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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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武. 호는 청전(靑田).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3년 6월 29일 함경북도 종성군 행영면[1][2]에서 안수익(安壽益)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무의 본명은 안병호로, 안무는 만주 망명 후 사용한 별칭이다. 안무의 아버지 안수익은 변계경무서의 관리 출신으로 1901년 함경북도 변계총순(邊界摠巡)을 지냈고 1903년 판임관으로서 상강분서총순을 맡았다.

안무는 만 16세에 접어든 1899년 대한제국 진위대의 사병으로 입대했다. 진위대는 1895년 훈련대가 폐지된 후 군제가 개편되었을 때 서울의 친위대와 함께 조직된 지방군이었다. 안무가 근무한 함경대 일대는 진위대 제5연대 관할이었으며 연대 본부는 북청에 있었고 덕원에 제1대대, 북청에 제2대대, 경성에 제3대대를 두었다. 안무는 진위대에 들어간 후 참교로 승진했고, 경성 교련관양성소를 졸업한 뒤 경성 진위대 본부 교련관에 임관했다. 교련관은 사병의 훈련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품외직[3]에 속했다.

1907년 8월 무산중대 교련관으로 종사하던 안무는 정미7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새로운 길을 찾다가 1908년 1월 경성의 함일학교 교원양성과정에 입학했다. 그가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까닭은 교련관 출신으로서 병식체조 등에 능한 점을 살려 체육교사가 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안무는 6개월간 수료한 후 함일학교 체육교사로 임용되었다. 그는 또 대한협회의 경성지회에 참가해 민중계몽운동에 열렬히 참여했다.

얼마 후, 안무는 무산의 유지인 양한호(楊漢虎)와 문희목(文熙穆)의 추천으로 무산의 보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보성학교에 부임한 안무는 체육시간에 병식체조 뿐만 아니라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함양하는 정신훈화를 강조했다. 당시 일제는 통감부를 통해 지방 사립학교에 일본어 과목을 수업할 것을 강요했고 교과서 검정제를 제도화했다. 특히 1908년 8월 '사립학교령'을 공포해 사립학교의 교과용 도서를 학부 편찬 또는 학부대신의 검정을 받은 것을 채택하도록 지시하면서, 이외의 도서를 교과용 도서로 사용하려면 학부대신의 인가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보성학교는 통감부의 재정 지원을 거부하며 일본어 과목을 끝내 수업에 편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이 성립되자, 보성학교는 끝내 일본어 과목을 수업에 편성하고 사관학교령에 순종했다. 이에 안무는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1911년 북간도로 망명했다.

1911년 초, 안무와 문희목은 집안 식구들을 이끌고 북간도로 향했다. 그들이 처음 도착한 곳은 화룡현 개미동이었다. 개미동은 일찍부터 한인들이 이주해 정착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안무는 문희목과 함게 한인들을 대상으로 민족 교육을 실시했고, 무산에서 온 양한호와 합류해 1914년 개미동에서 독립운동을 목표로 한 항일단체를 조직했다. 이 단체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4] 1913년에 조직된 간민회의 지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항일국민회군>에 따르면, 안무 등이 400여 명의 병사를 모으고 부사령관이 된 뒤 1918년 5월 국내진입작전을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항일국민회군>은 60여 년이 흐른 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데다 당대의 다른 기록들과 교차검증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신뢰성이 떨어지며, 이 기록 역시 시기의 착오이거나 과장된 측면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북간도의 독립군 단체들이 국내진입작전을 벌인 것은 1920년 이후였으니, 안무의 국내진입작전은 1920년 국민회군이 창설된 이후에 전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무는 3.1 운동의 여파로 3월 13일 용정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선언서를 받아와 병영 내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1919년 4월에 설립된 대한국민회가 이듬해 3월 대한국민회군을 설립하자, 안무는 개미동에서 양성한 독립군을 이끌고 대한국민회군에 가담했다. 그 후 대한국민회의 세력이 북간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재정이 확보되고 국민회군의 군사력도 강화되었다. 1920년 4월, 국민회의 서상용은 러시아제 장총 50정을 구입해 국민회장 구춘선의 집인 하마탕으로 가져왔고, 왕청현에서도 우마차 5대에 무기를 싣고 하마탕으로 운반해 홍범도 부대와 국민회군에 배급되었다.

