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징

김경징(金慶徵). 조선 인조 대의 권신 김류의 아들.

부친인 김류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려, 뭇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병자호란 당시 김류의 천거로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술을 마시는 등 허송세월하였으며, 장신과 군권을 다투는 등 내분까지 벌였다. 청나라군이 바다를 건너 섬에 상륙하자, 왕가를 수호하는 임무조차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이로 인해, 전쟁이 끝나고 사형에 처해졌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인조반정까지의 행적[편집 | 원본 편집]

김경징은 광해군 때 음서로 찰방[1]이 되었다. 그는 광해 13년(1621년, 신유년) 별시에서 병과 25위로 급제하였다.#

인조반정을 앞둔 즈음에는 야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서 당시의 그를 전 찰방이라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2] 그러나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일개 백수에 불과했던 김경징은 극적인 신분상승을 겪게 된다. 반정을 주도한 김류가 그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전략)김경징(金慶徵) 【전 찰방인데 김류의 아들이다.】(후략)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정초본 187권, 광해 15년 3월 12일 임인 5번째 기사

석연치 않은 개시 급제[편집 | 원본 편집]

인조반정으로부터 4일 후인 1623년 3월 17일, 양사(兩司)[3]가 계축년 이후의 파방[4] 등을 청했다. 계축년은 1608년으로 광해군이 즉위한 해이다. 즉, 광해군 즉위 이래 시행된 모든 시험은, 부정이 의심되니 전부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 중에서도 무오(1618년) 식년시 강경(講經)과 신유 별시(1621년 10월 20일)가 특히 논란이 많았다.관련 출처

  • 칠대문(七大文)의 기롱(譏弄)

문과 초시 초장에는 강경과 제술의 2가지 시험 방법이 있으며, 이중 강경은 구술시험에 해당한다. 강경에는 책을 보지 않고 물음에 답하는 배강과 책을 보고 뜻을 말하는 고강이 있었다.# 고강에는 칠서강(七書講)·사서강(四書講)·이서강(二書講)·일경강(一經講) 등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문과 식년시 초장에는 칠서강을 행했고 이것을 가장 중요시했다. 응시자가 편명을 기록한 찌들이 담긴 통에서 하나를 뽑고, 이어서 대문(大文)의 수를 기록한 찌들이 담긴 통에서 하나를 뽑으면, 시관이 이것을 강지에 기록하고 시험을 시행했다.[5]# 그런데 광해군 때는 강경에서 부정행위가 만연했다고 한다. 응시자가 미리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선정하고, 시험 날 시관이 해당 응시자로부터 준비된 자표를 받아 강지에 기입했던 것이다. 무슨 문제를 풀 것인지 사전에 서로 짰던 셈이다. 이 때문에 식년시(1615년) 강경 시험 이후에는 어떤 사람이 길가의 대문 벽에다가 ‘문장과 재사가 이처럼 성대한 것은 2백 년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네. 자기 원하는 칠대문을 줄줄 외고 있으니 자표를 서로 짠 것은 귀신이나 알겠지.(文章才士盛於斯 二百年來始見之 七大文通從自願 字標相應鬼神知)’라고 시를 지어 붙이기도 했는데, 세간에서 조롱거리 삼아 이 글을 항상 읊고 다녔다고 한다.광해군일기 정초본 109권, 광해 8년 11월 27일 갑오 8번째 기사1615년 식년시 특이사항 결국 1618년 8월 12일 무오 식년시 때, 이 문제가 크게 불거져 전시를 연기하였다. 그리고 전시를 언제 시행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계속 시간만 흐르다가,광해군일기 중초본 173권, 광해 14년 1월 25일 신유 1번째 기사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전략)
○ 어떤 이가 밤에 한찬남(韓纘男)의 집 대문에 쓰기를,

경(經)에 밝은 어진 선비로 이같이 번성하기는 / 明經賢士盛於斯
2백년이래 처음 보는 일이로다 / 二百年來始見之
칠대문통(七大文通)을 제원대로 따랐으니 / 七大文通從自願
비밀리 그 종적을 귀신은 알 것이다 / 暗中踵跡鬼神知

하였는데, 그때 이와 같이 세상을 기롱하는 시(詩)가 매우 많았다. 《일월록》
(후략)
— 연려실기술 제21권 /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과장(科場)에서 부정을 행한 폐단
(전략)
○ 식년(式年)에 실시하는 강경과(講經科)를 보면 응시하는 자들이 서서 삼경 중에서 각각 한 대문씩을 미리 외어서 과거 때 배강(背講)하므로 통하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때문에 대북(大北)의 자제라면 글을 알지 못하는 자들도 다 과거에 급제했으므로, ‘일곱 대문을 통하는데 원하는 대로 해준다.[七大文通從自願]’라는 말이 당시에 널리 유행되었다.
(후략)
— 대동야승, 일사기문
  • 오류지요(五柳之謠), 박홍구의 아들

유희분(광해군의 처남)에게는 아들과 조카 5명이 있었다. 이중 4명이 신유년(1621년) 10월 20일 별시에 응시했고, 다른 1명은 같은 달 있었던 알성시에 응시했다. 당시 시험관은 이들의 이름과 자를 부챗살에 적어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이들 다섯이 합격하자, 사람들은 오류(五柳, 다섯 유씨)라고 불렀다.[6] 신유년(1621년) 10월 20일 별시에서 이덕형의 아들과 박홍구의 아들이 함께 합격했다. 그러자 시험관은 ‘죽은 재상의 아들과 현 재상의 아들을 서로 비교할 수 없다.’고 여겨 박홍구의 아들을 합격시켰다.[7]신유년 별시 특이사항 이것이 논란이 되어 신유 별시는 합격자 발표를 하지 않고 미루었다고 한다.

(전략)【박홍구는 간사스럽고 비루한 인물로서 젊었을 때부터 사람들에게 영합하여 좋은 벼슬을 줄곧 차지하였다. 유영경이 득세했을 때에는 그와 결탁하여 편당이 되어 양전(兩銓)에 출입하였고, 영경이 패하자 또 삼창(三昌)[8]들에게 빌붙고 궁인들과 체결하여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중략) 아들과 조카 7명이 모두가 차작(借作)으로 진사의 급제를 차지하였는데 조카 박진장(朴晉章)은 문자를 약간 알고 있었다. 도성 사람들이 농담하기를 ‘박장(朴章)이 7장인데 진장(晉章)이 문장이고, 한국(韓國)이 5국인데 정국(定國)이 망국이고, 유립(柳立)이 10립인데 명립(命立)이 특립이다.’라고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정초본 182권, 광해 14년 10월 21일 계미 1번째 기사
(전략)
○ 어느 해의 과거에 유희분(柳希奮)의 한 집안 다섯 사람이 한꺼번에 과거에 올랐고, 이덕형(李德馨)과 박홍구(朴弘耉)의 아들이 지은 글이 취사선택을 겨루고 있었는데 시관(試官) 아무개가 말하기를, “죽은 정승의 아들을 현시 정승의 아들과 비교할 수 없다.” 하여, 드디어 홍구의 아들을 뽑았다. 어느 무명씨의 시에, “성남의 다섯 버들은(유희분의 집 다섯 사람) 봄빛을 독차지하고, 부채 위에 쓴 이름은 모두가 출신(出身 과거에 오른 것)일세.(미리 시관(試官)의 부채에다 썼기 때문이다.) 두 정승의 사랑하는 아들이 득실을 다툴 때에, 죽은 이와 산 사람에 대해 인정이 다른 것을 비로소 알았도다.” 하였다. 《일월록》
(후략)
— 연려실기술 제21권 /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과장(科場)에서 부정을 행한 폐단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 김경징은 신유년(1621년) 10월 20일 별시에서 참방[9]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조정 신료들은 김류의 눈치를 보다가 합격자들만 따로 추려서 재시험을 치르자고 의견을 굽혔다. 그리하여 무오년(1618년) 식년시 강경의 합격자와 신유년(1621년) 별시 합격자 가운데,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둔 자들을 대상으로 인조1년(1623년) 8월 12일 개시(改試)를 시행하였다.인조 1년 개시 특이사항 김경징은 해당 시험에서 급제(병과 10위)하였고, 이후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된다.

김경징이 신유년(1621년) 별시와 계해년(인조1년, 1623년) 개시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신유년 별시 자체가 부정행위가 심각했기에, 시험 자체를 무효로 해야 옳았고, 조정의 여론 또한 그와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김경징은 과거 시험을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권신을 아버지로 둔 덕분에 그는 곧바로 최종 시험을 치르는 초법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전략) 양사가 (중략) 아뢰기를,

"계축년 이후에 역적의 괴수가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과거를 가지고 당파를 심는 길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사정을 두거나 차술(借述)[10]케 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각년의 모든 방(榜)을 일일이 조사하여 삭제하기도 하고 파방하기도 하여 선비들의 분한을 풀어주소서."

하니, 상이 예조에 계하하였다. (중략)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그 사이에 혹은 정당하게 참방한 자가 있으니 뒤섞어 파방하는 것은 부당할 것 같습니다. 삭제해야 할 사람만 삭제해야지 전체를 파방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그 뒤 경연에서 다시 품하여 친경 별시(親耕別試)와 함께 강시(講試)를 다시 행하고 합쳐 한 방을 만들기를 청하였다. 이 두 방은 흉도들이 가장 심하게 부정을 행한 것이어서 공론이 모두 파방해야 한다고 했으나, 김류(金瑬)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별시(別試)에 참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조[11]와 대신이 그 형세에 견제되어, 처음엔 조사해 삭제하기를 청하더니 끝내는 다시 시험보이자고 하였다. 유신의 처음에 행사의 구차함이 이처럼 심하므로 식자들은 공도가 행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7일 정미 1번째 기사
(전략)
○ 8월에 광해조 무오년 식년과(式年科)와 신유년 별시(別試)에 합격하였던 사람에게 다시 시험보여 한 방(榜)으로 합해서 채유후(蔡裕後) 등 24명을 뽑았다. 무오년 식년과에는 7대문(七大文)의 비방이 있었고, 신유년 별시에는 오류(五柳)라는 말이 있어 발표하지 못하였던 것인데, 이때에 와서 임금이 다시 시험 보이기를 명하고 회시(會試)[12]라 하였다. 《국조방목(國朝榜目)》
:광해 무오년 대과를 기미년으로 물려 시행하려 하였으나, 요사스러운 미신의 말에 얽매여 전시(殿試)를 치르지 않았고, 신유년에 광해가 몸소 적전(籍田)에 거둥하여 별시(別試)를 보여 인재로 뽑았는데, 또한 요사스러운 말에 구애되어 발표를 허락하지 않았다. 반정 후에 임금이 이르기를, “무신년 이후의 과거 급제자는 혹은 개인만을 깎고 혹은 그 과거 전부를 무효로 하라.” 하였는데, 이는 임금이 항간에 있을 때에 이첨 등이 저희들의 사당(私黨)을 조정에 심으려고 과거 문제를 미리 사당에게 강하였으므로[13] 이러한 전교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두 번의 방(榜)과 병진년의 알성과(謁聖科)와 을묘년의 식년과(式年科)가 가장 심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방을 무효로 하였고, 다른 방에서도 이름을 깎인 자가 많았다. 예조 판서 이정귀가 일이 중대하다고 아뢰어 삼사를 모아 회의를 하기를 청하여 여러 번 시일을 물렸다. 그것은 김류의 아들 경징(慶徵)이 원래 글을 잘 못하는데, 친경방(親耕榜)에 부당하게 걸렸으므로 과거의 무효를 겁내는 까닭이었다. 이원익이 조강(朝講)에 입시하여 말하기를, “이미 뽑은 급제가 혹은 깎이고 혹은 무효가 되는 일은 이전에 없던 일이니, 가볍게 행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가운데 분명히 사(私)를 써서 부당하게 합격한 자만 추려서 쓰지 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따랐으니, 원익은 조야(朝野)에 인망이 두터웠으며 임금이 신뢰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경징이 공론이라고 핑계하고 원익에게 달래어 여러 번 시일을 물려 원익이 입시할 때를 기다린 것인데, 원익이 속은 것이다.”고들 하였다. 대간이 이 문제로 다투었으나 되지 않았다. 《하담록》
○ 이후원(완남(完南))이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을 때 신천익(愼天翊)을 방문하였는데, (중략) 천익이 (중략) 한참 뒤 이야기 끝에 “반정 초에 대간으로서 승평(昇平 김류)에게 가보니 승평이 먼저 파방(罷榜)하라는 논계를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더라.” 하였다. 대개 천익의 뜻은 일대의 으뜸가는 훈신으로서 사의(私意)를 가진 것이 이와 같으니 시사(時事)를 알겠다고 한 것이다. 《청야만집(靑野謾輯)》
(후략)
— 연려실기술 제23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계해정사(癸亥靖社)

이말질수를 국문하다[편집 | 원본 편집]

위리안치(圍籬安置)[14]되어 있던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 이지(李祬)가 땅굴을 파고 도망치려다가 나졸에게 붙잡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관련자들을 붙잡아 국문하였다.

그러던 중 김경징 등이 유희분(柳希奮)의 집 종 이말질수(李末叱水)의 종적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듣고 포도청으로 하여금 수색하여 체포한 뒤 국문하게 하였다. 이말질수는 “권채라는 인물이 노비를 보내 전언하기를 ‘폐동궁이 굴을 뚫고 탈출할 예정이니, 사람을 시켜 배를 가지고 갑곶으로 내려오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배를 예약한 후 권채를 찾아갔다.”고 증언했다. 당시 권채는 이미 체포된 상황이었으며 혐의를 부인하였는데, 이말질수와 대질하자 굴복했다. 이말질수와 권채는 모두 장하(杖下)에서 죽었다.

나무위키에는 ‘김경징이 이말질수를 국문함으로써, 폐세자 이지의 도주 계획을 사전에 파악해 저지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폐세자 이지를 붙잡은 인물은 정병(正兵) 최득룡(崔得龍)과 충순위(忠順衛) 김준남(金俊男)이므로, 이는 잘못된 서술이다. 김경징은 사건이 발생한 이후 그 전말을 캐는 과정에 일부 공이 있을 뿐, 폐세자의 도주를 막은 공로는 전혀 없다.

폐세자(廢世子) 이지(李祬)가 위리 안치된 상황에서 땅굴을 70여 척이나 파 울타리 밖으로 통로를 낸 뒤 밤중에 빠져 나가다가 나졸에게 붙잡힌 사실을 강화 부사(江華府使) 이중로(李重老)가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즉시 별장 권채(權綵)와 중사(中使) 박홍수(朴弘秀) 및 데리고 있던 나인 막덕(莫德)을 붙잡아 들여 국문하였다. (중략) 그때 마침 훈신(勳臣) 김경징(金慶徵) 등이, 유희분(柳希奮)의 집 종 이말질수(李末叱水)라고 하는 자의 종적이 의심스럽다는 것을 듣고 포도청으로 하여금 수색하여 체포한 뒤 국문하게 하였다. 그가 공초하기를,

"일찍이 권채와는 도감(都監)의 장졸로 같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그의 노비를 보내 전언하기를 ‘폐동궁(廢東宮)이 장차 굴을 뚫고 탈출하여 배를 타고 도주하려 한다. 부디 두모포(豆毛浦) 뱃사람 가팔리(加八里)라고 하는 자로 하여금 배를 가지고 갑곶(甲串)으로 내려오게 해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배를 예약해 놓은 다음 먼저 권채가 있는 곳에 갔더니, 권채가 말하기를, ‘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폐동궁과 함께 배를 타고 도주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국청에 보내어 신문하였는데, 말을 바꾸긴 하였으나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권채는 처음에 얼굴을 서로 모른다고 잡아떼었으나 대질하자 상당히 굴복하는 기색이 있었다. 권채와 말질수는 모두 장하에서 죽었다. (중략)

탈출하는 폐세자를 붙잡아 보고한 정병(正兵) 최득룡(崔得龍)은 통정 대부로 승진하고, 충순위(忠順衛) 김준남(金俊男)은 상당한 직에 제수되었는데, 이들 모두에게 종신토록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권, 인조 1년 5월 22일 신해 1번째 기사

반정공신으로 녹훈되다[편집 | 원본 편집]

인조 1년 윤10월, 정사공신 녹훈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부자형제가 나란히 공신으로 책봉되는 등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경징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인 김류가 그의 이름을 2등공신의 필두로 올리려 했기 때문이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김류는 아들의 이름을 이경립(李景立)의 위에 두었는데, 이는 직접 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이시백·이시방 형제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이경립은 이괄의 난 때 반란군에 가담한 정황이 있어 훈적에서 삭제되었는데, 이귀는 “이경립의 무리가 이괄에게 가담한 이유는 이 같은 부적절한 논공행상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15] 이렇듯, 김경징의 삶은 부친인 김류 덕분에 대체로 순탄하였다. 원래부터 인간성이 나빴던 건지 아니면 권력에 취해 성격이 모질게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그는 매번 오만방자한 행동을 일삼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김류(金瑬)·이귀(李貴)를 불러 대신과 함께 빈청에 모여서 정사훈(靖社勳)을 감정(勘定)토록 명하여 53명을 녹훈하였다. (중략)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신경인(申景禋)·이중로(李重老)·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중략)은 2등,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윤10월 18일 갑진 3번째 기사
(전략) 최명길은 아뢰기를,

"원훈(元勳)이 있으니 신 같은 무리는 감히 간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기 제집에 있으면서 몰래 서로 모의한 자들이야 그 공의 경중을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겠습니까. 이시백과 이시방은 드러난 공로가 있으므로 사람들의 이의가 없습니다만 그 나머지 자제들은 수효가 너무 많아 한 집안에서 공신이 서너 명이나 되기도 하니, 이는 복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중략) 김류와 이귀는 같은 원훈으로서 위세가 서로 대등하여 빈청에서 감훈(勘勳)하던 날에도 녹훈 대상자를 놓고 각기 다투다가 말이 흥분되어 발끈하고 일어서는 것을 대신이 만류하였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워하며 끝내 서로 좋게 지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윤10월 19일 을사 1번째 기사
(전략) 상이 이르기를,

"부자 형제로서 공훈에 참여된 자가 더러는 너댓 명에 이르는데, 이 일은 어째서인가?"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권, 인조 1년 윤10월 20일 병오 1번째 기사
헌부가 아뢰기를,(중략)

"죄인 이경립(李景立)은 군율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에게 붙은 정상이 명백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미처 처형하기 전에 지레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의 간사한 계책은 그의 머리를 보전하고 훈명(勳名)을 보존하려는 것이었으니, 이른바 ‘죽어도 남은 죄가 있다.’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훈적에서 삭제하소서."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2월 28일 임자 2번째 기사
헌부가 아뢰기를,(중략)

"죄인 이경립(李景立)·박효립(朴孝立) 등을 훈적(勳籍)에서 삭제하는 일에 대해 신들이 저번에 이미 논열하여, 사문(査問)한 뒤에 처치하라고 윤허를 내렸습니다. (중략) 빨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중략) 이경립은 훈적에서 삭제하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3월 4일 무오 3번째 기사
(전략) 이귀가 아뢰기를,(중략)

“(중략) 무릇 나라에 일이 있을 때면 신은 매양 김류에게 뒤졌기 때문에 애당초 논공(論功)할 때에도 신의 가족은 참여하지 못했으나 김류는 자기 아들을 이괄(李适)의 위에 두고자 하였다가 끝내 하지 못하자 다시 이경립(李景立)의 위에 두었습니다. 이 무리들이 분함을 품게 된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3년 을축(1625) 7월 12일(무오) 맑음

군관을 장살하다[편집 | 원본 편집]

공조참판으로 재임 중, 김경징은 군관을 장살했다. 1624년(인조 2년) 7월의 일이었다. 김경징이 상소하여 대죄(待罪)하자,[16] 인조는 훈계 정도로 넘어가려 했지만, 사헌부는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이에 따라 형조에서 이 사안을 다루었다. 그런데 형조에서는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려 했기 때문에, 인조가 크게 노하여 형조판서 이시발을 하옥시키고 다시 벌을 정하게 하였다. 이시발은 심문을 받은 후 면직되었다.[17] 한편 사헌부의 관원이었던 박정은 김경징의 상소를 받아들인 승지도 추고[18]할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김경징은 공조참판에서 삭직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여전히 탄탄대로였다. 1625년(인조 3년) 2월, 그는 순흥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얼마 뒤에 다시 관직을 받아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1626년(인조 4년) 2월에 예조참판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복직한 때는 그 이전일 것이다.

공조 참판 김경징(金慶徵)이 군관(軍官)을 장살(杖殺)하고 상소하여 대죄(待罪)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뒤로는 이 사람을 경계삼아 삼가 형장(刑杖)을 남용하지 말라."

하였는데, 헌부가 유사(有司)로 하여금 법에 따라 죄를 정하기를 청하였다. 그 뒤에 형조가 조율(照律)하여 아뢰니, 상이 양단(兩端)을 잡는 것을 노여워하여 판서 이시발(李時發)을 유사에게 내리라고 명하는 한편 다시 조율하게 하였다. 헌부가 또 정원이 김경징의 소를 봉입(捧入)하였다 하여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6권, 인조 2년 7월 16일 무진 4번째 기사
간원이 아뢰기를,

"(중략) 전번에 김경징(金慶徵)(중략)는 모두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삭직되기도 (중략) 하였는데 해조[19]가 그 일을 봉행함에 있어 완만히 했다 하여 잡아가두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전하의 지극히 공평한 마음에서 취해진 것으로 일국 사람들이 다함께 칭송하는 바입니다.(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9권, 인조 3년 4월 1일 무인 2번째 기사
(전략) 김경징(金慶徵)을 순흥군(順興君)으로, (중략) 삼았다.
— 승정원일기, 인조 3년 을축(1625) 2월 4일(계미) 흐림
좌상 윤방(尹昉), 우상 신흠(申欽), 이조 판서 김류(金瑬), 참판 이현영(李顯英), 참의 이민구(李敏求), 호판 김신국(金藎國), 참의 서경우(徐景雨), 예판 이정구(李廷龜), 참판 김경징(金慶徵),[20] 참의 이목(李楘) 등이 아뢰기를,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1권, 인조 4년 2월 24일 정유 4번째 기사

악연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김경징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헌부(司憲府) 때문에 살인에 대한 벌을 받게 된 셈이었다. 사헌부가 아니었다면, 한소리 듣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당시 대사헌(大司憲)은 정엽(鄭曄)이었다. 나만갑(羅萬甲)은 정엽의 사위였으며, 정엽과 함께 김경징의 일을 논했다. 박정(朴炡)은 사헌부 집의(執義)였는데, 직접 김류의 집을 찾아가 김경징에게 살인죄를 지적하였으며, 김경징의 상소를 봉입한 승지(承旨)를 추고할 것을 주청하였다.[21]

지은 잘못에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김류 부자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이 일에 관련된 자들에게 앙심을 품었다. 박정, 나만갑을 위시한 신진 관료들도, 권력을 휘두르며 법 위에서 노는 김류 부자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김류는 매번 나만갑과 그와 친한 인물들을 참소하여 외직으로 몰았고, 나만갑을 비롯한 젊은 관료들은 김류 부자의 행실을 비판하며 맞서게 된다.[22]

(전략) 이귀가 아뢰기를,

“(중략) 박정(朴炡), 유백증(兪伯曾), 나만갑(羅萬甲) 세 명의 학사가 아무 죄 없이 갑자기 외직(外職)으로 나갔으니, (중략) 신이 김류(金瑬)에게 묻기를, ‘나만갑이 무슨 죄가 있는가?’ 하니, 김류 또한 ‘죄는 없으나 다만 마음이 험한 것이 죄이다. 그 기운을 꺾은 뒤에는 마땅히 감사(監司)로 크게 쓸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찌 지은 죄도 없이 마음이 험하다는 것으로 벌을 내려 사람을 논하고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박정은 과연 죄가 있습니다. 전날 박정이 김류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 김경징이 사람을 죽인 죄를 똑바로 지적하였으니, 그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을 논박한 것이 어찌 인정(人情)이겠습니까. 나만갑은 정엽(鄭曄)의 사위로 장인을 도와 김경징의 일을 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김류가 그 당시에 사사로운 분노를 품고서 정엽을 폐조(廢朝) 때 청반(淸班)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는 일로 책망하였는데, 정엽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려 하자 관원들이 만류하는 바람에 결국 돌아가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중략) 신도 일찍이 탑전에서 박정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김경징의 상소를 봉입한 승지를 청추(請推)하기까지 하는 것은 지나치니, 박정은 인정이 없는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박정을 두둔하겠습니까. (중략) 김류는 매양 탑전에서 공도(公道)를 진달한다고 하는데, 물러나와 외간에서는 사정(私情)을 써서 사람을 모함하고 배척하기를 자기의 혐원(嫌怨)에 따라 합니다. (중략) 저번에 한 번 김경징을 대간(大諫)에 의망하였고, 그 후로 절대 다시 의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경징이 뜻을 얻지 못해 앙앙불락하여 한 시대의 사류를 모함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었습니다.”

(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3년 을축(1625) 7월 12일(무오) 맑음

선릉 방화 용의자의 국문을 요청하다[편집 | 원본 편집]

1626년(인조 4년) 2월, 정현왕후의 능[23]에 화재가 발생하여, 방화범을 찾기 위한 수사가 있었다. 3월 초, 좌의정 윤방, 선공감 제조 한준겸, 예조 참판 김경징은 “의금부로 하여금 인록(仁祿)이란 인물을 국문하게 하라.”고 건의했다.

인록은 능소 근처에 사는데, 늘 능 안의 나무를 베어갔다. 그는 1625년(인조 3년)에 능의 수호군에게 붙잡혀 형장을 맞았는데, 그 다음 날 선릉 정자각에 화재가 일어났다. 당시의 참봉(參奉)[24]은 인록을 의심하여 체포했지만, 심리(審理)[25] 결과를 기다린 뒤에 조사할 생각이었는지 별다른 형문 없이 방면하였다. 그리고 지금 선릉에 또 화재가 발생한 것이었다. 인록이 용의선상에 오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인조의 윤허로 인해, 인록은 국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죄를 부인하다가 사망했다. 이후의 기록은 없기 때문에, 방화 사건의 진상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뒤로는 선릉에 화재가 났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인록이 방화범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또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선릉 참봉(宣陵參奉)이 본조에 치보(馳報)하였는데, 이달 14일 밤에 본릉의 정자각(丁字閣) 정문에 불이 붙어 참봉이 급히 달려가서 불을 껐는데 문(門) 1척(隻)은 다 타 버렸고, 1척 및 인방(引枋)과 지방(地枋)의 곳곳에 불이 옮아 붙었다고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3년 을축(1625) 11월 15일(경신) 맑음
또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중략) 이번 선릉(宣陵)의 정자각에 불이 난 변고는 참봉 및 각인(各人)의 초사(招辭)에서 모두들 인록(仁祿)이라고 하는 자가 한 짓이라고 하였습니다. 방화할 때에 비록 현장에서 확실히 붙잡지는 못하였으나 도끼로 나무를 베어 낸 정황이 이미 명백하니, 유사로 하여금 붙잡아 와 추문(推問)한 다음 율문(律文)에 따라 정죄(定罪)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나추(拿推)하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3년 을축(1625) 11월 17일(임술) 맑음
선릉(宣陵) 왕후(王后)의 능에 또 화재가 발생하였다. 예조가 위안제(慰安祭)를 지내고 정부(政府) 이하를 보내어 봉심(奉審)하게 하기를 청하고 이어 아뢰기를,

"근일 능침의 화재는 듣기에도 가슴이 떨려 차마 앙달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겨울 이 능의 정자각(丁字閣)에 방화한 사람에 대해서는 일찍이 듣건대 참봉의 초사(招辭)에 명백히 의심스런 사람이 있다고 하여 그때 잡아가두었다가 미처 철저히 형문하지도 않은 채 곧 심리(審理)가 있었던 것을 인하여 장(杖) 한 대도 치지 않고 방면하였습니다. 그뒤 능의 화재가 이제 또다시 일어났습니다. (중략)"

하니, 답하기를,

"(중략) 지난해 심리(審理)할 때 방면된 사람은 다시 철저히 국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을 우선 잡아다 국문하라."

