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저서 == 박은식은 초년기 때 [[주자]]를 신봉하고 [[성리학]]을 탐구했다. 그러나 40세에 접어든 뒤 [[제자백가]]의 학설과 [[불교]], [[기독교]]도 탐구했으며, 서양 학문 역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익힐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특히 [[양명학]]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1909년 <유교구신론>과 <왕양명실기>를 저술했다.그는 <유교구신론> 서론에서 자신이 입장을 바꾼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용문2|현금, 공자의 교가 일취 암담하고 일익 늠철한 경황을 대하야 (중략) 기원인을 소고하며 말류를 추측하니 유교계에 삼대문제가 유한지라. (중략) 소위 삼대문제는 하야오, 하나는 유교파의 정신이 전히 제왕칙에 재하고, 인민사회에 진급할 정신이 부족함이오, 하나는 군산환열국하야 은역천하의 주의를 부강하고 비아구동몽이 구아라는 주의를 시수함이오, 하나는 아한유가에서 간역직체한 법문을 부요하고 지리한만한 공부를 전상함이라.}} 그는 이 서론에서 유교가 시대사상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쇠약해졌다고 진단했다. 유교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주자학을 탈피하고 양명학적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학은 쓰기 어렵고 왕학은 쓰기 쉬워서 '왕양명실기'를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한일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윤세복]]의 집에 1년여 동안 기거하면서, 박은식은 고구려사와 발해사의 연원을 밝히기 위해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조사하고 고전과 역사서를 탐독했다. 그는 민족사를 연구해 서북간도, 남북만주, 요동평야가 모두 한민족의 고대 활동지였음을 규명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민족운동의 기지로 만주가 적합하다는 걸 표명하려 했다. 이 시기에 저숧란 역사서로 <몽배금태조>, <천개소문전>, <대동고대사론>, <명림답부전>, <발해태조건국지>, <동명성왕실기> 등이 있다. <몽배금태조>는 만주의 도만강변의 작은 부락에서 일어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을 쳐서 중원까지 공략한 [[금태조]]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꿈 속에서 무치생이 금태조를 만나 구국의 방법을 문답하는 형식으로 집필된 일종의 반소소설 역사책이다. 박은식은 금태조를 평주 사람 김준(金俊)의 9세손이며, 고려의 영웅으로 봤다. 이는 그가 여진족을 발해인의 변칭자이며 조선족과 같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만주의 지리, 역사, 인종을 설명하면서, 이곳이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옛 당으로 무수한 영웅, 호걸이 출현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발해가 멸망한 뒤 천년동안 이곳을 잃고 [[소중화]]로 전락하였다고 탄식하고, 한민족의 만주 이민이 급증하는 것을 기뻐하며 만주를 되찾기 위한 후손의 분발을 촉구했다. 그는 이 책을 청소년들이 잃고 영웅으로 자라나 옛날의 영광으로 되찾아주기를 희망했다. <천개소문전>은 몽매금태조처럼 반소설적, 역사전기 소설이다. 그는 서론에서 조선의 상등사회에서 유림파와 귀족당만을 숭배하고 영웅을 숭배하지 않아 망국에 이르렀다고 보고, 영웅혼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본론에서는 [[연개소문]]의 중원에서의 성장과정과 국내 활동, 당군과의 항쟁, 그리고 종교 사상을 9장으로 나누어 적었다. 제 1장에서는 연개소문의 유년시절, 제 2장에서는 연개소문의 활동, 제 3장은 [[당나라]]와의 싸움, 제 4장은 [[안시성주]]의 대승첩, 제 5장은 당병의 재침과 패배, 제 6장은 각국과의 경쟁, 제 7장은 댕장의 패환, 제 8장은 연개소문의 종교 사상, 제 9장은 연개소문의 죽음으로 구성되었다. 박은식은 연개소문이 명문귀족들의 정치에 항거하는 개혁가였으며, 중원을 도모하는 팽창주의자였다고 주장했다. 결론에서는 [[김유신]]과 연개소문을 비교했다. 그는 김유신이 국가주의를 가르쳤으나 사대주의의 모범이 되었으며, 연개소문은 개인과 국가주의적인 면에서 모두 독립자주자의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또한 연개소문의 외세에 대한 투쟁과 당군과의 침략에 대한 격퇴자로서의 모습을 통해, 일제의 저항에 대한 표상을 나타내고자 했다. <대동고대사론>은 19쪽의 간략한 프린트 물로, 백암 박기정의 서, [[단군조선]], [[기자조선]]의 3 부분으로 이뤄지며, 말미에 고조선의 강성에 대한 견해와 [[윤세복]]의 간단한 발문이 들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대동'이란 백두산을 중심으로 남북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지역을 말한다. 그는 서론에서 독립을 위해 애국애족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적었다. 