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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대항해시대 시리즈|| | {{다른 뜻|대항해시대 시리즈||본 항목을 배경으로 한 동명의 게임}} | ||
大航海時代, Tha Age of Discovery(or The Age of Exploration) | |||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약 2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이 지구 곳곳을 항해하며 신항로를 개척하던 시기를 의미한다. | |||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Tha Age of Discovery, 즉 발견의 시대라고 칭하지만 이는 유럽인 관점에서의 표현으로 유럽인들이 발견했다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에는 이미 현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즉, 유럽인들 입장에서나 발견한 거지 보편적인 관점에서는 발견이라고 할 수 없어서 모험과 항해의 로망을 담아 대항해시대라고 일본에서 통칭했고 이 표현이 그대로 한국에게 넘어왔다. 반면, 중국에서는 영문표기를 존중하여 지리대발견이라 통칭한다. | |||
== 배경 == | == 배경 == | ||
=== 포르투갈의 국가전략 === | === 포르투갈의 국가전략 === | ||
포르투갈은 유럽의 외곽인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한 말 그대로 유럽의 끝자락이었다. 그렇다고 농경이 잘 되거나 광물이 산출되는 것도 아니어서 포르투갈은 국가 성장을 위해 필히 해상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런데 유럽의 핵심 해상무역권은 [[한자동맹]]을 중심으로 한 북해-발트해 무역권과 지중해 도시국가들이 주도하는 지중해 무역권으로 양분되어 있었고, 포르투갈은 그 위치상 어느 한 쪽에도 낄 수 없는 나라였다. | |||
이 때문에 포르투갈은 일찌감치 국가전략을 해상진출, 그것도 신항로 개척으로 잡았다. 포르투갈은 [[1415년]] 세우타를 점령하여 아프리카 진출의 토대로 삼은 후, 국가의 명운을 걸고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이 건재하던 15세기 초반, 제일 먼저 먼 바다로 눈길을 돌린 것이다. | 이 때문에 포르투갈은 일찌감치 국가전략을 해상진출, 그것도 신항로 개척으로 잡았다. 포르투갈은 [[1415년]] 세우타를 점령하여 아프리카 진출의 토대로 삼은 후, 국가의 명운을 걸고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이 건재하던 15세기 초반, 제일 먼저 먼 바다로 눈길을 돌린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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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년]]에는 마침내 중국에 도달하여 광저우 일대에서 교역을 시작하고 [[마카오]]에 상관을 두었으며, [[1542년]]에는 [[일본]]의 타네가시마에 도달하여 마침내 유럽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치는 기나긴 대항로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 [[1513년]]에는 마침내 중국에 도달하여 광저우 일대에서 교역을 시작하고 [[마카오]]에 상관을 두었으며, [[1542년]]에는 [[일본]]의 타네가시마에 도달하여 마침내 유럽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치는 기나긴 대항로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 ||
=== 16세기 전반 스페인 : 인도를 가다 우연히 걸린 로또 === | === 16세기 전반 스페인 : 인도를 가다 우연히 걸린 로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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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후반 ~ 17세기 : 신흥세력의 급부상과 항로의 안정 === | === 16세기 후반 ~ 17세기 : 신흥세력의 급부상과 항로의 안정 === | ||
16세기 중후반부터 [[잉글랜드]] | 16세기 중후반부터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와 같은 후발주자들이 맹렬히 신항로로 뛰어들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17세기에 이르면 포르투갈 세력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동남아시아와 인도에서 거의 축출되었고, 스페인의 신대륙 식민지들은 잉글랜드 해적의 공격과 약탈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 ||
이처럼 무게추가 빠르게 신흥국가들에게로 넘어갔고, 신항로도 이들에 의해 독점되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무역대신 해외식민지의 경영으로 국가전략을 바꿨고, 유럽의 향신료시장은 리스본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갔다. 이후의 지리적 발견도 이들에 의해 주도되어 오세아니아 대륙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에 의해 발견되었다. | |||
== 결과 == | == 결과 == | ||
유럽인들의 주도하였다는 전제긴 하지만 신항로가 개척되었고, 그동안 각자의 지역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상호간에 교류를 시작하였다. 이제 어느 특정 지역에서의 사건이 멀리 떨어진 다른 문화권, 다른 지역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물자와 사람간의 교류가 이루어졌고, | 유럽인들의 주도하였다는 전제긴 하지만 신항로가 개척되었고, 그동안 각자의 지역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상호간에 교류를 시작하였다. 이제 어느 특정 지역에서의 사건이 멀리 떨어진 다른 문화권, 다른 지역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물자와 사람간의 교류가 이루어졌고, 고추, 담배, 커피와 같은 작물들이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으며 반대로 서양식 화기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대륙으로 전파되었다. | ||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서유럽 국가들은 발빠르게 근대 |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서유럽 국가들은 발빠르게 근대 민족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며 세계제국의 기틀을 다졌고, 이때 확고부동해진 서유럽의 절대적 우위는 21세기 초인 오늘날까지도 흔들리긴 하지만 유지되고 있다. | ||
[[분류:세계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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