈당하거나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여 정몽준을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후보단일화 논의 끝에 노무현이 단일후보가 되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때의 앙금은 상당히 오래 가게 된다.


이처럼 승리 속에 잠복되어 있던 여당 내 갈등은 대북송금 특검을 계기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에 불법송금이 있었다는 문제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특검을 수용하고 이로 인해 국민의 정부에서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이 구속되자 민주당 구주류(이른바 동교동계)의 반발이 매우 거세지며 충돌이 심각해졌다. 이에 당시 민주당 신주류에서는 분당 불사를 외치는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결국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트로이카가 중심이 되어 분당을 기획했다.
이처럼 승리 속에 잠복되어 있던 여당 내 갈등은 대북송금 특검을 계기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에 불법송금이 있었다는 문제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특검을 수용하고 이로 인해 국민의 정부에서 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이 구속되자 민주당 구주류(이른바 동교동계)의 반발이 매우 거세지며 충돌이 심각해졌다. 이에 당시 민주당 신주류에서는 분당 불사를 외치는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결국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트로이카가 중심이 되어 분당을 기획했다.  


당 외부에서는 [[개혁국민정당]]이 [[2003년#3월|2003년 3월]] 재보궐선거에서 승리, 친노인사인 [[유시민]]이 원내에 진출하면서 신당론에 불을 지피고 있었으며, 한나라당에서도 구 민주당 출신으로 당내 소장파이며 反DJ 성향을 지닌 의원들이 합류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당 외부에서는 [[개혁국민정당]]이 [[2003년#3월|2003년 3월]] 재보궐선거에서 승리, 친노인사인 [[유시민]]이 원내에 진출하면서 신당론에 불을 지피고 있었으며, 한나라당에서도 구 민주당 출신으로 당내 소장파이며 反DJ 성향을 지닌 의원들이 합류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9월|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민주당 신주류들이 속속 탈당하였으며<ref>단, 신주류 외에도 일부 합류파가 있었다. 당장 [[2004년]] [[3월 12일]] 탄핵 당시 투표함을 던지며 분개하던 송석찬 당시 의원은 동교동계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2002년]] 후단협 소속이었다.</ref> 개혁국민정당 소속 의원 2명(김원웅, 유시민), 그리고 한나라당 탈당파 5인, 이른바 '''독수리 5형제'''<ref>김부겸,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김영춘. 이중 김부경, 안영근, 이부영은 [[1997년]]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할 때 민주당 출신이었으며, 이우재는 민중당 출신이었고 김영춘은 애당초 상도동계였다.</ref>가 합류하여 [[2003년]] [[11월 11일]] 정식으로 창당하게 된다. 뒤이어 경남지사 김혁규가 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세를 불렸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9월|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민주당 신주류들이 속속 탈당하였으며<ref>단, 신주류 외에도 일부 합류파가 있었다. 당장 {{날짜/출력|2004-3-12}} 탄핵 당시 투표함을 던지며 분개하던 송석찬 당시 의원은 동교동계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2002년]] 후단협 소속이었다.</ref> 개혁국민정당 소속 의원 2명(김원웅, 유시민), 그리고 한나라당 탈당파 5인, 이른바 '''독수리 5형제'''<ref>김부겸,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김영춘. 이중 김부경, 안영근, 이부영은 [[1997년]]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할 때 민주당 출신이었으며, 이우재는 민중당 출신이었고 김영춘은 애시당초 상도동계였다.</ref>가 합류하여 {{날짜/출력|2003-11-11}} 정식으로 창당하게 된다. 뒤이어 경남지사 김혁규가 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세를 불렸다.


