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프로 야구 지도자 === [[1982년]] [[두산 베어스|OB 베어스]]의 창단 투수 코치였던 김성근은 [[1984년]] ∼ [[1988년]] OB 베어스 감독을 시작으로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삼성 라이온즈|삼성]],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LG 트윈스|LG]] 등 무려 5개 팀 감독을 맡았다. 만년 하위권이었던 태평양 돌핀스([[1989년]], 3위)과 쌍방울 레이더스 ('96-'97, 2위-3위)을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으며, [[2002년]] 침체에 빠져 있었던 LG의 사령탑을 맡아 팀을 [[2002년 한국시리즈]]에 올려 놓고 LG 트윈스를 준우승으로 이끌었으나 구단 고위층과의 갈등을 빚으면서 석연치 않게 퇴진했다. <del>LG 트윈스 비밀번호의 시작</del> <del>[[김진욱|이 사람]]이 생각난다.</del> <del>그것도 하필 [[잠실 야구장|같은 구장]]을 쓰는 [[LG 트윈스|두]] [[두산 베어스|팀]]이</del> 당시 LG 트윈스는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른바 '신바람 야구'를 슬로건으로 내건 자율 야구를 지향하는 팀이었으나, 이른바 '[[데이터 야구]]'가 팀 컬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del>과연?</del> [[2006년]] 당시 한국 프로 야구 감독으로 활동한 15년간 통산 866승(803패 43무, 승률 0.519)을 거둬 [[김응룡]] 전 [[한화 이글스]] 감독의 1,463승(22년간, 1125패 65무)<!--2013시즌기록 시즌 후 합산바람-->에 이은 역대 2위를 기록 중이다. 태평양, 쌍방울, LG 등에서 하위 팀을 상위로 끌어 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검증받았으나, 한국시리즈 우승은 [[2007년]]에서야 처음으로 이루었다. 현재 지도자로 활동하는 코치나 감독들 중 [[김경문 (1958년)|김경문]]과 [[조범현]], [[박종훈 (1959년)|박종훈]], [[김기태 (1969년)|김기태]] 등 여러 지도자들이 현역 선수 시절에 그의 손을 거쳐 갔다. 특히 박종훈의 아들인 [[박윤]]은 [[SK 와이번스]] 소속이어서 아버지를 이어 2대째 손을 거쳤다.<ref>[http://www.sportsseoul.com/news2/baseball/pro/2009/1129/20091129101010100000000_7698422023.html 김성근 감독과 LG 박종훈 감독의 '3대째 인연'] - 스포츠서울</ref> 또한 그가 맡은 팀의 선수들은 시즌 중에는 물론 비 시즌 기간에도 이른바 '지옥 훈련'이라 불릴 정도로, 막대한 훈련 량을 소화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39&oid=038&aid=0002040614 SK의 힘은 '지옥 가을 훈련'] 《한국일보》성환희, 2009년 11월 27일.</ref><del>성근 다이어트!</del> 이를 바탕으로 많은 백업 요원들을 주전과 맞먹게 양성하였으며, [[박정환 (1977년)|박정환]] 등의 몇몇 타 팀 방출 선수들도 김성근 감독 아래에서 부활하기도 했으며<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0911240033 김성근 감독, ‘제2의 재활 공장장’이 될까] - OSEN</ref> <del>이제 [[송은범]]만 살리면 된다.</del> 이러한 특징은 [[고양 원더스]], 한화 이글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 [[두산 베어스|OB 베어스]] (1982년~1988년) ==== [[한국 프로 야구]]가 출범한 이후로 그는 OB 베어스의 창단 투수 코치로 부임하였고, [[1984년]] 시즌을 앞두고 [[김영덕 (야구인)|김영덕]]의 후임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1984년 후기 리그에서 OB 베어스는 [[롯데 자이언츠]]와 1위 자리를 다투며 한국시리즈 진출을 노렸으나, 전기 리그 우승 팀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 김영덕의 '고의 패배 작전'으로 인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del>그렇게 올라간 김영덕도 [[최동원|결국...]]</del> 소속 팀 OB 베어스는 전·후기 통합 승률 1위를 달성하였으나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하는 비극을 맞았다. 이후 OB 베어스는 긴 침체기를 걷게 되고, [[1988년]] 시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 [[태평양 돌핀스]](1989년~1990년)와 [[삼성 라이온즈]] (1991년~1992년) ==== [[1989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그는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인천광역시|인천]] 연고 팀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해 강력한 신인 투수 3인방([[박정현 (1969년)|박정현]], [[최창호 (야구인)|최창호]], [[정명원]])의 탄탄한 투수력을 바탕으로 만년 꼴찌 팀이었던 태평양 돌핀스를 사상 첫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를 2승 1패로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으나 [[해태 타이거즈]]에게 3연패로 스윕당해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하였다.