또한 '대동민족'이란 표현을 썻는데, 이 대동민족은 단군을 시조로 4천년의 역사를 가진 만주족과 한족의 동족으로 구성된 민족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단군의 후예만 우리의 민족이었으나, 후에 중국에서 들어온 기자도 우리 민족이 되어 우리 민족이 이원화되었고, 시간이 흘러 두 민족이 단군민족으로 일원화되었다고 봤다. 또한 민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민족보다 부강한 승리의 세력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민족을 교화, 복종시킬 수 있는 종교와 역사가 있다고 봤다. 하지만 대동민족은 둘다 없어 세계사에서 우리 민족의 명칭이 없어질 것을 우려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 글을 적었다고 기술했다. <명림답부전>은 44쪽 분량으로 되어 있고, 표지에는 '홍동학교지인(興東學校之印)'이라 찍힌 4각의 도장이 선명하게 찍혔고 끝에 역사가(歷史歌)가 붙어있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한 이유는 [[명림답부]]가 [[고구려]]의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백성과 나라를 구한 뛰어난 공을 세운 충신이며, 90세가 넘도록 고위직을 맡으면서 인민의 정신단합과 국가의 원기 배양에 기여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명림답부가 폭군 [[차대왕]]을 죽이고 왕위를 [[태조왕]]의 동생 [[신대왕]]에게 전위한 뒤 자신은 16년간 재상으로서 태평성대의 정치를 한 애국 충신이라고 평가했으며, 서양의 [[올리버 크롬웰]]에 비교될 만한 인물이라고 기술했다. 본론은 1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장은 명림답부의 출생지와 시대, 제 2장은 명림답부의 초년행동, 제 3장은 조의대선의 지위, 제4장은 차대왕의 역사, 제 5장은 대선사무(大仙師巫)의 선견(先見), 제 6장은 수성의 찬위, 제 7장은 대선사무의 피화(被禍), 제 8장은 명림답부의 활동, 제 9장은 왕군과 민군의 충돌, 제10장은 차대왕의 피시(被弑)와 신대왕의 즉위, 제 11장은 명림답부의 세력과 정치, 제 12장은 명림답부의 무공 등 12개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끝부분에 역사가가 있다. <발해태조건국지>의 분량은 66쪽으로, 서론, 12장으로 구성된 본론, 역사가(歷史歌)로 나뉜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의 역사가 단군 조선에서 시작하여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신라와 백제의 삼국시대를 거쳐, 발해와 통일신라의 남북조 시대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발해와 통일신라가 망한 뒤 고려가 건국되었으나, 고려는 신라의 역사만 인식하고 발해의 역사는 인식하지 못하여 고려 4백년간 발해사를 편찬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개탄했다.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와 [[정약용]]이 [[아방강역고]]를 저술할 때 발해강역을 기재하였고, 유득공은 발해고를, 홍석주(洪奭周)는 <발해세가>를 찬술했지만 겨우 당나라 역사서 중 발해인과 교통한 문자를 의거할 뿐이니 국가부흥과 민족회생의 정신을 담은 발해의 역사를 내버려 둔 데 통탄했다. 본문은 12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장은 발해 이전의 고구려의 말운(末運), 제 2장은 태조의 가계와 인격,제 3장은 고구려 유민의 생기(生氣), 제 4장은 영웅의 장신(藏身), 제 5장은 활동시기, 제 6장은 천문령(天門嶺)의 대승첩, 제 7장은 태조 건국, 제 8장은 발해강역(渤海疆域), 제 9장은 발해의 종교와 풍속, 제 10장은 발해의 문학, 제 11장은 태조의 외교, 제 12장은 태조의 유후(裕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발해 건국사에 한정되지 않고 발해의 영토와 문물제도, 종교, 풍속, 문학까지 서술했으며, 발해 태조의 건국과 무왕, 문왕, 선왕 시대까지의 발해의 발달상까지 서술했다. 결론에서는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한민족에게 역사의 지도원리로 발해인의 자강심과 진취심과 희망심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은식은 <동명성왕실기> 역시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실전되었다. 1914년 한국 망국의 역사를 집필하기로 결심한 그는 상하이에서 집필에 전념해 1915년 <한국통사>를 간행했다. 그는 <한국통사>에서 망국의 아픔을 광복으로 이끌기 위해 신(神)과 혼(魂)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용문|모든 사물은 형(形)과 신, 혹은 백(魄)과 혼이 있는데, 혼에 속한 것은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 등이고 백에 속한 것은 전곡, 군대, 성지, 함선, 기계 등이다. 형이나 백은 쉽게 없어질 수 있으나, 신이나 혼은 백이나 형에 관계 없이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한 것은 형과 백이 망한 것이지 혼과 신이 망한 것이 아니므로, 혼과 신이 살아잇는 한 형백의 부활, 즉 조국의 광복이 가능하다.