== 개혁정치의 시동과 실패 : 전략의 부재와 운의 부족이 겹친 패배의 연속 ==
== 개혁정치의 시동과 실패 : 전략의 부재와 운의 부족이 겹친 패배의 연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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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로 인해 탄핵후폭풍이 정가를 강타하면서, 민주당은 말 그대로 멸망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한나라당도 죽다 살아났으며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살짝 넘기는 152석을 획득하며 대승리를 거둔다! 6공화국 이래 총선에서 1개 정당이 과반 이상을 획득한 것은 처음이었다.<ref>[[1990년]]부터 [[1997년]]까지의 민주자유당-신한국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이건 정상적인 선거가 아닌 3당 합당과 야당의원과 무소속 의원 영입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과반수를 만든 결과이다. 13대 국회 하반기때는 민주자유당이 개헌선을 넘어섰지만 선거를 통한 결과는 아니었고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이 얻은 의석은 149석(총 의석 299석)이었고,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얻은 의석도 139석으로 과반에 미달했기 때문이다.</ref><ref>이후 총선을 통한 과반 달성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2번째로 기록했고, 이어 [[새누리당]] 이 19대 총선에서 과반을 3번째로 기록했다. 거기다 중도 과반붕괴한 열린우리당과 달리 [[2015년]] 현재까지 과반을 유지중이다.</ref><ref>6공화국 이전으로 거슬러가면 [[4.19 혁명]] 이후 2공화국 체제에서 [[민주당 (1955)]]가 75%를 차지하긴 했다. 다만 이땐 민주당 외 제대로 된 정당이 [[자유당]]뿐인데다 그 자유당이 [[3.15 부정선거]]로 스스로 붕괴한 뒤라서...</ref> 한때 200석까지 바라보았으나 정동영 당시 당 의장의 노인폄하실언으로 많이 깎아먹었음에도 이 성과였던 것.<ref>젋은 층의 투표독려 취지로 한 발언이였으나, 노인을 폄하한다는 뉘앙스가 난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ref>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로 인해 탄핵후폭풍이 정가를 강타하면서, 민주당은 말 그대로 멸망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한나라당도 죽다 살아났으며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살짝 넘기는 152석을 획득하며 대승리를 거둔다! 6공화국 이래 총선에서 1개 정당이 과반 이상을 획득한 것은 처음이었다.<ref>[[1990년]]부터 [[1997년]]까지의 민주자유당-신한국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이건 정상적인 선거가 아닌 3당 합당과 야당의원과 무소속 의원 영입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과반수를 만든 결과이다. 13대 국회 하반기때는 민주자유당이 개헌선을 넘어섰지만 선거를 통한 결과는 아니었고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이 얻은 의석은 149석(총 의석 299석)이었고,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얻은 의석도 139석으로 과반에 미달했기 때문이다.</ref><ref>이후 총선을 통한 과반 달성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2번째로 기록했고, 이어 [[새누리당]] 이 19대 총선에서 과반을 3번째로 기록했다. 거기다 중도 과반붕괴한 열린우리당과 달리 [[2015년]] 현재까지 과반을 유지중이다.</ref><ref>6공화국 이전으로 거슬러가면 [[4.19 혁명]] 이후 2공화국 체제에서 [[민주당 (1955)]]가 75%를 차지하긴 했다. 다만 이땐 민주당 외 제대로 된 정당이 [[자유당]]뿐인데다 그 자유당이 [[3.15 부정선거]]로 스스로 붕괴한 뒤라서...</ref> 한때 200석까지 바라보았으나 정동영 당시 당 의장의 노인폄하실언으로 많이 깎아먹었음에도 이 성과였던 것.<ref>젋은 층의 투표독려 취지로 한 발언이였으나, 노인을 폄하한다는 뉘앙스가 난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ref>


이후 [[2004년]] [[6월 5일]] 재보궐선거에서는 광역단체장 4개를 모조리 내주며 패배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들중 제주도를 빼면 모두 총선에서도 우리당이 고전한 지역(부산, 경남, 전남)이었고, 기초단체장에서도 수도권에서는 패했지만 충청권에서 승리(대전 동구, 대덕구 및 충남 당진군)하였고 무엇보다 총선 후 2달밖에 안 지나서 패배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같은 해 [[10월 30일]] 재보궐선거도 기초단체장 5석이 걸렸는데 하나같이 열린우리당 약세지역이라 패배는 당연시 여겨졌고, 그 와중에 강원 철원군수 선거에서 승리하여 오히려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날짜/출력|2004-6-5}} 재보궐선거에서는 광역단체장 4개를 모조리 내주며 패배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들중 제주도를 빼면 모두 총선에서도 우리당이 고전한 지역(부산, 경남, 전남)이었고, 기초단체장에서도 수도권에서는 패했지만 충청권에서 승리(대전 동구, 대덕구 및 충남 당진군)하였고 무엇보다 총선 후 2달밖에 안 지나서 패배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같은 해 [[10월 30일]] 재보궐선거도 기초단체장 5석이 걸렸는데 하나같이 열린우리당 약세지역이라 패배는 당연시 여겨졌고, 그 와중에 강원 철원군수 선거에서 승리하여 오히려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2005년]]부터였다!'''
