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동

朴順東. 본관은 밀양 박씨, 호는 진관(津觀). 199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20년 5월 2일 1920년 5월 2일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면 행정(현 순천시 행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28년부터 1933년까지 순천공립보통학교(현 순천남초등학교)에 재학했고,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장남 박영운의 증언에 따르면, 박순동은 1938년경 일본인 교사가 일기 검사를 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 인권 유린이라고 항의했다가 경찰서 고등계로 끌려가 호된 문책을 당했고, 이를 계기로 반일감정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41년에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매형이자 승려인 조종현(趙宗玄)[1] 밑에서 2차례에 걸쳐 승려 수업을 받았다. 이후 조종현의 권유로 1943년 4월 일본 고마자와(駒澤)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채 1년을 다니지 못하고 1944년 1월 20일 학도지원병 제도로 인해 학병에 강제로 끌려갔다. 그는 용산 제629부대에 소속되어 6월 18일 부산에서 수송선을 탄 뒤 해로와 육로를 거쳐 9월 7일 버마의 동북단인 라시오에 기차로 도착했다.

박순동은 일본의 버마원정군 오오가미 사단 소속 아야노 산포중대의 일등병이 되었다. 이후 그는 부대의 이동에 따라 버마 동북부와 운남성의 변경을 넘어 버마 남중부 메이크텔라까지 진군했다. 당시 그가 속한 산포중대의 분대에는 그를 포함의 3명의 조선인 학병이 있었다. 한 명은 그보다 5살 연상에 영암군 도포면 출신이고 도쿄 니혼대학을 졸업했던 이종실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보다 한 살 어리고 전남 목포 출신이며 일본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에 재학하던 이가형(李佳炯)이었다. 박순동은 이들 두 사람과 의기투합하며 서로를 의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사람은 일본군이 임팔 작전을 실패했고 영국군 탱크부대가 버마의 일본군 퇴로를 끊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했다. 또한 후방 주둔지에 영국군이 들어온다는 급보도 접했다. 이에 그는 동료들과 함께 탈출을 논의했지만, 이가형은 병약한데다 말라리아에 걸려 탈출이 어려웠다. 결국 그는 이종실과 함께 탈출을 논의한 끝에 이가형을 남겨두고 부대 근처 마을에 피난하고 있던 인도인 마운테인틴의 도움을 받아 탈출을 감행했다.[2]

그들은 수통 2개, 쌀 두줌, 38식 소총 1정, 실탄 30발을 들고 탈출에 나섰다. 훗날 박순동이 본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저서 <모멸의 시대>에 따르면, 당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계획했다고 한다.

1. 도중 불심신문에 대해서는 (주둔했던) 구메부락쪽의 잔류부대 연락병으로 가장한다.


2. 행동을 기어코 방해하는 놈은 죽인다. 죽일 때는 칼을 쓰고 되도록 총성을 삼간다.

3. 투쟁시의 부서담당으로는 이종실이 총으로 상대를 겨누어서 행동을 견제하는 틈을 타서 박순동은 격투로 넘어뜨려서 칼로 찌른다. 상대의 힘이 우세할 때는 총의 개머리판으로 가격한다.

4. 상대가 2인 이상이어서 부득이할 때는 총을 발사한다.

5. 죽이는 것이 발각되어 다수에게 포위될 때는 총으로 자살한다.

두 사람은 3일동안 사막 40리를 포함해 70리를 걸어야 했다. 도중에 일본군 병사, 장교들을 만났지만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지막 위병소에서 일본인 보초 1명이 자신들의 출입을 제지하자, 이종실이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사이 박순동이 습격해 단도로 살해했다. 그리하여 1945년 3월 23일, 박순동 일행은 모든 검문을 돌파하고 조력자 마운테인틴과 합류했다. 사흘 후, 마운테인틴의 장인인이 박순동 일행을 영국군에게 소개하는 소개장을 타자기로 작성해줬고, 부락청년 2명이 그들을 영국군 진영으로 인도했다.

박순동과 이종실은 현지 영국군 사단사령부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은 뒤 3월 28일 인도 뉴델리로 향했다. 이들은 뉴델리의 중국, 버마, 인도전구 사령부에서 한동안 일본인 포로들과 섞여 있었다. 1주일 후, 일본군 기병대를 탈출한 박형무(朴亨武)가 이들과 합세했다. 박순동은 영국군의 포로로서 포로번호 #M-1354를 받았고, 이종실은 #M-1353, 박형무는 #M-1371번을 부여받았다. 세 사람은 일본군 포로들이 하는 궁성요배를 거부하고 반일감정을 서슴없이 토로했다.