하였다. 그 뒤 능소(陵所) 근처에 사는 백성 인복(仁福)[26]에게 의심스런 형적이 있다고 하여 잡아다가 추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1권, 인조 4년 2월 15일 무자 5번째 기사
좌의정 윤방(尹昉), 선공감 제조 한준겸(韓浚謙), 예조 참판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중략) 신들이 처음 능소에 도착하여 새로 차임된 참봉과 당번 수호군 등에게 전후로 불이 나게 된 원인을 자세히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상세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인록(仁祿)이란 자가 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데 늘 능 안의 나무를 찍어 가곤 하였습니다. 작년에, 어느 달 어느 날인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또 수호군에게 붙잡혔는데 전 참봉 홍박(洪𩅿)이 잡아다가 형장을 쳤습니다. 그는 형장을 맞으면서 패악한 말을 많이 내뱉었는데, 다음날 정자각에 불을 지르는 변고가 있었습니다. 그 뒤로 양능에 - 원문 빠짐 - 이러한 변고가 있는 것은 필시 이 자의 소행일 것입니다. 그 밖에는 의심할 만한 길이 전혀 없습니다. - 3자 원문 빠짐 -’[27] (중략) 의금부로 하여금 엄중히 국문하여 기필코 죄인을 잡아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이렇게 함께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4년 병인(1626) 3월 4일(정미) 맑음
최현이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인록(仁祿)에게 형장을 더 치는 것이 어떤지 묻는 공사(公事)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이전부터 종묘와 사직에 죄를 범한 사람은 모두 삼성 추국(三省推鞫)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그 일을 중시한 것이다. 산릉의 변고가 종묘사직의 변고와 실로 다르기는 하나 이놈은 행적이 의심스럽고 죄상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예사롭게 추국해서는 안 된다. 실정을 캐낸 다음 삼성 추국을 할 것인지 대신과 의논하라.’고 판하(判下)하셨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좌의정 윤방(尹昉)과 우의정 신흠(申欽)은 ‘성상의 하교대로 삼성 추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재결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영중추부사 정창연(鄭昌衍)은 병 때문에 수의(收議)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의 논의가 이와 같으니, 성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수의한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4년 병인(1626) 3월 14일(정사) 비
최현이 추국청(推鞫廳)의 말로 아뢰기를,

“인록(仁祿)을 세 차례 형문(刑問)하였으나 단단히 숨기고 승복하지 않으면서 한결같이 억울하다고만 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인록은 나이가 겨우 15세라 하는데, 그 모습을 보아도 지극히 어리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리고 참봉과 수호군 등이 공초에 끌어들여 말한 것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은 정확한 말이 아니라, 그의 아비가 형장을 맞은 일로 인하여 그가 패악한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의심하여 그렇게 연루시킨 것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계속해서 형장을 가한다면 실상을 알아내기도 전에 필시 죽고 말 것입니다. 형장을 더 가할 것인지 여부를 황공한 마음으로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막중한 죄를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되니, 형장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라. 그리고 그 아비도 나국(拿鞫)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4년 병인(1626) 3월 15일(무오) 비
심액이 추국청 위관의 뜻으로 아뢰기를,

“인록(仁祿)은 아비를 잡아 오기를 기다려서 형장을 가하는 것으로 입계하였는데, 지금은 기다릴 일이 없으니 형장을 가하게 해 주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4년 병인(1626) 3월 16일(기미) 비

[28]

제방 관리 실태를 조사할 것을 건의하다[편집 | 원본 편집]

1626년(인조 4년) 4월, 김경징은 ‘일부 사대부들이 사사로이 제방을 차지하여 그 안에 논을 만드니, 제방 아래의 논이 쓸모없게 되어, 백성들의 원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에 대한 수사를 수행할 것을 주청했고, 인조는 이를 윤허했다.

(전략) 특진관 김경징(金慶徵)이 아뢴 내용에,

“전에 경기 및 삼남(三南) 지역에 각각 제방을 쌓은 곳이 있어서 거주민이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중략) 그런데 광해군 말년에 적신(賊臣)의 무리가 제방을 사사로이 점유하여 그 안에 논을 만들었으므로 제방 아래의 논은 비록 수백 석이나 되는데도 모두 거북 등처럼 갈라져서 쓸모없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원성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사대부 사이에 혹 그대로 염치없이 차지하고 있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일일이 사핵하여 다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조사해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4년 병인(1626) 10월 13일(임자) 맑음

정묘호란[편집 | 원본 편집]

1627년(인조 5년) 1월 17일, 조정에 금나라의 침공 소식이 전해졌다. 인조는 강화도(이하 강도)로 대피하는 한편, 김자점에게 강도 수비를 맡겼다. 김경징은 김자점을 보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자점은 순검사[29] 겸 임진수어사, 김경징은 순검부사 겸 검찰부사로 임명되었다.

1월 29일, 인조 정권은 강화도로 건너가려 했다. 그런데 배가 적어서, 사람을 먼저 태워 보내고, 그 다음 말을 옮기는 식으로 이동하였다. 인조는 맨땅에 발을 딛고 선 채, 자신의 말이 건너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인조가 자신의 말을 타고 행궁[30]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임금을 호종하는 관원들도, 꼬박 밤을 새운 후에야 전부 강화도로 건너올 수 있었다. 강을 건널 배를 마련하는 것은 검찰부사 김경징의 역할이었다. 인조는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김경징을 추고할 것을 명령했다.복선 암시

(전략) 상이 또 이르기를,

"김자점을 전일에 중죄가 있었기 때문에 처벌하였다마는[31] 갑자년 변란에 많은 공로가 있었으니 이제 석방하여 강화를 검찰하는 책임을 맡기려 하는데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1월 17일 을유 1번째 기사
비국이 아뢰기를,

"김자점에게 강화를 주관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명호(名號)가 무겁지 않습니다. 청컨대 순검사(巡檢使)로 개칭하소서.[32]"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1월 17일 을유 11번째 기사
(전략) 김자점이 아뢰기를,

"내전의 행차는 사세가 몹시 급합니다. 김경징은 많은 풍력(風力)이 있으니 일을 같이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1월 18일 병술 1번째 기사
김경징(金慶徵)을 순검 부사(巡檢副使)로 삼았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1월 22일 경인 4번째 기사
김자점(金自點)을 임진 수어사(臨津守禦使)로 삼았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2월 27일 갑자 2번째 기사
(전략) 상이 타던 말이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이에 건너 왔다. 상이 드디어 말을 타고 행궁에 이르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시신과 종관(從官)은 사람과 말이 서로 떨어져 강 위에 서 있기도 하고 남쪽 언덕에 있기도 하여 서로 부르는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병기 한림(並騎翰林)·도보 간관(徒步諫官)’이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1월 29일 정유 2번째 기사
김상에게 전교하기를,

“검찰부사(檢察副使) 김경징(金慶徵)은 물을 건너는 일을 전적으로 담당하면서도 제때에 배를 대령시키지 못하였으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이 심하다. 추고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5년 정묘(1627) 1월 29일(정유) 흐림

가벼운 형벌을 적용한 죄로 파직되다[편집 | 원본 편집]

1629년(인조 7년) 4월, 김경징은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우참찬 박동선(朴東善)이 감악산(紺岳山) 기우제(祈雨祭)의 헌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다가 추고를 받았다. 문제가 된 점은, 교자(轎子)를 탔다는 사실과, 향축(香祝)[33]을 받든다는 이유로 가교(駕轎)를 사용했다는 사실이었다. 교자는 종일품 이상의 벼슬아치나 기로소[34]의 당상관만이 탈 수 있는 가마이고,# 가교는 임금과 세자가 쓰는 가마이다. 박동선의 행동은 법도를 어긋난 것이었던 셈이다.

형조는 박동선의 죄에 대해 ‘태(笞) 30을 치는 것이 적정하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인조는 “이전에 목대흠(睦大欽)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고신(告身)[35]을 추탈하는 벌을 받았다. 박동선은 목대흠보다 죄가 무거운데, 형벌은 더 가벼우니, 이는 이치에 맞지 않다. 판결에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하였으니, 해당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라.”고 응답했다. 이에 따라 형조 판서 권분(權昐)과 형조 참판 김경징(金慶徵)은 파직되었고, 형조 좌랑 이유(李愈)는 장(杖) 70의 형벌을 수속(收贖)[36]하였다.

정사가 있었다. (중략) 김경징(金慶徵)을 형조 참판으로, (중략) 삼았다.
— 승정원일기, 인조 7년 기사(1629) 4월 22일(정미) 맑음
형조가, 박동선(朴東善)이 교자를 탄 데 대해 (중략) 회계하기를,

“대개 향축(香祝)을 받들기 위해 가교(駕轎)를 쓴 데 대해 조율해야 하나 법에 딱 맞는 조문이 없습니다. 제향조(祭享條)의 범법(犯法)에 대해 태(笞) 30을 친다고 한 것에 견주어 적용하는 것 외에 달리 적용할 만한 율문이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목대흠(睦大欽)이 신병이 있어 봉향(奉香)하는 일을 하지 못했는데 고신(告身)을 추탈하는 것으로 조율하였다. 이번에 박동선이 범한 것은 목대흠에 비해 본다면 무거운 점이 있지 가벼운 점은 없는데 다만 태 30을 치는 것으로 조율하였으니 지극히 괴이하다. 죄는 같은데 벌이 다름이 이처럼 심하니 공도(公道)가 쓸어버린 듯이 없어지고 사정(私情)이 크게 압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나국해야 할 것이지만 지금 우선 엄하게 추고하라. 이 공사는 도로 내주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7년 기사(1629) 5월 26일(경술) 맑음
형조가 아뢰기를,

“우참찬 박동선(朴東善)이 감악산(紺岳山) 기우제(祈雨祭)의 헌관인데, 노병이 들어 교자를 탄 것은 혹 용서할 수 있으나 향축을 받들기 위한 가교(駕轎)를 쓴 것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죄가 장(杖) 100에 고신(告身)을 모두 추탈하는 데에 해당합니다.”

하니, 계하하기를,

“공(功)과 의(議)로 각각 1등을 감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7년 기사(1629) 5월 29일(계축) 맑음
사헌부의 계본에,

“형조 좌랑 이유(李愈)의 경우, 박동선(朴東善)이 향을 받들고 가기 위해 가교(駕轎)를 탄 죄에 대해 태(笞) 30으로 가볍게 조율한 것은 장(杖) 70을 수속(收贖)하고 고신(告身) 2등을 추탈하는 데에 해당합니다. 이 사안에 대해 판서 권분(權昐)과 참판 김경징(金慶徵)은 지만(遲晩)[37]하였습니다. 성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였는데, 계하(啓下)하기를,

“모두 파직하되, 이유는 수속만 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7년 기사(1629) 6월 5일(무오) 비

간언을 무시하는 인조의 태도를 비판하다[편집 | 원본 편집]

1630년(인조 8년) 1월, 지사 홍서봉은 “최근 민간에 사치하는 폐단이 심하니, 왕께서 먼저 검약하는 모습을 보이며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참찬관 이경여 역시 “사치품을 사들이는 풍조가 심하다. 궁중에서 먼저 이에 대한 소비를 끊어 모범을 보이자.”고 건의했다.아랫것들 보기 안 부끄러워요? 이에 인조는 “관리가 친분이나 청탁 때문에 범법자를 놓아주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민심이 좋지 않은 이유는 이런 불공평한 일들 때문일 것이다.”라고 대답했다.니들이나 잘하세요

이즈음 후금이 명을 침공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해 2월 지경연 이귀(李貴)는 “소식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만약을 대비하여 병력을 마련하자.”고 건의했다. 소문이 사실이고 조선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을 경우, 명나라에서 이를 따지면 입장이 난처해지니, 유사시 후금을 공격할 수 있게 준비를 하자는 의미였다. 김경징은 “지차암(芝次巖)의 별당을 보수하는 작업이 규모가 너무 크다. 지출이 커질 것 같으니 공사를 중지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인조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말을 거의 실천하지 않았던 듯하다. 때문에 사간 김광현은 “후금과 명과의 전쟁에 대한 소식이 계속 들려오고 있는데, 도울 생각을 하기는커녕 풍정(豊呈)[38]을 준비한답시고 재정을 낭비하고 있다.”고 인조를 비판했다. 당시 인조는 인경궁(仁慶宮)을 수리할 것을 명령했는데, 그곳에서 풍정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김광현은 이를 문제 삼은 것인데, ‘풍정을 진행할 장소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인경궁 수리 같은 일을 벌여서 필요 없는 지출을 하느냐.’는 논지였다. 인조는 김광현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여러 곳에 공사를 벌인 것도 아니고, 인경궁 수리도 거의 끝나가니, 작업을 중지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고 응답했다.(...)

신하들은 인경궁 수리에 대해 계속해서 비판했다. 김경징 역시 “‘궁가(宮家)[39]에 대한 면세(免稅)를 혁파하자.’는 논의를 비롯해서 여러 유익한 간언들이 있었는데, 받아들인 것은 거의 없지 않느냐. 이래서야 신하들 의견을 묻는 것은 겉치레일 뿐이다.” 하고 거들었다. 그러나 인조는 이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실록에는 ‘풍정의 의식을 인경궁에서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황상, 인조는 주변의 말을 무시한 채 인경궁 수리를 강행하여 마무리 짓고, 무난하게 그곳에서 풍정을 진행한 듯하다.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지사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이때처럼 백성이 곤궁하고 재정이 고갈된 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치하는 폐단은 하천배들이 더욱 심하니, 이는 상께서 실제로 검소함을 본보이는 것이 혹 미진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하니, (중략) 참찬관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중략) 지금 갑자기 고칠 수는 없겠지만 의당 폐단을 줄이는 방도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은(金銀)·주옥(珠玉)·사라(紗羅)·능단(綾段) 등의 물건에 있어서도 먼저 궁중에서 금지해 끊은 다음에야 아랫 백성들이 사치하는 것을 금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법부(法府)의 관리가 혹 아는 사람이거나 청탁을 받은 자일 경우 범법자를 놓아주어 세력이 없는 자들만 벌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지엽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불공평하니 인심이 승복치 않는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고,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1월 28일 무신 2번째 기사
주강에 《서전》을 강하였다. 지경연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중략) 노병(奴兵)이 서쪽을 침범했다는 말의 진위 여부를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중략) 오늘날 우리나라가 조용히 수수방관하며 근왕(勤王)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다가 후일 중국 조정에서 죄를 묻는 일이라도 있으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할 것입니까. (중략) 비록 군사를 선발했다 할지라도 황제의 명이 없을 경우 중지하면 될 것이고, 황제의 명이 있게 되면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이 또한 옳을 것입니다. (중략)"

하였다. (중략) 참찬관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요즘 듣건대 지차암(芝次巖)의 별당을 보수하는데 그 일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고 합니다. 풍정(豊呈)의 예를 거행한다 하더라도 일이란 마땅히 절약하며 간소하게 해야 합니다. 이번에 보수하는 일은 폐단만 있을 뿐이 아닙니다. 마음이 한번 유상(遊賞)하는 데에 빠지게 되면 실로 적은 잘못이 아니게 될 것이니, 그 조짐을 끊어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당의 공사는 혹 자전(慈殿)께서 거둥하시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에 보수하도록 한 것인데, 경이 이처럼 말하니 정지시키도록 하겠다."

하였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2월 3일 계축 1번째 기사
사간 김광현(金光炫)이 아뢰기를,

"노적(奴賊)이 황성(皇城)을 포위하고 조이고 있다는 말이 전후에 걸쳐 잇따라 이르렀습니다. 이 말이 비록 오랑캐들이 과장한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절대로 이럴 걱정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군사를 징발하여 어려운 상황을 구하러 달려가 급할 때 서로 구해주는 의리도 보여주지 못했는데, 도리어 풍정(豊呈)을 거행한다는 이유로 음악을 점고할 즈음에 춤이며 노래며 악기들을 날마다 잔뜩 벌이고 있으니, 정전을 피해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않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우선은 정확한 보고가 오기를 기다려 그 말이 허망하다는 것을 안 뒤에 다시 습의(習儀)하고 점고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년 풍정 때에 처소가 충분치 못해서 걱정이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금년에는 또 인경궁(仁慶宮)을 수리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국가가 무사하고 재정이 풍부하더라도 다른 곳에 따로 설치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국가에 일이 많고 재정이 고갈된 상태인데, 어찌 허비해서는 안 될 재물을 낭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수리하는 곳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끝나가고 있는데 지금 와서 정지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2월 14일 갑자 3번째 기사
(전략) 김기종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하문하심을 받들었으니 감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인경궁(仁慶宮)을 수리하는 데에 그다지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신(臺臣)이 연계(連啓)하는 것은 물력(物力) 때문이 아니라 실로 그 조짐을 근심해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일은 단지 옛 건물을 그대로 두고 수리하는 것뿐인데, 외부에서는 마치 새로 짓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왜 그런가?"

하니, 시독관 이소한(李昭漢)이 아뢰기를,

"옛날 진풍정(進豊呈) 때에는 시어(時御)하시는 궁궐에서 그대로 거행했어도 넉넉하였는데, 하필 인경궁에서 하려고 하십니까. 간관이 극력 간쟁하는 것이 실로 옳지 않은 것이 아니나, 그 논의를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하자, (중략) 참찬관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구언(求言)하신 것은 단지 겉치레였을 뿐입니다. 지난번에 대관(臺官)이 궁가(宮家)에 대해 면세(免稅)해 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논열(論列)한 것이 한 달 가까이 되는데도 전하의 윤허는 더욱 아득하기만 하고 그 밖에 쓸 만한 말들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고 계십니다. 이로써 본다면 겉치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고,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2월 22일 임신 1번째 기사
자전이 인경궁(仁慶宮)으로 행행하자 연(輦)앞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은 금천교(禁川橋) 서쪽까지 나가 공손히 전송하였는데, 풍정(豊呈)의 예를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3월 11일 신묘 2번째 기사
상이 인경궁(仁慶宮)에 거둥하여 자전을 문안하고, 이어 "풍정(豊呈)을 끝낸 뒤에 환궁하겠다."고 하교하였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3월 20일 경자 1번째 기사

칠향의 저주를 고발하다[편집 | 원본 편집]

1632년(인조 10년) 12월, 김경징은 “계집종 칠향(七香)이 집안을 저주했다.”고 고발했다. 모친이 종기를 심하게 앓는 것을 이상히 여기던 중, 집안 여러 곳에서 흉측한 물건을 발견하여 의심 가는 사람들을 문초했더니, 칠향 등이 죄를 실토했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의금부로 하여금 범인들을 색출하여 국문으로 죄를 다스리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칠향, 춘개(春介), 계진(季眞), 박삼남(朴三男) 등의 용의자들이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승황의 아내 끗정[40]도 끌려와서 국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에 위관[41] 김상용(金尙容)은 “끗정이 저주를 주도했는지 확실치 않다. 설혹 정말로 관여하였더라도, 고의로 살인을 도모한 죄를 따져야지, 삼성(三省,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에서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간언했다.

국문은 역모 같은 국가 안위와 관련된 사건이나 혹은 중대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행하는 것이 조선의 국법이었다. 때문에 끗정을 국문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42] 그러나 인조는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끗정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다가 장사(杖死)[43]하고 말았다.[44]

인조가 끗정의 삼성 추국은 부당하는 간언을 듣지 않았다는 점, 용의자 끗정이 혐의가 불분명함에도 끝내 곤장을 맞고 죽어야 했다는 점 등에서, 당시 김류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금부가 아뢰기를,

“경기 감사 김경징이 상소를 올리니, ‘역적 처의 소행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흉악하다. 그 사주한 자도 모두 나국하여 증거를 잡아 공신을 모해한 죄를 징계하라.’는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형조를 저주한 죄인 춘개(春介), 계진(季眞), 칠향(七香), 맹인(盲人) 박삼남(朴三男) 등은 형조가 이미 수금하였고, 칠향이 끌어댄 박자흥(朴自興)의 처와 이른바 죽은 박금제(朴金提)의 처는 도사(都事)를 파견하여 모두 잡아 오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12월 1일(갑자) 맑음
금부가 박승황(朴承黃)의 처 끗정(唜貞)을 나수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12월 2일(을축) 맑음
의금부가 아뢰기를,

“칠향(七香), 득지(得只) 등이 모두 강상죄에 관계되므로 잡아 오고 형조의 공사를 근거하여 고찰한 다음 추국하도록 전교하셨습니다. 전례에 따라 삼성 추국(三省推鞫)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12월 2일(을축) 맑음
의금부 낭청이 위관의 뜻으로 아뢰기를,

“칠향 등이 끌어댄 옥녀(玉女)가 도망친 까닭에 당초 형조가 잡아 가두지 못하였는데, 지금 삼성 죄인이 되었으니 중대한 사안에 관계되므로 포도청으로 하여금 수색하여 체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여쭙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12월 3일(병인) 맑음
전지(傳旨)에,

“적인(賊人) 옥남(玉男)은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의 집을 저주하는 일에 함께 모의했을 것이므로 칠향(七香)의 초사(招辭)로 인해 포도청이 이미 수금하였다. 일에 관련된 3명을 율문대로 처치하도록 의금부에 내리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12월 8일(신미) 흐림
금부 낭청이 위관[45]의 뜻으로 아뢰기를,

“끗정(唜貞)은 박가(朴家)와 절친한 자로서 계진(季眞), 칠향(七香) 등이 흉모를 꾸미고 저주를 행한 일에 대해 비록 혹 참여하여 알고 있었더라도 박가를 위해 기필코 원수를 갚고자 하여 주모(主謀)하고 지휘한 정상은 명백하지 않은 듯합니다. 설령 참여하여 알았다 해도 고의로 살인을 도모한 죄를 받아야 마땅하지 본래 강상죄(綱常罪)와는 관계되지 않는데 모두 삼성에서 추국하니 물의가 떠들썩하게 일어나 모두들 불가하다고 하며 옥사의 체모로 헤아려 보아도 과연 합당하지 않습니다. 신이 다시 옥사의 조사를 맡아 당초 변별하지 못하고서 강상죄를 지은 정범(正犯)과 혼동하여 형을 청함으로써 국가의 형정(刑政)이 신으로 인해 잘못되었으니 지극히 황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옥사의 체모가 이와 같고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은데 그대로 삼성 추국을 하는 것은 실로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해부로 하여금 신국(訊鞫)해서 실정을 알아낸 다음 법에 의거하여 처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12월 12일(을해) 맑음
금부가 아뢰기를,

“역적의 괴수 옥지의 언니 대옥과 동생 끗옥 등을 연좌하는 일에 대해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의정 윤방(尹昉)과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은 ‘율문 내에 역적의 딸이 출가하면 연좌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하물며 출가한 형제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율문 밖의 일을 가볍게 논의할 수 없으니 삼가 상께서 재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고, 판중추부사 정창연(鄭昌衍), 영돈녕부사 오윤겸(吳允謙), 승평부원군 김류(金瑬), 좌의정 이정귀(李廷龜)는 병으로 수의하지 못했으며, 완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은 지방에 있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와 같으니 삼가 상께서 재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의논한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12월 12일(을해) 맑음
집의 민응형(閔應亨), 지평 성여관(成汝寬)이 피혐하기를,

“신들이 위관의 계사를 보니 바로 박승황(朴承黃)의 처 끗정(唜貞)에 대한 일이었습니다. 신들이 모두 끗정을 형신하는 날에 가서 참여하였는데, 막중한 옥사를 자세하고 신중하게 하여서 분명히 판단하지 못해 강상 죄인이 아닌 자의 옥사를 삼성 추국에 혼입(混入)시킴으로써 크게 법례를 어기고 물의가 떠들썩하게 일어나게까지 하였습니다. 신들이 혼미하여 살피지 못한 죄가 큽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12월 14일(정축) 맑음
판의금 김자점(金自點), 동의금 이시방(李時昉), 동의금 정광경(鄭廣敬), 동의금 윤이지(尹履之)가 아뢰기를,

“무릇 삼성 추국의 규정은 관련자들을 신문하는 것이 필수인데, 이번에 끗정(唜貞)은 각인(各人)에게서 포도청과 형조가 승복을 받은 공초 및 당초의 고발장(告發狀) 중에 여러 번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의논을 완결할 때에 모두의 의논이 일치되어 공초를 받아 형률을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위관이 물의가 떠들썩하다고 진계하였고 양사가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습니다. 신들은 추관(推官)의 반열에 끼어 있으면서 또한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12월 15일(무인) 맑음
금부 낭청이 위관의 뜻으로 아뢰기를,

“죄인 옥남(玉男)은 세 차례 형문한 다음 형문을 정지하고 옥사가 마무리될 동안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제는 삼성 죄인 옥례(玉禮)가 이미 물고[46]가 났고 달리 더 추문할 자가 없으므로 옥사가 이미 완결되었습니다. 옥남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하니 의처(議處)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12월 20일(계미) 맑음
금부가 아뢰기를,

“옥남을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하니 의처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칠향(七香)의 공초 내에 옥남이 전해 주어 글을 읽었다고 운운하였지만 별달리 실정을 안 흔적이 없고, 각인의 공초에도 드러난 곳이 없습니다. 세 차례 형문을 받았지만 시종 무죄를 주장하고 있으니 성상의 하교대로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므로 삼가 성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12월 22일(을유) 맑음
(전략)
11월
:(중략)
:27일
::경기 감사 김경징(金慶徵)이 그의 친가의 저주 사건으로 형조 문 밖에 와서 단자를 올렸다. 그의 모부인(母夫人)이 종기를 앓았는데 증세가 심하자 저주한 일이 있는가 의심하던 중, 흉측한 물건을 10여 곳에서 파내었다. 집안의 의심할 만한 사람을 문초하였더니, 공신 사패비(賜牌婢)로서 박자흥(朴自興)의 가속이었던 공비(公婢) 중진(仲眞)ㆍ춘개(春介)ㆍ옥례(玉禮)ㆍ계진(季眞)ㆍ칠향(七香) 등이 모두 장하(杖下)에 승복하였다. 초사에, ‘박자흥의 아내와 박승황(朴承黃)의 아내 및 맹인 삼남(三男)이 관련되었다’ 하였다.
::위관(委官)이 아뢰기를,
:::“죄인 애생(愛生)이 정범으로서 여러 차례 형을 받았으나 끝내 승복하지 않다가 이미 물고(物故)되었습니다. 사건 관련자인 안생(安生)ㆍ진이(眞伊)ㆍ중생(仲生) 등은 원래 강상(綱常) 죄인이 아니니, 금부에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2월
:1일
::승평부원군(昇平付院君) 집을 저주한 여종 칠향ㆍ계진ㆍ춘개에게 공초를 받았는데, 칠향ㆍ계진은 포도청(捕盜廳)에서 승복한 초사와 가감(加減)이 없었고, 춘개와 맹인 삼남은 발명하였다. 아울러 입계하고 의금부에 이송해서 원장(元狀)에 부쳤다. 중진(仲眞)은 난장(亂杖)에 죽었고 옥례(玉禮)도 거의 죽게 되었으며, 비부(婢夫)인 포수 김귀현(金貴玄)은 포도청 난장에 죽었다. 다만 네 사람이 초사만 받았는데, 칠향과 계진은 곧 박자흥의 여종이고, 춘개는 권충남(權忠男)의 여종이다. (중략) 경기 감사 김경징이 상소해서 실정을 아뢰고 체대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해조에 내려서 회계(回啓)하도록 하라.”
::하였고, 잇따라 전교하기를,
:::“이 상소를 보니 역적 아내의 행위가 극히 흉악하다. 그를 사주한 사람을 아울러 금부에서 나국하여, 공신을 모해한 죄를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중략)
:2일
::(중략)금부가 아뢰기를,
:::“김경징의 상소에 의해서 형조로 넘겨 온 저주 죄인 춘개ㆍ계진ㆍ칠향과 맹인 박삼남은 형조에서 이미 수금(囚禁)했는데, 칠향의 공초에 나온 박자흥의 처 및 소위 고 박금제(故朴金堤)의 처는 도사를 보내서 잡아 올 것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금부에서 박승황(朴承黃)의 아내 끝정(唜貞)을 잡아 가두었다.
:3일
::금부가 아뢰기를,
:::“도사(都事)가 박자흥의 처를 잡아오기 위하여 그가 있는 중령포(中令浦)에 달려 갔더니, 지난 달 29일에 발광(發狂)해서 스스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근처의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도피했다고 합니다. 형적이 극히 수상하므로, 그 동네의 행수(行首)인 고산(高山)과 이웃에 사는 사람 가팔리(加八里)ㆍ복지(卜只) 등에게도 초사를 받아 왔습니다. 이 사람들을 해조에서 가두어 추문(推問)하도록 하고 박자흥의 처는 한성부(漢城府)에서 검시(檢屍)하도록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후략)[47]
— 대동야승, 응천일록
경기 감사 김경징(金慶徵)이 상소하기를,