'''문제는 [[2005년]]부터였다!'''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 당시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경선을 했는데 이게 역설적이게도 선거법 위반 사유를 늘려주는 부작용을 낳았다. 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중 재보궐 사유를 발생시킨 경우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 당시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경선을 했는데 이게 역설적이게도 선거법 위반 사유를 늘려주는 부작용을 낳았다. 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중 재보궐 사유를 발생시킨 경우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이상락 (경기 성남 중원) 선거법 위반 : 2005. 4. 30 재보궐
* 이상락 (경기 성남 중원) 선거법 위반 : 2005. 4. 30 재보궐
* 이철우 (경기 포천/연천) 선거법 위반 : 2005. 4. 30 재보궐
* 이철우 (경기 포천/연천) 선거법 위반 : 2005. 4. 30 재보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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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측 귀책사유로 재보궐을 치른 곳은 위와 같이 총 10곳이며 이중 지병으로 작고한 故구논회 의원을 제외해도 9명이다. 그야말로 공천받기 위해, 그리고 공천 후 당선을 위해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선거법 위반이 속출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열린우리당이 총선 채 1년도 안되어 과반의석이 붕괴되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측 귀책사유로 재보궐을 치른 곳은 위와 같이 총 10곳이며 이중 지병으로 작고한 故구논회 의원을 제외해도 9명이다. 그야말로 공천받기 위해, 그리고 공천 후 당선을 위해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선거법 위반이 속출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열린우리당이 총선 채 1년도 안되어 과반의석이 붕괴되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


어쨌든 자당 귀책사유가 압도적으로 많긴 했지만 재보궐을 치뤄야하니 후보 공천을 해야 하는데 이 공천에서부터 우리당은 온갖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어쨌든 자당 귀책사유가 압도적으로 많긴 했지만 재보궐을 치뤄야하니 후보 공천을 해야 하는데 이 공천에서부터 우리당은 온갖 실책을 저지르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2005년]] 4.30 재보궐 당시 충남 아산 지역구인데, 우리당은 1년 전인 17대 총선때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한 이명수를 영입, 공천했다. 문제는 이명수가 '''자민련에서 아직 탈당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 이명수 본인도 당연히 탈당된줄 알고 우리당에 입당, 공천받았다. 정확히는 자민련에서 이명수를 출당조치했고, 이명수는 출당된줄 알았는데 자민련의 당 내 의결기구에서 아직 출당안을 승인하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선거관리위원회는 '''이중당적으로 후보등록 불가'''를 통보하며 우리당의 아산 선거는 [[망했어요]]. 이후 급히 후보를 임좌순으로 교체하지만 결국 졌다.<ref>이후 이명수는 우리당을 탈당한 후 [[국민중심당]]으로 민선 4기 충남지사 선거에 출마하나 낙선, [[자유선진당]]으로 아산 지역구에서 18~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2015년]] 현재 새누리당 소속이다.</ref><ref>이명수를 대신해 급히 공천받은 임좌순은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아산시장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임좌순은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다.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417027 #]</ref>
대표적인 것이 [[2005년]] 4.30 재보궐 당시 충남 아산 지역구인데, 우리당은 1년 전인 17대 총선때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한 이명수를 영입, 공천했다. 문제는 이명수가 '''자민련에서 아직 탈당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 이명수 본인도 당연히 탈당된줄 알고 우리당에 입당, 공천받았다. 정확히는 자민련에서 이명수를 출당조치했고, 이명수는 출당된줄 알았는데 자민련의 당 내 의결기구에서 아직 출당안을 승인하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선거관리위원회는 '''이중당적으로 후보등록 불가'''를 통보하며 우리당의 아산 선거는 [[망했어요]]. 이후 급히 후보를 임좌순으로 교체하지만 결국 졌다.<ref>이후 이명수는 우리당을 탈당한 후 [[국민중심당]]으로 민선 4기 충남지사 선거에 출마하나 낙선, [[자유선진당]]으로 아산 지역구에서 18~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2015년]] 현재 새누리당 소속이다.</ref><ref>이명수를 대신해 급히 공천받은 임좌순은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아산시장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참고로 임좌순은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이다.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417027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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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따지자면 당 4대 강령으로서 새롭고 깨끗한 정치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건설, 한반도 평화통일을 내세웠으나 이는 어느 정당이나 다 추구하는 목표다. 이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각자의 이념에 따른 충돌이 발생하는데 열린우리당은 이 충돌의 제어에 실패했다.