국민회군이 독립운동에 처음 나선 전투는 1920년 6월에 벌어진 봉오동 전투였다. 국민회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는 서로 연대를 꾀하면서 전열을 정비했다. 4월 20일 연길현 화전사에 있던 국민회와 군무도독부, 군정서의 간부들이 모여 군자금 모집, 병사의 소집 및 훈련, 무기 증강 등을 논의했다. 그 결과 5월 28일 대한독립군과 국민회군, 군무도독부가 대한군북로독군부로 통합되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했다.

1. 국민회 군무위원회와 군무도독부의 명칭을 취소하고 그 기관을 통합해 대한북로독군부라 칭할 것.


2. 국민회는 행정기관, 독군부는 군사기관의 사무를 집행하며, 국민회는 독군부를 보조해 일절의 군무를 준비한다.

3. 전 군무도독부의 지방기관인 지방국은 국민회에 귀속한다.

이에 따라 국민회군, 군무도독부, 대한독립군이 합쳐 북로독군부로 통합되었고, 최진동의 670명,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 550명이 통합하면서 북로독군부의 병력은 1,200명에 달했다. 또한 이들은 기관총 2문, 장청 900정, 권총 200정, 폭탄 약 100개, 탄환 군총 1정당 150발, 망원경 7개 등으로 무장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진용은 사령관 홍범도, 부장 최진동, 부장 안무. 부장 주달, 국장 이원, 제1중대장 이천오, 제2중대장 강상모, 제3중대장 강시범, 제4중대장 조권식 등으로 정비되었다.

1920년 6월 4일, 일본군이 고려령 방면으로 북상하면서 북로독군부가 주둔한 봉오동을 포위하려 했다. 이에 북로독군부는 매복, 포위 작전을 계획하고 동포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킨 뒤 제1연대는 봉옷골 웃마을, 제1중대는 붕옷골 웃마을 서북단, 제2중대는 동쪽 산, 제3중대는 북쪽 산, 제 4중대는 서쪽 산의 남쪽에 잠복하게 했다. 그리고 연대장 홍범도가 2개 중대를 거느리고 서산 북단에 자리잡고 적의 선봉 부대가 아군의 포위망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일제 사격을 가하기로 했다. 이때 안무는 최진동과 함께 동부 산장 최고봉에서 총지휘를 담당했다.

이후 벌어진 봉오동 전투는 북로독군부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 안무는 사령부에서 독립군의 전투를 지휘했다. 그 후 북로독군부는 전열을 재정비한 뒤 일본군의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봉오동을 떠나 간도의 연길현 의란구로 이동했다. 그리고 6월 21일 왕청현 가야하장동에서 독립군단체 연합회의를 열고 독립군의 통일적 운영 및 연합작전을 논의했다. 이어 7월 1일에는 의란구에서 국민회군을 비롯해 군무도독부, 의군부, 의민단, 신민단, 나자구의사부, 훈춘한민회, 광복단 등 8개 단체 대표가 참가한 연석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군무도독부와 대한국민회 간에 이뤄진 통합 원칙에 반대하면서 이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에 북로군정서를 합류시키기 위해 7월 7~8일 일양구에서 연합회의가 열렀다. 이때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이용, 왕삼덕, 안정근 등이 독립군의 연합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북로군정서도 연합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김좌진은 동의했고, 독립군 단체들은 하나로 뭉쳐 명월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7월 중순에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포진한 독립군 부대가 동도군정서, 동도독군부, 동도파견부로 편성되었다. 동도군정서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를 개편한 것이고, 동도파견부는 연해주 지역의 독립군을 통합한 것이었으며, 동도독군부는 홍범도의 지휘 아래 국민회군, 의군단, 신민단 등을 통합한 것이었다. 안무의 국민회군은 덩도독군부에 편성된 4개 대대 중 3개 대대에 분산 배치되었다.