"불행하게도 사패(賜牌)한 계집종이 남몰래 옛 주인의 사주를 받고서 감히 신의 집을 모조리 없앨 꾀를 내어 부엌·굴뚝·기둥·지붕에다 흉측한 물건을 묻어두었는데, 음험하고 사특한 짓이 빌미가 되어 어미의 병이 위독해졌습니다. 자식된 자의 망극한 정으로는 그의 살점을 저며도 분함을 씻기에 부족합니다만, 신은 일단 법조(法曹)에 고발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 소를 보고 금부에 명하여 사주한 자를 잡아다 국문해서 공신(功臣)을 모해한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다. 금부가 저주한 죄인 칠향(七香)이 끌어댄 박자흥(朴自興)의 처와 박승황(朴承黃)의 처를 잡아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박자흥의 아내는 이이첨(李爾瞻)의 딸인데 잡아들이라는 명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즉시 자살하였고, 계집종 칠향은 형문(刑問)을 받고 승복하였다. 말질정(末叱貞)은 바로 박승황의 아내로서 신문(訊問)해도 승복하지 않았는데 위관(委官) 김상용(金尙容)이 ‘말질정의 박가(朴家)의 절친(切親)으로 설혹 그 일을 관여하여 알았더라도 고의로 살인을 도모한 죄를 받아야 옳지, 함께 삼성(三省)에서 국문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뢰고, 양사도 삼성에서 국문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引避)하여 체직되었으나, 상이 끝내 상용의 의논을 따르지 않아, 말질정이 끝내 장하(杖下)에서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박승황(朴承黃)이 자기의 형인 박승종(朴承宗)과 평생 동안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말질정이 박승종의 부자(父子)에게 무슨 연연한 생각이 있기에 몰래 앙갚음할 꾀를 품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할 처지에 빠졌겠는가. 다만 이 일이 김류(金瑬)의 집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위관 이하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곧장 형추(刑推)를 청하여 삼성에서 국문하다가 결국 장사(杖死)하기에 이르렀으므로 물의가 이를 그르게 여겼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7권, 인조 10년 12월 1일 갑자 1번째 기사

폐모 관련자 명단을 양사와 전조에 전달할 것을 주장하다[편집 | 원본 편집]

1634년(인조 12년) 3월, 김경징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그 해 4월, 사간원에서 청주 목사(淸州牧使) 박안효(朴安孝), 흥해 군수(興海郡守) 김효건(金孝建), 강령 현감(康翎縣監) 유창문(柳昌文)을 비판했다. 이들 셋은 광해군 시절 폐모(廢母) 주장에 찬동하여 그 실행에 참여한 전적이 있었다. 사간원은 ‘그들은 폐모에 관여한 데 대해 반성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 없이 뻔뻔하게 벼슬아치 노릇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었다. 김경징은 폐모에 가담한 인물들을 처벌하고, 폐모 정청(庭請)[48]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양사와 전조(銓曹)에 전달할 것을 주장했다. 전조는 이조와 병조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이조는 문관을 뽑고 병조는 무관을 뽑으므로, 김경징의 발언은 ‘폐모론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절대 관직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사간원 역시 “의금부로 하여금 정청의 문서를 베껴 양사와 전조에 보내게 해서, 그 문건에 이름이 있는 인물은 삼사의 관직에 추천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인조는 “폐모에 관여한 이들에 대한 처리는 과거에 이미 하였으므로, 오늘날 굳이 또 거론할 필요가 없다. 또한 정청에 대한 문서를 보내는 일은, 모두가 옳지 않은 처사라고 여기고 있으며, 사람들의 불안감만 키울 뿐이다.”라고 반박하며, 김경징과 사간원의 건의를 물리쳤다. 같은 해 5월, 이조와 사간원에서 의금부로부터 폐모 관련 문건을 베껴 가져간 일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인조는 의금부에 “김경징의 논의로 인해 몹시 소란스러우니, 앞으로는 이런 문서를 내어주면 안 된다.”고 하명했다.

이비가 (중략) 김경징(金慶徵)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중략) 삼았다. (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12년 갑술(1634) 3월 20일(병오) 맑음
(전략) 대사간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중략) 요즈음 자신이 직접 폐모할 것을 정청하는 데 참여하였던 자가 대각에 출입하면서도 일찍이 한마디도 스스로를 비판하는 말이 없이 의기양양한 채 거리끼는 바가 없었으니, 공론이 격발되는 것을 어찌 멈출 수 있겠습니까.

신이 어제 성상소(城上所)의 홍주일(洪柱一)과 상의하여 계초(啓草)를 작성하였는데, 바로 일찍이 정청에 참여하였던 자 몇 사람을 죄주기를 청하는 일과, 정청한 문서 몇 건을 베껴 내어 양사와 전조에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중략) 신의 잘못된 견해는 시비를 밝히고 공론을 수립하자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료에게 무시당하여 믿음을 받지 못하였으니, 결단코 그대로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9권, 인조 12년 4월 19일 갑술 1번째 기사
간원이 아뢰기를,

"청주 목사(淸州牧使) 박안효(朴安孝), 흥해 군수(興海郡守) 김효건(金孝建), 강령 현감(康翎縣監) 유창문(柳昌文) 등은 광해군이 폐모하던 때를 당하여 직접 정청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때의 문서가 분명하여 가리울 수 없으니, 이들은 실로 윤기(倫紀)에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계해년 반정(反正)한 초엽에 청현직을 두루 거쳐 대각을 휘젓고 다니면서 한 마디도 스스로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소서.

(중략) 당초에 정청한 문서를 전조에 다 비치해 두고 진퇴시켰다면 박안효와 같은 무리가 청현직에 출입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정청한 문서를 금부로 하여금 양사와 전조에 베껴 보내게 해서, 이름이 거기에 실려 있는 자는 삼사(三司)에 의망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청에 참여한 사람은 처음에 이미 정적을 살펴서 처리하였으니, 참으로 오늘날에 번거롭게 논할 것이 아니다. 문서를 베껴 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공론이 모두 온당치 않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장관이 시비를 돌아보지 않고 홀로 고집을 부려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울러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9권, 인조 12년 4월 22일 정축 1번째 기사
간원이 아뢰기를,

"혼조(昏朝) 때 수의(收議)하면서 나온 흉패한 말들로 지금까지 문서 가운데 전파되는 것이 매우 많으니, 일일이 뒤늦게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남병사(南兵使) 허완(許完), 황해 병사 이숭원(李崇元), 의주 부윤 황박(黃珀)은 곤수(閫帥)의 중임을 받기까지 하였으므로 물정이 모두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치종 교수(治腫敎授) 정지문(鄭之問)은 본래 천인으로서 일찍이 혼조 때 여러 차례 폐모의 상소를 올렸는데, 몹시 흉악하고 참혹하여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됩니다. (중략) 속히 멀리 유배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3부(府)에 이름을 기록해 두는 일은 이미 정계(停啓)[49]하였는데도 스스로 발명하는 소가 분분하게 들어오고 간원에서 논하는 바가 또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인가? 금부에 물으라."

하니, 금부가 회계하기를,

"이조에서 정백형의 상소에 대해 회계하는 일로 이영구(李榮久) 등이 올린 상소 한 장을 가져 갔고, 또 오늘 간원에서 무오년에 올린 흉소의 등록 1권을 가지고 갔습니다. 양사가 상고할 일이 있을 경우에 이문(移文)하여 가지고 가는 것은 전례입니다. 그러므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요즈음 김경징(金慶徵)의 새로운 논의로 인하여 몹시 소란스럽다. 이러한 문서는 이후로는 내어주지 말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29권, 인조 12년 5월 19일 갑진 2번째 기사

윤방을 공격하다[편집 | 원본 편집]

1636년(인조 14년) 2월, 후금(이하 청)으로부터 용골대, 마부대를 위시한 사절단이 들어왔다. 그들이 온 목적은 조선과 군신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다. 청을 황제국으로 받들라는 것이다. 조선에서 자신들의 문서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신단은 화를 내며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이후 인조는 대신들과 청과의 외교 문제에 대해 논의했는데, 윤방은 "적이 쳐들어 올 게 분명하니, 미리 강도(강화도)로 피신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김경징은 “지금 중요한 건 방어하는 것이지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조선은 이미 그들과 한 차례 전쟁을 하였다. 청나라의 위협은 조선에겐 이미 현실이었다.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든 청에 대해 강한 적대심을 품고 있었고, 그러한 정서는 자연히 조정의 여론을 한쪽으로 기울게 했다. 청과의 결사항전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백성들을 내버려두고 강도로 피신할 수는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50] “'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그들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니, 그 호칭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이도 있었다.[51] 마침내는 “후금에 사절단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말까지 나왔고,#[52] 그래서 1636년(인조 14년)에는 추신사(秋信使)를 보내는 것을 두고 지지부진하게 논쟁이 벌어지다, 12월 4일에야 사절단이 출발했다.#[53][54][55]병자호란 D-4[56] 조정 신료들 대다수가 이와 같은 태도를 취했는데, 그들이 바로 ‘척화파’였다.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거나 신중론을 펼치는 이들은 이귀, 최명길, 장유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들 ‘주화파’의 의견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공공연히 척화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57] 척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담론을 바탕으로 명분의 우위를 점함으로써, 정치적인 힘을 과시하였다.후금 개새끼 해봐 김경징의 발언은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윤방을 비방했다.

그리하여 이 일이 있고 약 한달 후, 윤방은 인조에게 체직[58]을 청했다. 아들 혹은 조카뻘인 인물(김경징)[59]이 면박을 주지 않나, 여러 사람들이 조리돌림을 하지 않나, 대단히 속이 상했을 것이다.

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서달(西㺚)의 대장 47인, 차장 30인과 종호(從胡) 98인을 거느리고 나왔다. 용골대가 의주 부윤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이미 대원(大元)을 획득했고 또 옥새를 차지했다. 이에 서달의 여러 왕자들이 대호(大號)를 올리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귀국과 의논하여 처리하고자 차인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만 보낼 수 없어서 우리들도 함께 온 것이다."

하였는데, 의주 부윤 이준(李浚)이 조정에 계문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16일 신묘 1번째 기사
(전략) 장령 홍익한(洪翼漢)이 상소하기를,

"신이 들으니, 지금 용호(龍胡)가 온 것은 바로 금한(金汗)을 황제라 칭하는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이 태어난 처음부터 다만 대명(大明)의 천자가 있다고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들린단 말입니까. (중략)

간곡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힘써 분발하고 큰 용기를 더욱 떨쳐서 빨리 관(館)에 있는 노사(虜使)를 잡아다 큰길에 늘어 놓고 분명하게 천하의 주멸(誅滅)를 가하소서.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1일 병신 1번째 기사
호차(胡差)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 익합□(溺哈□) 등 세 장수가 거느리고 온 종호(從胡) 196명 가운데 서달(西㺚)이 144명이고 종호가 52명인데, 서울에 들어왔다.
—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2월 23일(무술) 맑음
금의 차인 용골대 등이 서울에 들어왔다. (중략) 용호 등이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우리 한께서는 정토하면 반드시 이기므로 그 공업이 높고 높다. 이에 안으로는 팔고산과 밖으로는 제번(諸藩)의 왕자들이 모두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자, 우리 한께서 ‘조선과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각각 차인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 받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서달이 일시에 한목소리로 말하기를,

"명나라가 덕을 잃어 북경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은 금나라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귀국이 금나라와 의를 맺어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금한이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처럼 굳게 거절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이에 제관이 군신간의 대의로써 물리치자, 용호가 성이 나서 고산 등의 봉서를 도로 가져가며 말하기를,

"내일 돌아가겠다. 말을 주면 타고 갈 것이고 주지 않으면 걸어서 가겠다."

하였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4일 기해 1번째 기사
(전략) 비국에서 명백하게 처치하고 따로 답서(答書)를 작성하기를 청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조금 있다가 용호 등이 그들의 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 대해 성이 나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중략) 그들이 성을 나갈 때에 구경하는 관중이 길을 메웠는데, 여러 아이들이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며 욕을 하기도 하였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6일 신축 2번째 기사
대신과 비국 당상, 삼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윤방이 아뢰기를,

"오랑캐 사신이 성을 내고 갔으니, 우리나라는 끝내 오랑캐의 침략을 당할 것입니다. 마땅히 방어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도성은 결코 지키지 못할 것이니 미리 강도에 들어가서 조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오늘날 강구할 것은 방어할 방법이지 피란에 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강도로 들어가는 일은 바로 두 번째의 일입니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9일 갑진 1번째 기사
영의정 윤방이 상차하기를,

"강도(江都)를 나라의 보장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미 조정의 계획이 결정되었고 사민(士民)들이 의지하고 있는 바이니, 모르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매번 묘당에서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은, 나라의 계책이 마땅히 묘사(廟社)와 군부(君父)를 만전한 지역에 둔 다음에야 싸우거나 지키거나 함에 있어 군색한 일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마침 등대(登對)하는 기회에 망령되이 이에 대해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은 본디 말을 조리 있게 못해 미처 뜻을 다 말하지 못한 채 갑자기 곁에 있던 신료에게 논척당하여 【 윤방이 탑전에서 강도로 이피(移避)하자는 뜻으로 진달하자 도승지 김경징(金慶徵)이 면전에서 논척하였다.】 감히 앞서 하던 말을 끝내지 못하고 물러나왔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일어나 공격을 하였는데, ‘어떤 자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 윤황(尹煌)이 상소한 말이다.】 그러니 사리상 그날로 사퇴하여 사람들의 말에 사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신으로 있는 처지에서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하였기 때문에 감히 발끈하여 떠나지 못하고 조당(朝堂)에 뻔뻔스레 얼굴을 들고 오늘날까지 있어 왔습니다. 신의 직을 체직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들의 상식에 벗어난 말은 마음속에 품어 둘 필요가 없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3월 22일 정묘 1번째 기사

화약 제조와 군사 훈련에 대해 조언하다[편집 | 원본 편집]

1636년(인조 14년) 5월, 당시 화약색 제조(火藥色提調)[60]였던 김경징은 인조에게 “현재 강도에 비축된 화약의 수량과 도감이 보유하고 있는 것을 합치면 1만 수천 근 정도이다. 그런데 포수 훈련 등으로 한 달에 소모되는 화약의 양은 5,6천 근에 이른다.[61] 근래는 명나라와 무역을 하지 않아, 나라에서 화약을 직접 구워 만드는데, 그 양은 봄가을로 3,4천 근에 불과하다. 현재 솥 8개로 염초를 굽고 있는데, 솥 10개를 추가로 더 만든다면, 기존보다 더 많은 화약을 구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건의했다. 병조에서는 “김경징의 간언을 이행하려면 지출이 너무 커진다. 함토가를 매달 지급하는 현행 지침을 없던 것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지만, 인조는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김경징은 다시 “상번한 군사들이 아무리 열심히 훈련에 임하였더라도, 고향에 돌아가 연습을 하지 않으면, 실력이 퇴보할 것이다. 사수나 포수로 선발된 이들에게 화약과 탄환을 지급하여 집에서도 훈련을 하게끔 하자.”고 간언했다. 인조는 그의 말이 바람직하다고 여겨, 병조로 하여금 김경징의 발언을 명문화하도록 했다.

인견(引見)할 때 도승지 김경징이 아뢴 내용은 “신이 새로 화약색 제조(火藥色提調)가 되어 비록 본색(本色)의 일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듣자니 강도(江都)에 먼저 보낸 수량과 도감이 보유하고 있는 수량이 겨우 1만 수천 근(斤)에 불과한데 포수(砲手) 등이 1개월 동안 방포(放砲)를 연습하는 데에 (중략) 한 달에 용하(用下)하는 화약의 수량이 무려 5, 6천 근에 이른다고 합니다.”라는 일이었는데, (중략) 형조 판서가 아뢰기를,

“비록 5, 6천 근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3, 4천 근을 밑돌지는 않습니다.”

하였다. 도승지 김경징이 아뢰기를,

“근래 중원(中原)에서 무역해 오는 규례가 없어 우리나라에서 구워서 만드는 것이 봄가을로 겨우 3, 4천 근에 불과하니, 이것으로 장차 무엇을 하겠습니까. (중략) 올해는 8개의 솥을 이용하여 굽고 있는데 장차 10개의 솥을 더 설치하려고 합니다. 많은 수량을 구워 낼 수 있는 계책일 듯하나 (중략) 운용하는 데에 필요한 함토(鹹土), 시목(柴木) 등의 값을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제급(題給)하도록 한 연후에야 10개의 솥을 더 설치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이 일에 근거하여 솥 하나에 대해 보목(步木) 10필(疋)씩을 해마다 6개월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3월 1일(병오) 맑음
병조가 아뢰기를,

“(중략) 도감의 제조 김경징(金慶徵)의 탑전 계사(榻前啓辭)로 인하여 가열하여 화약(火藥)을 만들어 낼 솥 10좌(坐)에 대해서 1솥당 함토가(鹹土價)를 보목(步木) 10필로 계산하여 1개월에 100필을 지급하도록 전교하셨습니다. (중략) 매달 100필을 또 지급한다면 1년 6개월에 지급하는 수량이 600필이나 되니 비용을 이어 댈 길이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중략) 달마다 지급하는 함토가는 지급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에 감히 이렇게 번거롭게 여쭙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5월 20일(계해) 맑음
병조가 아뢰기를,

“조강 때 특진관 김경징이 아뢴 내용은, ‘상번 군사에서 뽑아내 교습(敎習)시킨 자들이 하번(下番)이 된 뒤에 만약 총 쏘기 연습을 하지 않으면 전공이 아깝습니다. 그 본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연속하여 화약과 탄환을 제급하여 총 쏘기 연습을 하도록 신칙하게 하라는 뜻으로 각 도의 감사에게 통지하도록 하소서.’라는 일이었는데, 상께서 ‘해조에 이미 사목이 있는데 경의 말이 자세하고 지극하니 이 한 항목을 첨입하도록 해조에 말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각 도에 행회(行會)하여 시열(試閱)하게 하라는 뜻은 이미 전에 계하받은 사목 가운데에 넣었습니다만 연속하여 화약과 탄환을 제급하는 한 항목은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첨입하여 부표(付標)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6월 2일(을해) 흐림

과거 응시자들의 난동에 대해 논쟁하다[편집 | 원본 편집]

1636년(인조 14년) 7월, 과거 시험 도중에 유학(幼學) 강인(姜戭)을 위시한 몇몇이 들고 일어나 “선성(先聖)을 모욕한 자가 어떻게 감히 많은 선비의 시험을 주관하느냐.”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고관(考官) 정두경(鄭斗卿)을 축출하는 사건이 있었다.

표제가 공개되고 과거 시험이 시작될 즈음, 서너 명의 응시자들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표제가 붙은 판에 내걸었다. 그 내용은 시관(試官) 정두경을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장내(場內)가 소란스러워지자, 정두경은 건물 안으로 몸을 피했다. 다른 시관이 사람들을 타일러 진정시켰지만, 정두경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분위기가 도로 험악해졌다. 이내 다수의 사람들이 시관의 자리로 쳐들어가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정두경은 다시 건물 안으로 피신했다가, 야음을 틈타 빠져나갔다. 그날의 과거는 그렇게 파장(罷場)[62]하였다.

그 이전의 어느 날, 진위(振威)의 유생들이 “향교가 오래되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며 조정에 건물을 보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정두경이 경기도사로서 상황을 살피러 나갔다. 그런데 이때 그는 술에 취해, “건물이 무너지면, 사람이야 깔려 죽겠지만 현판은 멀쩡할 텐데, 뭐가 문제가 되는가.”라는 망언을 내뱉었다. 이로 인해, 그는 1635년(인조 13년) 2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었다.[63] ‘정두경은 선성을 모독했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1632년(인조 10년)에 지평 김효건(金孝建)과 집의 강대수(姜大遂)가 서경 단자(署經單子)[64]를 심사하다가, 정두경을 서경하지 않고 건너뛴 일이 있었다. 이에 정두경은 ‘김효건과 정대수는, 나의 고조부 정순붕이 옥사를 일으킨 것을 문제 삼아 서경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둘을 비판하였다. 이에 김효건은 “서경 단자에서 정두경 부친의 조부(즉, 정두경의 증조부) 정현의 이름은 보았으나, 정순붕의 이름은 없었다. 정현이 자신의 부친을 부추겨 옥사를 유발하였음을 인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론을 살펴본 후에 서경 여부를 결정하려 한 것이지, 옛 일을 빌미로 정두경의 벼슬길을 막을 속셈은 없었다.”고 항변했다. 위에서 언급한 시험장 소란의 주동자인 강인은 강대수(정두경의 서경에 관여한)의 아들이었다. 어쩌면 강인이 소동을 일으킨 것은 부친과 관련된 원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과거장에서의 난동을 두고 몇몇 신하들이 논쟁을 벌였다. 헌납(獻納) 김익희(金益熙)는 “소란으로 인해 수많은 선비들이 피해를 입었으니, 잘못은 분란을 일으킨 자들에게 있다.”며, 정두경을 두둔하는 동시에 난동을 일으킨 응시자들의 파방을 주장했다. 대사간이었던 김경징은 “시관이 적절히 대처했다면, 이런 분란은 없었을 것이다.”라며 시관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언 이시매는 김경징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이번 일을 비롯한 여러 안건에 대해 장관(김경징)에게[65]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데 네 차례에 걸쳐 발언했음에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신임을 받지 못하는 몸으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면서 사직을 요청했다.저 새끼랑 같이 일 못하겠습니다 이에 김경징도 “비판을 받고서 어떻게 뻔뻔하게 그대로 자리에 있겠는가.”라며 사직을 요청했다.이딴 욕이나 처먹어가며 일하기 싫습니다.

대사헌 김덕함(金德諴)이 “죄는 난동을 피운 자들에게 있으니, 셋의 의견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들은 언관의 본분을 다했으니,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것과 같다.”면서, 갈등을 중재하고자 나섰다. 그러나 김경징은 계속하여 자신을 체직해달라고 청했고, 인조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윤황이 새로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지평 김효건(金孝建)이 아뢰기를,

“소신은 (중략) 사관(史官)을 서경(署經)하게 되었습니다. 전례대로 비록 인원을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계청(啓請)하여 집의 강대수(姜大遂)와 제좌(齊坐)하였습니다.

이어 수찬 정두경(鄭斗卿)의 서경 단자(署經單子)를 보게 되었는데, (중략) 정현(鄭礥)의 이름이 그의 아비 편에 할아비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강대수가 말하기를, ‘지평은 정현의 사람됨에 대해서 들어보았습니까?’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일찍이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가을에 정현이 그 아비로 하여금 결국 큰 옥사를 이루게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데, 이 사람이 아닙니까?’ 하니, 강대수가 말하기를, ‘내가 들은 것도 그렇습니다.’ 하였습니다. 마침내 서로 의논하여 서경을 건너뛰었습니다. 신들은 생각건대, 한 번 서경을 건너뛰는 것은 단지 공의(公議)의 소재를 밝히려는 것일 뿐이었으니, 어찌 이 일로 인하여 앞길을 영원히 폐하는 데까지 이르겠습니까. (중략)

생각한 것이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하였는데도 정두경의 상소를 보건대, (중략) ‘신의 고조 정순붕(鄭順朋)은 을사년(1545) 의옥(議獄)의 잘못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당초 신들은 단지 정현의 이름만을 보았고 정순붕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서경 단자 가운데 이름을 쓴 대수(代數)가 조금 가까운 정현은 버려두고 대수가 조금 멀어 원래 단자에 이름을 쓰지 않은 정순붕을 제기하였으니, 도리어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10년 임신(1632) 5월 29일(병인) 맑음
헌부가 직강 정두경(鄭斗卿)을 파직시키자고 논하였다.

두경은 문장에는 능하지만 사정에 어둡고 성격이 또 오활하고 엉성하였다. 진위(振威)의 유생들이 그 고을의 향교가 지은 지 오래되어 재목이 썩어서 장차 쓰러질 지경이라며 조정에 청하여 중건하고자 하므로, 두경이 당시 경기 도사로서 심사를 나갔는데, 술이 하도 취하여 소리를 지르고 말이 너무 조리가 없었다. 유생들이 모두

"도사(都事)가 선성(先聖)을 능멸하여 심지어는 ‘집이 무너지면 산 사람도 압사를 면키 어려운데, 위판(位版)이야 깔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말을 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탄핵을 받은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1권, 인조 13년 2월 27일 무신 1번째 기사
감시(監試) 이소(二所)의 거자(擧子)가 고관(考官) 정두경(鄭斗卿)을 축출하였다. 사관(四館)에 명하여 유학(幼學) 강인(姜戭) 【 강대수(姜大遂)의 아들이다.】 ·심창(沈敞) 【 심동귀(沈東龜)의 아들이다.】 ·김하영(金廈楹)·조정항(曺挺恒)·조시망(曺時望)·박빈(朴賓)·박수행(朴粹行) 등 수창자 7명을 적발하여 모두 장형으로 다스리고 충군하였다.

이에 앞서 두경이 망발로 인하여 탄핵을 입었는데, 일대(一隊)의 의논은 엄하게 따져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었다. 고관이 되자 강인 등이 창언(倡言)하기를,

"선성(先聖)을 모욕한 자가 어떻게 감히 많은 선비의 시험을 주관할 수 있는가?"

