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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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시카]] 출신의 [[프랑스]]의 [[정치가]], [[군인]]. 프랑스 제1제정의  [[황제]]이며 황제로서는 나폴레옹 1세.
[[코르시카]] 출신의 [[프랑스]]의 [[정치가]], [[군인]]. 프랑스 제1제정의  [[황제]]이며 황제로서는 나폴레옹 1세.


인류사를 통틀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한니발 바밀카]]와 버금가는 손꼽히는 천재 군사전략가. 더군다나 비교되는 다른 2명이 고대의 인물인데 비해 나폴레옹은 근대의 인물로, '''사실상 혼자서 전 유럽을 상대'''했다는 평가를 듣기에 더더욱 부각된다.
인류사를 통틀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한니발 바밀카]]와 버금가는 손꼽히는 천재 군사전략가. 더군다나 비교되는 다른 2명이 고대의 인물인데 비해 나폴레옹은 근대의 인물로, '''사실상 혼자서 전 유럽을 상대'''했다는 평가를 듣기에 더더욱 부각된다. 이는 당대에 그를 적대했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나 [[프로이센]]의 블뤼허 원수,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꺾은 [[아서 웰즐리 웰링턴]] 모두 인정했던 사실이었다.


19세기 유럽 외교사는 이런 인간이 어떻게 다시 튀어나와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것을 막는가란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19세기 유럽 외교사는 이런 인간이 어떻게 다시 튀어나와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것을 막는가란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2015년 4월 23일 (목) 19:40 판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 잉그레, 1806

Napoleon Bonaparte. 1769. 8. 15 ~ 1821. 5. 5

개요

코르시카 출신의 프랑스정치가, 군인. 프랑스 제1제정의 황제이며 황제로서는 나폴레옹 1세.

인류사를 통틀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한니발 바밀카와 버금가는 손꼽히는 천재 군사전략가. 더군다나 비교되는 다른 2명이 고대의 인물인데 비해 나폴레옹은 근대의 인물로, 사실상 혼자서 전 유럽을 상대했다는 평가를 듣기에 더더욱 부각된다. 이는 당대에 그를 적대했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프로이센의 블뤼허 원수,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꺾은 아서 웰즐리 웰링턴 모두 인정했던 사실이었다.

19세기 유럽 외교사는 이런 인간이 어떻게 다시 튀어나와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것을 막는가란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생애

유년기

코르시카의 아작시오 태생이다. 부친은 이탈리아계로 제노바 공화국이 프랑스에 코르시카 섬을 매각한 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패하자 항복, 전향하여 프랑스 귀족의 작위를 받았다. 즉, 시골뜨기라 놀림받을지언정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귀족이다.

10살이 되던 1779년에 본토로 가 유년사관학교, 뒤이어 정식으로 사관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했는데 졸업동기 58명 중 42등으로 졸업, 겉보기엔 상당히 안 좋은 성적이지만 사실은 미친 듯이 월반해서 무려 4년 월반 졸업이었다. 과목 대부분, 특히 수학과 역사에서 우수했다고 전해지며 본국 귀족 출신 학생들과 교우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능력만큼은 인정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부친이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사관학교 시절 경제적으로는 궁핍했다. 물론 먹고 살며 학교를 다니는데 부족하진 않았지만 당시 사관학교는 프랑스 본토의 이름높은 귀족가의 자제들이 득실거리다보니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혁명 속에서

1785년 포병 소위로 임관 후 별다른 특색 없이 지내다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역사의 격동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자코뱅 파를 지지했으며, 이후 고향으로 잠시 돌아갔으나 코르시카 독립운동의 지도자 파울리와 충돌했다. 혁명의 혼란 속에서 독립국가 코르시카를 건설하자는 파울리와 프랑스에 남아야 한다는 나폴레옹의 충돌은 결국 코르시카 정계에서 세력이 미미했던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나고 나폴레옹은 가족들과 함께 본토로 이주한다.

이후 1793년의 툴룽 포위전에서 왕당파 반군을 격파하고 이를 지원하러 온 영국 함대를 포격으로 쫓아내는 전공을 세워 혁명전쟁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채 30세도 되지 않아 사단장의 자리에 올랐다. 1795년에는 파리 에서 왕당파가 궐기하자 수도의 시내 한복판에서 포병 일제사격을 가하는 충공깽한 짓으로 간단하게 봉기를 진압했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어 이탈리아 방면의 오스트리아군을 보이는 족족 격파, 1797년 2월 최대 요충지 만토바를 함락하여 오스트리아 세력을 북부 이탈리아에서 밀어내고 전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뒤이어 1798년 이집트 원정을 떠나 소기의 성과를 거뒀으나 아부키르 만 해전의 패배로 함대가 괴멸당하고, 중동 방면으로의 진격이 난항을 거듭하였으며, 본국의 정치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가자 1799년 10월 급거 귀국했다.

나폴레옹의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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