}} 그는 혼이 속한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 중에서 국교와 국사를 중히 여겼다. 즉, 그는 나라의 교육과 역사만 존재한다면 언젠가는 독립할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통사>는 고종 즉위부터 105인 사건까지의 역사를 다뤘다. 그는 서론에서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인용문|우리민족은 전설상의 나라인 당·요 등의 시대로부터 건국되어 4천 3백년을 유지하였지만 우리를 스승으로 삼던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했다. 우리 민족이 다시 광복을 되찾기 위해서는 유태인들이 2천년 동안 그 나라는 망해도 유태족 호칭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던 조상의 가르침을 숭배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역사인 신을 보장하면 나라(形)를 되찾을 수 있다.}} 박은식은 [[흥선대원군]]의 정치 10년은 득과 실이 반반이었다고 평가했다. 긍정적으로 평가내린 것은 문벌과 당파의 견제, 군포의 개혁, 서원 철폐, 국방주의, 풍속교정의 개혁정책이고, 부정적으로 평가내린 것은 [[경복궁]] 중건, 서교(西敎) 탄압, [[쇄국정책]] 등이었다. 그가 보기에, 대원군은 개혁을 단행할 힘이 충분히 있었고 시기적으로도 적절했으나 전통적인 개혁에만 집착했다. 그 이유는 그가 국내외 정세를 관찰할 학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단행하여 그 개혁을 추진할 시기를 놓쳤고, 국내 개혁도 자신의 좁은 생각으로 단행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비판했다. 그 예로 재정개혁이 있는데, 박은식은 대원군의 재정개혁을 높게 평가했지만 민산(民産)을 장려하여 부의 원천을 개발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또 경복궁 중건은 부유한 시대이면 가능하지만 국력이 피폐하고 민심이 혼란스로운 시기에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국정의 중요성을 따지지 않고 행한 부적절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여기에 경복궁 중건을 위해 발행한 [[당백전]]은 화폐제도를 혼란시켰고 원납전(願納錢)을 강제로 징수한 것도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박은식은 대원군이 실각한 것은 위의 실정 때문이 아니라 [[명성황후]]의 책략이었다고 주장햇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대원군의 장점을 위주로 보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태산같이 의지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한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한편으로 난이라고 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김옥균]] 등 정변의 주체세력을 혁명가로 평가했다. 그는 혁명의 주체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인용문|그들은 신중하게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거사를 행한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정변을 진행하여 군부 관료, 국민 등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또 일본에 의지하여 정변을 단행하려 했기 때문에 너무 외세 의존적인 태도여서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은식은 [[동학 농민 혁명]]에 대해서는 내정이 극도로 부패하면서 발생한 대란이라고 봤다. 그는 동학도가 양반토호와 관원을 잔인하게 살인하였음을 지적하면서도, 동학도들이 혁명사상, 정치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로 인해 엄격한 신분계급이 무너졌음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만약 그들이 일본의 개입 전에 경성으로 바로 진격했다면 혁명을 성공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리 되면 서구 같은 시민 혁명을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또, 그는 민비 수구파 정부가 동학 농민 혁명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것에 격렬히 비판했다. 그는 이 반란의 최대 원인은 정부의 과오였으며, 정부가 청군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우리나라의 민중은 흉악하고 간사하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이는 오히려 관원에게 적용된다고 규탄했다. 반면, [[독립협회]]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다만 실패원인에 대해서는 "지식의 근본적 기초가 미천했고 운동이 너무 조급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으며, 일본의 탄압도 한 몫을 했다."