국민회는 8월 12일 각 지방 대표회의를 일양구 원계동에서 열고 국민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북로독군부의 부장 안무를 새롭게 신설한 국민군 사령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북로독군부는 국민회가 독립군의 지휘권을 장악하려고 안무를 자신들의 승인도 받지 않고 국민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자신들을 악화시키려 든다며 반발했다. 그러다가 9월 초 중국 군벌군이 독립군을 탄압하는 것을 피해 독립군 단체들이 안도현 경계의 삼림지대로 이동했지만, 안무의 국민회군은 근거지에 머물었고 9월 13일 중국군이 탄압하려 하자 분산 퇴각했다.

1920년 9월 27일, 북로군정서는 본거지인 왕청현 서대파를 떠나 화룡현 청산리를 향해 이동하던 중 북간도 연길현 동불사 북구를 지나치다가 안무의 국민회군과 충돌해 서로 총격전을 벌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이 성포문을 발표해 국민회군을 성토했다. 그러나 홍범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군 장성들과 독립군 단체들은 북로군정서를 비판했다. 양측이 충돌한 원인은 식량 보급 문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식량 보급 문제에 시달리다가 국민회 근거지를 지나면서 국민회 근거지에서 나는 식량을 공출했다가 국민회군의 반발을 사 무력 충돌까지 멀어졌다는 것이다.

9월 28일, 안무의 국민회군 200여 명은 광복단의 병력과 함께 구세동 방면으로 이동했고, 10월 초 대한독립군과 합류했다. 이후 독립군 대표들은 10월 13일 이도구 북하마탕 대표자 회의에 모여 다섯 가지 안건을 결의했다.

1. 4단(홍범도군을 국민회군에 포함시킴)의 무력으로 군사행동의 통일을 도모할 것.


2. 국민회 군적에 있는 사람을 총동원하고 예정의 부서에 배치할 것.

3. 군량, 군수품의 긴급 징집에 착수할 것.

4. 경찰대를 조직해서 각 방면에 밀행시켜 일본군대의 동정을 탐사할 것.

5. 일본군대와의 응전은 그 허를 찌르거나 혹은 산간에 유인해 필승을 기하는 경우 외에는 전투를 개시하지 말 것.

이도구에 모인 독립군 부대와 병력은 홍범도 부대 3백 명, 안무 부대 2백 명, 한민회, 신민회, 의민단 등의 부대가 350여 명으로 총 850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일본군이 2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독립군을 섬멸시키려 들자, 독립군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3개 연대로 나눠서 돌파하는 작전을 세웠다. 홍범도의 6개 중대가 제1연대를 맡아 완구루 중앙 산록으로 향했고, 김좌진의 2개 대대가 제2연대를 맡아 이도구 좌편 고지에, 최진동과 안무의 연합군이 제3연대를 맡아 이도구 우편 고지에 진을 치기로 했다.

1920년 10월 21일, 2연대 소속의 김좌진 부대가 일본군 기병 및 주력부대와 게릴라 전을 벌이면서 청산리 전투가 발발했다. 이후 6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안무는 21일 완루구 전투, 22일 어랑촌 전투, 25일 고동하 전투에 참가해 홍범도, 최진동과 연합하거나 단독 작전을 벌여 승리를 거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주력부대를 홍범도 연합부대로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서 목하 동소장이 거느린 부대와 상대하는 적도의 주력은 홍범도, 안무가 거느린 국민회 및 한민회의 부대 약 500명 정도이다. 10월 중순 동부대는 각자 200발 탄환을 소지했다.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 단체들은 10월 28일 안도현 황구영촌으로 진영을 옮겼다. 안무는 동신장의 동쪽 약 1리 떨어진 한인 마을에 머물렀다. 이후 일본군이 초토화 작전을 사용하자, 안무는 북간도를 떠나 연해주를 향해 철수했다.