이에 뉴델리 주재 미 첩보기관 OSS가 이들을 주목했다. 그들은 OSS/인도-버마지대 소속이던 최창수 하사의 통역으로 탈출과정, 출신지역, 항일의지 등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문:그대가 연합군에게 어떤 임무를 받았을 때, 그것을 일본군이 탐지하고 그대의 가족에게 보복을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답: 조선인의 대부분은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조국을 위하여 연합군에서 일하는 결과로 받는 박해라면 내 가족은 나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문: 연합군에서 일하는 경우에 무슨 계급을 바라는가?

답: 계급은 필요치 않다.

문: 보수는 얼마를 바라는가?

답: 먹고 입기만 하면 된다.

- 박순동, <모멸의 시대>

이들에 관한 기록은 1945년 4월 말부터 OSS문서에 등장했다. OSS 인도지부의 윌킨슨은 1945년 4월 26일 OSS 워싱턴의 아이플러에게 전보를 보내 최근 영국군에 투항한 한국병사 2명(박순동, 이종실)이 적극적인 반일 의지를 표명하며 연합군 작전에 동참하길 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윌킨슨은 또 이들이 도쿄를 떠난 지 불과 18개월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최신 정보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OSS 워싱턴은 1945년 4월 28일 답전을 보내 이들을 냅코 프로젝트에 참가시키길 원한다며, 이들의 이동에 필요한 조치가 무엇일지를 문의했다. OSS 인도지부는 박순동, 이종실이 대학교육을 받은 인물들로 영어를 하지 못하지만 최근 일본과 일본의 정보에 민감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OSS 워싱턴이 필요하다면 이들을 보내겠다고 회신했다. 또한 이들을 미 본토로 보내는 데 있어서 미 국무부의 입국허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후 OSS 인도지부는 박형무가 영국군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추가로 워싱턴에 전달했고, 박형무가 "일본군 제49사단에 약 500명의 한인 병사들이 있으며, 이들은 연합군에 투항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덧붙였다. 미군은 이들의 존재를 중요시해 영국군에게 박순동, 이종실을 워싱턴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영국군은 동의했다. 그러나 인도-버마전구 사령관의 정치고문 막스 비숍(Max Bishop)은 이들을 워싱턴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미 국무부와의 접촉이 이뤄져야 하며, 이들에 대한 무여권, 무비자 입국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포로 대우에 대한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포로를 전쟁 수행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는 모두 영국군에 투항한 포로이므로, 이들을 미국까지 데려가서 특수작전에 투입하는 것은 제네바 협약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미 국무부는 이들을 기용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고, 냅코 프로젝트 담당자 아이플러는 이 문제를 놓고 고심했다.

하지만 OSS는 전쟁 기간 내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활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OSS는 국무부에게 세 사람의 무비자, 무여권 입국허가를 내려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국무부는 5월 17일 허가했다. 이후 세 사람은 미국 동부 항구로 수송되었다. 하지만 국무부가 정말로 허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OSS가 국무부의 문서를 위조하거나 임의로 행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5월 22일 워싱턴행 비행기에 탑승한 세 사람은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카사블랑카, 대서양을 거쳐 5월 24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이들은 5월 29일 로스앤젤레스에 이동하여 아이플러의 환영을 받은 뒤 훈련장이 설치된 샌타 카탈리나 섬에 도착했다. 그 후 박순동 등 세 사람은 1945년 6월부터 9월까지 외부와 격리된 채 고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 훈련 등을 이수했다. 훈련과정에서 이들의 국적, 성명, 경력은 비밀에 붙여졌고, 이들은 각각 조(Joe, 이종실), 찰리(Charley, 박형무), 톰(Tom, 박순동)으로 불렸다.

종전 무렵, 세 사람은 전체 훈련의 3/4 과정을 이수했다. 박형무는 평균 87점을 받으며 1급 무전전문가로 평가되었고, 이종실은 평균 80점을, 박순정은 평균 90점을 받았다. OSS는 이들을 LA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실지로 가상 침투시키기도 했으며, 침투용 잠수정에 태워서 LA 항구에 잠입하는 훈련을 수행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세 사람은 LA 빌트모아에 무선 송출기를 설치했고, 센디에이고로 파견되어 무선국을 설치하다 현역 군인에 체포되어 FBI의 수사를 받기도 했다. 이렇듯 그들은 거의 모든 훈련을 이수하고 이제 조국으로 침투할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그들의 운명은 기로에 놓였다. OSS는 연합군이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고 한인 포로들을 전쟁에 동원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해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를 하와이 포로 수용소로 보내버렸다. 그들에게 주어진 거라고는 아이플러가 발급한 감사장 한 장 뿐이었다. 훗날 박순동은 저서 '모멸의 시대'에서 자신이 한국과 미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사력을 다했거늘 돌아온 것은 포로 취급이었다며 분노를 토로했다.