고 봤다. 이중 일본의 탄압에 대해서는, 일본공사가 고종에게 해산을 건의한 것을 들어 "일제가 독립협회가 활동할 시 우리나라 민권이 발달하여 침략하기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친일내각과 연합하여 독립협회를 탄압했다."고 서술했다. 또한 박은식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각지의 의병 활동을 소개하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박승환]] 참령의 자결을 신호로 일어난 구 한국군의 봉기와 [[민긍호]] 의병 부대를 중요하게 다뤘다. 그는 의병에 대해 "전술과 병기의 사용은 서툴고 성패를 생각하지 않고 목표를 순국에 두고 있으며, 동지들을 전쟁에서 잃고 맨손으로 무적의 일본군의 총칼에 10년 동안 항거하였다."고 적었다. 박은식은 대한자강회와 같은 애국계몽운동단체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으며, 일제가 황성신문을 비롯한 14개 신문과 잡지를 폐가시키고 30여 종 수십만 권의 서적을 압수하고 공업전습소 학생을 비롯한 애국 학생들을 구금한 것을 고발, 규탄했다. 또한 일제가 [[105인 사건]]을 일으킨 목적에 대해 "신민회원과 평안도 일대의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을 억압할 계획으로 이 사건을 꾸몄다."고 분석했다. 박은식은 한국의 종교에 대해서도 다뤘다. 그는 삼국시대 이전에 성립된 종교로 단군의 신교, 기자의 예교, 소연, 대연<ref>소연과 대연은 공자와 같은 시대의 동이인(東夷人)으로, 거상(居喪)을 잘해 효자의 모범으로서 공자의 칭찬을 받았다.</ref>의 윤교를 들었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최치원]]의 통속 오교, 신라 시조와 고구려 시조 때부터 비롯된 신선교를 들었으며, 불교는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수입되어 여러 명승을 배출하였고 일본에까지 전해주었다. 유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진흥되어, 신라에서는 이두 제작과 같은 특출한 업적이 나타났다고 서술했다. 고려시대에는 유, 불 2교가 성행하였으며, 불교는 선종과 교종으로 구별되어 선종이 더욱 흥기하였으나 사부(詞賦)에 치우치는 폐단이 있어 고려 말에 성리학이 융성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와 불교가 있었는데, 유교는 [[정몽주]]의 계통을 이어받고 여론을 통해 정부를 굴복시킬 수 있어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림이 존중되면서 사화와 당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주자학에만 치우치고 다른 학문은 모두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한편 불교는 명승을 많이 배출하고 왜란 때는 의병도 조직했지만 고려 말부터 유가의 배척을 받아 점점 도태되었다고 기술했다. 조선왕조 후기에 들어온 천주교와 개항 이후에 들어온 미국의 개신교의 배일활동이나 병원 자선사업 등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는 100만 신도를 가졌다고 한 데 비해, 시천교는 모두 일진회당이라고 매도했다. 박은식은 [[3.1 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운동 관계 자료를 수집하였고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상하이에서 간행했다. 이 책은 '한국통사'의 자매편에 해당되며, 일제의 탄압 및 동화정책에 맞서서 투쟁하는 국내외의 민족운동의 실상을 밝히고 일제의 패망과 독립성취의 필연성을 예고했다. 이 책의 구성은 한국독립운동사 서문, 상,하 2편과 결론으로 이뤄졌다. 상편은 종 25장으로, 제 1장 민족의 약력에서 시작하여 제 25장 각 종교를 박멸하는 정책으로 구성되었다. 또, 상편은 3.1 운동의 도입과정을 서술했다. 하편은 3.1 운동으로부터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독립투쟁사를 서술했다. 박은식은 서문에서 "한국이 나라의 망함이 그 통을 알고 '한국통사'를 저술하였으므로 반드시 '독립운동사'가 있을 것이고 이 '독립운동사'가 있으니 반드시 '독립성공사'가 있을 것이다."라며, 한국독립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그는 나라의 국혼만 존재한다면 나라가 망해도 마침내 독립한다고 보면서, "2천만의 국혼만 존재한다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광복의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고"고 적었다. 그는 일제가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인용문|일본은 섬 가운데 자리잡고 있어 본래부터 보고들은 것이 없는 고루한 나라이고, 중국과 러시아와 싸우는 무인들의 전제정치에 일반 사람들은 불만을 품고 밖을 향해 내달리는 것이 지나치게 급격하여 백성의 힘은 이미 피폐하였다. 세계 여러 사람의 민의를 무시하고 오직 소수의 간사한 무리를 이용하여 그들의 야욕을 제멋대로 부려 세계 민의의 원수가 되어 일본은 패망할 수밖에 없다. 