(태평양 돌핀스는 이후 [[정동진 (1946년)|정동진]] 감독이 재임하던 중 [[1994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이후 [[1990년]]에 다시 5위로 추락한 태평양 돌핀스는 그와 재계약하지 않았고, 그는 이듬해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옮겼으나, 초유의 위장 오더 등 각종 구설수를 남기고 2시즌 동안 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자 [[우용득]]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 인스트럭터와 2군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 간다. ==== [[쌍방울 레이더스]] (1996년~1999년) ==== [[한동화]] 감독의 후임 <del>야왕 대신 야신</del> 으로 [[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을 맡으면서 만년 약체였던 쌍방울 레이더스를 2년 연속 3위로 끌어올려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IMF 사태 여파로 모기업 쌍방울이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구단이 '선수 팔기'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었고 이때 팀의 주축인 [[박경완]], [[김현욱 (야구인)|김현욱]], [[김기태 (1969년)|김기태]], [[조규제]] 등이 현금 트레이드로 타 팀으로 떠나 전력이 크게 약화된다.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의 숙식 등을 위해 본인의 사비까지 쓰며 노력했지만 쌍방울 구단의 열악한 환경 그리고 빈약한 선수층이 가진 한계에 이르러, [[1998년]]에는 정규 시즌 6위로 마무리했고 [[1999년]] 전반기까지 팀이 최하위인 8위에 머물면서 올스타전이 끝난 날 성적 부진에 따른 분위기 쇄신이라는 이유로 해임된다. 결국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9년에 최하위로 마감한 뒤 [[2000년]]에 해체되었다. 쌍방울 선수단은 신인 지명 선수들을 포함하여 2000년 [[SK 와이번스]]가 새로 창단되면서 인계되었고 그가 [[2007년]]에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어 다시 인연을 맺게 된다. ==== [[LG 트윈스]] (2001년~2002년) ==== 쌍방울의 감독에서 물러나고 [[1999년]] 시즌이 끝난 후 곧바로 삼성 라이온즈가 다시 그를 불러들여 이듬해 2군 감독을 1시즌 동안 맡았지만, 시즌 후 코치진의 대개편 과정에서 해임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9&aid=0000062351 프로야구 삼성, 코치 6명 무더기 해임] - 매일경제</ref> <ref>왜냐하면 이때 2001년 시즌 감독으로 부임할 사람이 김응룡 이었기 때문이다.</ref> [[2001년]] LG 트윈스로 옮겨 2군 감독으로 부임하였다가, 시즌 초 팀이 1승 9패에 그치자 수석코치로 1군에 올라왔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38&article_id=0000065550 LG, 코칭스태프 대수술] - 한국일보</ref> LG 트윈스 감독으로 재임하였을 때 다시 한 번 그는 LG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01년 시즌 초 LG 트윈스는 9승 1무 25패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그 해 [[5월 16일]] [[이광은]]을 경질하고 수석코치로 올라온 김성근을 감독 대행으로 선임하는 초강수를 보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38&article_id=0000072631 '최악 부진' 이광은 감독 전격 해임] - 한국일보</ref> 2001 시즌이 끝난 후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2002년]] 시즌에는 하위 팀이었던 LG 트윈스를 정규 시즌 4위에 올려 놓으며, 준 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와 KIA를 잇따라 꺾고 [[200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준 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선수들이 지쳐 갔음에도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흐름을 보여 주며 삼성과 LG 양 팀 모두 흥미 진진한 경기를 펼쳤고, 2002년 한국시리즈는 삼성의 우승으로 끝났던 6차전까지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였고, 당시 고관절이 좋지 않았던 [[외야수]] [[김재현 (1975년)|김재현]]이 대타로 나와 장타를 날리면서도 겨우 1루에 걸어가는 모습을 연출하는 등 대부분의 야구 팬들에게 역대 한국시리즈 경기 중 최고의 명승부로 회자가 되고 있다. 그러나 결국 2002년 11월 10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에서 열린 6차전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과 [[마해영]]에게 백투백 홈런을 얻어맞고 2승 4패로 밀려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ref>이후 그는 경기 중 유일하게 눈물을 흘린 경기가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이었다고 회고했다.</ref> 시즌 후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유임될 줄 알았던 그는, LG 트윈스 어윤태 사장으로부터 "김성근의 야구는 LG의 야구가 아니다"라는 혹평을 받으며, <del>그럼 너가 해보시든가</del> 계약 기간(3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해임되어 또 한 번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과 어윤태 사장은 2002년 시즌 초부터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었으며,<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0277704 프로야구 LG, 김성근 감독 전격 해임] - 연합뉴스</ref> 당시 LG의 팀장을 맡고 있었던 아들 김정준은 “워낙 LG 구단 쪽에서 내부적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그런 분위기가 오히려 선수단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김성근 감독과 관련해서 구단이 어떻게 움직인다는 것을 선수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선수들이 악으로 깡으로 승부에 임한 데는 그런 요소들이 작용했던 것 같다.”