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김경징은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 ==== 마지막 주장을 살펴보자. 나무위키 옹호론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김경징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오해의 산물이다. 주화파 vs 척화파, 공서파 vs 청서파 등의 당쟁으로 인해, 김경징이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다. 그 후 척화파가 득세하고, 야사에 의해 당시의 사실(史實)에 잘못된 이야기가 추가되면서, 김경징에게 졸장이란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우선 공서와 청서에 대해 살펴보자.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세력을 공서(功西), 반정에 소극적이었던 서인 세력을 청서(淸西)라고 한다. 그런데 인조 집권기 동안 공서 vs 청서로 대립 구도가 명확하게 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굳이 거론하자면, 인조 집권 초기 남이공의 대사헌 발탁을 두고 벌어진 갈등이 있을 것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305017_002 #] 당시 공서파는 자기들의 우세를 바탕으로 남인 및 소북과의 연대를 꾀했으며, 남이공의 등용은 그 일환이었다. 청서파는 공서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막기 위해 해당 인사를 반대하고 나섰다. 서인-남인-소북의 연립 정권 수립 여부를 놓고 서로 대립한 셈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이같이 대립한 적은 없었다. 정원군 추숭 때 이귀는 찬성했으나, 그 외 대부분은 반대했다. 세자 책봉 건에서는, 김류와 김자점은 봉림대군을 밀었으나, 그 외 대부분은 소현세자의 아들인 경선군을 밀었다. 강빈 사사 때는 김자점은 찬성했으나, 나머지는 모두 반대했다. 진영 대 진영으로 다투기보다는, 특정 인물 vs 나머지로 갈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진영 논리를 따르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소신을 내세우거나 혹은 여론 및 상식을 택하여 움직였던 셈이다.{{ㅊ|아웃사이더vs인싸들}}<ref>언급한 논의들은, 전부 다수파가 상식을 따른 쪽이었다. 정원군의 추숭은 당시의 예법에 어긋났다. 세자 책봉은 장자 계승이 원칙이니, 원손인 경선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게 상례였다. 강빈 사사 건은 ‘강빈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혐의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인조의 주장일 뿐 어떤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김류를 위시한 조정 신료들은 전부 강빈 사사에 [[무죄추정의 원칙|반대했다.]]</ref> 그래서 학계에서는 공서와 청서를 별도의 정파로 분류하지 않는다. 후금 및 청과의 대응 방안은, 화친하자는 주화론과 맞서 싸우자는 척화론으로 갈렸다. 그중 주화파는 이귀, 최명길, 장유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언급한 세 명이 모두 공서<ref>이귀, 최명길, 장유는 모두 반정에 참여했다. 그 결과 이귀와 최명길은 1등공신, 장유는 2등공신에 녹훈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10118_003 #]</ref>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서파가 전부 주화파였던 것은 아니다. 공서의 필두인 김류부터 척화를 외쳤고, 그의 아들인 김경징 역시 척화파였다. 공서고 청서고 다 떠나서, 조정의 여론 자체가 척화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무위키 옹호론에서는 병자호란 전후의 갈등을 진영 논리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틀린 서술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김경징은 왕족 일가를 호위하는 임무도,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유지하는 직무도,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또한 김류는 본인이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오자, 그동안 척화를 주장하던 것이 무색하게 주화론으로 전향했다. 청나라에서 척화파를 보낼 것을 요구하자, 자신이 언제 척화를 주장했느냐는 듯이 입을 다물고 다른 사람들을 떠밀었다. 심지어는 “척화파가 나라를 망쳤다.”면서, 척화론자의 처벌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김류와 김경징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인 공세가 아니었다. 공서, 청서, 주화, 척화, 그런 정치 얘기를 다 떠나서, 그들 둘은 욕먹을 짓을 했기 때문에 욕을 먹은 것이다. [[부전자전|부자가 쌍으로.]] {{인용문2|이홍주(李弘胄) 등을 보내 지난번의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도록 하였는데, 답서를 받아 가지고 돌아 왔다. 그 글에,<br /><br />"(중략) 맹서를 어기도록 앞장 서서 모의한 그대의 신하에 대해 [[숭덕제|짐이]] 처음에는 모두 죽인 뒤에야 그만 두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대가 정말로 성에서 나와 귀순하려거든 먼저 앞장서서 모의한 신하 2, 3명을 묶어 보내도록 하라. (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20_003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0일 경신 3번째 기사]}} {{인용문2|김류·이성구(李聖求)·최명길이 입대하였다. (중략) 김류가 아뢰기를,<br /><br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의 의논이 당시에는 정론이었다고 하더라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그르친 죄를 피할 길이 없으니, 그들이 나가기를 자청한다면 좋겠습니다. 