1921년 1월, 안무의 국민회군은 대한독립군단에 편입되어 노령을 향해 이동했다. 그의 군대는 홍범도의 부대보다 조금 늦게 노령에 도착했다. 이때 연해주에 있던 문창범과 오하묵 등은 자유시에 주둔지를 마련하고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유했다. 이에 대한독립군단은 만주-소련의 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연해주 자유시에 집결했다. 그들은 러시아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물리치고 그 대가로 자치권을 보장받으려 했다.

1921년 3월 하순 독립군 6단체 회의 결과, 독립군은 대한총군부라는 통일단체를 조직했다. 4월 12일 자유시에서 대소 36개 단체가 독립군 대회를 개최하고, 대한총군부를 대한독립단으로 개칭하기로 했으며, 본부에 외교부, 중국 영안현에는 사관학교를 설치하기로 했다. 부대는 2개 여단으로 편제되었는데, 제 1여단은 노령 자유시, 제2여단은 중국 영안현에 설치되었다. 안무는 이 중 제2여단장을 맡는 한편 흑하에서 별도의 암살단을 조직했다. 그 목적은 간도 지방 및 국내의 주요 관리 및 친일 조선인의 처단이었다. 다만 이 암살단이 구체적으로 암살 활동을 했음을 입증할 기록은 없다.

그러나 1921년 6월 7일 고려군정의회가 자유시에 도착한 뒤 출두 명령을 내리자, 안무는 대한독립단을 떠나기로 마음 먹고 자유시로 가서 고려군정의회에 가담해 지청천, 홍범도와 함꼐 고려군정의회 제3연대에 편성되었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까닭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출두 명령을 거부했다가 소련군과 무력 충돌을 벌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덕분에 그는 자유시 참변에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자유시 참변 후, 잔여 독립군 부대는 코민테른의 동양비서부로부터 이르쿠츠크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자 안무는 홍범도와 함께 이르쿠츠크 행을 거부하고 8월 말 홍범도, 최진동과 함께 흑룡강성 대흑하 부근에 주둔했다. 그러나 식량이 부족하자, 그는 국민회군을 이끌고 만주로 돌아가 9월 26일 영안현에 도착했고, 뒤이어 돈화현을 거쳐 북간도의 무산으로 향했다.

1921년 12월 경 북간도에 돌아온 안무는 양수천자에서 회의를 열고 동지들을 설득했고,. 12월 5일 돈화현에서 고려공산당중령총회를 조직했다. 이후 안무는 공산주의를 선전해 소련의 지원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하는 한편 독립군의 재기를 위해 군자금 모집, 무기 확충에 힘을 쏟았다. 국민회군 출신의 임병극은 암살대 30여 명을 이끌고 다니며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고, 구춘선은 3개 조의 모금대를 결성해 함경도 지역으로 파견하려 했지만 실패하기도 했다. 안무는 이르쿠츠크를 지속적으로 왕래하며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유지했고, 이강(李剛)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1922년 2월 중순, 안창호는 베이징에서 이동휘, 박용만 등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혁 및 독립운동의 방향 등을 협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79명 대표에게 3월 17일까지 베이징으로 집합할 것을 통보했고, 안무는 김좌진과 함께 북간도 지역 군사대표로 선정되어 베이징으로 떠났다. 4월 베이징에서 모인 대표들은 통일군단을 결성할 것을 결의했다. 사무총장엔 안창호, 임시총장엔 채상덕, 정무 및 군무총장엔 김좌진, 사령관장엔 홍범도가 맡았고, 참모장엔 오석영, 안무가 맡았다. 그러나 통일군단의 구상은 구호로 그쳤을 뿐 실현되지 않았다. 이는 통일군단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 마련되지 못했고 각 단체간의 이해관계가 서로 엇갈렸기 때문이다.