하고, 서로 인솔하여 축출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파장(罷場)을 의논토록 명하였는데,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7월 9일 신해 1번째 기사
유학(幼學) 민도(閔燾)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중략) 불행히 신들이 한 시장에 함께 들어가 그 변고를 목격하고 섞여서 파장의 처분을 받았고 도리어 소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부득이 밝으신 성상께 우러러 아뢰는 이유입니다. 신들이 자초지종을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일에 제목을 내건 뒤에 거자가 각기 자리를 정하고 앉아 막 글의 초안을 잡으려 할 즈음 갑자기 서너 명이 한 곳에 머리를 모으고 무엇을 하는 듯하였습니다. 신들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 모르고 범범하게 보아 넘겼습니다. 조금 있다가 봉명지(封名紙)를 잘라 통문(通文)을 써 내고는 제목을 내건 판에 내걸었는데 시관 정두경(鄭斗卿)의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한 번 발생하니 온 시장이 떠들썩하였는데 (중략) 정두경은 비록 협실(挾室)로 피해 들어갔습니다만 달려가고 떠들썩하게 지껄이는 상황은 여전히 조용해지지 않았습니다. 시관이 입계하여 (중략) 시끄러운 분위기가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정두경이 다시 자리에 나와 앉았는데 - 5, 6자 원문 빠짐 - 큰 소리로 사방에서 모여들어 따라 올라가 시관의 자리를 꽉 채우고서 때리고 욕하는 것이 정두경에게까지 미치니 정두경이 - 5, 6자 원문 빠짐 - 소란을 일으킨 무리가 북을 치며 막고 길을 막아 터 주지 않으므로 정두경이 나아갔지만 나가지 못하고 물러나 협실로 돌아갔는데 끝내 면치 못하였고 밤중을 틈타 나갔으니 그 기상(氣像)이 참담하여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13일(을묘) 맑음
헌납 김익희(金益熙)가 와서 아뢰기를,

“나라에서 시장을 설치하여 선비를 시험하는 것은 지극히 엄하고도 중대하여 조금이라도 구차한 점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사습이 불선하여 과거에서 소란을 일으켜 시관을 몰아내고 많은 선비를 협박하여 마침내 파장하는 지경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었습니다. 이것은 전고에 없었던 큰 변고입니다. 선동하여 소란을 주동한 자는 패악하고 망녕된 십수 명에 불과한데 이로 인해 10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선비를 모두 정거시키는 것은 갑에 대한 분노를 을에게 옮기고 목이 멜까 걱정하여 음식을 먹지 않는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중략) 파방하도록 속히 명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17일(기미) 맑음
행 대사간 김경징(金慶徵)이 아뢰기를,

“(중략) 지난번에 헌납 김익희(金益熙)가 죄는 거자에게 있으니 거자만 벌하라는 등의 말로 피혐하였는데 신이 처치할 때에 또한 시관으로서 진정시킬 수 있는 계책이 없었다는 것으로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으니[66] 지금 처음의 견해를 변경할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20일(임술) 맑음
정언 이시매(李時楳)가 아뢰기를,

“(중략) 시관이 먼저 스스로 두려워하고 겁내어 금하고 억제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감시관(監試官)은 그 직임이 무슨 일입니까? 소란을 일으키는 상황을 좌시하고 태연스러이 괴이하게 여기지도 않고서 대담하게 말 한 마디 하여 적발해서 규정(糾正)하지 못하고 정두경(鄭斗卿)이 피해 나갈 즈음에야 황망(慌忙)히 뜰에 내려와 직접 자신이 호송하며 소란을 일으킨 무리와 서로 섞여 허둥지둥 달아났으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들 경악하였습니다. 신이 시관에 대해서는 모두 추고할 것을 청하고 감시관은 파직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석상에서 발언하니 장관(長官)이 여러 차례 수작(酬酌)하여 - 6, 7자 원문 빠짐 - 또 날짜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또 (중략)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반복해서 상의하니, (중략) 석상에서 무릇 네 차례 발언하였습니다만 한 번도 신임을 받지 못하였으니 결코 뻔뻔스럽게 외람되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20일(임술) 맑음
행 대사간 김경징이 아뢰기를,

“신이 정언 이시매가 피혐한 말을 보니 그중에 시관에 대해 논계한 일은 어제 이미 이로 인해 인피(引避)하였으니 지금 다시 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중략) 네 차례 발론(發論)하여 한 번도 신임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데에 이르러 사설(辭說)이 낭자하여 현저히 지적하여 나무라기를 그치지 않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21일(계해) 흐림
한흥일이 아뢰기를,

“헌납 김익희(金益熙), 대사간 김경징(金慶徵), 정언 이시매(李時楳)가, 재차 아뢰는 것은 번거롭게 해 드리는 일이므로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21일(계해) 흐림
대사헌 김덕함(金德諴)이 와서 아뢰기를,

“(중략) 이번 파장의 변고는 실로 전고에 없었던 일로서 소란을 일으켰을 때에 진정시키고 금하고 억제하지 못한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거자에게 있는데 지금에 이르러 추론(追論)하는 것은 다만 거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뿐입니다. (중략) 자신이 언책(言責)에 있는 자로서 일에 따라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또한 소견이 있으니 모두 피할 만한 혐의가 없습니다. 대사간 김경징, 헌납 김익희, 정언 이시매에 대해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병자(1636) 7월 21일(계해) 흐림
대사간 김경징(金慶徵)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5월 8일 신해 1번째 기사

[67]

김경징(金慶徵)을 도승지로, (중략) 윤황(尹煌)을 대사간으로, (중략) 삼았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7월 24일 병인 2번째 기사

병자호란[편집 | 원본 편집]

전설의 시작

강도검찰사로 임명되다[편집 | 원본 편집]

1636년 12월 13일, ‘청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조정에서는 한성부 판윤 김경징을 강도검찰사로, 부제학 이민구를 검찰부사로, 수찬 홍명일을 종사관으로 임명해, 강화도(이하 강도)에 파견했다.

병자호란 이후, 이 인선은 논란이 되었다. 김경징을 강도검찰사로 천거한 인물이 그의 부친인 김류였기 때문이다. 당시 강도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겨졌으며, 검찰사의 직무는 직접 나가 싸우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친아들을, 가장 안전한 곳의, 싸우지 않는 자리에 앉힌 셈이다. 물론 김류는 추천만 했을 뿐, 임명할지를 판정할 때는 개입하지 않았다.[68] 그러나 권력자가 대놓고 밀고 있는데, 누가 거기다 반대를 할 수 있을까?오늘 내가 쏜다! 다들 부담 갖지 말고 시켜! 난 컵라면!

(전략)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빈궁의 행차를 배행(陪行)하며 호위하게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4일 갑신 1번째 기사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중략) 김경징이 검찰사(檢察使)가 된 것은 김류가 스스로 천거한 데에서 나왔는데, 대개 온 집안이 난리를 피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6월 21일 무오 1번째 기사
양사가 합계하기를,

"영의정 도체찰사 김류(金瑬)는 (중략) 강도(江都)의 중임(重任)을 당초에 신중히 가리지 않고 경솔히 그 아들에게 제수하여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7월 7일 계유 1번째 기사
영중추부사 이홍주(李弘胄)가 상차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당초에 강도의 검찰사(檢察使)를 차출할 때에 신이 영의정 김류(金瑬)와 함께 빈청에 앉아 있었는데 창황 중에 적임자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김경징이 판윤(判尹)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의 직질(職秩)과 인망이면 이 직임을 감당할 만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이 사람으로 아뢰어 차정했던 것입니다. (중략) 그때 김류가 비록 자리에 있었지만 혐의하여 참여하지 않았으니 잘못 천거한 죄는 실제로 신에게 해당됩니다. 공의가 한창 일어나고 있으니 신은 두려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삼가 견척을 받아 물정(物情)에 사죄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재결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김경징이 그렇게 일을 그르칠 줄은 나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경은 안심하고 공무를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7월 8일(갑술) 흐림
행 대사간 이행원(李行遠), 장령 서상리, 지평 윤득열ㆍ윤미, 정언 김여옥ㆍ조중려가 아뢰기를,

“(중략) 김류(金瑬)는 (중략) 강도 검찰사(江都檢察使)를 차임한 일이 비록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수석의 자리에 있었으면서 어찌 감히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8월 3일(무술) 저녁에 비 옴

강도로 건너가다[편집 | 원본 편집]

김경징의 행렬은 통진 나루에서 강도로 건너갔다.

이때 김경징은 가족과 지인부터 배를 태웠으며, 다른 사람들은 함께 가지 못하게 막았다. 때문에 피난민들이 나루를 앞두고 길게 줄지어 서야 했다. 빈궁과 원손을 비롯한 왕실 일행조차 3일 동안 나루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틀밤낮을 추위에 떨며 굶주리다, 내관(內官) 김인(金仁)이 분에 못 이겨 통곡하고, 빈궁 역시 가마 안에서 “김경징아, 김경징아, 네가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하고 외쳤다. 사복시주부 송시영 또한 그들의 행각에 분개했다. 게다가 김경징은 피난민들이 많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전부 나룻가에 남겨둔 채 그냥 강화도로 떠났다. 버림받은 백성들은 청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병자록에 따르면, ‘강도에 건너갈 당시, 김경징의 어머니와 아내는 각각 덮개 있는 가마에 태우고 계집종은 전모를 씌웠으며, 짐바리가 50여 바리나 되었는데 경기도의 인부와 말이 거의 다 동원되었다.’고 한다.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면, 유백증도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려 비판한 듯한데, 이에 대해 이경증이 “국가의 짐바리가 5,60필 미만인데, 김류가 어디서 그만큼의 짐바리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김경징의 모친은 병환 때문에 가교(駕轎)가 필요했을 테니, 가마를 타고 갔다는 말은 맞을 것이나, 그 외에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라고 반박하는 내용이 있다.[69] 실록에는 ‘피난 당시 세 집(김경징, 이민구, 홍명일)의 짐이 10리에 잇달고 그 집 사람의 행색에 매우 화사하여, 피난민들이 모두 분하여 욕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이를 종합하면, 기록이 실제보다 부풀려졌음을 감안하더라도, 김류 가문의 피난 행렬이 다른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거창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전략) 김경징은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도에 호종했던 영의정 김류(金瑬)의 아들인데, 통진(通津) 나루터에 도착해서는 가속들만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으므로 빈궁과 원손은 이틀 동안이나 통진 나루에서 추위에 떨어야 하였다. 『강도일기』의 기록은 이러하다.

:나(어한명 자신)는 곧장 그 사람을 따라가 그(김경징)를 만나 보았는데, 한참을 이야기했으나 나랏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하늘을 쳐다보고 휘파람을 부는가 하면 부채를 들고서 흔들며 말하기를, “무엇을 어찌하겠소, 무엇을 어찌하겠소?”라고만 할 뿐이었다. 조금 후 덕포 첨사(德浦僉使) 조집이 배를 타고 오자 그는 기쁜 얼굴로, “이 사람이 타고 온 배는 필시 튼튼할 것이니, 우리 가속을 태워 건넬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 (후략)
— 한국 문화사,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p.246~247(어한명의 강도일기)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중략) 당초 강도(江都)로 들어갔을 때에 먼저 제 집안 일행을 건너게 하고 묘사와 빈궁(嬪宮)은 나루에 사흘 동안 머물러 두어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내관(內官) 김인(金仁)이 분을 못 이겨 목메어 통곡하고 빈궁도 통곡하였으니, 이 사람은 전하의 죄인일 뿐더러 실로 종사의 죄인입니다. 또 영기(令旗)로 제 친한 사람만 건너게 하고는 사민(士民)들은 물에 빠지거나 사로 잡히게 하였으니, 통분하여 견딜 수 있겠습니까.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6월 21일 무오 1번째 기사
대사헌 유백증이 아뢰기를,

“(중략) 만약 빈궁이 3일 동안 건너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김경징을 효수(梟首)했다면 장신(張紳) 등이 어찌 숨었겠으며 강도(江都)가 어찌 함몰되었겠습니까. (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12월 7일(신축) 맑음
(전략)
묘사주와 여러 행차는 밤에 김포를 통과하여 사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강화도에 도달했다. 두 검찰 등은 먼저 자기 식솔들을 태워 보냈으나, 빈궁을 비롯한 여러 벼슬아치들 이하는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윤전과 송시영이 해안가에 놓인 배 한 척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 배를 타야겠소.”라고 하자, 이민구가 말하기를, “이 배에 태울 사람들은 바로 나의 식솔들이오. 내가 배를 구했으니 우리 식솔들이 건넌 이후에야 다 같이 건널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대개 검찰은 행차들을 호위하는 것이 임무일진댄 종묘사직의 신주, 빈궁 및 여러 호종신들이 거의 건넌 이후에야 자신의 식솔들을 건너게 해야 할 것인데도, 대소와 선후에 어긋나게 행동함은 말할 것도 없었으니 대체로 황급하여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재주와 식견이 따르지 못한 데서도 나온 것이었다. 송시영이 나(윤선거)를 위해 분개하여 말했던 것이다. (후략)
— 노서유고, 기강도사(記江都事)

[70]

(전략)
○ 경징이 배를 모아서 그의 가속과 절친한 친구를 먼저 건너가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함께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때문에 사족 남녀(士族男女)가 수십 리나 뻗쳐 있었으며, 심지어 빈궁 일행이 나루에 도착해도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한 채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었다. 빈궁이 가마 안에서 친히 소리 질러 급히 부르기를 “김경징아, 김경징아, 네가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하니, 장신(張紳)이 듣고 경징에게 말하여 비로소 배로 건너도록 하였다. 그때 사녀(士女)들이 온 언덕과 들에 퍼져서 구해 달라고 울부짖다가 적의 기병이 갑자기 들이닥치니 순식간에 거의 다 차이고 밟혀 혹은 끌려가고 혹은 바닷물에 빠져 죽어,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았으니 참혹함이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후략)
— 연려실기술 제26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 강화도[江都]가 함락되다

강도에서의 만행[편집 | 원본 편집]

강도로 건너온 이후, 김경징은 검찰사의 업무에서 아예 손을 놓았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안에 틀어박힌 채 서류 쪼가리나 만지는 것뿐이었다. 술에 취해 주정을 일삼을 때도 있었다. 피난 온 선비들이 그 모습을 보고 분통이 터져, ‘옥지(玉趾)가 성을 순찰하고 유신(儒臣)이 성을 지키니 와신상담해야지 술 마실 때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글을 지어 보냈지만,[71] 김경징는 이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김경징이 믿고 의지하는 인물은 검찰부사 이민구뿐이었다. 어떤 일이든 이민구에게 먼저 물어보고 실행에 옮겼다. 때문에 사람들이 이민구를 김경징의 유모(乳母)라고 불렀다.

당시 강화도의 군권은 강도유수 장신이 쥐고 있었다. 검찰사는 실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경징은 장신에게 명령을 내리며 자신이 상관인 양 행세했다. 검찰사의 권한을 이용하여, 장신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등 내분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 소식은 남한산성에도 전해졌고, 인조는 ‘강화도의 수비는 장신에게 일임한다.’는 교지를 내려 둘의 서열을 정리했다.

그러던 중,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前)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은 “강화도에는 검찰사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하니, 검찰 부사를 호서로 보내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고 의병들을 끌어 모으게 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민구는 가지 않으려 했다. 김경징은 이민구의 편을 들었고, 김상용과 강하게 다투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때 김상용이 “네 아버지가 임금을 받들고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있다. 민구가 너의 유모 노릇한 지가 오래다. 니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이러느냐.”고 꾸짖으니, 김경징이 화가 나서 도장을 땅에 던지며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하고 외쳤다고 한다. 이시직의 행장에도 ‘김경징이 술에 취해 사납게 날뛰며 원로대신을 능멸했다.’는 내용이 있고, 김상용의 신도비명에서도 ‘김상용이 이민구를 호서로 보내려 했으나, 김경징이 대들고 헐뜯으며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윤선거의 기강도사에서도, ‘호서로 가라는 명령을 받자, 이민구는 가기 싫어했다. 김경징은 대신(大臣)이 민구를 보내지 않게 하려 했으나, 대신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구는 어쩔 수 없이 갈 채비를 했다.’라는 내용이 있다.[72][73]

(전략) 19일에서부터 21일까지 3일 동안을 계속 분비국(分備局)에 가서 보니, 김경징(金慶徵)과 이민구(李敏求)가 담당하며 일 처리를 하고 있었는데, 별로 하는 일은 없고 단지 문서를 수응(酬應)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후략)
— 포저집, 병정기사(丙丁記事)
(전략)
○ 경징이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하려 하자 장신이 이르기를, “나는 지휘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하여 서로 배척하고 알력이 심하였다. 경징은 (중략) 태평스럽게 방종하여 날마다 술만 마셔 대며 주정을 일삼았다. (중략)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큰 소리 치기를, “아버지는 체찰사요 아들은 검찰사니 국가의 큰일을 처리할 자가 우리 집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하였다. 별좌 권순장(權順長)과 생원 김익겸(金益兼)과 진사 심희세(沈熙世)와 윤선거(尹宣擧) (《잡기(雜記)》 및 《병자록(丙子錄)》에는 권순장과 김익겸 두 사람으로 되어 있고, 《강도록(江都錄)》에는 심희세와 윤선거로 되어 있다.) 등이 글을 올려 책망하기를, “와신상담(臥薪嘗膽)이 지금 할 일이요, 술을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였더니, 경징 등이 더욱 노여움을 드러냈다.
○ 혹 전해 오는 말에 충청 감사가 적진에서 죽었다 하므로, 대신(大臣)이 임시방편으로 이민구(李敏求)를 대신으로 임명하고, 이어 삼남(三南)의 흩어지고 도망친 군졸을 빨리 모아서 싸움을 독려하도록 명하였다. (중략) 경징도 허락하지 않았다. 김상용(金尙容)이 경징을 불러서 준엄히 꾸짖기를, “너의 아버지는 임금을 받들고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위기가 코앞에 닥쳐 있는데, 네가 설령 임금의 욕됨은 걱정하지 않을지라도 홀로 너의 늙은 아버지마저 생각하지 않느냐. 삼남의 군졸을 독려하는 것이 대단히 급한 일인데 네가 어찌 차마 저지하는가. 민구가 너의 유모 노릇한 지가 오래이다. 너의 나이 지금 얼마인데 어찌 감히 이러느냐.” 하였다. 경징이 노하여 나와 도장을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하였다.(중략)
(후략)
— 연려실기술 제26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 강화도[江都]가 함락되다
(전략) 강도의 제장들은 (중략) ‘천연적인 참호인 강이 여기 있는데 북쪽 군대가 어떻게 날아서 건너온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술에 취해 날을 보내는 이도 있었으므로, 진사 김익겸(金益兼)ㆍ윤선거(尹宣擧) 등은 글을 올려 이를 풍자하였는데, 그 가운데 ‘와신상담할 이때에 술잔이라니[嘗薪在卽 杯盤非詩]’란 말이 있었다. (후략)
— 대동야승, 일사기문
지평 심대부(沈大孚)가 아뢰기를,

“(중략) 이민구(李敏求)의 명망과 재주 그리고 조정의 신임이 어찌 김경징(金慶徵)이 견줄 바이겠습니까. 그런데 ‘유모(乳母)’[74]라고 불렸다고 들었을 뿐, 한마디 말을 해서 김경징의 행위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보면, 《춘추(春秋)》의 법으로 단죄(斷罪)할 때 이민구는 마땅히 수악(首惡)이 될 것이니, (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16년 무인(1638) 3월 22일(을유) 맑음
(전략) 상헌이 아뢰기를,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이 그의 형에게 글을 보내기를 ‘본부의 방비를 배가해서 엄히 단속하고 있는데, 제지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답니다. 장신은 일처리가 빈틈없고 이미 오래도록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신임 검찰사가 절제하려 한다면, 과연 제지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방수(防守)하는 일은 장신에게 전담시켰으니, 다른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도록 전령하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3번째 기사
(전략) 며칠 뒤에 무인 최상원(崔尙元)이 남한산성으로부터 밀랍으로 봉한 글을 가지고 도착하였습니다. 유지(有旨)에 이르기를 “수륙(水陸)의 방비를 모두 유수 장신(張紳)에게 위임하니 간섭하는 문제가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틀 뒤에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승려가 또 남한산성으로부터 왔는데 유지의 내용은 이전과 같았습니다. (중략) 김경징과 장신이 많은 말로 옥신각신 다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중략) 간혹 군교(軍校)들이 와서 적들의 실상을 보고하고 동료들이 더욱 삼엄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권하는 말을 했지만, 문득 지나친 걱정이며 쓸데없이 겁을 내는 것이라고 여긴 것은 그의 지기가 대단히 사나워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니, 이것도 천운(天運)입니다. (후략)
— 동주집, 답정판서서
선부군(先府君)의 휘는 시직(時稷)이고 자는 성유(聖兪)이며 성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중략) 김경징(金慶徵), 이민구(李敏求) 등이 검찰사(檢察使)로 강도의 일을 관장하고 있으면서, 군대를 징발하여 수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날마다 술에 취해 방자하고 사납게 날뛰며 원로대신까지도 능멸하니, (후략)
— 동춘당집 제20권, 통훈대부(通訓大夫) 봉상시 정(奉常寺正) 죽창(竹窓) 이공(李公) 행장
나(김상헌)의 큰형님이신 우의정공(右議政公)은 휘는 상용(尙容)이고, 자는 경택(景擇)이며, 자호는 선원(仙源)이고, 또 다른 호는 풍계(楓溪)이다. (중략) 검찰사와 유수(留守) 장신(張紳) 등은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음을 믿고 군무(軍務)를 등한시한 채 제멋대로 하면서 제 한 몸만 편히 하고자 했다. 이에 공(김상용)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말하기를, “행재소가 포위되어 있은 지가 오래되어 위급한 사태가 조석 간에 있게 되었다. 혹자는 정세규(鄭世䂓)가 패하여 죽어 호서군에 군사(軍事)를 주관할 자가 없다고 한다. 강화도에는 검찰사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하니, 부사(副使)는 마땅히 호서로 가서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고 의병들을 끌어 모으며, 호남의 병사 중에 후방에 처져 있는 자들을 독려하여 위급한 지경에 빠진 군부(君父)에게 달려 나가야 한다. 이 일은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이민구가 눈물을 흘리며 가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또 말하기를, “남한산성과 소식이 불통되었으니 큰상을 내걸고 군사를 뽑아 안부를 묻는 관원으로 삼아 보낼 경우 열 명을 가게 하면 반드시 한 명은 도달할 것이다. 신하 된 자의 의리에 있어서 어찌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김경징 등은 대들어 헐뜯으면서 끝내 시행하지 않았다. (후략)
— 청음집 제26권, 백씨(伯氏)인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선원(仙源) 선생의 신도비명

강화도 방어전[편집 | 원본 편집]

1637년(인조 15년) 1월 21일, 청군은 민가의 집을 헐어 만든 뗏목으로, 염하수로를 건너 갑곶 나루로 상륙하려 했다. 적습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을 때, 누군가 "뿔피리를 불어 군사를 집결시키자." 하였지만, 김경징은 "사람들이 동요할 것이다."라며 그 의견을 묵살하고, 성 안의 무사들 7~80명만을 동원했다. 갑곶에 모인 재신들은 청군의 홍이포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자 기가 꺾였고, 김경징과 이민구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풀이 죽어 창고 처마 아래 주저앉았다.

충청 수사 강진흔이 휘하의 수군을 이끌고 적과 맞서 싸우는 가운데, 22일 새벽 강도유수 장신의 강화도 함대도 염하수로에 당도했다. 이를 본 검찰사 김경징이 언덕 위에서 깃발을 흔들며 장신에게 싸움을 재촉했다. 그러나 썰물로 인해 수심이 얕아지던 중이었기에, 장신의 판옥선단은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대로 뱃머리를 돌려 퇴각하고 말았다. 조선 수군이 흩어지자, 청군은 배를 갑곶으로 전진시켰다. 곧 뗏목 하나가 정박했고, 대여섯 명이 하선하며 화살을 쏘아댔다.

청군이 상륙하자, 언덕 위의 조선군은 순식간에 진영이 와해되었다. 김경징, 이민구를 비롯하여 모든 장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황선신(黃善身)을 비롯한 몇몇 장수들이 소수의 병력과 함께 분투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전멸하고 말았다. 청군은 기세를 몰아 진격하여 강화성까지 함락하였다. 전투가 끝나자 청군은 약탈을 시작했고, 수많은 양민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 자결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개중에는 김경징의 모친과 아내도 있었다. 김경징은 자신의 가솔들도 내버리고 도망쳤던 것이다.[75]

(전략)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76]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강진흔·김경징·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중략)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 패배하여 죽었다. (중략) 노왕이 도로 강을 건너갔는데, 몽병(蒙兵)[77]이 난을 일으켜 거의 남김없이 불지르고 파헤치며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8번째 기사
(전략) 이른 아침에 김경징(金慶徵)이 군병을 이끌고 갑곶(甲串)으로 나가기에, 내(조익)가 “나도 가겠다.”라고 하면서 차중철만을 데리고 따라 나갔다. (중략)
성을 나와 1, 2리쯤 지났을 적에 포성(炮聲)이 진동하는 것이 들렸다. 갑곶에 이를 무렵에 주먹만 한 크기의 포환(砲丸)이 계속해서 날아오자 사람들 모두가 풀이 죽었다. 갑곶의 둔덕 위에 이르러서 바라다보니, 나루의 동편에는 모여 있는 적의 무리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고개 위에 주둔한 병력은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작은 배들이 마치 우반(隅盤)[78]의 모양과 같았으며 크기도 우반을 겨우 능가할 정도였는데, 깃발을 달고서 나룻가에 떠 있는 배들의 숫자도 겨우 30여 척 정도에 불과하였다. 한편 나루의 북쪽을 바라다보니, 아군의 전선(戰船) 4, 5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리고 사시(巳時)쯤 되었을 때에 판옥(板屋)의 대선(大船)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였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사람들 모두가 이것은 필시 남방의 전선(戰船)이 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들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그 배들이 나루를 수백 보쯤 앞에 두고서 모두 정지한 채 전진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바로 장신이 거느린 경기(京畿)의 전선들이었다.
변보(變報)를 처음 들었을 때에 어떤 이가 뿔피리를 불어서 군사들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김경징은 그렇게 할 경우에 인심을 경동(驚動)시킬 것이라고 말하고는, 단지 성 안의 무사들만을 모아서 데리고 가려고 하였다. 그 숫자는 겨우 7, 8십 명에 불과하였는데, (중략) 이때 검찰(檢察) 등 여러 사람들은 모두 창고의 처마 아래에 앉아 있었다. 오시(午時)쯤 되었을 적에 적의 선박이 차례로 건너오기 시작하자, 검찰 등이 언덕 위에서 깃발을 흔들며 주사(舟師)의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주사는 끝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적의 선박이 중류(中流)를 막 지나자마자 아군의 조총(鳥銃)이 일제히 불을 뿜었으나 모두 거리가 미치지 못한 채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발사하지 못하는 사이에 적의 선박 한 척이 먼저 도착하여 정박하였는데, 그 배에 탄 자가 겨우 5, 6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건만 그들이 배에서 내려서 나오자 아군은 어지럽게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계속해서 또 두세 척의 배가 정박하였는데, 아군이 화살에 맞아 혹 즉사(卽死)하자 모두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후략)
— 포저집, 병정기사(丙丁記事)
(전략) 정월 21일에 이르러 오랑캐들이 뭍으로부터 배를 끌고 강화도 동쪽 해안에 도착하니 (중략) 사시(巳時) 쯤 되었을 때 적들이 대포를 이용해 서쪽 해안을 연이어 폭격하니 흙과 돌이 부서졌습니다. 작은 배 수십 척이 앞 바다에 떠서 장차 건너오려는 형세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대군께서 도착하셨고, 재상 김상용(金尙容)과 판서 이상길(李尙吉)과 판서 조익(趙翼)과 동지 여이징(呂爾徵)과 참의 유성증(兪省曾)과 헌납 이일상(李一相)과 전적 이행진(李行進) 등 10여 명도 이어서 도착하였습니다. 충청도의 전선(戰船) 7척은 급류에 정박해서 갑자기 제어할 수 없었고, 본부(本府)의 수군 27척은 광성진에서 북쪽으로 올라왔는데 조수가 밀려나가자 전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때에 본부의 중군 황선신(黃善身)이 광성진에서 비로소 육군 113명을 이끌고 와서 개펄에서 저지하며 멀리 돌아서 왔습니다. (중략) 적들은 (중략) 황선신의 군대와 마주쳤는데 황선신의 군대는 패하고 말았습니다. (후략)
— 동주집, 답정판서서(答鄭判書書)
(전략)
○ 김류의(金瑬)의 아내 유씨(柳氏)(근(根)의 딸)ㆍ 경징의 아내 박씨(효성(孝誠)의 딸)ㆍ 진표(震標)의 아내 정씨(백창(百昌)의 딸) 및 김류의 첩 신씨ㆍ경징의 첩 권씨가 같은 날에 목을 매어 죽었는데, 아울러 정려하였다. 《강화지》
○ 그때 경징과 장신의 어머니가 모두 성 안에 있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자기 어머니를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그 어머니가 마침내 적중에서 죽었다. 경징의 아들 진표는 그 아내를 다그쳐 자진하게 하고, 그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성 가까이 왔으니 죽지 않으면 욕을 볼 것입니다.” 하니, 두 부인이 이어서 자결하고 일가친척의 부인으로서 같이 있던 자들도 모두 죽었는데, 진표는 홀로 죽지 않았다.
○ 일찍이 경징의 아내 박씨가 경징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주 간하니, 경징이 노하여 말하기를, “여자가 무엇을 아느냐.” 하자, 박씨는 울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깨치고 집이 망하면 또한 여자라 하여 스스로 모면할 수 있는가.” 하더니, 과연 이때에 이르러 한 집안의 부녀가 모두 목을 매어 죽었다. 혹자는, “진표가 다그쳐 죽게 하였다.”고 일컬었다. 대개 인심이 경징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그 어머니와 아내의 절개까지 아울러 깎아 없애려고 한 것일 뿐이다. 정씨는 백창의 딸이니, 그 친정의 혈통을 증험해 보더라도 남에게 닥달을 받아 죽을 사람은 더욱이 아니다. 《강화지》
(후략)
— 연려실기술 제26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 순절한 부인들

최후[편집 | 원본 편집]

병자호란 이후, 김경징의 행각은 조정에 고스란히 알려졌다. 인조는 김류의 공을 생각하여, 김경징을 귀양 보내는 선에서 상황을 마무리 짓고자 했다. 그러나 조정의 신료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김경징을 처형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79] 그들의 극에 달한 분노는, 임금인 인조도 권신인 김류도 감히 억누를 수 없었다.