홍익한(洪翼漢)은 현재 평양(平壤)에 있는데, [[청나라|저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처치를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br /><br />하고, (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22_003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3번째 기사]}} {{인용문2|시강원 설서 유계(兪棨)가 상소하였다.<br /><br />“(중략) 전하께서 꼭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모두 잡아 보내려 하실 경우, 대소 신료 중에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놔두시겠습니까? 신이 지난해에 경연에 입시하여 '''영의정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 신사(信使)는 보낼 수 없으며 청나라에 글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김류 또한 화친을 배척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독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지금 만약 김류 등은 묘당(비변사)에 편히 있게 하고 단지 평일에 시행되지도 않은 헛말을 한 사류(士流)만 택하여 간사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할 경우, 신은 신하를 대우하는 전하의 의리 역시 두텁고 얇은 차이가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23_012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계해 12번째 기사]}} {{인용문2|(전략) 김류가 아뢰기를,<br /><br />"오늘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내야 할 텐데, 사람들이 모두 엄호하면서 곧바로 지목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들이 이미 앞장서서 모의하여 맹세를 무너뜨린 자를 대상으로 삼았고 보면, 지난 봄에 논주(論奏)한 자와 그 뒤로 준론(峻論)한 자는 의당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수한 자 외에도 지난 봄에 그 일을 말한 사람이 한두 사람뿐만이 아닐 뿐더러 그 경중(輕重)도 모르는 판인데, 또 어떻게 취사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그 당시의 삼사 및 오늘날 자수한 자를 아울러 잡아 보내면 저들이 반드시 숫자가 많은 것을 기뻐하리라 여겨집니다."<br /><br />하니, (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28_003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3번째 기사]}} {{인용문2|영의정 김류(金瑬),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우의정 이성구(李聖求), 병조 판서 신경진(申景禛), 공조 판서 구굉(具宏),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호조 판서 이경직(李景稷)이 회의하여 나라를 그르친 사람들의 죄를 경중(輕重)으로 나누어 서계(書啓)하기를, (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2019_003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9일 기축 3번째 기사]}} {{인용문2|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br /><br />“(중략) '''지난해 가을·겨울 이전에는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논의가 매우 준열하여 ‘청국이라 쓰지 말아야 하고 신사(信使)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하다가,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8020_002 전하께서 특별히 ‘적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는 그 죄를 면할 수 없으리라.’는 분부를 내리신 이후로 화친하는 의논에 붙어]<ref>인조 14년 8월 20일 신묘 2번째 기사이다. 기록 최하단에 인조가 “청군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체찰사는 김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3020_002 인조 14년 3월 20일 을축 2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5026_001 인조 14년 5월 26일 기사 1번째 기사]</ref> 윤집(尹集)<ref>오달제,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강화 조건으로 척화파들을 보낼 것을 요구하자, 이들 셋은 “최명길이 주화를 주장할 때, 그를 비판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었다.”며 자진해서 청으로 압송됐다.</ref> 등을 묶어 보내고 윤황(尹煌)<ref>척화를 주장하던 강경파 중 한 명이다.</ref> 등의 죄를 논할 것을 김류가 실로 주장하였습니다.''' 