라며 그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ref>[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31&contents_id=6920 2002년 한국시리즈 삼성-LG] - 네이버캐스트</ref> 하지만 김성근이 LG 트윈스에서 물러난 이후 LG 트윈스는 FA 잔혹사 <del>탈쥐효과+입쥐효과</del> 와 함께 [[2012년]]까지 포스트 시즌에 계속 오르지 못하게 되어 <del>비밀번호가 무려 10자리!</del> 김성근의 저주라는 말이 생겼으며, [[김기태 (1969년)|김기태]]가 감독으로 부임한 뒤 [[2013년]]이 되어서야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게 되었다.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결정적인 3점 동점 홈런을 날려 김성근에게 패배를 안겼던 이승엽은 일본 진출 후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일본 사정에 익숙했던 김성근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가 LG 트윈스에 있는 동안 [[류택현]]과 [[최동수(야구 선수)|최동수]]는 그의 손을 거치며 뒤늦게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일본 프로 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 (2005년~2006년) ==== [[2005년]]에 일본 프로 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의 팀 타격 인스트럭터로 취임하였고, 당시 일본식 야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2004년]] 시즌에 부진에 빠져 있던 이승엽의 개인 코치로서 지도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조언과 도움을 받은 이승엽은 2005년에 30홈런을 기록하여 그는 이승엽이 부활하는 데 숨은 조력자가 되었다. 한국 프로 야구 감독 시절부터 선수들의 자세 변화, 포착과 기술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능력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 1군 선수들에게도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 (2005년 시즌 이후에 이승엽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갔던) [[2006년]]에는 지바의 1·2군 순회 코치로 취임해 한국 프로 야구 출신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일본 프로 야구 팀의 정식 코치가 되었다. ==== [[SK 와이번스]] (2007년~2011년) ==== [[2006년]]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하여 재계약에 실패한 제자인 조범현 감독의 후임으로 [[2007년]]에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여 태평양 돌핀스 이후 인천광역시 연고 팀을 다시 맡게 되었다. <del>돌아갈 감독은 돌아온다.</del> 2006년 시즌을 6위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마감한 SK 와이번스는 김성근 감독 - [[이만수]] 수석 코치 체제로 2007년 정규 시즌 페넌트레이스 1위를 기록,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초반 2연패 후 4연승으로 역스윕하며 한국시리즈에서 SK 와이번스 구단의 창단 첫 우승이자, 김성근 감독 자신도 프로 감독 재임 후 생애 첫 우승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ref>초반 2연패 후 4연승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예는 이 우승이 최초이다)</ref> 한편, 당시 한국시리즈에 출전한 두산 베어스의 외국인 투수 [[다니엘 리오스|리오스]]의 투구 폼(이중 동작)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0806290038 리오스, 금지약물로 무너진 야구 신화] 《OSEN》 2008.06.29 10:37 작성, 2009.10.15 19:27 확인</ref> 이후 [[2008년]]에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야쿠르트]]로 이적한 리오스는 일본 프로 야구 최다 보크를 기록한 후, 금지약물 양성 반응이 드러나면서 일본에 진출한 지 얼마 안 되어 출장 정지 처분을 받고 전격 방출당했다. 2008년 9월 3일, [[문학 야구장|문학]]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감독 생활 통산 1,000승'''을 달성하였다. 2008년 9월 21일, SK 와이번스가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함으로써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하여 한국시리즈에 직행하였고, 2008년 10월 31일에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2007 시즌에 이어 [[2008년 한국시리]]에 다시 올라온 두산 베어스를 맞았다. <del>호구 왔능가?</del> 1차전에 2:1로 패배한 이후, 4연승을 함으로써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 냈다. 2008년 11월 4일에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9 WBC]] 대표팀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이를 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표팀 감독 제의를 고사한 이유는 따로 있는데, 김성근의 회고에 의하면 '그 때는 지금처럼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는다는 합의가 없었다. 