결국 1637년(인조 15년) 9월 21일, 김경징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80] 인조는 김류가 안쓰러웠는지, 김경징을 예장(禮葬)[81]할 것을 명령했지만, 예조에서는 “장신(張紳)을 사사할 적은 물론이고,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82]의 상이 있었을 적에도, 예장을 하지 않았다. 김경징만 예장하는 것은 전례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여 시행되지 못했다.

김경징의 존재는 김류의 큰 오점으로 남았다. 오죽하면 실록에 실린 김류의 졸기에서도, 아들을 강도검찰사로 천거한 것을 들어 김류를 비판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한 김류의 신도비명에 적힌 김경징에 대한 기록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되어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는 한 줄 정도의 분량이 전부이다. 강도검찰사로 있었던 때를 비롯한 다른 행적에 대해서는 어떤 서술도 없다.[83] 김류의 부인에 대해, ‘시를 지어 바치니, 시아버지(김여물)가 크게 기뻐하였다.’, ‘인조반정 때 김류가 계책을 꾸미는 데 도움을 주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청군이 들이닥쳐, 사람들이 어찌할지 물어 오자, 칼을 가리키며 “저것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더니 자결했다.’ 등의 기록을 남기며 찬양한 것과는 심히 대조적이다.# 결국 김경징은 부친과 가문을 등에 업고 행패를 부리다가, 부친과 가문이 등을 돌려 외면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만 셈이다.

행 대사헌 한여직(韓汝溭), 행 대사간 김수현(金壽賢), 집의 채유후(蔡裕後)가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김경징(金慶徵) 등에 대해 사형(死刑)을 감하여 조율(照律)하라는 하교를 들었는데,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무슨 용서할 만한 도리가 있다고 그들의 사형을 용서하십니까? 혹시 이 사람들의 죄상을 몰라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비록 죽일 만한 죄는 있지만 죽일 수 없어서입니까? 김경징은 비록 그의 검찰(檢察)하는 임무가 적을 방어하는 일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만, 종묘사직의 신주와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이 모두 병화(兵禍)에 빠졌는데도 일찍이 털끝만큼도 돌보며 염려하는 뜻이 없이 혼자서만 배를 타고 도망하느라 겨를이 없었으니, 원손이 다행스럽게 화를 모면한 것은 실로 하늘의 도움입니다. 그렇다면 김경징의 검찰하는 책임이 장차 어디로 귀결되겠습니까? 그의 죄는 여러 장수들이 군율을 어긴 것과 비교하여 조금도 차등이 없습니다. (중략) 극형으로 복주(伏誅)하는 형률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종묘사직의 영혼을 위로하며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겠습니까. (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2월 22일(임진) 맑음
대사헌 이식, 지평 목행선(睦行善)이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원수(元帥)와 강도(江都)의 사신(使臣)[84]은 임금을 버리고 군율을 어긴 죄를 결단코 용서할 수 없으니 복주(伏誅)시키되 부대시(不待時)[85]에 처해야 합니다. 그런데 합계가 다시 일어났는데도 허락하시는 유음이 아직까지 묘연하니 신들은 삼가 의혹이 듭니다. (중략) 명을 받들고 강도에 간 신하의 경우는 주사(舟師) 대장과 비록 직분에 차별이 있다 하지만 검찰(檢察)의 임무를 받고서도 당초 협력해서 수어할 계책이 없었고 난을 당해 달아나 피하느라 종묘사직과 목숨을 함께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으니 (중략) 김경징(金慶徵), (중략) 등을 모두 율문에 따라 정죄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1일(무술) 맑음
(전략) 답하기를,

“(중략) 김경징의 경우는 영상에게는 단지 아들 하나와 손자 하나뿐인데 그 손자는 병들었다고 한다. 나는 차마 그 큰 공로를 잊고 법률을 적용하여 그 독자를 처형함으로써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지는 못하겠다. 경들은 부디 이 뜻을 받아들이고 모두 강경하게 고집하지 말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5일(임인) 비
대사헌 이식, 장령 황호, 헌납 조수익, 정언 최계훈이 아뢰기를,

“김자점, 김경징 등이 모두 중임을 받고는 군율을 어기고 일을 그르쳐 이처럼 국가를 패망에 빠뜨렸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책임을 때우기에 부족한데 오히려 유찬(流竄)에 그쳤으니 인심이 모두 분격하고 국론이 그치지 않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중략) 지금 두 신하가 범한 죄는 국가에 관계되어 성상께서 법을 굽혀 인(仁)을 베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당연히 법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6일(계묘) 맑음
헌납 권심(權淰)이 아뢰기를,

“신이 김자점(金自點) 등이 군율을 어긴 죄에 대해 형벌을 청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유음(兪音)이 아직까지 내려지지 않아 형전(刑典)이 거행되지 않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함께 분해하니, 신은 실로 성상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중략) 김경징(金慶徵)은 이미 검찰(檢察)의 직임을 받고서 수어(守禦)하는 대비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적병(敵兵)이 강에 다다랐을 때 자신이 나루터에 있으면서 무리를 독려하여 저항해 대적할 계책을 행하지 않고서 지레 도주하여 묘사(廟社)와 빈궁(嬪宮)이 일시에 함몰되게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의 도리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바이고 나라의 법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바입니다. 어찌 훈귀(勳貴)라고 하여 너그러이 용서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중략) 모두 형률에 따라 정죄(定罪)하도록 명하소서. (중략)”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25일(임술) 맑음
비로소 김경징(金慶徵)을 사사하고 강진흔(姜晋昕)·변이척(邊以惕)을 참형에 처하였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9월 21일 병술 2번째 기사
김육에게 전교하기를,

“김경징(金慶徵)이 전후로 저지른 죄가 지극히 무거우므로 부득이 국법을 적용하기는 했지만, 지난날 그가 세운 공로와 그 아비의 심정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전일의 공로를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표하게 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9월 21일(병술) 맑음
상이 하교하기를,

"김경징은 전후의 죄악이 매우 무거우므로 마지못하여 법을 썼으나, 전일의 공로와 그 아비의 심정을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흐른다. 해조를 시켜 예장(禮葬)하여 내가 전의 공로를 잊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내라."

하자, 예조가 아뢰기를,

"상께서 이렇게 하교하시니 보고 듣는 모든 자가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장신(張紳)을 사사(賜死)할 때에도 처음에 예장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본조(本曹)에서는 난후(亂後)의 규례에 따라 관곽과 일꾼 양식 따위의 물건만을 주었으니, 이제도 달리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근래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9월 21일 병술 3번째 기사
또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

“- 첫머리 원문 빠짐 - 애당초 예장(禮葬)의 명이 있었지만 본조에서 난리 뒤에 만들어진 규례에 따라 - 원문 빠짐 - 등의 물건을 제급(題給)하였으니, 지금 다르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 인목왕후의 모친)의 상도 예장할 수 없다는 뜻으로 방금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김경징(金慶徵)만 예장하는 것은 근년의 규례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그렇다면 근년의 규례대로 하라.”

하였다.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9월 24일(기축) 맑음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조선사를 통틀어도 유례를 찾기 힘든 최악의 똥별.
살생에 거리낌이 없었던 잔혹한 인물
말과 행동이 달랐던 위선자
법의 밖에서 노는 존재가 나라를 어떤 식으로 말아먹는지 보여주는 실례

조선왕조 600년 역사를 샅샅이 훑어봐도, 이런 미친놈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말 답이 없다. 그와 맞먹을 만한 똥별은,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을 완전히 말아먹은 원균 밖에 없다. 그나마 원균은 권율에게는 찍 소리도 못했지만, 김경징은 인조가 가장 총애하던 권신인 김류를 아버지로 두고 있었던지라 무서울 게 없었다. 원균이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는 등 굴욕을 당하기도 했던 것과 달리, 김경징은 강화도가 함락되기 전까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았다. 원임대신이었던 김상용은 물론이고, 강화도의 실질 군권을 쥐고 있던 장신조차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조가 “원훈(元勳)의 외아들을 죽일 수 없다.”면서 유배형으로 봐주려 했을 정도였다.

김경징의 이런 패악질은, 그가 검찰사로 임명된 순간, 예정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앞서도 말했듯, 그의 아버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있던 김류였다. 광해군 대의 과거 부정 행위 논란에도 불구하고, 김경징은 아비의 위세 덕분에 곧바로 과거 최종 시험을 치르는 특혜를 받았다. 실록에서는 이를 두고 ‘유신의 처음에 행사의 구차함이 이처럼 심하므로 식자들은 공도가 행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고 비판했는데, 그 말대로 김경징은 언제나 아비의 권세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여,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런 인간이 전쟁이 터졌다고 정상적으로 행동할 리가 있나.

김경징은 단순히 성격이 건방진 정도를 넘어, 상당히 잔혹하고 무자비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애에서 특기할만한 점으로는, 장살과 관련된 경우가 유달리 많음을 들 수 있다. 이말질수 장살, 공조참판 재임 중의 군관 장살, 인록 장살, 끗정 장살까지, 무려 4건의 장살과 엮여있다. 물론 장살이 조선사에서 그리 드문 사건은 아니다. 그리고 이말질수의 국문은 폐세자의 도주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필요했으며, 인록의 국문은 김경징이 건의하긴 했지만 그가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두 건은 이야기가 다르다.

군관 장살 때 김경징이 취한 행동이라고는 고작 상소문을 올린 게 전부였다. 게다가 사헌부에서 그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여 관철시키자, 김경징은 대사헌 정엽의 사위였던 나만갑에게 앙심을 품었다. 이로 인해 나만갑은 매번 김류의 참소를 받아 파직되거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잘못했다는 상소문은 그저 인조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었을 뿐, 김경징은 반성하는 마음 따위는 전혀 없었던 셈이다.

또한 김경징의 고발에서 비롯된 끗정의 국문은, 사실 국법에 어긋난 처사였다. 양사의 간원들이 끗정의 국문을 반대한 것이나, 이 사건을 기록한 사관이 끗정을 동정하고 김류 가문을 비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김류와 김경징은 그녀의 국문을 강행했고, 결국 끗정은 장살 당했다. 김류 부자는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서도 주변의 눈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김경징이 악행만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미미하긴 했지만 업적도 있었고, 바람직한 언행을 보인 적도 있었다. 인조가 ‘궁가(宮家)의 면세를 철폐하자.’는 건의에 침묵하자, 김경징은 “이런 식으로 무시하기만 할 거면, 조언은 왜 구하는 거냐.”고 일침을 날렸다. 강화도로 파천하자고 건의하는 윤방에게는, "싸울 생각은 않고 도망칠 궁리만 하느냐."고 비판했는데, 이 말도 도덕적으로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문제는 행동이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 김경징은 남의 잘못을 추상같이 비판하면서도, 본인이 잘못을 저지르는 데는 거리낌이 없었고, 그에 대한 비판이 들어오면 무시하거나 오히려 앙심을 품었다. 그는 반정에 별 다른 공이 없는데도 2등공신으로 녹훈되었다. 곧바로 최종 시험을 치르는 편법으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런 특혜를 누리고도, 김경징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군관 장살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되자, 관련자인 나만갑에게 원한을 품었다. 싸우는 게 우선이라며 윤방을 면박하던 것이 무색하게,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검찰사로 임명되었다는 명분으로 강화도로 튀었다. 자신을 꾸짖는 김상용에게 역으로 대들며 성질을 부렸다. 이렇듯 김경징의 생애는 특혜, 비리, 폭력, 부정으로 얼룩져 있다. 그는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위선자였다.

그렇게 김류와 인조의 뒷배로 마음껏 활개치고 다니던 김경징은, 병자호란의 패배와 그 후의 조선 정세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내버리고 간 봉림대군과 세자빈 일행은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이로 인해 남한산성의 조선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항복했다.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체험해야 했으며, 전쟁 이후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청나라의 무자비한 수탈로 인해, 조선의 국력은 밑바닥을 찍게 되었다.

물론 인조 정권의 병폐와 병자호란의 패배를, 김경징의 존재로만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여기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경징의 존재는, 법의 통제를 벗어난 권력이 나라를 어떻게 망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실록의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실록에서는 김경징을 ‘미친 새끼(狂童)’, ‘집안 망칠 자식’ 등이라 지칭하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김경징이 나루터에 버리고 간 수많은 백성들이 청군에게 죽거나 붙잡혔고, 그가 내팽개치고 간 봉림대군과 세자빈 역시 포로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조선군의 사기가 꺾이게 되었고, 결국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면, 김경징은 가족친지의 원수이자 나라를 말아먹은 역적이었다. 평가가 혹독할 수밖에 없다.청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불세출의 명장

사실 병자호란 이전에도 김경징은 평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부친의 권세를 믿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한다.’였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강화도의 일이 아니었더라도, 김경징은 ‘애비 빽 믿고 나대는 양아치’ 정도로 역사에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전략) 경징이 세력을 믿고 교만 방자하니,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1권, 인조 13년 12월 2일 무인 1번째 기사
(전략) 사신은 논한다. 경징은 경박하고 교만하여 대사간에 적합하지 않은데, 대관들도 감히 탄핵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양하여 체직될 수 있게 하였다. 명기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5월 8일 신해 1번째 기사
비로소 김경징(金慶徵)을 사사하고 강진흔(姜晋昕)·변이척(邊以惕)을 참형에 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아아, 강도는 천연으로 이루어진 요새이다. 정묘년[86] 이후로 시설하여 보장(保障)으로 삼았다. 그 성곽을 수리하고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저축하여 사변이 있을 때에 임금이 머무를 곳으로 삼았으니, 묘당이 참으로 마땅한 사람을 가려서 맡겨 방어할 방도를 다해야 할 것인데, 김경징은 한낱 광동(狂童)일 뿐이었다. 글을 배우지 않아 아는 것이 없고 탐욕과 교만을 일삼으므로 길에 나가면 거리의 사람들이 비웃고 손가락질하는데, 김류(金瑬)는 사랑에 가리워 그 나쁜 점을 몰랐으나 사람들은 집안 망칠 자식이라 하였다. 이 때에 청나라 군사가 대거 우리나라로 들어와 신보를 들은 지 며칠 만에 이미 경기 고을에 이르렀으므로, 김류가 검찰사(檢察使) 두 사람을 내어 먼저 강도에 보내어 주사(舟師)를 정리하게 할 것을 의논하고 그 아들 김경징을 우의정 이홍주에게 힘써 천거하여 입계하게 하였는데, 이홍주의 마음은 그가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나 권세에 겁이 나 애써 따랐다.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삼았는데, 이민구는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아우이다. 평생에 시와 술로 자부하고 본디 실용(實用)의 재주가 없었다.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홍명일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의 아들이다. 데면데면하고 느려서 일할 줄 몰랐다. 세 사람이 명을 받고 나갈 때에 세 집의 짐이 10리에 잇달고 그 집 사람의 행색이 매우 화사하므로 서울에서 피란하는 자가 모두 분하여 욕하였다. 강도에 이르러서는 적병이 날아서 건널 형세가 아니라 하여 날마다 술에 취하는 것을 일삼으므로 피란한 사자(士子)들이 분통 터져 두어 줄의 글을 지어 검찰사의 막하에 보냈다. 그 글에 "옥지(玉趾)가 성을 순찰하고 유신(儒臣)이 성을 지키니 와신상담해야지 술 마실 때가 아니다." 하였으나, 이민구 등은 오히려 부끄러운 줄 몰랐다. 어느 날 적병이 갑곶진(甲串津)을 건너자 김경징은 늙은 어미를 버리고 배를 타고 달아나고, 이민구와 홍명일도 뒤따르고,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金震標)는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였다. 윤방(尹昉)은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성안에 있다가 미처 피해 나가지 못하고 열성(列聖)의 신주를 묻었는데, 청나라 군사에게 도굴되어 조종(祖宗)의 신주가 드디어 다 더럽혀졌다. 아,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누구의 죄인가.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김류는 부귀 때문에 이미 나라를 망치고 또 제 아들을 죽였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9월 21일 병술 2번째 기사

김경징 재평가?[편집 | 원본 편집]

나무위키의 ‘김경징 옹호론’ 항목에서는 ‘현재 전해 내려오는 김경징에 대한 이야기들은 신빙성이 의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김경징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 출처들은 전부 야사이며, 당시 강화도에 없었던 사람의 저서이거나, 혹은 김류 가문과 사이가 나쁜 사람의 저작이거나, 아니면 후대 사람이 과거의 소문을 받아 적어 탄생한 문헌이기 때문이다.
김경징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료로는 '병자록(丙子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병자록의 저자인 나만갑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있었다. 또한 그는 김류 가문과는 사이가 매우 험악했다. 때문에 병자록의 내용은 전적으로 신뢰하기 힘들다. 이긍익은 영조~정조 대의 인물이며, 그가 당시에 떠돌던 야사를 수집하여 만든 것이 바로 연려실기술이다. 즉, 연려실기술에 기술되어 있는 김경징에 대한 내용도 소문을 기반으로 한 것이니 만큼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 외에도 여러 야사들이 있지만, 작자미상(난리잡기, 강도록, 일사기문 등)이거나 남한산성에 있었던 인물이 저술한 것(동계집 연보 등)이 대부분이다.
  • 조선왕조실록의 내용대로라면, 공조참판 시절 군관을 장살한 것을 제외하면, 김경징의 행적은 병자호란 이전까지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상당히 모범적이었다. 사관들은 김경징을 가리켜 탐욕과 교만을 일삼았다고 평하지만,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실록에 따르면, 김경징은 김류와 함께 인조반정을 주도하며 큰 공을 세웠다. 폐세자의 도주를 조기에 간파했으며, 폐모론을 주장하고도 인조의 비호를 받으며 거들먹거리는 이들을 비판했다. 청나라가 침공할 조짐을 보이자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원로대신 윤방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나랏일에 대해 많은 간언을 했다. ‘김경징이 교만 방자했다.’는 내용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저질렀는지 명시된 것은 없다.
  • 강화도에서 있었던 인물들이 남긴 문헌에는 김경징의 악행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조익의 포저집에는 ‘김경징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나랏일을 걱정하며 강화도의 허술한 수비를 걱정했다.’고 되어 있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렸다는 기록은 없다.
  • 김경징이 맡은 임무는 강화도 수비가 아니었다. 강화도의 방어는 강도유수 장신과 그 휘하 장수들의 역할이었으며, 그들이 강화도의 조선군을 지휘했다. 김경징이 통솔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강화도 방어전에서 제대로 싸우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김경징이 패전의 책임을 지는 것은 부당한 처사였다.
인조 15년 2월 21일 신묘 1번째 기사에 ‘김경징은 비록 그의 검찰(檢察)하는 임무가 적을 방어하는 일과 관계는 없다 하더라도,’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통해 김경징의 임무는 강화도 방어와는 무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해당 기사에는 인조가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다.”고 발언하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다. 조익의 포저집에도 ‘강화도의 장정들이 전부 의병으로 차출되어, 병력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김경징은, 그에 대한 적대적인 여론을 배경으로 정치적 갈등이 불거지면서, 강도 함몰의 원흉으로 낙인찍혔다. 이때의 공론이 후대까지 이어지고, 이야기가 변질되어, 김경징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인조 집권기에, 서인은 공서파와 청서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즈음에는 주화파와 척화파가 대립했다. 김류 부자는 공서파였다.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김류는 주화론을 주장했으며, 전쟁 이후 척화파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벌을 내리려 했다. 그리하여 김류와 김경징은 척화파의 공세를 받게 되었다.
한편, 김경징은 왕족의 행차를 호위할 때 매우 무례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가 강화도로 건너갈 때 내버리고 간 백성들은, 청군의 공격을 받아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김경징은 청서파를 위시한 사대부들은 물론이고, 백성에게까지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척화파는, 이러한 세간의 적대심을 등에 업고, 김류를 비롯한 주화파를 공격했다. 그 정쟁은, ‘김경징이 왕족 일가를 제대로 호위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척화파의 승리로 끝났다. 그후 척화파는 강화도 함락의 모든 책임을 김경징에게 덮어씌웠다. 효종 치세 이래 척화파가 대대로 집권하면서, 김경징에 대한 복권(復權)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야사로 인해, 당시의 이야기에 살이 붙으면서, 오늘날 졸장 김경징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나무위키 옹호론의 이 같은 주장은 잘못되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이어질 항목에서 후술한다.

김경징 관련 기록의 신빙성[편집 | 원본 편집]

우선 첫 번째 주장부터 살펴보자. 나무위키의 옹호론에서는, ‘김경징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내용들은 대부분 야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나만갑은 김류 부자와 사이가 나쁘며,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없었으므로, 그의 저작인 병자록의 내용도 믿을 수 없다.’고 서술하였다.

실제로 병자록의 저자 나만갑은 김류 부자와 사이가 나빴다. 따라서 병자록에 한해, 옹호론의 주장은 이치에 맞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연려실기술의 경우는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연려실기술은 여러 야사들을 모아 만들어졌다. 개중에는 병자호란을 직접 보고 겪은 이들이 남긴 저작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그 저작물들은 참조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그래봤자 야사일 뿐이니, 실록이나 여타 공신력 있는 사료와 내용이 상이하다면, 당연히 연려실기술의 내용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말인즉슨, 실록 등의 관찬 사서를 중심으로 살피되, 당대의 인물들이 남긴 저작을 참고하여 김경징을 평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김경징에 대한 기록들을 훑어보면, ‘김경징에 대해 알려져 있는 일반적인 이야기들은 대부분 왜곡된 것이다.’라는 말은 매우 납득하기 힘듬을 알 수 있다.

실록에는 강화도 방어전에 대한 내용이 남아있다. 당장 바로 위의 ‘실록의 평가’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매일같이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고, 선비들이 분통이 터져 지금이 술이나 마실 때냐는 글을 지어 검찰사에게 보냈다.’는 내용이 실록에 분명하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김경징은 강화도에서 술을 마시며 일을 게을리 했다.’는 야사의 기록은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강화도에 없었던 사람의 저작은 믿을 수 없다.’는 말 역시 듣기는 그럴싸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강화도 방어전 이후, 청군의 약탈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섬의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다. 봉림대군과 세자빈, 윤방, 조익, 김경징, 이민구 등이 살아남았고,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섬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또한 실록에 따르면, 1637년(인조 15년) 1월 26일 최명길 등이 청군의 진영에 갔다가, 윤방·한흥일의 장계 및 봉림대군이 손수 쓴 서찰을 가지고 남한산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성 안의 사람들도 강화도의 일을 전해 들었다. 게다가 병자호란 이후 의금부에서 직접 김경징 등을 심문하여 강화도 방어전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였다. 한 마디로, 강화도에서 김경징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고, 조정에서는 그들을 통해 당시 강화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재야의 사람들 혹은 후대의 사람들이 남긴 저작은 몰라도, 당시 조정에 몸담고 있던 이들의 저서는 신뢰할 가치가 있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도 마찬가지.

홍서봉·최명길·김신국이 오랑캐 진영에 가서 (중략) 용골대가 (중략) 윤방·한흥일의 장계와 대군(大君)의 수서(手書)를 전해 주었다. 이에 처음으로 강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성 안의 사람들이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6일 병인 2번째 기사
또 의금부의 말로 아뢰기를,

“‘김경징(金慶徵), 이민구(李敏求), 장신(張紳), 신경원(申景瑗), 강진흔(姜晉昕)을 모두 율문에 의거하여 정죄하도록 명하소서.’라는 일로 합계(合啓)하니, ‘아뢴 대로 하라. 신경원 등이 수비하던 곳을 김경징과 이민구에게 물어보고 처치하라.’고 답하여 전교하셨습니다. 김경징에게 물어보니 ‘경기 수사 신경원은 분사(分司) 대신의 분부로 교동(喬桐) 북진(北津)에서 파수하였고 공청 수사 강진흔은 유수 장신의 분부로 연미정(燕尾亭)에서 파수하였습니다. - 이하 원문 빠짐 -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2월 17일(정해) 맑음

만약 정말로 김경징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정황이 있다면, 그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기껏 해봐야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가 가족들에게 자결을 강요했다는 이야기는 거짓일 것이다.’ 정도가 전부다. 그 외에, 최명길이 인조에게 김경징을 살려줄 것을 청하는 승정원일기의 기록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최명길은 “김경징이 죽을 죄를 지은 것은 맞다. 하지만 외아들이 죽는다면, 김류도 상심하여 죽고 말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동정론에 의지하여 김경징을 구명할 뿐이다.