자신이 장상(將相)을 도맡아 마침내 임금이 성을 나가게 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논열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당초 청인(淸人)이 동궁(東宮)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때에 김류가 곧 입대(入對)하여 따라가기를 바라더니, 동궁이 북으로 떠날 때에는 감히 늙고 병들었다고 핑계하였습니다. 동궁이 또한 이미 북으로 가고 나서는 김류가 감히 질자(質子) 김경징(金慶徵)이 ‘어미의 복을 입고 있다.’고 그 이름 아래에 적었는데, 이 때문에 구굉(具宏)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동궁의 작위(爵位)가 김경징에 못 미치는가. 중전의 초기(初朞)가 겨우 지났는데 김경징이 감히 어미의 상을 핑계하는가.’ 하니, 김류의 낯과 목이 붉어졌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리석은 데에서 나왔겠습니까, 방자한 데에서 나왔겠습니까? (중략) '''김경징이 검찰사(檢察使)가 된 것은 김류가 스스로 천거한 데에서 나왔는데, 대개 온 집안이 난리를 피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당초 강도(江都)로 들어갔을 때에 먼저 제 집안 일행을 건너게 하고 묘사와 빈궁(嬪宮)은 나루에 사흘 동안 머물러 두어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내관(內官) 김인(金仁)이 분을 못이겨 목메어 통곡하고 빈궁도 통곡하였으니, 이 사람은 전하의 죄인일 뿐더러 실로 종사의 죄인입니다. 또 영기(令旗)로 제 친한 사람만 건너게 하고는 사민(士民)들은 물에 빠지거나 사로잡히게 하였으니, 통분하여 견딜 수 있겠습니까. (중략) ”<br /><br />하였는데, 소(疏)가 올라가니 상이 끝내 금중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6021_001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6월 21일 무오 1번째 기사]}} 김경징에 대한 복권 논의가 없었던 것은, 척화파가 정권을 잡은 것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다. 위의 여러 항목들에 서술되어 있지만, 다시 한 번 병자호란 당시 김경징의 행보를 살펴보자. 왕족 일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음에도, 가족친지를 먼저 배에 태워 강화도에 보냈다. 그리하여 왕족의 행차는 나루터에 사흘간 방치되었다. 백성들을 나룻가에 내버려두어 청군의 사냥감으로 만들었다. 강화도에서는, 검찰사로서 방어 태세를 유지할 책임이 있음에도, 안에 틀어박힌 채로 술을 마시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군권을 탐내, 장신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어 내분을 일으켰다. 김상용이 이민구에게 호서로 갈 것을 지시하자, 단지 이민구가 그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하며 패악질을 부렸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 “뿔피리를 불어 군사를 집결시키자.”는 건의를 무시하고, 7~80명의 무사들만을 데려가는 실책을 범했다. 청군이 상륙하자, 왕족은 물론 가족까지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김경징의 복권을 논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굳이 언급하자면,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강화도의 군권은 강도유수 장신에게 있었으며, 김경징에게는 실권이 없었다. 따라서 강도 함몰의 가장 큰 책임은 장신에게 있다. 강화도 방어전의 패배에 대해, 김경징에게 장신과 동등한 수준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한 처사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김경징의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어떤 전쟁이든, 대비하고 예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김경징이 강도검찰사로서 맡은 임무였다. 또한 김경징에게는 왕족 일가를 호위하는 사명도 있었다. 하지만 김경징은 어떠했는가? 장신이 경계를 소홀히 하는 것을 지적했는가? 청군의 동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였는가? 강화도가 함락되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피난 대책을 강구하였는가? '''아니. 김경징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왕족 일가의 호위를 소홀히 한 죄가 강화도 함락의 죄보다 가벼운가? 결코 그렇지 않다. 조선은 왕조국가이고, 사대부는 그 체제 아래에서 특권을 누린다. 그 권력은 국가의 체제를 수호하는 의무가 전제된 것이고, 그 중 가장 중대한 것이 바로 왕가를 지키는 것이다. 김경징은 사대부의 도의적 책무이자 왕이 직접 내린 임무를 무책임하게 내던진 것이다. 전략적 측면에서 보아도, 김경징의 잘못은 매우 심각했다. 그가 왕족 일가를 무사히 피신시키기만 했다면, 봉림대군 등을 구심점으로 한 분조를 통해 항전 의지를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갔다면, 병자호란은 오히려 조선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삼전도의 굴욕을 감내하며 참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척화파의 집권 아래 김경징의 복권은 불가능해졌고, 그의 이야기에 과장과 왜곡이 더해져, 오늘날에 이르러 김경징은 졸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다.’는 나무위키 옹호론의 주장은 틀렸다. 인과 관계가 잘못되었다. '''김경징은 실제로 복권 따위 언급도 못할 정도의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고, 그래서 사형 당했으며, 그로 인해 그를 비판하는 각종 기록들이 탄생한 것이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