또한 구미열강의 여러 나라들도 저들의 침략행위에 분노하여 기회만 있으면 제압하려 하니, 국제적인 고립이 생겨 패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는 이 저서에서 [[갑신정변]]을 '한국통사'에서보다 높게 평가했다. 한국통사에서는 주도세력을 갑신혁당이라 불렀으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갑신독립당이라 불렀으며, 한국통사에서는 난으로 다뤘지만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혁명으로 다뤘다. 그는 갑신정변을 과거에 비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실패를 애석해 했다. 동학 농민 혁명에 대해서는 한국통사에서는 갑오동학당의 난이라고 기술했지만, 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갑오동학당의 ‘대풍운(大風雲)’이라고 고쳤다.그는 ‘대풍운’을 동학당의 혁명의 기치로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는 동학당이 무식하고 거동이 난폭하여 기강이 서 있지 못하여 개혁 정치를 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즉, “그들이 구습을 파괴할 수는 있었으나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유능한 자가 나와야 가능했었다”는 것이었다. 독립협회 활동은 『한국통사』에서는 주로 독립의 문제를 중심으로 서술하였으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민권의 문제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즉,독립협회의 운동이 대한제국의 독립과 함께 백성들의 민권운동임을 강조하여 독립협회 회원들이 친러 수구파 대신들의 제거와 개혁정부의 수립을 요청한 운동임을 밝혔다. 의병 활동에 대해서는 한국통사보다 독립운동지혈사에서 더욱 자세하게 서술했다. 그는 의병은 민군이며, 국수라고 지적하며 그들의 저항은 일제의 무력 압박을 가중시키고 이로 인해 한국 민족도 반동을 격렬하게 하여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한국통사에서는 의병의 무력이 약해 결코 독립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평가했지만, 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의병의 가치를 높게 봤다. 박은식은 3.1 운동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3.1 운동이 한국인 2천만이 모두 정의, 인도의 가치 아래 오직 맨손으로 궐기하여 독립을 구하고자 함으로서 세계혁명사상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봤다. 3.1 운동 초창기에는 민족자결주의에 호응하여 평화적인 시위로 진행되었으나 후에는 폭력적으로 변모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한국 민족을 야만적으로 학살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격렬한 독립운동은 한국 민족의 본의가 아니었으며, 인도주의를 내세우고 있다고 봤다. 또 그는 3·1운동을 전 민족이 일치한 대민족 운동으로 보고,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의 민족으로부터 독립자격을 인정받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3.1 운동으로 인해 독립쟁취를 위한 민족의 바람이 구체화되고 있다면서, 광복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믿었다. 한편, 박은식은 독립운동지혈사에서도 한국통사에서처럼 국혼을 강조했지만, 그 외에도 민의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이 민의에 의해 반드시 독립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회주의]]를 의식하고 그것이 독립운동에 유리한 조건임을 인정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3.1 운동에서 일본 헌병대에게 피살되거나 부상당한 이들의 수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만주 등지에서 벌어진 독립전쟁 역시 중요하게 다뤘다. 그는 과거에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영웅이 등장해야 한다고 봤지만, 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민중운동을 중시하면서 한민족 전체의 단합된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또한, 그는 한국을 망국에 빠뜨린 무력한 사류들을 비판하면서, 인민에 대해 "자국 정부의 학대를 반항치 못하는 자가 어찌 다른 나라의 학대를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힐책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남긴 유언에서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분류:황주군 출신]] [[분류:대한독립선언서 연서자 39인]]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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