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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5월 17일 연해주 무시에서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청은 안무에게 병력 150명을 인솔해 연해주 파르티잔스크로 출동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안무가 이 명령에 실제로 따르지는 않았던 듯하다. 일제의 첩보에 따르면, 안무는 영안현 동경성 부근에서 활동했고 안무를 따르는 독립군은 강구우, 방우룡 등 2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또 다른 첩보 자료에는 안무가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 1922년 5월 17일 연해주 무시에서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청은 안무에게 병력 150명을 인솔해 연해주 파르티잔스크로 출동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안무가 이 명령에 실제로 따르지는 않았던 듯하다. 일제의 첩보에 따르면, 안무는 영안현 동경성 부근에서 활동했고 안무를 따르는 독립군은 강구우, 방우룡 등 2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또 다른 첩보 자료에는 안무가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 ||
1922년 9월 초, 안무는 러시아 치타에서 열린 공산당대회에 참가했고 그곳에서 군정서의 혈성단과 행동을 같이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그는 10월 2일 돈화현 남구에서 구춘선과 함께 독립군 40명을 이끌고 활동했으며, 10월 12일에는 최창선 등과 함께 흑룡강성 영고탑 방면으로 이동했다. 또한 10월 20일엔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연린 공산당연합대회에 참가해 [[김규식 (1882년)|김규식]], 김좌진, [[조성환 (1875년)|조성환]], 장도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해 연설했다.그러나 이 회의에 참가한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분리되어 서로에 대한 매도에만 집중했기 | 1922년 9월 초, 안무는 러시아 치타에서 열린 공산당대회에 참가했고 그곳에서 군정서의 혈성단과 행동을 같이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그는 10월 2일 돈화현 남구에서 구춘선과 함께 독립군 40명을 이끌고 활동했으며, 10월 12일에는 최창선 등과 함께 흑룡강성 영고탑 방면으로 이동했다. 또한 10월 20일엔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연린 공산당연합대회에 참가해 [[김규식 (1882년)|김규식]], 김좌진, [[조성환 (1875년)|조성환]], 장도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해 연설했다.그러나 이 회의에 참가한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분리되어 서로에 대한 매도에만 집중했기 떄문에, 결국 안무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북간도에 쓸쓸히 귀환해야 했다. | ||
1923년 1월, 코민테른은 송전관 및 하바롭스크 부근에서 노농독립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안무는 이 계획에 이름을 올려놓았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던 듯하다. 이 계획은 일제가 사전에 간파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안무는 한인군인위원회에 참가해 국민군 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1923년 2월 말에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가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창조파에 속했다. 다만 그가 정말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는지, 자신의 이름만 올려놓고 창조파에 위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 1923년 1월, 코민테른은 송전관 및 하바롭스크 부근에서 노농독립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안무는 이 계획에 이름을 올려놓았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던 듯하다. 이 계획은 일제가 사전에 간파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안무는 한인군인위원회에 참가해 국민군 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1923년 2월 말에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가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창조파에 속했다. 다만 그가 정말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는지, 자신의 이름만 올려놓고 창조파에 위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