(전략) 최명길이 아뢰기를,

“(중략) 이번의 처사는 진실로 좋지 않은 부분이 있고 또 그 자식이 매우 불초하니 나라 사람들이 누군들 김경징이 죽어야 마땅하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김류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김경징의 부당함은 응당 군율에 처해야 합니다. 빈궁(嬪宮)이 행차할 때에 먼저 그의 처와 어미를 건너도록 했는데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중략) 신이 김경징을 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김류를 장차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중략) 최명길이 일어나 절을 하고 울며 아뢰기를,

“김류가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김류가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하였다. (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7월 7일(계유) 아침에 비 오고 저녁에 맑음

그리고 위의 항목에서 이미 말했지만, 김류의 묘비명이나 신도비명에 등장하는 김경징에 대한 내용은, ‘문과에 급제하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정도가 전부이다.[87] 김류를 기리는 기록인 만큼, 그의 아들인 김경징에 대해 유리한 내용을 써놓았을 법도 한데, 아예 행적이 통째로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김류의 부인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를 제시하며 칭송한 것[88]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김경징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진실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근거로 볼 수 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을 정도의 잘못을 저질렀기에, 가문에서조차 그를 변호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영의정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문충공(文忠公) 김공(金公) 묘지명,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공(金公) 신도비명)

정리하면, 현전(現傳)하는 김경징의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강화도 방어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으며, 인조 조정은 그들을 통해 당시의 일을 명확히 파악하였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내용은 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니 신빙성이 있으며, 이는 당시 조정에 있었던 사람들이 남긴 저작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리고 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 속 김경징에 대한 서술은 대동소이하다. 김류의 묘비명 같은 김경징에게 유리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기록에서조차, 강화도의 일은 누락되어 있다. 그러므로 병자록의 내용을 부정하더라도, 그리고 야사의 내용에 과장된 부분이 있음을 고려하더라도, ‘술을 마시며 경계를 게을리 했다.’, ‘군권이 탐나 장신과 다투었다.’ 등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는 진실이라 보는 것이 합당하다.

김경징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편집 | 원본 편집]

2번째 주장을 살펴보자. 나무위키의 옹호론에서는, ‘김경징의 관직 생활은 병자호란 이전까지는 비교적 순탄했다.’고 되어 있으며, 그 근거로 그의 여러 행적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 서술은 틀렸거나 실제보다 과장되었다.

  • 김경징은 김류와 함께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렇지 않다. 위의 ‘반정공신으로 녹훈되다’ 항목에서 서술했듯이, 당시 김경징의 2등공신 책봉에는 논란이 많았다. 공신의 자제들 중에서 공적이 분명하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들은 이시백 형제뿐이었기 때문이다. 공신 녹훈 당시, 김경징의 이름은 이경립의 앞에 있었는데, 후일 이귀는 이에 대해 “이경립은 부적절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괄의 반란군에 가담한 것이다.”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귀 역시 친구 유순익의 녹훈을 관철시켰고, 김자점도 자신의 아들 김련을 공신으로 책봉하게 했다. 그러나 유순익과 김련은 3등공신인 데 반해, 김경징은 2등공신이었다. 그것도 이괄 바로 다음에 이름이 놓였다. 실제로 공적이 있는 이시백 형제의 이름보다 앞에 자리 했다. 요약하면, 김경징은 반정에서 별 다른 공이 없었음에도,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2등공신에 두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 폐세자의 도주를 조기에 간파하여 이를 막았는가?
그런 적 없다. 위의 ‘이말질수를 국문하다’ 항목에서 서술했듯이, 폐세자의 도주를 막은 인물은 정병(正兵) 최득룡(崔得龍)과 충순위(忠順衛) 김준남(金俊男)이다. 김경징이 이말질수를 국문한 시점은 도주 사건이 있은 후였다. 김경징은 사건의 전말을 캐는 데 일부 도움을 줬을 뿐, 폐세자의 도주를 막은 적은 없다.
  • 폐모론자들을 비판했다?
이건 사실이다. 위의 ‘폐모 관련자 명단을 양사와 전조에 전달할 것을 주장하다’ 항목에서 서술했듯이, 김경징은 폐모론에 참여한 전적이 있는 이들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벼슬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그리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은 아니다. 인조반정의 명분, 그러니까 광해군 폐위의 근거는 폐모살제였다. 인조 치세에서 폐모론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으로 조금도 위험할 것 없는 발언이었다.
오히려 이때 인조는 “사람들의 불안감만 키울 뿐이다.”라고 비판하며 김경징의 건의를 기각했다. 반정이 성공하고 12년의 세월이 지났다. 내부 단속은 이미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폐모론을 운운하며 벼슬길을 끊으라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인조 입장에선 어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리하면, 폐모론자들을 비판한 것은 맞지만, 이걸 두고 ‘폐모론을 주장해놓고 인조의 비호를 받으며 떵떵거리는 이들을 비판했다.’라고 말하는 건 과장된 표현이다. 인조의 비호를 받으며 어깨에 힘주고 다닌 인물은 김류와 김경징이었다.
  • 청나라가 침공할 조짐을 보이자 도망칠 생각부터 하던 윤방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것도 사실이다. 위의 ‘윤방을 공격하다’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윤방이 “청나라가 쳐들어 올 것 같으니, 강화도로 피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김경징은 “어떻게 방어할지를 궁리해야지, 도망칠 생각부터 먼저 하느냐.”고 비판했다.
김경징의 발언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적이 쳐들어오면, 왕은 멀리 도망친다.’는 작전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보기 좋은 행동은 아니니까. 하지만 강화도로 대피하자는 발언이 면전에서 구박을 받아야 할 만큼 파렴치한 언행이라고도 볼 수 없다. 여요전쟁이나 임진왜란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적의 침공을 대비하여 미리 대피하거나 안전한 곳으로 거점을 옮기는 것은, 방어하는 측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 중 하나이다. 윤방은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건만 면박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거의 아들 혹은 조카뻘 되는 사람에게.[59]
김경징이 자신의 언행에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면 모르겠지만, 실상은 어땠는가.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김경징은 강화도로 향했다. 윤방의 발언을 비판한 것이 무색하게, 검찰사로 임명되었다는 명분으로 강화도로 내뺀 것이다. 게다가 청군이 섬에 상륙했을 때는, 왕가와 가족들조차 내버리고 도망쳤다. 입은 싸움을 외쳤지만, 몸은 도망을 치고 있었다. 결국 윤방에 대한 비판은 김경징의 위선적인 일면을 뒷받침하는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 실록에는 ‘김경징이 교만방자했다.’는 내용이 있지만, 구체적인 사례는 제시되지 않았다?
제시되었다. 위의 항목들, 그러니까 ‘군관을 장살하다’의 ‘악연의 시작’, ‘칠향의 저주를 고발하다’, ‘윤방을 공격하다’, ‘병자호란’에 적힌 내용은 전부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실이다. 김경징이 부친의 위세를 믿고 기고만장하게 행동한 사례들이다.
  • 그 외에도 나랏일에 대해 많은 간언을 했다?
사실이다. 위의 항목들 중 ‘과거 응시자들의 난동에 대해 논쟁하다’의 내용은 단순한 말싸움에 가까우니 언급할 가치가 없지만, 그 항목을 제외하더라도 김경징이 아무 일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선릉 방화 용의자의 국문을 요청하다’, ‘제방 관리 실태를 조사할 것을 건의하다’, ‘간언을 무시하는 인조의 태도를 비판하다’, ‘화약 제조와 군사 훈련에 대해 조언하다’ 등의 항목들이 그 예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정묘호란’, ‘가벼운 형벌을 적용한 죄로 파직되다’ 등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 또한 바로 위에서 언급한 항목들도, 내용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리 추켜세울 만한 업적은 아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병자호란 이전의 김경징은, 부친의 후광을 등에 업고 부정을 저지르거나 횡포를 부리던 광동(狂童)이었다. 업적이 없지는 않지만, 본인의 과오(過誤)를 덮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고 보는 것이 옳다.

김경징 관련 기록에 대하여[편집 | 원본 편집]

세 번째 주장을 살펴보자. 나무위키의 옹호론에서는, ‘강화도에 있었던 인물들이 남긴 문헌에는 김경징의 악행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강화도에 있었던 조익은 포저집에서 김경징에 대해 서술했는데, 그 모습은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와 전혀 다르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잘못되었다.

옹호론의 해당 주장은 ‘강화도에 있었던 인물들의 저작은 신빙성이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일견 맞는 말 같지만, 강화도 방어전 등과 관련된 인물의 저작에는 성립하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거나 남에게 전가하는 식의 편파적인 서술을 남겨두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강화도에 없었지만 섬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부터 실상을 전해들은 사람이 남긴 저작도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 따라서 ‘강화도의 실상을 체험했으며, 그 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인물이 남긴 저작’ 혹은 ‘강화도의 생존자로부터 전해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탄생한 저작’은 신빙성이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바탕으로 김경징에 대한 기록들을 살피는 것이 옳다.

어한명의 강도일기[편집 | 원본 편집]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기록 중 하나로, 어한명(魚漢明)의 강도일기(江都日記)가 있다. 어한명은 병자호란 당시 경기좌도 수운판관이었으며, 강화로 피난하던 봉림대군을 보필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조정의 관료들과 면식이 없었으며,[89] 김경징을 직접 대면한 인물이었다. 그는 강도일기에서 자신이 겪은 김경징에 대해 서술해놓았는데, 그 모습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이미지와 매우 흡사하다. 어한명은 당대 조정의 권력다툼과는 관련이 없었던 중립적인 인물이므로, 강도일기의 서술은 매우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병자호란’의 ‘강도로 건너가다’ 항목에 기술했으나, 편의상 한 번 더 제시하기로 한다.

나(어한명 자신)는 곧장 그 사람을 따라가 그(김경징)를 만나 보았는데, 한참을 이야기했으나 나랏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하늘을 쳐다보고 휘파람을 부는가 하면 부채를 들고서 흔들며 말하기를, “무엇을 어찌하겠소, 무엇을 어찌하겠소?”라고만 할 뿐이었다. 조금 후 덕포 첨사(德浦僉使) 조집이 배를 타고 오자 그는 기쁜 얼굴로, “이 사람이 타고 온 배는 필시 튼튼할 것이니, 우리 가속을 태워 건넬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
— 어한명, 강도일기中

물론 해당 기록에는 김경징이 강화도로 간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적혀있지 않다. 이 기록만으로는 강화도에 도착한 이후의 김경징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김경징은 병자호란 이전에도 인성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는 될 수 있다.

조익의 병정기사[편집 | 원본 편집]

나무위키 옹호론에서는, 조익의 포저집을 근거로 ‘김경징은 세간의 이미지와는 180도 다른 인물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조익은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당시, 인조를 호종하는 임무를 내팽개치고 강화도로 도망친 인물이다.## 이 때문에 포저집(이하 병정기사[90])은 조익이 자신의 행적을 변명하기 위해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한다.[91][92] 그러나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조익이 당시 강화도에 체류하고 있었다는 점이나, 강도 함몰의 잘못으로부터 자유로운 처지[93]임을 고려하면, 그의 저서는 비교적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무위키 옹호론에서 병정기사를 인용하려 한 것은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 진짜 문제는, 병정기사에는 나무위키 옹호론의 주장과 달리, ‘김경징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나랏일을 걱정하며 강화도의 허술한 수비를 염려했다.’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략) 19일에서부터 21일까지 3일 동안을 계속 분비국(分備局)에 가서 보니, 김경징(金慶徵)과 이민구(李敏求)가 담당하며 일 처리를 하고 있었는데, 별로 하는 일은 없고 단지 문서를 수응(酬應)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중략)
언젠가 분비국에 가서 김경징과 이민구에게 말하기를 “임진년에 왜적이 경성(京城)에까지 육박해 왔을 때에 이정암(李廷馣)[94]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려고 하였으나 가인(家人)이 구해서 살린 적도 있고, 옛날에 숙손소자(叔孫昭子)가 계손(季孫)이 임금을 쫓아낸 것을 통분하게 여겨 축종(祝宗)에게 죽게 해 달라고 빌게 한 고사[95]도 있는데, 지금 나도 참으로 죽고만 싶다. 만약 내가 수백 명의 병력을 얻어서 한 방면을 담당하며 육박전을 벌일 수만 있다면, 뒤로 물러나지 않고 싸우는 자로는 내가 응당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하자, 김경징이 나를 보고 슬피 울면서 손을 잡고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때 관군(官軍) 이외에 남정(男丁)과 피난 온 사람들은 모두 의병(義兵)으로 차출되어 더 이상 남아 있는 자들이 없다 보니 병력을 얻기가 참으로 몹시 어려웠다. 그리고 이민구가 병력을 얻을 계책을 강구해 보았지만 그것도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후략)
— 조익, 병정기사(丙丁記事)

병정기사의 서술을 요약하면, '김경징과 이민구를 3일 내내 지켜봤는데, 안에 틀어박혀서 종이만 만지고 있더라.', '나랏일이 걱정된다고 한탄하자 울어줬다.'(...) 정도가 된다. 김경징과 이민구는 적을 코앞에 두고도 안에 틀어박힌 채 일하는 시늉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강화도의 방비가 허술한 점 등을 안타까워 한 것 역시 김경징이 아니라 조익이다. 김경징은 그의 말에 맞장구친 게 전부였다. 이런 내용들은 김경징을 옹호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안에 틀어박혀 일하는 척이나 하면서 잡담 나누고 눈물이나 질질 짜는 게 검찰사의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시직 관련 기록[편집 | 원본 편집]

봉상시정(奉常寺正) 이시직(李時稷)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있었는데, 성이 함락되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송시영(宋時榮)과 함께 자결했다. 이때 그는 노복에게 자신이 죽으면 매장해줄 것을 부탁하며 아들에게 유서를 부쳤다. 노복은 청군에 붙잡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유가족들에게 당시의 일에 대해 증언했다고 한다. 유서 중 사(詞) 한 편은, 원고는 사라졌으나 그 내용은 세상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실록에 이시직이 자결할 당시의 일이 기술되어 있으며, 그가 아들에게 부친 사(詞)의 내용도 남아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등 여러 문인들도 이시직을 기리는 전기(傳記)를 지었다.

(전략) 전 사헌부 장령 이시직(李時稷)은 (중략) 송시영이 먼저 죽자 스스로 가서 초빈한 뒤 두 개의 구덩이를 파서 그 중 하나를 비워두고 말하기를,

"나를 묻어라."

하였다. 이에 글을 지어 그의 아들 이경(李憬)에게 부치기를,

"장강(長江)의 요새를 잘못 지켜 오랑캐 군사가 나는 듯 강을 건넜는데, 취한 장수가 겁을 먹고 나라를 배반한 채 욕되게 살려고 하니, 파수하는 일은 와해되고 만 백성은 도륙을 당하였다. 더구나 저 남한산성마저 아침저녁으로 곧 함락될 운명인데,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는 없으니, 기꺼이 자결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함으로써 천지간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한다.[96] 아, 내아들아, 조심하여 목숨을 상하지 말고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지낸 뒤,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며 고향에서 숨어 살고 나오지 말라. 구구하게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네가 나의 뜻을 잘 잇는 데 있다."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9번째 기사
선부군(先府君)의 휘는 시직(時稷)이고 자는 성유(聖兪)이며 성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중략) 병자년(1636) 여름에 봉상시 정에 제수되셔서는 (중략) 12월에 오랑캐가 대군을 이끌고 갑자기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온 지 며칠 만에 이미 경기(京畿)에 박두하였다. (중략)
이때 김경징(金慶徵), 이민구(李敏求) 등이 검찰사(檢察使)로 강도의 일을 관장하고 있으면서, 군대를 징발하여 수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날마다 술에 취해 방자하고 사납게 날뛰며 원로대신까지도 능멸하니, (중략) 적이 갑자기 병선(兵船)을 모아 갑곶 나루로 몰려오자, (중략) 부군께서는 필선 윤전(尹烇), 주부 송시영(宋時榮) 등 두 공과 더불어 스스로 처신할 방법을 상의하셨는데, (중략) 부군께서는 송공과 한날 자결하기로 약속하시고는 (중략) 송공이 먼저 자결하니, 부군과 윤공(尹公)은 서로 끌어안고 통곡한 다음 손수 염빈(殮殯)하셨다. 그런 뒤에 두 노복(奴僕)을 시켜 그 빈소 곁에 구덩이 하나를 파게 하시고는 “내가 죽거든 이곳에 임시로 묻어 우리 아이가 수습(收拾)할 수 있도록 하라.” 하시고, 또 옷 한 가지를 벗어 관인(館人)에게 주시며 “그대는 사리를 조금 아니, 내 노복을 시켜 내 시신을 염(殮)하도록 하라.” 하셨다. (중략) 부군께서는 (중략) 활시위로 자결하시니, 25일 을축일이고, 춘추가 66세셨다.
(중략) 적이 빈궁과 대군을 위협하여 떠나게 하고는 불을 질러 성안을 도륙(屠戮)하니, 두 노복과 관인도 모두 적에게 잡혔다. 잡힌 지 7일 만에 한 노복이 탈출하여 유서를 옷 동정 속에 숨기고 돌아와서 아들들에게 전하면서 그때의 전말을 이상과 같이 말하였다.
일기초(日記草)와 그 밖의 몇 장의 문자(文字)는 가지고 있던 노복이 적의 포로가 되었으므로 전해지지 못하였다. 또 세상 사람들이 부군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사(詞) 한 편(篇)도 원고가 없어졌는데, 아마도 포로로 잡힌 노복에게 맡겼던 것을 당시에 어떤 이가 보고서 전한 것인 듯하다.[97] (후략)
— 동춘당집, 통훈대부(通訓大夫) 봉상시 정(奉常寺正) 죽창(竹窓) 이공(李公) 행장
병자년(1636, 인조14)에 (중략) 강도로 들어갔으나, 일을 주관하고 있던 자들이 모두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중략) 적이 강을 건너옴에 미쳐서는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과 이민구(李敏求)와 유수(留守) 장신(張紳)이 앞 다투어 배를 타고 도망쳤다. (중략) 오랑캐들이 드디어 성 안으로 들어오자, 공은 태복시 주부(太僕寺主簿) 송시영(宋時榮)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옛사람의 책을 읽었는데,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구차스럽게 살아남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중략)
송군(宋君)이 먼저 결행을 하여 죽자, 공은 시신을 끌어안고 큰 소리로 곡한 다음 스스로 임하여 염빈을 하였다. 그리고는 구덩이 두 개를 파서 한 곳을 비워 두게 하고 종에게 명하여 자신을 그곳에 묻게 하였다. 그런 다음 옷을 벗어 관소(館所)의 사람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염습하여 뒷날 나의 아들로 하여금 시신을 찾아 장사 치르게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평상시에 활시위를 옷소매 속에 넣어 두고 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노복이 눈물을 흘리며 저지하자, 공이 뿌리치면서 말하기를, “오늘의 이 죽음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하였다. 관소에 있던 사람이 공의 의리에 감동해 염빈을 하는 데 소용되는 물품을 갖추기를 명대로 하였다. 바로 정축년(1637, 인조15) 정월 25일의 일로, 춘추는 66세였다. (후략)
— 청음집,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이공 시직(李公時稷)의 묘갈명

이시직이 남긴 사(詞)에 등장하는 '취한 장수'가 누구인지는,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욕되게 살려고 한다.'는 서술을 통해 싸움을 피해 도망친 인물임을, '나라를 배반했다.', '파수하는 일이 와해되었다.' 등의 서술을 통해 강화도가 함락된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다. 강도검찰사 김경징.[98] '김경징은 청군을 목전에 두고도 술잔치나 벌이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특정 부류의 악의가 담긴 중상모략이 아니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이 직접 목격한 사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물론, ‘유서의 원본이 사라졌으니, 현재 세상에 알려진 저 글이 그 유서라는 보장은 없다.’, ‘송준길과 김상헌은 당시 강화도에 없었으니, 그들이 지은 행장과 묘갈명의 내용은 믿을 수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경징이 술에 취해 일을 게을리 했다.’는 내용은 사실로 보는 것이 이치에 맞다.

이시직 행장은, 그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강화도에서 살아남은 노복의 증언을 참조했음을 알 수 있다. 김상헌은 김상용의 친동생인데, 김상용의 상을 치를 때 강화도의 생존자인 윤방, 박동선, 강석기가 조문을 왔다고 한다. 당연히 김상헌도 그들과 접촉했을 것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당시 조정에서는 김경징 등 강화도의 생존자를 심문하여 강화도의 상황을 파악했다. 따라서 조정 관료의 저서도 신뢰할 가치가 있으며, 당시 예조판서였던 김상헌이 남긴 묘갈명도 마찬가지이다. 정리하면, 위의 행장과 묘갈명 모두 강화도의 생존자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된 사료라 할 수 있고, 따라서 신빙성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김경징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고(故) 상신(相臣) 김상용(金尙容)의 아들 김광환(金光煥)·김광현(金光炫) 등이 상소하기를,

"(중략) 강도가 함몰될 때에 신의 아비가 (중략) 남문(南門)에 가서 자결하였습니다. 변란을 겪은 뒤에 윤방·박동선·강석기가 조문하러 와서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10월 28일 임술 5번째 기사
김상용의 신도비명[편집 | 원본 편집]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있었다. 그는 섬에 상륙한 청군으로부터 강화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다가, 패색이 짙어지자 폭사(爆死)하여 자살하였다. 김상용의 친동생 김상헌은 그를 기리기 위해 신도비명을 지었다.

김상용 사후, 인조는 “김상용이 자결한 게 정말 사실이 맞긴 하느냐.”는 의문을 내비치며, 그를 추모하는 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상용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남초(담배)를 피우려다 사고로 죽은 것이다.’라는 소문도 있었다.# 이에 김상용의 아들들은 강화도의 생존자들 및 당시 그의 죽음을 목격한 인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상용은 순절한 것임을 증명하였다.[99] 인조와 다른 사람들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김상용의 신도비명은 철저히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앞서도 말했듯이 김상헌은 강화도의 생존자들을 만났으며, 병자호란 당시에 조정의 관료였으므로, 강화도의 실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므로 김상용의 신도비명에 기술된 강화도의 정황은 실제와 거의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나(김상헌)의 큰형님이신 우의정공(右議政公)은 휘는 상용(尙容)이고, 자는 경택(景擇)이며, 자호는 선원(仙源)이고, 또 다른 호는 풍계(楓溪)이다. 아버지께서 좌의정 임당(林塘) 정 부군(鄭府君) 댁에 장가들어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이 바로 공이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화도(江華島)에서 순절하였다. (중략)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는 기세가 날로 급박해지자 상께서 고 상신 윤방(尹昉)에게 명하여 종묘와 사직을 받들게 하고,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과 이민구(李敏求) 등에게 후궁과 원손(元孫), 왕자 등을 호위하게 하였으며, 또 여러 신하 중에서 늙고 병든 자들로 하여금 먼저 강화도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공 역시 이를 수행하게 되었다. (중략)
이듬해인 정축년(1637, 인조15)에 (중략) 호서군(湖西軍)이 먼저 이르러 적과 맞닥뜨려 싸웠으나 궤멸되었다. (중략) 검찰사와 유수(留守) 장신(張紳) 등은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음을 믿고 군무(軍務)를 등한시한 채 제멋대로 하면서 제 한 몸만 편히 하고자 했다. 이에 공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말하기를, “행재소가 포위되어 있은 지가 오래되어 위급한 사태가 조석 간에 있게 되었다. 혹자는 정세규(鄭世䂓)가 패하여 죽어 호서군에 군사(軍事)를 주관할 자가 없다고 한다. 강화도에는 검찰사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하니, 부사(副使)는 마땅히 호서로 가서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고 의병들을 끌어 모으며, 호남의 병사 중에 후방에 처져 있는 자들을 독려하여 위급한 지경에 빠진 군부(君父)에게 달려 나가야 한다. 이 일은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이민구가 눈물을 흘리며 가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또 말하기를, “남한산성과 소식이 불통되었으니 큰상을 내걸고 군사를 뽑아 안부를 묻는 관원으로 삼아 보낼 경우 열 명을 가게 하면 반드시 한 명은 도달할 것이다. 신하 된 자의 의리에 있어서 어찌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김경징 등은 대들어 헐뜯으면서 끝내 시행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에 급보가 이르러 오자 김경징 등이 비로소 두려워하여 한밤중에 창을 잡고는 겁을 내어 떨면서 허둥지둥하였다. 그러다가 멀리서 적선(賊船)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는 일시에 도망가 버려, 임금으로부터 받은 부탁과 자신의 노모를 호랑이의 아가리에 버려두기를 팽개치듯이 했다. (후략)
— 김상헌, 청음집 /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선원(仙源) 선생의 신도비명

이민구는 만년에 친구 정세규에게 편지를 보내 병자호란 당시의 일에 대해 증언하였다. 이 기록이 바로 답정판서서(答鄭判書書)인데, 이민구의 문집인 동주집에 수록되어 있다. ‘처벌받은 지 이제 20년’이란 편지의 글귀로 미루어, 편지를 작성한 때는 1656년이거나 그 이후로 보인다.[100] 이민구는 이 서찰에서, ‘김상헌이 지은 신도비명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신도비명에는, ‘김상용이 “검찰부사는 호서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라.”고 요구하자, 이민구가 가지 않으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민구가 문제 삼은 대목은 그 부분이었다. 답정판서서에서, 이민구는 ‘나는 김상용의 제안을 듣자마자 바로 호서로 갈 준비를 했다. 떠날 채비를 하다가 김광환(김상용의 아들)과 윤선거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들이 지금 살아있으니, 당시의 일을 물어보면,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고 주장했다. 김상헌이 다른 사람들의 모함을 받아 적는 바람에, 신도비명에 잘못된 기록이 남았다는 것이다.

(전략) 사람들이 와서 전하기를 호서의 군대가 들어와 남한산성을 돕다가 오랑캐들에게 습격을 받아 방백(方伯)이 벼랑에 떨어져 죽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그 다음 날 제가 밖에서 돌아오니 재상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이 방 안에 있다가 저를 불렀습니다. 들어가 보니 김경징이 먼저 자리에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재상 윤방이 말하기를 “호서 방백의 생사를 알 수 없소. 호서에 주장(主將)이 없고 남한산성의 명령이 통하지 않으니 공이 가서 그 임무를 살피는 것이 마땅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재상 김상용이 처음 그런 의사를 말했고, 윤방이 저에게 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말하기를 “잘 알겠습니다.”라고 하고, 장신(張紳)에게 이르기를 “내가 지금 바다로 나갈 것이니 배와 식량과 노꾼을 공이 곧바로 준비해서 보내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성 동쪽에 있는 재상 김상용의 우사(寓舍)에 가서 하직하였는데, 공의 아들 춘천 부사(春川府使) 김광환(金光煥)이 아버지를 뵈러 왔기에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났습니다. 제 우사에 들러 행장을 꾸리는데 피란한 유생 김익겸(金益兼)과 윤선거(尹宣擧)가 와서 보고 헤어졌습니다. 선원리에 있는 촌사로 나와 자고서 배를 준비하고 식량을 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재상 윤방이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해 오기를 “듣자니 호서 방백이 다행히 무사하다고 하니 공은 갈 필요가 없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에 성으로 돌아와 비로소 재상 김상용이 김경징과 주고받은 말이 있음을 들었지만 그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와 같을 뿐입니다.
지금 재상 김상용의 행장과 비문에 “눈물을 흘리며 가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하고, “가려는 의사가 없었으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략) 호서의 직로(直路)에 있는 몇 개 고을이 침략 당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안전하게 보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섬을 지키는 것과 뭍으로 나가는 것은 이로움과 해로움의 차이가 대단히 큰 데 어찌 눈물을 흘리며 가지 않으려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지금 김광환과 윤선거가 아직도 살아 있으니 가려고 했는지 가려고 하지 않았는지는 사실을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음(淸陰) 공은 (중략) 그 일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고 말은 여러 사람들에게서 들은 것이기 때문에, 증거 없는 말을 취해서 여러 사람이 내버린 저에게 더한 것인데, 돌봐 주는 이도 없고 뒤집어 주는 사람도 없어서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후략)
— 이민구, 동주집 / 답정판서서(答鄭判書書)

하지만 이민구의 변명은 신도비명의 내용을 부정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답정판서서의 내용대로라면, 김광환은 김상용과 이민구가 나눈 대화는 듣지 못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자호란’의 ‘강도에서의 만행’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윤선거는 오히려 그의 저서 기강도사에서, ‘이민구는 호서로 가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 했으나, 대신이 뜻을 굽히지 않자, 하는 수 없이 갈 채비를 했다.’라고 서술했다.[73] 따라서 김광환과 윤선거는 이민구의 무죄를 증명해줄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이민구의 결백을 확실하게 입증해줄 수 있는 사람은 4명이 존재했다. 그에게 직접 호서로 가라고 제안한 김상용, 당시에 그 자리에 있었던 김경징, 그들의 사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윤방, 그리고 신도비명을 지은 김상헌. 이들 넷 중 한 명과 대면하고 사실 여부를 가렸다면, 이민구는 자신이 누명을 썼음을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다.[101] 즉 이민구는, 윤방이나 김상헌 같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줄 수 있을 만한 인물들이 살아있을 적에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다가, 그들이 죽고 한참이 지나서야 억울하다고 입을 연 것이다. 이는 이민구가 무결하지 않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정말로 살고 싶었다면, 호서가 더 안전한 걸 아는데, 왜 계속 강화도에 있었겠느냐.’는 항변도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시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이전부터 강화도가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민구는 ‘호서가 더 안전해 보였다.’고 여겼다 술회하면서, 그 근거로 ‘호서는 직로(直路)의 고을 몇이 침략 당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안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런데 침탈당한 곳이 일부 있는 지역과 아직 한 번도 침입을 허용한 적이 없는 지역 중 어디가 안전할까? 결국 이민구의 이 발언 역시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정리하면, 김상용의 신도비명은, 강화도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였고, 강화도의 정황에 대한 정보를 쉽게 입수할 수 있었을 김상헌이 지었으며, 인조와 다른 사람들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사실을 기반으로 작성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내용을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 등장하는 김경징의 모습은 다른 사료의 내용과 대체로 일치한다. 김상헌이 죽은 후에야 이민구가 ‘그 내용은 잘못되었다.’고 변명한 것은, 신도비명의 내용이 진실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민구의 답정판서서[편집 | 원본 편집]

이민구는 병자호란 당시 검찰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경징과 마찬가지로 강화도에서 제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술에 취해 있었으며, 호란 이후 이 행적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었다.