박순동은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도 한인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그는 이종실, 박형무와 함께 2,700명에 달하는 한인 포로들의 별도 관리를 요청했고, 그 속에서 한인포로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유 한인보>라는 주간지를 발행했다. 이 주간지는 60쪽 정도로 매주 1,350부가 발행되었다. 세 사람은 모두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한인 포로들의 이익을 도보하고 단결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또한 포로수용소장 하월 대령은 이들이 다른 포로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적지 않은 편의를 제공했고,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 역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한인 포로들을 지원했다. 그래서 박순동은 포로수용소에서 나름대로 편하게 살 수 있었다. 박순동은 <자유한인보> 제3호(1945년 11월 15일)에 다음과 같은 시를 게재하기도 했다.

젊은이여 그대들은 나라의 방패이니라.


궆이시랴 그대들의 먹은 마음을,

끊치시랴 그대들의 세운 발길을,

그대들의 목숨은 조선의 목숨이니라.


젊은이여 그대들은 뭉처지는 힘,

범이 되어 홀몸으로 헤매지 말고,

벌이 되어 뭉쳐살며 같이 도으라,

손가락을 곱으시면 주먹이 되리라.

그렇게 총 7회의 <자유 한인보>를 발간하던 세 사람은 한국 송환이 임박하자 <정간의 말>을 게재했다. 그들은 이때 포로 생활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포로였다는 것을 수치로 생각치 말자는 것이다. 우리의 포로됨은 그 성질이 달르거니와 또한 구테혀 포로의 수치를 느낀다면 그는 우리 동포 3천만 전부의 수치이여서 우리는 이 수치 위에서 설욕의 건설에 힘써야 할 껏이다. 따라서 우리 2천 7백명만이 3천만명 중에서 수치의 자책심에 얼킬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나어가서 우리의 심각한 정신적인 단련을 뻐처서 씩씩하게 일해야 할 것이다. 실상 우리가 완전하게 13도 강산의 하늘에 태극기를 날리는 날까지는 전선의 고초와 철망 내의 부자유한 생활이 우리 2천 7백면 뿐만이 않이요 3천만 조선동포 전체의 마음과 몸을 속박하고 잇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않될 껏이다.

1945년 12월 21일 이종실, 박형무와 함께 하와이를 출발한 그는 1946년 1월 11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1947년 3월까지 순천에 주둔한 미군정청의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1947년 3월 25일부터 1952년 11월 5일까지 순천제지주식회사에 근무했으며, 1947년 11월 10일부터 1949년 5월 31일까지 순천공업중학교 영어과 교사를 역임했다. 또, 1952년 11월 15일부터 1953년 9월 15일까지 전남 벌교상업고등학교 영어과 교사를 역임했으며, 1953년 9월 17일부터 1963년 10월 14일까지 한국천보제지주식회사 상무이사를 맡았다.

1957년 1월 13일부터 1958년 1월 12일까지 1년간 미국 제지공업을 시찰했지만 1963년 8월 순천에서 수해가 발생하는 바람에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실직되어 생활고를 겪었다. 그러다 1964년 전주지 원창제지주식회사 상무이사 겸 공장장으로 발탁되어 1년간 일했고, 1965년 3월부터 1967년 2월까지 목포시 문태중학교·문태고등학교 영어과 교원으로 일했다. 그리고 1965년 9월 자신의 경험을 담아낸 자전적 논픽션 <모멸의 시대>를 출간해 '신동아' 논픽션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로 <암태도소작쟁의>, <전명운전> 등 여러 논픽션 작품을 발표했다.

1967년 전남 광주 전남중학교·전남고등학교 영어과 교원에 부임하여 2년간 근무하던 그는 1969년 1월 20일 인천광역시 기독병원에서 병사했다. 향년 49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박순동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정병준, <박순동의 항일투쟁과 미 전략첩보군(OSS)의 한반도침투작전>, 역사문화학회, 2003.[1]
  • 독립유공자공훈록

각주

  1. 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의 아버지이다.
  2. 이가형은 두 사람이 자신을 두고 탈출한 것에 불만을 가졌고,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종전 후 버마의 포로수용소에서 1년간 포로 생활을 한 뒤 1946년 8월 귀국한 그는 중앙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활동했다. 그러다 박순동과 재회해 서로 화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