1922년 5월 17일 연해주 무시에서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청은 안무에게 병력 150명을 인솔해 연해주 파르티잔스크로 출동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안무가 이 명령에 실제로 따르지는 않았던 듯하다. 일제의 첩보에 따르면, 안무는 영안현 동경성 부근에서 활동했고 안무를 따르는 독립군은 강구우, 방우룡 등 2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또 다른 첩보 자료에는 안무가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1922년 9월 초, 안무는 러시아 치타에서 열린 공산당대회에 참가했고 그곳에서 군정서의 혈성단과 행동을 같이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그는 10월 2일 돈화현 남구에서 구춘선과 함께 독립군 40명을 이끌고 활동했으며, 10월 12일에는 최창선 등과 함께 흑룡강성 영고탑 방면으로 이동했다. 또한 10월 20일엔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연린 공산당연합대회에 참가해 김규식, 김좌진, 조성환, 장도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해 연설했다.그러나 이 회의에 참가한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분리되어 서로에 대한 매도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결국 안무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북간도에 쓸쓸히 귀환해야 했다.

1923년 1월, 코민테른은 송전관 및 하바롭스크 부근에서 노농독립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안무는 이 계획에 이름을 올려놓았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던 듯하다. 이 계획은 일제가 사전에 간파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안무는 한인군인위원회에 참가해 국민군 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1923년 2월 말에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가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창조파에 속했다. 다만 그가 정말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는지, 자신의 이름만 올려놓고 창조파에 위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923년 중순, 안무는 연해주에서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김규린, 정일무 등과 함께 향후의 방책을 논의했고, 뒤이어 연해현한인위원회에 가담해 제4군구를 맡아 혈성단 전위대를 안도현으로 옮겼다. 그는 이들을 이끌고 무산, 갑산, 길주, 명천 등지의 면사무소를 습격, 파괴하는 등 조선-만주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였고 국내에 몰래 진입해 군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또한 8월 15일부터 11월 3일까지 화전현에서 열린 남북만주선인통일대회에 참가해 나중소, 지청천과 함께 군사부원으로 활동했고, 지청천과 함께 무장단을 지휘해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3천원을 모아 2천원은 무기를 사고 나머지는 연해주에서 폭탄을 구매했다.

이 무렵, 안무는 고려 공산당 계통인 적기단에서도 활동했다. 이에 공산주의에 격렬한 반감을 품은 김좌진이 안무가 독립군을 공산주의에 물들여버린다고 여기고 그를 살해하려 한다는 소문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김좌진이 정말로 그런 계획을 꾸몄음을 입증할 기록은 없다.

1924년 9월 6일 오후 3시, 3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유격전과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던 안무는 연길현 모아산 북쪽 산기슭에서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고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는 중상을 입고 용정의 자혜병원에 입원되었으나 끝까지 치료받기를 거부하다가 9월 7일에 사망했다. 향년 41세. 안무의 유해는 용정 일본영사관 지하실에 6일간 보관되었다가 용정 시내 영국덕이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안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

  1. 다만 안무의 부하 이목(李睦)과 정창언(鄭昌彦)은 안무의 본적이 함경북도 무산군 읍면 남산동이라고 진술했다.
  2. 행영면을 기준으로 하면 현재의 회령시, 무산군 읍면 남산동을 기준으로 하면 현재의 무산군 독소리에 해당한다.
  3. 무과를 치르지 않아도 사술, 강서, 진법 등의 시험을 통과하면 정원과 관계없이 임용될 수 있는 직책.
  4. 1974년에 저술된 <항일국민회군>에는 안무 등이 개미동에서 '대한국민회'를 설립했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의 대한국민회가 구춘선 등에 의해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