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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 | ==== 6월 ==== | ||
6월 2일에는 시위 근거지인 몇몇 도시에서 시리아 정부군의 포격으로 인해 많은 수의 건물들이 무너졌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 6월 2일에는 시위 근거지인 몇몇 도시에서 시리아 정부군의 포격으로 인해 많은 수의 건물들이 무너졌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끔살]]당했다. 그 다음날인 [[6월 3일]](〈어린이의 금요일〉)에는 약 5만명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지만 시리아 정부는 진압과 함께 '''시리아의 인터넷을 다운시켰다.'''<s>시리아 위키러는 [[안습]].</s> 이로 인해 시리아 인터넷 사용량은 ⅔가량 줄어들었다. 그 다음날에도 시위는 계속되어 금요일로부터의 사망자수는 72명으로 늘었다. | ||
[[6월 10일]](〈민족의 금요일〉)에는 시위자들이 "민족의 금요일" 행사를 예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정부군에서 먼저 작전을 개시했다. 결국 2000명이 [[터키]]로 가는 등 반정부 시위대 쪽 피해가 예상보다 더 커졌다. | [[6월 10일]](〈민족의 금요일〉)에는 시위자들이 "민족의 금요일" 행사를 예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정부군에서 먼저 작전을 개시했다. 결국 2000명이 [[터키]]로 가는 등 반정부 시위대 쪽 피해가 예상보다 더 커졌다. | ||
[[6월 14일]]에 [[아랍 연맹]]에서 공식적으로 시리아를 규탄했다. 그에 이어서 [[6월 16일]]에는 [[반기문]] [[UN]] 사무총장 역시 시리아를 규탄했다. 국제 사회는 시리아 반정부 시위대를 지지하는 모양새로 가는 가운데 드디어 금요일인 [[6월 17일]]이 왔다. 평소 [[이슬람교]] 예배를 드리던 신자들의 모습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된 시각이 되자 거리로 나왔고 같은 시각, 시리아 정부군도 거리로 나왔다. [[알레포]]에서 그 날 첫 사망자가 속출하였으며 [[홈스]], [[하마]]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같은 시각 [[레바논]]의 [[트리폴리]]에서도 수니파와 시리아 친정부 세력의 충돌로 사망자가 나왔다. | [[6월 14일]]에 [[아랍 연맹]]에서 공식적으로 시리아를 규탄했다.<s>팀킬</s> 그에 이어서 [[6월 16일]]에는 [[반기문]] [[UN]] 사무총장 역시 시리아를 규탄했다. 국제 사회는 시리아 반정부 시위대를 지지하는 모양새로 가는 가운데 드디어 금요일인 [[6월 17일]]이 왔다. 평소 [[이슬람교]] 예배를 드리던 신자들의 모습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된 시각이 되자 거리로 나왔고 같은 시각, 시리아 정부군도 거리로 나왔다. [[알레포]]에서 그 날 첫 사망자가 속출하였으며 [[홈스]], [[하마]]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같은 시각 [[레바논]]의 [[트리폴리]]에서도 수니파와 시리아 친정부 세력의 충돌로 사망자가 나왔다. | ||
[[6월 18일]]에는 [[터키]]-시리아 국경에서 불과 2 km 떨어진 도시에서 시리아 정부군이 포격을 가해 터키와 시리아 간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 [[6월 18일]]에는 [[터키]]-시리아 국경에서 불과 2 km 떨어진 도시에서 시리아 정부군이 포격을 가해 터키와 시리아 간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