굳이 따지자면 당 4대 강령으로서 새롭고 깨끗한 정치실현, 중산층과 서민이 잘사는 나라구현,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건설, 한반도 평화통일을 내세웠으나 이는 어느 정당이나 다 추구하는 목표다. 이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론적 측면에서 각자의 이념에 따른 충돌이 발생하는데 열린우리당은 이 충돌의 제어에 실패했다.


현실 정치/정책과 지지층의 충돌 역시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참여정부, 그리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여러 차례 지지층과 충돌했는데 대표적으로 4대 입법<ref>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언론개혁법, 과거사 진상규명법. 지지층에서는 4대 개혁입법이라고 부르고 반대층에서는 4대 개악입법이라 칭하기에 중립적으로 4대 입법으로 표기함.</ref>의 처리 과정에서 끝내 한나라당과 타협하여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이루지 못해 비판받았고,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여 지지층의 실망을 불러왔으며<ref>단, 대연정은 당이 아닌 청와대(즉 당시 대통령)가 주도했다.</ref> 정책적으로는 이라크전 파병과 한미 FTA 체결 등으로 지지층 상당수의 반발을 샀다. 이라크 파병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였고, 한미 FTA는 자유무역시장 확대의 세계적 조류 속에서 시장 선점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진보성향의 지지층들이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현실 정치/정책과 지지층의 충돌 역시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참여정부, 그리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여러 차례 지지층과 충돌했는데 대표적으로 4대 입법<ref>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언론개혁법, 과거사 진상규명법. 지지층에서는 4대 개혁입법이라고 부르고 반대층에서는 4대 개악입법이라 칭하기에 중립적으로 4대 입법으로 표기함.</ref>의 처리 과정에서 끝내 한나라당과 타협하여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이루지 못해 비판받았고,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여 지지층의 실망을 불러왔으며<ref>단, 대연정은 당이 아닌 청와대(즉 당시 대통령)가 주도했다.</ref> 정책적으로는 이라크전 파병과 한미 FTA 체결 등으로 지지층 상당수의 반발을 샀다. 이라크 파병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였고, 한미 FTA는 자유무역시장 확대의 세계적 조류 속에서 시장 선점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진보성향의 지지층들이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 뚜렷한 지역기반 없는 전국정당의 허울 ===
=== 뚜렷한 지역기반 없는 전국정당의 허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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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부의 단명 등으로 인한 구심점 부족 ===
=== 지도부의 단명 등으로 인한 구심점 부족 ===
열린우리당은  3년 9개월여동안 당 의장만 11명에 달할 정도로 지도부가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로 인해 당 내 권력이 계속해서 흔들리며 뚜렷한 리더십이 서지 못했고 내부에서 갈팡질팡 우왕좌왕을 거듭했다. 그 약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열린우리당은  3년 9개월여동안 당 의장만 11명에 달할 정도로 지도부가 오래가지 못했는데, 이로 인해 당 내 권력이 계속해서 흔들리며 뚜렷한 리더십이 서지 못했고 내부에서 갈팡질팡 우왕좌왕을 거듭했다. 그 약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 김원기 : 창당준비위원회 임시의장. 임기 약 3달. 그래도 창당준비위 임시의장이니 큰 문제는 없다.
* 1. 김원기 : 창당준비위원회 임시의장. 임기 약 3달. 그래도 창당준비위 임시의장이니 큰 문제는 없다.
* 2. 정동영 : 초대 의장. 임기 약 4달. 창당 첫 의장. 입각을 위해 사퇴
* 2. 정동영 : 초대 의장. 임기 약 4달. 창당 첫 의장. 입각을 위해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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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세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당도 잘 알고 있었다. 이때문에 일부에서 미국식 완전국민참여경선제, 즉 '''오픈 프라이머리'''의 도입을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 도입하는 방안까지 추진했으나 결국 대선에 후보를 내기도 전에 망했다.
당세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당도 잘 알고 있었다. 이때문에 일부에서 미국식 완전국민참여경선제, 즉 '''오픈 프라이머리'''의 도입을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 도입하는 방안까지 추진했으나 결국 대선에 후보를 내기도 전에 망했다.


당내 의원 몇몇이 [[2007년]] 들어 탈당을 시작했고, 김한길계가 집단 탈당하여 [[중도개혁통합신당]]을 만들며 의석수가 크게 줄었으며,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계까지 가세하며 당 외부에서 대안정당이 빠르게 모색되자 우리당 탈출 행렬은 가속화되어 의석수가 72석까지 크게 감소하였다. 특히 당 의장까지 지낸 정동영, 김근태 두 계파의 탈당이 결정적이었다. 이후 [[2007년]] [[8월 18일]], 마지막 전당대회에서 우리당 탈당파가 중심이 된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의결, [[8월 20일]] 합당과 동시에 해산되었다.