감독들끼리 구두로만 이야기를 했지, WBC 감독을 누가 해야 하는지 KBO 측에서 문서로 밝히지도 않았다'고 해명했다. [[2009년]] 8월 25일의 승리를 시작으로 9월 26일에 정규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19연승(?!)을 거두었다. 이 기록은 기존의 삼성 라이온즈가 가지고 있던 17연승 기록을 뛰어넘은 것이며, 일본 프로 야구가 가지고 있던 기록까지 경신하면서 아시아 신기록이 되었다. 2009년 KIA 타이거즈와 맞붙게 된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박경완]], [[김광현 (야구 선수)|김광현]], [[전병두]], [[송은범]]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 속출에 따른 전력 이탈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마지막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으나, [[채병룡]]이 [[나지완]]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0년 한국시리즈]] 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4전 전승으로 스윕하여 3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마지막 경기는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고, 8년 전 LG 트윈스의 감독을 맡았던 당시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과 마해영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여 무너졌던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의 눈물'을 SK에서 되갚았다.<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10192010522228&ext=na 야신, '대구의 눈물' 8년 만에 되갚다] - 마이데일리</ref>(이후 삼성 라이온즈에서는 [[선동열]] 감독을 퇴진시키고 [[류중일]] 감독을 선임하였다.) [[2011년]] 5월 4일,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프로야구 감독 통산 1,200승'''을 달성하였다. 2011년 8월 17일, 프런트와의 재계약 마찰로 인해 2011 시즌 종료 후 자진 사임할 것이라고 선언하자<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2241716 '재계약 자진 포기' 김성근호 SK, 떠나는 선장]</ref> 다음 날인 2011년 8월 18일 SK 와이번스에서 바로 경질하고<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295&article_id=0000000648 SK 김성근 감독, 결국 경질]</ref> <del>뭐라고?</del> [[이만수]]<ref>이때부터 이만수의 별명이 인천유다가 되었다.</ref> 2군 감독을 감독 대행으로 올렸다. SK 구단의 경질 통보 이후, 휴식을 위해 도일하였다가 8월 26일에 귀국하였다. 그 이후 초·중·고 야구부의 감독으로 있는 여러 제자들의 요청으로 부산, 경남 거제, 제주도의 학교 야구부와 리틀 야구단에서 야구부 조언 겸 기술을 지도하기도 했다. 예전 태평양과 쌍방울에서 함께하였던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이연수 감독의 요청으로 2011년 9월 5일 성균관대학교 야구부의 인스트럭터로 초빙되어 성균관대학교 야구부가 전국체전에 우승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 [[고양 원더스]] (2012년~2014년) ==== 시즌 후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2012년]] 2군 번외 경기에서도 좋은 경기력을 인정받아 시즌 중 원더스 구단과 재계약에 합의하였다. 그 해 원더스 출신 선수 5명이 프로로 진출했으며, 그 중 일부 선수는 방출로 인해 원더스에서 기량을 갈고 닦다가 재진입에 성공하였다. LG 트윈스에서 함께하였던 [[이상훈 (1971년)|이상훈]]을 코치로 맞이하였다. 고양 원더스 감독 재직 동안 총 22명 선수를 프로로 진출시켰으며, 고양 원더스의 갑작스런 해체로 야인의 몸이 되었다. ==== [[한화 이글스]] (2015년~2017년 5월 23일) ==== [[2014년]]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하여 재계약에 실패한 김응용 감독의 후임으로 팬들<ref>다만 이 팬들이 한화팬들인지 [[노리타 (야구)| 김성근 감독 개인팬들]]인지는 확인바람.</ref>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2015년]]에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한 때 4위까지 올라가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듯 했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이 후 DTD하며 6위에 그쳤다. 다음 해인 2016년 리그에는 FA에 600억을 쏟아붓고도 7위라는 초라한 성적에 그쳤다. 김 감독은 부임 후부터 2015년 5월 반짝 성적이 좋았을 때 빼놓고는 선수운용에 관해 계속 팬들에게 지적을 당해왔다. 6점차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권혁, 박정진, 송창식 등을 계속 마운트에 올려놨고 송은범<ref>팬들은 송은범을 김성근 감독의 양아들 김정은범이라는 닉네님으로 불렀다.</ref>은 휴식을 칼같이 지켜주면서 혹사당한 선수들은 살려조라는 별명으로 팬들에게 불리우며 어깨가 제대로 아작나고 있었다. 그러나 2017년 5월 23일 경질을 당했다. 말이야 사의 표명의 수용이지 사실상 경질인데도 구단은 잔여 연봉을 다 준다고 한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2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분류:퍼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