이민구는 강화도 방어전 당시 현장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답정판서서는 강화도 방어전의 전개 과정을 파악하기 위한 사료로 상당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김경징과 이민구의 당시 행적을 파악하기 위한 사료로 활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전투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면, 그 내용은 본인의 잘못에 대한 변명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변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검찰사의 역할은 도로와 배편을 관리하는 것이니, 강화도에 들어온 시점에서 우리(김경징, 이민구)의 임무는 전부 끝난 것이었다.
반박 : 당시 김경징과 이민구는 왕족 일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병자호란’의 ‘강도로 건너가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강화도로 건너갈 당시 자기들의 가족친지부터 먼저 배를 태워 보냈고, 세자빈 일행을 3일씩이나 나루터에 방치했다. 이것이 바로 조정에서 김경징과 이민구를 처벌한 가장 강력한 이유 중 하나였다. 답정판서서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본연의 임무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은폐하였다.
  • 남한산성으로부터 ‘수륙의 방비는 장신에게 일임한다.’는 교지가 있었다. 따라서 우리(김경징, 이민구)는 강화도의 수비에 간섭할 권한이 없었다.
반박 : ‘병자호란’의 ‘강도에서의 만행’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김경징은 장신의 행동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며 분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둘의 갈등을 진압하기 위해 교지를 보낸 것이다. 그 목적은 강도유수와 검찰사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 짓는 데 있었다. 한 마디로 김경징에게 월권행위를 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검찰사는 철저한 방어 태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군무를 검찰할 책임이 있다. 그냥 놀고먹는 직책이 아니다. 장신에게 간섭할 권한이 없었다는 건 궁색한 핑계에 불과하다. 강화도의 일에 아예 간섭하지 말라는 취지로 교지를 보냈다면, 검찰사의 직위까지 박탈했을 것이다.
  • 김경징과 장신은 서로 다투었다. 장신은 청군이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라 여겼고, 그래서 삼엄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동료들의 충고를 무시했다.
반박 : ‘평가’의 ‘실록의 평가’ 항목에 있는 실록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김경징 또한 경계를 소홀히 했다.# 그러나 답정판서서에는 장신의 잘못만 기술되어 있다. 김경징의 과오에 대한 서술은 없다. 당시 이민구는 검찰부사로, 김경징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김경징의 잘못은 그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본인의 잘못으로 연결된다. 답정판서서에 김경징에 대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는 것은, 본인의 실책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가 의심된다.
  • 장신이 수군과 육군을 다 모아갔기 때문에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이 전혀 없었다.
반박 :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김경징과 이민구는 전투가 있기 전에 자신들의 직무에 태만했다. 이민구의 답정판서서에는 이러한 사실이 누락되어 있다. 또한 강화도 방어전 당시 성 내에는 수백 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김경징은 독단으로 7~80명의 병력만 대동하였다. 답정판서서에는 이 역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물론 성 안의 병사를 전부 동원하였더라도, 청군의 상륙을 저지하거나 강화성을 지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변호를 받아야 할 사람은, 김상용과 봉림대군, 황선신 같은 인물들이다. 전쟁 이전부터 빈둥대며 놀기만 하다가, 전쟁이 벌어지자 모두를 내버리고 도망친 김경징과 이민구가 아니라.
  • 상륙한 청군은 황선신의 군대를 물리친 후 곧장 성으로 진격했다. 나(이민구)는 성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이미 전투가 끝나 있었으므로 배를 얻어 타고 도망쳤다.
반박 : 조익의 병정기사에 따르면, 언덕 위의 조선군은 청군이 상륙하자마자 모조리 도망쳤다. 병정기사와 답정판서서 두 기록이 모두 옳다면, ‘이민구는 숨어서 눈치만 보다가 느지막이 성으로 가려 했고, 그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지 오래였다.’는 말이 된다. 둘 중 하나의 기록만 옳다면, 조익의 병정기사를 따라야 하는데,[102] 그렇다면 ‘이민구는 청군이 상륙하자마자 도망쳐놓고, 실은 그러지 않았다고 답정판서서를 통해 거짓말을 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느 쪽이든 이민구의 행동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힘들다.
  • 강화도에 들어갈 당시 세자빈 일행은 나(이민구)와 함께 바다에서 운행하는 배를 탔고, 김경징은 강에서 운행하는 배를 탔다. 바닷배는 느린데다 얼음덩이에 막히는 등의 일이 있었지만 강의 배는 빠른데다 얼음덩이까지 타고 넘어갔다. 때문에 김경징의 배가 세자빈의 배보다 섬에 먼저 도착한 것이다. 김경징이 처벌 받은 것은, 김시양(金時讓)이 이때의 일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강도 함몰의 잘못으로 처벌되었다고 말하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반박 : 답정판서서에는 세자빈 일행을 배에 태우고 가는 과정은 서술하였으나, 그 이전의 내용은 빠져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김경징과 이민구는 세자빈 일행을 놔두고 가족친지부터 먼저 배에 태워 보냈다. 그리고 강화도 방어전 때는, 봉림대군과 세자빈 등을 두고, 본인들만 도망쳤다. 단지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먼저 도착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김경징이 처벌받은 것이 아니다.
물론 왕족 일가를 지키는 책무를 소홀히 한 것이 김경징의 처형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누누이 말한 것처럼, 김경징과 이민구는 검찰의 책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강화도의 군권을 가지고 있었던 장신이 강화도 방어전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 사실이 김경징과 이민구의 강도 함몰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 사람들은 일의 전말은 생각 않고, 악의적으로 나(이민구)를 모함하고 있다.
반박 : 이민구는 죽는 순간까지 서용(敍用)받지 못했고, 결국 야인으로 생을 마쳤다. ‘이민구를 다시 쓰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조정 신료들이 강하게 반대한 까닭이다. 사람들이 자길 헐뜯는다고 푸념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민구는 단지 병자호란 당시의 잘못 때문에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다. 병자호란 이후, 그는 영변에 위리안치 되었는데, 이후에 정명수의 처제를 첩으로 삼았다. 정명수는 청나라 역관 노릇을 하면서, 청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있었다. 1643년(인조 21년) 10월, 정명수는 조선 조정에 “위리안치된 중죄인들을 모두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이민구는 아산현으로 옮겨졌다. 모국을 유린한 나라의 힘을 빌려, 자신의 형벌을 감경한 셈이다. 이민구에 대한 조정의 여론이 혹독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스스로 원인제공을 한 것이다. 이후 1653년(효종 4년), 정명수가 청나라에서 숙청되면서, 이민구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이민구의 서용이 번번이 취소된 이유이다. 특정 당파의 비방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외세에 의존하여 득세하려던 기회주의자에 대한 응당한 조치가 있었을 뿐.
(전략) 간원이 【헌납 임의백(任義伯), 정언 심세정(沈世鼎).】 아뢰기를,

"이민구가 일찍이 검찰(檢察)의 임무를 받고도 끝내 종묘사직을 위망에 빠지게 하였으니, 유배(流配)의 형전(刑典)으로 다스린 것만도 이미 실형(失刑)했다 할 것인데, 민구는 도리어 남몰래 비밀스런 계책을 부려 돌아올 발판을 마련하는 여지로 삼았습니다. 【처음에 민구가 영변부(寧邊府)에 귀양가서 정명수(鄭命守)의 처제(妻弟)를 취하여 첩(妾)으로 삼았다. 그 뒤 정명수가 청사(淸使)로 나왔을 때에 서로(西路)에 유배한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라고 청하자, 조정이 할 수 없이 따랐다. 그리하여 민구가 마침내 아산현(牙山縣)에 양이(量移)되었으므로 간원이 이같이 아뢴 것이다.】 선왕께서 그 정상을 통촉하시어 장신(張紳)과 김경징(金慶徵)이 지하에서 원통해 할 것이라는 분부까지 내리셨으니, 전하께서 아무리 용서하여 등용시키고 싶다 하더라도 종사와 선왕에 대해서는 어찌하시렵니까. 거두어 서용하라는 의논을 시행하지 마소서. (후략)
—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 4권, 효종 1년 7월 20일 신미 2번째기사
(전략) 우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중략) 강도(江都)의 일이 지나가고 그 뒤에 민구가 유배된 상태에 있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정명수(鄭命壽)의 처제(妻弟)를 첩으로 삼고는 그 세력을 빌려 조정을 협박하면서 양이(量移)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조 대왕께서도 그 정상을 미워하시어 제신(諸臣)에게 ‘서로(西路)의 죄인을 석방하라고 요구한 의도는 실제로 민구를 풀어주려는 데 있다. 경들은 이 사실을 아는가?’ 하고 하교하셨는데, 이 일이야말로 더욱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할 일이었습니다."

하니, (중략) 정언 이지무(李枝茂)가 그 뒤를 이어 반복해 논하며 서용하라고 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 4권, 현종 2년 12월 25일 경오 2번째기사

[103]

사헌부가 아뢰기를,

"이민구(李敏求)가 강도(江都)에서 일을 그르친 죄에 대해서는 신들이 번거롭게 누누이 아뢸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민구에게는 이보다 더 큰 죄가 따로 있습니다. 그가 귀양 가 있을 때에 정명수(鄭命壽)가 데리고 있던 여자의 아우를 취하여 첩으로 앉히고 명수와 교결(交結)하여 감히 협박하여 풀려나기를 도모할 계교를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청인(淸人)이 나올 때를 당하여 은밀히 명수에게 촉탁을 넣어 마구 공갈을 가하게 하였으므로 인조 대왕께서 당초 즉시 왕법(王法)에 의거 정형(正刑)에 처하지 않았던 탓으로 이런 욕을 당하게 되었다고 크게 한스럽게 여기고서 부득이 우선 이배(移配)하게 했었습니다. 가령 민구가 조금이나마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의당 스스로 책형(磔刑)을 받아도 부족할 것처럼 여겨야 할 것인데 끝내는 창녀(娼女)를 첩으로 앉혀 놓고 스스로 좋은 계교로 여겼으니, 고금 천하에 남의 신하가 되어 이웃 나라에 있는 역적과 교결해서 군부에게 협박을 가하는 것을 민구처럼 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전후 죄상을 따져본다면 지금까지 천지 사이에 숨쉬고 있게 한 것도 더 없는 실형(失刑)인 것입니다. 더구나 직첩을 주고 거두어 서용하여 다시 작록의 반열에 끼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민구를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다가 뒤에 따랐다. (후략)
— 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 13권, 현종 6년 9월 6일 기축 3번째 기사

[104]

정리하면, 이민구의 답정판서서는, 강화도 방어전에 대한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민구의 자기 잘못에 대한 변호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변명의 내용은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그러므로 답정판서서는 김경징과 이민구의 행적을 살피기 위한 사료로는 활용할 수 없다.(관련 논문 : 이민구의 강화도 탈출담 연구(KISS 링크)

김경징은 강화도 수비를 맡은 적이 없는가?[편집 | 원본 편집]

네 번째 주장을 살펴보자. 나무위키 옹호론에서는, 실록의 ‘인조 15년 2월 21일 신묘 1번째 기사’의 일부 글귀를 근거로, ‘김경징은 강화도 수비를 맡은 적이 없으며, 거느린 병력도 매우 적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옹호론에서는 ‘비록 그의 검찰(檢察)하는 임무가 적을 방어하는 일과 관계는 없다 하더라도,’라는 실록의 구절을 강조했다. 이 대목이야말로 김경징의 업무가 강화도 방어와는 무관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해당 구절의 원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金慶徵, 雖曰檢察之任, 不關於禦敵,’# 직역하면, ‘김경징은 비록 “검찰의 임무는 적을 방어하는 일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만.’이다. 번역이 틀린 것 같은가? 승정원일기에도, 위에서 언급한 실록의 내용과 동일한 기록이 존재한다. 해당 기록은 ‘최후’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으나, 편의상 한 번 더 제시한다.

행 대사헌 한여직(韓汝溭), 행 대사간 김수현(金壽賢), 집의 채유후(蔡裕後)가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중략) 김경징은 비록 그의 검찰(檢察)하는 임무가 적을 방어하는 일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만, (후략)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2월 22일(임진) 맑음

바로 위에 제시한 승정원일기의, 볼드체로 강조한 구절의 원본 내용은, ‘金慶徵, 雖曰檢察之任, 不關於禦敵,’이다.# 실록의 원문과 똑같다. 실록의 번역이 중의적으로 된 것일 뿐, 해당 구절은 김경징의 발언이다. 결국 나무위키 옹호론에서는, 김경징을 변호하기 위해, 김경징 본인의 변명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인조 : 너 잘못 없지? / 김경징 : 네. / 인조 : 그래, 열심히 하자.

물론 조정 신료들은 ‘검찰사는 전쟁하는 장수가 아니다.’라는 점을 수긍했다. 김경징이 변명한 것처럼, 검찰사는 직접 나가 싸우는 장수가 아니다.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의 군권을 쥐고 있었던 인물은 강도유수 장신이었다. 섬의 병력도 태반이 장신의 관할이었고, 김경징이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강도 함몰의 가장 큰 책임은 장신에게 있었고, 그래서 장신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김경징은 강화도 방어전의 패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검찰사의 책무는 말 그대로 군무 검찰이다. 군무 실태를 점검하고 통제하여, 최상의 방어 태세를 유지할 책임이 있다. 위의 ‘최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김경징에 대한 조정의 비판에는 공통적으로 ‘수어(守禦)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김경징도 강화도 방어의 직임(職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직무를 전혀 수행하지 않았다. 전투가 있었을 당시에는, 성 안의 병사들 중 7~80명만을 이끌고 가는 실책을 범했다. 청군이 상륙했을 때는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 김경징 역시 강화도 방어전의 패배에 책임이 있다. 강도 함몰을 이야기할 때, 김경징이 반드시 언급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윤방과 김류는 다 나라를 망친 대신입니다. (중략) 강도를 지키지 못한 죄를 어찌 김경징만이 당해야 하겠습니까.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12월 11일 을사 1번째 기사
(전략) 살펴보건대, 산골짜기의 험함이 저절로 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험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강도를 지키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임무를 맡은 사람이 적격자가 아니어서이니, 이것이 어찌 지형이 그래서였겠는가. 그런데 지금 급급히 소재지를 옮기려 하니, 비록 초나라의 방성(方城)과 한수(漢水) 같은 천험의 형세를 얻는다 하더라도 다시 김경징(金慶徵)·장신(張紳)과 같은 자로 하여금 지키게 한다면 전과 같을 뿐이다. 묘당은 적임자 얻을 생각은 않고, 읍만 옮기려고 힘쓰니, 아, 이상하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1월 22일 병술 1번째 기사

정리하면, 김경징은 검찰사로서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직무에 소홀하였으며, 전투 당시에는 성의 병력 중 7~80명만을 차출하는 실수까지 범했다. 또한 적이 상륙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강화도의 군권은 장신이 쥐고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김경징은 강도 함몰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나무위키 옹호론에서 제시한 실록의 글귀는 김경징의 진술이다. ‘김경징은 잘못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본인의 자기옹호발언을 제시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김경징은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편집 | 원본 편집]

마지막 주장을 살펴보자. 나무위키 옹호론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김경징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오해의 산물이다. 주화파 vs 척화파, 공서파 vs 청서파 등의 당쟁으로 인해, 김경징이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다. 그 후 척화파가 득세하고, 야사에 의해 당시의 사실(史實)에 잘못된 이야기가 추가되면서, 김경징에게 졸장이란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우선 공서와 청서에 대해 살펴보자.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세력을 공서(功西), 반정에 소극적이었던 서인 세력을 청서(淸西)라고 한다. 그런데 인조 집권기 동안 공서 vs 청서로 대립 구도가 명확하게 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굳이 거론하자면, 인조 집권 초기 남이공의 대사헌 발탁을 두고 벌어진 갈등이 있을 것이다.# 당시 공서파는 자기들의 우세를 바탕으로 남인 및 소북과의 연대를 꾀했으며, 남이공의 등용은 그 일환이었다. 청서파는 공서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것을 막기 위해 해당 인사를 반대하고 나섰다. 서인-남인-소북의 연립 정권 수립 여부를 놓고 서로 대립한 셈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이같이 대립한 적은 없었다. 정원군 추숭 때 이귀는 찬성했으나, 그 외 대부분은 반대했다. 세자 책봉 건에서는, 김류와 김자점은 봉림대군을 밀었으나, 그 외 대부분은 소현세자의 아들인 경선군을 밀었다. 강빈 사사 때는 김자점은 찬성했으나, 나머지는 모두 반대했다. 진영 대 진영으로 다투기보다는, 특정 인물 vs 나머지로 갈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진영 논리를 따르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소신을 내세우거나 혹은 여론 및 상식을 택하여 움직였던 셈이다.아웃사이더vs인싸들[105] 그래서 학계에서는 공서와 청서를 별도의 정파로 분류하지 않는다.

후금 및 청과의 대응 방안은, 화친하자는 주화론과 맞서 싸우자는 척화론으로 갈렸다. 그중 주화파는 이귀, 최명길, 장유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언급한 세 명이 모두 공서[106]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서파가 전부 주화파였던 것은 아니다. 공서의 필두인 김류부터 척화를 외쳤고, 그의 아들인 김경징 역시 척화파였다. 공서고 청서고 다 떠나서, 조정의 여론 자체가 척화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무위키 옹호론에서는 병자호란 전후의 갈등을 진영 논리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틀린 서술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김경징은 왕족 일가를 호위하는 임무도,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유지하는 직무도,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또한 김류는 본인이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오자, 그동안 척화를 주장하던 것이 무색하게 주화론으로 전향했다. 청나라에서 척화파를 보낼 것을 요구하자, 자신이 언제 척화를 주장했느냐는 듯이 입을 다물고 다른 사람들을 떠밀었다. 심지어는 “척화파가 나라를 망쳤다.”면서, 척화론자의 처벌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김류와 김경징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인 공세가 아니었다. 공서, 청서, 주화, 척화, 그런 정치 얘기를 다 떠나서, 그들 둘은 욕먹을 짓을 했기 때문에 욕을 먹은 것이다. 부자가 쌍으로.

이홍주(李弘胄) 등을 보내 지난번의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 진영에 가도록 하였는데, 답서를 받아 가지고 돌아 왔다. 그 글에,

"(중략) 맹서를 어기도록 앞장 서서 모의한 그대의 신하에 대해 짐이 처음에는 모두 죽인 뒤에야 그만 두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대가 정말로 성에서 나와 귀순하려거든 먼저 앞장서서 모의한 신하 2, 3명을 묶어 보내도록 하라.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0일 경신 3번째 기사
김류·이성구(李聖求)·최명길이 입대하였다. (중략) 김류가 아뢰기를,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의 의논이 당시에는 정론이었다고 하더라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그르친 죄를 피할 길이 없으니, 그들이 나가기를 자청한다면 좋겠습니다. 홍익한(洪翼漢)은 현재 평양(平壤)에 있는데, 저들로 하여금 그에 대한 처치를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고,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3번째 기사
시강원 설서 유계(兪棨)가 상소하였다.

“(중략) 전하께서 꼭 전후에 걸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모두 잡아 보내려 하실 경우, 대소 신료 중에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놔두시겠습니까? 신이 지난해에 경연에 입시하여 영의정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는데, 신사(信使)는 보낼 수 없으며 청나라에 글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김류 또한 화친을 배척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독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지금 만약 김류 등은 묘당(비변사)에 편히 있게 하고 단지 평일에 시행되지도 않은 헛말을 한 사류(士流)만 택하여 간사한 사람들의 마음을 쾌하게 할 경우, 신은 신하를 대우하는 전하의 의리 역시 두텁고 얇은 차이가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3일 계해 12번째 기사
(전략) 김류가 아뢰기를,

"오늘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내야 할 텐데, 사람들이 모두 엄호하면서 곧바로 지목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들이 이미 앞장서서 모의하여 맹세를 무너뜨린 자를 대상으로 삼았고 보면, 지난 봄에 논주(論奏)한 자와 그 뒤로 준론(峻論)한 자는 의당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수한 자 외에도 지난 봄에 그 일을 말한 사람이 한두 사람뿐만이 아닐 뿐더러 그 경중(輕重)도 모르는 판인데, 또 어떻게 취사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그 당시의 삼사 및 오늘날 자수한 자를 아울러 잡아 보내면 저들이 반드시 숫자가 많은 것을 기뻐하리라 여겨집니다."

하니,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3번째 기사
영의정 김류(金瑬),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우의정 이성구(李聖求), 병조 판서 신경진(申景禛), 공조 판서 구굉(具宏),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 호조 판서 이경직(李景稷)이 회의하여 나라를 그르친 사람들의 죄를 경중(輕重)으로 나누어 서계(書啓)하기를, (후략)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9일 기축 3번째 기사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중략) 지난해 가을·겨울 이전에는 김류가 화친을 배척하는 논의가 매우 준열하여 ‘청국이라 쓰지 말아야 하고 신사(信使)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하다가, 전하께서 특별히 ‘적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는 그 죄를 면할 수 없으리라.’는 분부를 내리신 이후로 화친하는 의논에 붙어[107] 윤집(尹集)[108] 등을 묶어 보내고 윤황(尹煌)[109] 등의 죄를 논할 것을 김류가 실로 주장하였습니다. 자신이 장상(將相)을 도맡아 마침내 임금이 성을 나가게 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논열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당초 청인(淸人)이 동궁(東宮)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때에 김류가 곧 입대(入對)하여 따라가기를 바라더니, 동궁이 북으로 떠날 때에는 감히 늙고 병들었다고 핑계하였습니다. 동궁이 또한 이미 북으로 가고 나서는 김류가 감히 질자(質子) 김경징(金慶徵)이 ‘어미의 복을 입고 있다.’고 그 이름 아래에 적었는데, 이 때문에 구굉(具宏)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동궁의 작위(爵位)가 김경징에 못 미치는가. 중전의 초기(初朞)가 겨우 지났는데 김경징이 감히 어미의 상을 핑계하는가.’ 하니, 김류의 낯과 목이 붉어졌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리석은 데에서 나왔겠습니까, 방자한 데에서 나왔겠습니까? (중략) 김경징이 검찰사(檢察使)가 된 것은 김류가 스스로 천거한 데에서 나왔는데, 대개 온 집안이 난리를 피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당초 강도(江都)로 들어갔을 때에 먼저 제 집안 일행을 건너게 하고 묘사와 빈궁(嬪宮)은 나루에 사흘 동안 머물러 두어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내관(內官) 김인(金仁)이 분을 못이겨 목메어 통곡하고 빈궁도 통곡하였으니, 이 사람은 전하의 죄인일 뿐더러 실로 종사의 죄인입니다. 또 영기(令旗)로 제 친한 사람만 건너게 하고는 사민(士民)들은 물에 빠지거나 사로잡히게 하였으니, 통분하여 견딜 수 있겠습니까. (중략) ”

하였는데, 소(疏)가 올라가니 상이 끝내 금중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6월 21일 무오 1번째 기사

김경징에 대한 복권 논의가 없었던 것은, 척화파가 정권을 잡은 것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다. 위의 여러 항목들에 서술되어 있지만, 다시 한 번 병자호란 당시 김경징의 행보를 살펴보자. 왕족 일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음에도, 가족친지를 먼저 배에 태워 강화도에 보냈다. 그리하여 왕족의 행차는 나루터에 사흘간 방치되었다. 백성들을 나룻가에 내버려두어 청군의 사냥감으로 만들었다. 강화도에서는, 검찰사로서 방어 태세를 유지할 책임이 있음에도, 안에 틀어박힌 채로 술을 마시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군권을 탐내, 장신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어 내분을 일으켰다. 김상용이 이민구에게 호서로 갈 것을 지시하자, 단지 이민구가 그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하며 패악질을 부렸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 “뿔피리를 불어 군사를 집결시키자.”는 건의를 무시하고, 7~80명의 무사들만을 데려가는 실책을 범했다. 청군이 상륙하자, 왕족은 물론 가족까지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김경징의 복권을 논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굳이 언급하자면,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강화도의 군권은 강도유수 장신에게 있었으며, 김경징에게는 실권이 없었다. 따라서 강도 함몰의 가장 큰 책임은 장신에게 있다. 강화도 방어전의 패배에 대해, 김경징에게 장신과 동등한 수준의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한 처사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김경징의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어떤 전쟁이든, 대비하고 예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김경징이 강도검찰사로서 맡은 임무였다. 또한 김경징에게는 왕족 일가를 호위하는 사명도 있었다. 하지만 김경징은 어떠했는가? 장신이 경계를 소홀히 하는 것을 지적했는가? 청군의 동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였는가? 강화도가 함락되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피난 대책을 강구하였는가? 아니. 김경징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왕족 일가의 호위를 소홀히 한 죄가 강화도 함락의 죄보다 가벼운가? 결코 그렇지 않다. 조선은 왕조국가이고, 사대부는 그 체제 아래에서 특권을 누린다. 그 권력은 국가의 체제를 수호하는 의무가 전제된 것이고, 그 중 가장 중대한 것이 바로 왕가를 지키는 것이다. 김경징은 사대부의 도의적 책무이자 왕이 직접 내린 임무를 무책임하게 내던진 것이다.