당내 의원 몇몇이 [[2007년]] 들어 탈당을 시작했고, 김한길계가 집단 탈당하여 [[중도개혁통합신당]]을 만들며 의석수가 크게 줄었으며,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계까지 가세하며 당 외부에서 대안정당이 빠르게 모색되자 우리당 탈출 행렬은 가속화되어 의석수가 72석까지 크게 감소하였다. 특히 당 의장까지 지낸 정동영, 김근태 두 계파의 탈당이 결정적이었다. 이후 {{날짜/출력|2007-8-18}}, 마지막 전당대회에서 우리당 탈당파가 중심이 된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의결, [[8월 20일]] 합당과 동시에 해산되었다.


참 씁쓸한 말로인 것이, 마지막 전당대회가 치뤄진 곳은 일산 킨텍스로 전당대회가 열린 [[8월 18일]] 이곳에선 코믹월드 행사가 있었고, 코믹에 참가한 덕후들은 우리당이 해체하건 말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또, 이날 흡수합당에 반대하는 시위자 중에는 우리당 진성지지층 외에도 '''허경영'''같은 인사가 해체 반대를 주장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ref>허경영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대선 예비후보 등록까지 한 상태였다. 물론 그의 행보를 생각하면 다분히 이벤트적...</ref>
참 씁쓸한 말로인 것이, 마지막 전당대회가 치뤄진 곳은 일산 킨텍스로 전당대회가 열린 [[8월 18일]] 이곳에선 코믹월드 행사가 있었고, 코믹에 참가한 덕후들은 우리당이 해체하건 말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또, 이날 흡수합당에 반대하는 시위자 중에는 우리당 진성지지층 외에도 '''허경영'''같은 인사가 해체 반대를 주장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ref>허경영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여 대선 예비후보 등록까지 한 상태였다. 물론 그의 행보를 생각하면 다분히 이벤트적...</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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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의 ==
== 의의 ==
* 상술했듯, 전국정당과 정책정당 지향에 불을 지핀 것은 우리당이 가지는 중요한 의의다. 실패해서 문제지.(...)
* 상술했듯, 전국정당과 정책정당 지향에 불을 지핀 것은 우리당이 가지는 중요한 의의다. 실패해서 문제지.(...)
* 한국 정당정치사상 진보계열 정당을 제외하고 최초로 진성당원제를 도입했다. 정확히는 기간당원제로, 진성당원제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같다. 당비를 내는 당원만을 당원으로 인정하며 이 당원들에게 당직 및 공직선거 당 후보 피선거권 및 당직선거의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간당원제가 역으로 민심을 제대로 수용못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당이 망해가던 [[2007년]] [[1월 29일]] 기간당원제가 정식 폐지되었다.
* 한국 정당정치사상 진보계열 정당을 제외하고 최초로 진성당원제를 도입했다. 정확히는 기간당원제로, 진성당원제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같다. 당비를 내는 당원만을 당원으로 인정하며 이 당원들에게 당직 및 공직선거 당 후보 피선거권 및 당직선거의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간당원제가 역으로 민심을 제대로 수용못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당이 망해가던 {{날짜/출력|2007-1-29}} 기간당원제가 정식 폐지되었다.
* 기존의 원내총무를 원내대표로 승격시킨 첫번째 정당이다. 원내총무가 사실상 당 총재나 대표 밑에서 제한적인 임무를 수행하던 것에 비해, 원내대표로 승격시키면서 그 권한과 책임을 늘리고 원내운영의 독립성을 인정해준 것이다. 2015년 6월 국회법 사태 와중에 재조명되었다.
* 기존의 원내총무를 원내대표로 승격시킨 첫번째 정당이다. 원내총무가 사실상 당 총재나 대표 밑에서 제한적인 임무를 수행하던 것에 비해, 원내대표로 승격시키면서 그 권한과 책임을 늘리고 원내운영의 독립성을 인정해준 것이다. 2015년 6월 국회법 사태 와중에 재조명되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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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의 정당]]
[[분류:대한민국의 정당]]
[[분류:해산된 정당]]
[[분류:2003년 설립]]
[[분류:2003년 설립]]
[[분류:2007년 해체]]
[[분류:2007년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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