전략적 측면에서 보아도, 김경징의 잘못은 매우 심각했다. 그가 왕족 일가를 무사히 피신시키기만 했다면, 봉림대군 등을 구심점으로 한 분조를 통해 항전 의지를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갔다면, 병자호란은 오히려 조선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삼전도의 굴욕을 감내하며 참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척화파의 집권 아래 김경징의 복권은 불가능해졌고, 그의 이야기에 과장과 왜곡이 더해져, 오늘날에 이르러 김경징은 졸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다.’는 나무위키 옹호론의 주장은 틀렸다. 인과 관계가 잘못되었다. 김경징은 실제로 복권 따위 언급도 못할 정도의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고, 그래서 사형 당했으며, 그로 인해 그를 비판하는 각종 기록들이 탄생한 것이다.

김경징 재평가 결론[편집 | 원본 편집]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강화도 방어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조정에서도 김경징과 이민구 등을 심문하여 강화도의 상황을 파악하였다. 김경징에 대한 정사 및 야사는 그들 생존자의 증언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현전하는 김경징 관련 기록들 대부분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
  • 김경징은 병자호란 이전부터 부친의 권세에 의지하여, 특혜를 누리고 오만방자한 행동을 일삼았다. 반면 그가 남긴 업적은 극히 미미했다. 이는 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남아있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 조익의 병정기사에는 ‘김경징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나랏일을 걱정하며 강화도의 허술한 수비를 걱정했다.’ 같은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화도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사료들은 공통적으로 김경징의 업무 태만을 지적하고 있다.
  • 김경징이 사형에 처해진 결정적인 이유는, ‘왕족 일가를 호위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죄목이었다. 강화도 방어전의 패배 책임은 군권을 쥐고 있던 장신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김경징은 강화도 함락의 잘못과 무관하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검찰사 김경징 역시 강화도의 방어 태세를 최상으로 유지해야 할 책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의 직임을 등한시했다는 점에서, 김경징 역시 강도 함몰의 죄업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 오늘날의 김경징에 대한 평가는, 당대의 여론이 전해 내려오며 진실이 왜곡된 결과가 아니다. 인과관계가 잘못되었다. 김경징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고, 그래서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만행이 이야기로 기록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왕족 일가를 지키지 못한 죄는, 도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강화도 함락의 잘못보다 더 크고 무거웠다. 김경징에 대한 복권 논의가 없었던 이유는, 척화파의 집권 같은 정치 논리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가 재론의 가치조차 없는 명백한 역사의 죄인이기 때문이다.ㅆ새끼가 아니라 그레이트 ㅆ새끼

각주

  1.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 외관직.#
  2. 찰방 말고 다른 관직에 임명된 상태라면, 당연히 그 관직명으로 불렀을 것이다.
  3.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함께 이르는 말.
  4. 罷榜. 과거 급제자 발표를 취소함.
  5. 『논어』 강서를 친다고 가정하자. 만약 응시자가 첫 번째 통에서 「학이편」을 뽑고, 2번째 통에서 12번을 뽑았다면, 시관은 강지에 『논어』 「학이편」 12번째 대문이라 기록하고, 응시자의 고강을 들은 후 성적을 평가한다.
  6. 신유년 별시 급제자 중 유씨는 병과 4위 유두립(柳斗立), 병과 7위 유정립(柳正立), 병과 10위 유중립(柳中立), 병과 35위 유익립(柳益立) 4명뿐이다. 이중 유정립과 유익립이 유희분의 아들로, 유익립이 형이고 유정립이 동생이다. 유두립은 아버지가 유희량(柳希亮)이고, 유희량은 유희분의 동생이다. 그리고 유중립은 아버지가 유희발(柳希發)인데, 유희발은 유희분의 동생이고 유희량의 형이다. 신유년 알성시 급제자 중 유씨는 을과 1위 유명립(柳命立) 1명뿐이다. 유명립은 유희분의 아들로, 유정립과 유익립의 동생이다. 따라서 오류(五柳)란, 유두립, 유정립, 유중립, 유익립, 유명립, 이들 다섯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7. 신유년 별시의 병과 36위 박취장(朴就章)은 박홍구(朴弘耉)의 삼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박홍구의 아들은 박취장으로 보인다.
  8.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이들 셋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이첨의 봉호는 광창 부원군(廣昌府院君), 박승종의 봉호는 밀창 부원군(密昌府院君), 유희분의 봉호는 문창 부원군(文昌府院君)으로, 셋의 봉호 모두 창(昌) 자가 들어가므로, 이같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9. 參榜.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榜目, 문과 급제자의 명부)에 이름이 오름.
  10. 남이 지은 글을 자신의 답안지에 적어 자기 글인 것처럼 써내는 행위.
  11. 該曹. 해당 조. ‘상이 예조에 계하하였다.’는 부분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예조에 해당한다.
  12. 인조 1년 8월의 개시(改試)를 말한다.
  13. 과거(科擧)에는 저술(著述)도 있고 강경(講經)도 있는데, 강경은 경서 중에서 예고 없이 어느 한 장절(章節)을 뽑아 질문하여 합격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므로 어느 장절을 미리 선택하여 예고하는 것은 부정 행위이다.
  14. 안치(安置)는 죄인을 일정한 장소에 격리시키는 형벌이다. 위리안치는 안치의 한 종류인데, 거주하는 집의 울타리를 가시나무로 둘러쳐, 죄인이 외부와 접촉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격리하는 형벌이었다.#
  15. 그런데 이 부분은 이귀도 무결하지 않다. 이귀 역시 자신의 친구 유순익을 3등공신으로 녹훈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관철했기 때문이다.(… 유순익(柳舜翼)의 녹훈은 이귀의 강력한 주장으로 된 것인데, 사람들의 말에 ‘순익이 공신에 오른 것은 친구의 덕이다.’고 하였다. …)
  16. 나무위키에서는 ‘김경징은 궁궐 앞에 꿇어앉아 대죄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서술이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실록에 따르면, 군관 장살에 대한 김경징의 대응은 상소문을 쓴 것이 전부였다.잘못했어요, 데헷~! - 김경징 올림
  17. 판서 직만 면직되었고, 겸직하고 있던 다른 직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8. 推考. 벼슬아치의 죄와 허물을 문초하여 살펴봄.
  19. 바로 위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 김경징의 처벌을 논한 것은 형조였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해조는 형조를 가리킨다.
  20. 김경징의 이름이 예조판서 다음에 온 것에서, 당시 김경징의 직위가 예조참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21. 대사헌은 사헌부의 최고 관직이며, 집의는 그 다음이다. 인조실록 6권, 인조 2년 7월 16일 무진 2번째 기사를 보면, 이때 정엽은 대사헌이고 박정은 집의였음을 알 수 있다.
  22.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세력을 공서(功西), 반정에 소극적이었던 서인 세력을 청서(淸西)라고 한다. 박정, 나만갑 등 김류 부자를 비판한 인물들은 청서파였다. 학계에서는 공서와 청서를 별도의 정파로 분류하지 않는데, 인조 집권기 동안 공서 vs 청서로 대립 구도가 명확하게 선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김류 부자와 박정, 나만갑 등의 대립 역시 공서와 청서 간의 정쟁이라기보다는, 특정 인물들 사이의 갈등으로 보는 것이 옳다.
  23. 선릉(宣陵)의 능역은, 조선 성종(成宗)의 능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의 능, 이렇게 2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재가 난 곳은 정현왕후의 능이었다.
  24. 능을 관리하는 종9품 관직.
  25. 소송 사건에 관하여 법관이 판결에 필요한 사실 및 법률관계를 조사하는 일련의 과정.#
  26. 방화 용의자의 이름을, 실록에서는 인복(仁福), 승정원일기에서는 인록(仁祿)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본 항목에서는 인록으로 표기하였다.
  27. 이 속에서 참봉과 당번 수호군의 말이 끝나고 계사의 내용이 시작된 듯하다. 즉, 이후의 기록은 계사의 내용이다.
  28. 인록에 대한 이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실록의 기록에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3월 16일의 형문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9. 巡檢使. 순검이란, 순찰과 치안 유지를 의미한다.
  30. 행궁(行宮)은 왕이 도성 안 궁궐을 떠나 행차의 중간 또는 목적지에 다다라 머무는 지방의 궁실을 말한다.#
  31. 1625년(인조 3년) 7월, 인조는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조정 신료들은 이를 반대했다. 김자점은 이때 가장 먼저 나서서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시했으며, 심명세는 안락공주(중국 당나라의 공주. 어머니 위황후와 결탁하여, 아버지 당중종을 독살하고, 권력을 쥐려 하였다.)의 고사를 언급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인조는 크게 노하여, 심명세는 중도부처하고, 김자점은 삭탈관직하여 문외출송하였다.#
  32. 바로 위의 기록에 ‘인조는 김자점에게 강도 검찰의 임무를 맡기기로 결심했다.’고 되어 있다. 정황상 이때 인조는 김자점을 강도검찰사로 임명한 듯하다. 검찰사의 직무는 관리들의 업무 실태를 감찰하는 것으로, 실무와는 거리가 멀었다. 순검사의 직무는 앞의 주석에서 말했듯이 순찰 및 치안 유지이다. 검찰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실권까지 갖고 있는 셈이다. 순검사가 검찰사보다 명호가 더 무거울 수밖에 없다.
  33.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
  34. 70세 이상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
  35. 관리에게 품계나 관직을 수여하는 증서.#
  36. 재물을 바침으로써 형벌을 면제하는 것.#
  37. 죄인이 자복(自服)할 때에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하던 말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복종함을 이르는 말.#
  38.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해 왕실 등에서 음식 등을 바치는 잔치 의식. 풍정도감(豊呈都監)은 이 의식을 주관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39. 왕실의 구성원인 후궁, 대군, 공주, 옹주 등의 집을 일컫는 말.#
  40. 박승황의 아내를, 승정원일기에는 ‘끗정’, 실록에는 ‘말질정’, 응천일록에는 ‘끝정’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본 항목에서는 편의상 그녀의 이름을 ‘끗정’으로 표기한다.
  41. 委官. 죄인을 심문할 때 의정대신(議政大臣) 가운데서 임시로 뽑아 임명하는 재판장을 이르던 말.#
  42. 국문은 역모나 강상죄의 혐의가 있는 이들에게 행하였다. 칠향의 저주는 종이 주인을 해치려 한 강상죄에 해당하므로, 그녀의 국문은 적법한 것이었다. 그러나 끗정은 노비가 아니므로, 그녀가 칠향의 저주에 정말로 참여하였더라도, 그 죄는 역모도 강상죄도 아닌 살인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끗정의 국문은 법에 어긋난 처사였다.
  43. 장형(杖刑)을 당하여 죽는 일을 이르던 말.#
  44. 후술할 승정원일기의 내용에 따르면, 인조는 ‘끗정의 삼성 추국은 이치에 맞지 않은 듯하니, 적법한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건의를 받아들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록에는 ‘인조는 김상용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고, 끗정은 삼성에서 국문 받다가 사망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승정원일기에서도 ‘추국에 참여한 인물들이 파직을 청하는 등 대죄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인조는 김상용의 말을 듣는 척만 하고, 끗정의 국문을 멈추지 않았으며, 끗정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 관련자들이 잘못을 시인한 것은, 끗정의 사망으로 인해 여론이 흉흉해진 것을 수습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로 보인다.
  45. 후술할 실록의 기록에 ‘위관 김상용이 아뢰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위관은 김상용일 것이다.
  46. 物故. 죄인이 죽임을 당하는 일 혹은 죄인을 죽이는 일을 이르던 말.#
  47. 이후의 내용은 승정원일기와 대체로 비슷하므로, 편의상 생략한다.
  48. 어떤 중대한 사안을 임금에게 아뢰고 그에 대한 명령을 기다리는 일을 이르는 말.#
  49. 전계(傳啓. 임금에게 보고하는 죄인 문건)에서 죄인의 이름을 빼 버리다.#
  50. 대사간 윤황(尹煌)이 동료를 거느리고 차자를 올리기를, "... 혹 전하께서 한번 강도로 들어가신 후에 오랑캐의 병사가 국내에 가득하여 백만 생령들이 모두 그들에게 짓밟힘을 당한다면 전하께서는 그때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 전하께서 항시 강도로 들어가 보전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계시었으므로 군신들의 해태한 마음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 평양(平壤)에 진주하는 것이 최선인 듯합니다. ... 강도를 보전하는 방법으로 평양을 보전하고 진주하여 친정(親征)할 계책을 세우신다면 전하의 신하들 중 누가 감히 움츠리고 물러가 살기를 도모할 마음을 갖겠습니까. ...
  51. 간원이 아뢰기를, "... 지경연 최명길은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금한(金汗)을 일러 ‘청국 한(淸國汗)’이라고 하여, 정식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명길의 말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어찌 그리 생각이 깊지 못합니까. 저들이 청국으로 호칭하는 것은 실로 범연히 호칭한 것이 아닙니다. ... 만일 그의 말이 세상에 행하여지게 된다면 국가의 화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 관직을 삭탈하소서." ...
  52. 이성구가 “추신사를 보낼 때가 가까워졌다.”고 말하자, 이홍주가 “보내지 말자.”고 반응하고, 그 외 다른 사람들도 이홍주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53. 추신사는 그 이름 그대로 가을에 보내는 사절단이다. 보통 7월 ~ 8월, 늦어도 10월 중에 보냈다.######
  54. 1633년의 추신사는 언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추가 바람.
  55. 1634년에도 추신사가 언제 갔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실록에 ‘후금이 추신사를 억류하고 선전관 편으로 답서를 보냈다.’는 11월 12일의 기록이 있다. 따라서 1634년에 추신사가 간 때는, 늦어도 10월 초순~중순일 것이다.
  56.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선봉대는 1636년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의주에서 침공을 인지한 때는 12월 9일이었다.
  57.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명길이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자.’는 의견을 제시하자, 오달제 등의 척화파들이 공격하였고, 이에 최명길은 자리를 떠났다.
  58. 遞職. 관직이 바뀌는 것. 임기가 만료되거나 상피의 법이 적용되는 경우, 그리고 비리를 저지르는 등의 문제가 있는 경우 체직되었다.
  59. 59.0 59.1 윤방은 김경징보다 26살 더 많고, 김류보다는 8살이 더 많다. 한 마디로, 윤방은 김경징에게 큰아버지뻘이었다.
  60. 화약색은 화약의 제조와 출납에 관한 일을 맡은 부서이다. 훈련도감 산하에 있었다.#
  61. 후술할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김경징의 말은 조금 과장된 것으로, 실제로 한 달에 소모되는 화약의 양은 3,4천 근 정도라고 한다.
  62. 과장(科場), 백일장, 시장(市場) 따위가 끝남. 또는 그때.#
  63. 당시 정두경은 직강(直講) 자리에 있었으며, 사헌부에서 그를 파직할 것을 논하였다. 승정원일기 1635년(인조 13년) 9월 30일자 기록에서 정두경을 전 직강이라 부르는 부분이 있으므로, 사헌부의 탄핵 건의가 통과되었음을 알 수 있다.#
  64. 관직을 제수 받은 후보자의 이름과 그 가계 등이 기록된 문서. 후보자 본인이나 부계 및 모계의 선조 중에 죄인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여, 서경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했다.
  65. 대사간은 사간원의 장관이며, 정언은 사간원의 관원이다. 당시 대사간은 김경징이었다.
  66. 보통 실록 등의 기록에서의 ‘출사’는 ‘出仕’로 표기하며, 그 뜻은 출근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출사’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승정원일기의 원문에는 ‘亦以試官無可鎭定之策請出’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 마지막에 ‘請出’이라고 되어 있으므로,(그 앞의 구절은 ‘시관으로서 진정시킬 수 있는 계책이 없다.’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출사는 내쫓으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자로 따지자면,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다는 뜻의 ‘出社’가 될 것이다.#근데 이렇게 써도, ‘회사에 출근한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고 한다(...)
  67. 해당 기록은 인조 14년 5월의 것으로, 과거장 난동 사건의 날짜보다 시기가 앞선다. 그러나 후술할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윤황을 대사간으로 삼은 때는 (승정원일기에서 기록되어 있는) 김경징이 체직을 요청한 때로부터 며칠 후에 해당한다. 따라서 김경징이 대사간의 자리에서 체직된 때는, 위에 언급한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행적 이후임을 알 수 있다.
  68. 조선에는, 업무에 가족이나 친척 등이 관련되어 있는 인물은 해당 임무로부터 제외하는 관례가 있었다. 부정행위를 사전에 막기 위한 방법으로 보면 된다. 이를 상피(相避)라고 하는데, 딱히 조선에만 있었던 제도는 아니다.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현대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방식을 적용하는 경우가 여럿 있다.
  69. 유백증이 올린 상소문은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김류 집안의 피난 행렬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서 이경증이 유백증의 상소에 대해 ‘김류 가문의 짐바리가 그리 많을 리 없다.’고 비판하는 것을 보아, 상소문에 그와 관련된 내용도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경증이 아뢰기를, “이러한 시기에 대신(김류)을 동요시키니, 어찌 잘못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그 상소 내용을 보니, 실정과 다른 설이 또 있는 듯하였습니다. 피란할 때의 짐바리에 관한 말인데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그 당시 신이 궐내에 있으면서 국가의 짐바리를 보았는데 그것도 5, 6십 필 미만이었는데, 영상이 어디에서 그만큼의 짐바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그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모친을 모시고 강도로 갔으니, 아마도 병든 모친 때문에 가교(駕轎)도 없이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밖에는 확실한 말이 아닌 듯합니다. ...” 하였다. ...)
  70. 번역은 신달도·정양·윤선거 원저, 신해진 편역, 「17세기 호란과 강화도」, 역락, 2012, 126~127쪽
  71. 글을 쓴 선비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실록에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으며, 《잡기(雜記)》와 《병자록(丙子錄)》에는 권순장과 김익겸, 《강도록(江都錄)》에는 심희세와 윤선거, 《일사기문(逸史記聞)》에는 김익겸과 윤선거라고 되어 있다.
  72. 강화도 방어전은 패배로 끝났으나, 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수가 살아남았다. 생존자로부터 당시 강화도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행장이나 신도비명 같은 전기(傳記)가 고인을 미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음을 고려하더라도, 이시직의 행장과 김상용의 신도비명은 상당 부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연려실기술의 내용도 이 기록들과 비슷하니 신빙성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윤선거는 당시 강화도에 피난 와 있었으므로 역시 그 기록을 믿을 만하다.
  73. 73.0 73.1 항목에서 언급한 기강도사의 내용에 대한 원문은 다음과 같다 : ... 分司令副察使李敏求出按湖西。收拾餘燼。以爲赴援之計。敏求憚行。金慶徵請於大臣勿出敏求。大臣不聽。敏求不得已治舡將行矣。 ...(항목 참조) 좀 더 제대로 된 번역은, 신해진 편역의 「17세기 호란과 강화도」 134쪽; 161쪽 참조.
  7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종묘(宗廟)의 신주(神主)와 빈궁(嬪宮), 왕자(王子) 등을 강화(江華)로 피난시키면서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이민구(李敏求)를 검찰부사(檢察副使)로 삼아 강화의 수비를 맡겼으나, 이들은 지리(地理)의 유리한 점만을 믿고 방비를 소홀히 하다가 급습한 청나라 군대에 패하여 한 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결국 도주하고 말았다. 강화를 수비할 당시에 김경징이 항상 모든 일을 이민구에게 물어서 행하였는데, 이를 본 강화의 사람들이 이민구를 ‘김경징의 유모(乳母)’라 불렀다고 한다. 《仁祖實錄 15年 9月 21日》 《隱峯全書 卷4 杞平君兪公神道碑銘》
  75. 강화지에 따르면,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가 가족들에게 자살을 강요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언제 청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가족들을 모두 자살시킨 후 도망쳤다는 건,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서도 강화지의 기록에 대해 ‘당시의 민심이 김경징에 대해 적개심이 너무 컸기 때문에, 아녀자들의 자결을 왜곡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김경징과 김진표가 식구들을 전부 내버리고 도망친 건 사실이다.
  76. 예친왕(睿親王).
  77. 몽골 병사.
  78. 우반(隅盤)은 소반을 말한다. 쉽게 말해 밥상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된다.
  79. 1637년(인조 15년) 2월 25일부터 3월 21일까지 거의 매일 김경징을 처형하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간언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80. 사실 이것도 상당히 관대한 처분이었다. 외형상으로 큰 훼손이 생기지 않는 처벌은,(사약이나 교수형 같은) 당시 조선에서는 비교적 자비로운 사형 방식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81. 종친, 공신 및 1품 이상을 지낸 문무관의 사망 시에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주는 것.#
  82. 인목왕후의 모친
  83. 계집종 칠향의 저주가 언급이 되긴 하는데, 무고한 끗정을 장살한 내용은 쏙 빼고, ‘인조가 내탕금(內帑金 임금이 사사로이 쓰는 돈)을 내어, 김류가 집을 옮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만 해놓았다. 인조의 김류에 대한 총애가 지극하다는 점만을 강조한 셈이다.(...)
  84. 강도검찰사 김경징을 가리킨다.
  85. 부대시(不待時)란, 추분을 기다리지 않고 형을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대시(待時) 혹은 부대시(不待時)에서 ‘때[時]’는 추분(秋分)을 가리킨다. 사람의 목숨을 끊는 사형은 자연 질서에 반하는 것이기에 사형의 집행은 자연 질서가 쇠퇴하는 추분(秋分)부터 춘분(春分) 사이에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니, 이는 동양 고래(古來)의 법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86. 1627년.(인조 5년)
  87. 묘비명에 ‘김류가 김경징으로 하여금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李曙)를 찾아가 인조반정의 거사 날짜를 조정하게 했다.’ 같은 내용이 있긴 하지만, 강화도 방어전과는 관계없는 부분이다.
  88. ‘영특한 자질을 타고났으며 행실이 아름다웠다.’(묘비명), ‘시를 지어 바치니, 의정공(김류의 아버지 김여물)이 크게 기뻐하였다.’(신도비명), ‘반정을 의논할 때 늘 참여하였다.’(묘비명, 신도비명), ‘거사 당일 김류 부자를 독려하고 응원한 후, 옷을 갈아입고 단도를 소지한 채로 뒷산에 올라가 결과를 기다렸다.’(묘비명, 신도비명), ‘인목왕후가 거사에 대해 물었을 때, 공신 부인들 누구도 대답을 못하였다. 오직 김류의 부인만이 전말을 상세하게 고하였으므로, 인목왕후가 기이하게 여겼다.’(묘비명),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섬에 상륙하여 사람들이 어찌할지 물으니, 칼을 가리키며 이게 있으니 충분하다고 말하고는 자결하였다.’(묘비명, 신도비명) 등등.
  89. 심지어 봉림대군 본인도 이름을 몰랐다.(...)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즉위한 후, 어한명의 충성심을 회상하며 여러 차례 그의 성명을 물었으나, 조정의 누구도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어한명은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권상하와 김창협에 의해 성명과 업적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1816년(순조 16년)에 좌참찬에 추증되었고, 1827년(순조 27년)에 충경(忠景)의 시호를 받았다.##
  90. 포저집은 조익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92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손자들인 조지항, 조지정 등이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전후의 체험을 서술한 것은, 포저집에 수록된 기록 중에서 병정기사에 해당한다.
  91. 이시백이 파직된 조익을 변호하기 위해 올린 상소의 내용이 병정기사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이 그 근거이다. 이시백과 조익은 겹사돈을 맺을 정도로 사이가 가까웠다.(이시백의 장손 이상주는 조익의 고명딸과, 조익의 사남 조내양은 이시백의 딸과 결혼했다.)
  92. 여담이지만, 이러한 죄로 인해 조익은 호란이 끝난 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된다. 그러나 인조를 호종하는 임무를 포기한 이유가 행방불명된 아버지 조영중을 찾기 위해서였다는 점,(조익은 아들 조진양으로 하여금 조영중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가게 했는데, 도중에 그들 둘이 따로 떨어져 버렸다.) 아버지를 강화도로 도피시킬 때 따라 들어가지 않고, 윤계, 심지원 등과 함께 경기 지역의 패잔병들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며 입성하고자 노력했다는 점 등이 참작되어 석방되었다.(앞의 주석에서 언급한 이시백의 상소에서도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조익을 두둔하고 있다.) 3년 뒤에 원손보양관으로 제수되었으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양했고, 그 뒤로도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거부하다가, 아버지가 죽고 상복을 벗은 후에야 좌참찬으로 조정에 나갔다.(1648) 이러한 점을 볼 때, 조익은 제 목숨 아까워서 꽁무니를 뺀 김경징 같은 부류와 동급으로 칠 만한 인물은 아니다.
  93. 강화도의 군권은 장신이 쥐고 있었으며, 방어 태세를 살피는 역할은 김경징이 맡고 있었다. 강화도에서 조익의 위치는, 조금 과장하자면, 피난민1이나 다름없었다.(...)
  94. 임진왜란 때에 황해도 초토사(黃海道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한 뒤에 연안성(延安城)에 들어가서 왜장(倭將) 흑전장정(黑田長政 구로다 나가마사)이 이끄는 6000명의 공격을 막아내며 밤낮으로 4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95. 노 소공(魯昭公)이 계손씨(季孫氏)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삼환(三桓)의 공격을 받고 외국으로 망명하였는데, 숙손소자가 소공의 귀국을 위해 무진 애를 썼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자, 목욕재계한 다음에 제사를 주관하며 기도드리는 사람인 축종(祝宗)에게 빨리 죽게 해 달라고 빌게 하더니 얼마 뒤에 죽었다는 기사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5년 조에 나온다.
  96. 살신성인부앙무작(殺身成仁俯仰無怍)이라는 글귀인데, 후세에까지 알려진 유명한 구절이다.
  97. 사의 내용은 실록의 것과 동일하다.
  98. 장신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장신에 대한 내용은 '장강의 요새를 잘못 지켜 오랑캐들이 강을 건너왔는데'라는 전반부에 해당한다. 당시 장신은 강화 유수겸 주사대장으로 임명되어 강화도의 수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99. 바로 위의 항목에 제시된 실록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100.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에 발발하여, 1637년 1월에 끝났다.
  101. 김상용은 강화도 방어전 당시 자결했고, 김경징도 병자호란 이후 처형당했다. 윤방은 1640년에, 김상헌은 1652년에 세상을 떠났다. 앞서도 보았듯이, 답정판서서는 1656년이나 그 이후에 지어졌다.
  102. 조익은 김경징이나 이민구와는 달리, 패배의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처지였다. 전투에 대한 서술에 왜곡을 가할 필요가 별로 없었다.
  103. 현종개수실록의 기록은 항목 참조.
  104. 현종실록의 기록은 항목 참조1&항목 참조2.
  105. 언급한 논의들은, 전부 다수파가 상식을 따른 쪽이었다. 정원군의 추숭은 당시의 예법에 어긋났다. 세자 책봉은 장자 계승이 원칙이니, 원손인 경선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게 상례였다. 강빈 사사 건은 ‘강빈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혐의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인조의 주장일 뿐 어떤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김류를 위시한 조정 신료들은 전부 강빈 사사에 반대했다.
  106. 이귀, 최명길, 장유는 모두 반정에 참여했다. 그 결과 이귀와 최명길은 1등공신, 장유는 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107. 인조 14년 8월 20일 신묘 2번째 기사이다. 기록 최하단에 인조가 “청군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체찰사는 김류였다.인조 14년 3월 20일 을축 2번째 기사인조 14년 5월 26일 기사 1번째 기사
  108. 오달제,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강화 조건으로 척화파들을 보낼 것을 요구하자, 이들 셋은 “최명길이 주화를 주장할 때, 그를 비판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었다.”며 자진해서 청으로 압송됐다.
  109. 척화를 주장하던 강경파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