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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6021_001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6월 21일 무오 1번째 기사]}} {{인용문2|양사가 합계하기를,<br /><br />"영의정 도체찰사 김류(金瑬)는 (중략) 강도(江都)의 중임(重任)을 당초에 신중히 가리지 않고 경솔히 그 아들에게 제수하여 (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7007_001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7월 7일 계유 1번째 기사]}} {{인용문2|영중추부사 이홍주(李弘胄)가 상차하기를,<br /><br />“삼가 아룁니다. 당초에 강도의 검찰사(檢察使)를 차출할 때에 신이 영의정 김류(金瑬)와 함께 빈청에 앉아 있었는데 창황 중에 적임자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김경징이 판윤(判尹)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의 직질(職秩)과 인망이면 이 직임을 감당할 만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이 사람으로 아뢰어 차정했던 것입니다. (중략) 그때 김류가 비록 자리에 있었지만 혐의하여 참여하지 않았으니 잘못 천거한 죄는 실제로 신에게 해당됩니다. 공의가 한창 일어나고 있으니 신은 두려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삼가 견척을 받아 물정(物情)에 사죄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재결하여 주소서.”<br /><br />하니, 답하기를,<br /><br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김경징이 그렇게 일을 그르칠 줄은 나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경은 안심하고 공무를 행하도록 하라.”<br /><br />하였다.|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5_07A_08A_00150_2013_040_XML 인조 15년 정축(1637) 7월 8일(갑술) 흐림]}} {{인용문2|행 대사간 이행원(李行遠), 장령 서상리, 지평 윤득열ㆍ윤미, 정언 김여옥ㆍ조중려가 아뢰기를,<br /><br />“(중략) 김류(金瑬)는 (중략) 강도 검찰사(江都檢察使)를 차임한 일이 비록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수석의 자리에 있었으면서 어찌 감히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후략)|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5_08A_03A_00050_2013_040_XML 인조 15년 정축(1637) 8월 3일(무술) 저녁에 비 옴]}} ==== 강도로 건너가다 ==== 김경징의 행렬은 통진 나루에서 강도로 건너갔다. 이때 김경징은 가족과 지인부터 배를 태웠으며, 다른 사람들은 함께 가지 못하게 막았다. 때문에 피난민들이 나루를 앞두고 길게 줄지어 서야 했다. 빈궁과 원손을 비롯한 왕실 일행조차 3일 동안 나루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틀밤낮을 추위에 떨며 굶주리다, 내관(內官) 김인(金仁)이 분에 못 이겨 통곡하고, 빈궁 역시 가마 안에서 “김경징아, 김경징아, 네가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하고 외쳤다. 사복시주부 송시영 또한 그들의 행각에 분개했다. 게다가 김경징은 피난민들이 많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전부 나룻가에 남겨둔 채 그냥 강화도로 떠났다. 버림받은 백성들은 청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병자록에 따르면, ‘강도에 건너갈 당시, 김경징의 어머니와 아내는 각각 덮개 있는 가마에 태우고 계집종은 전모를 씌웠으며, 짐바리가 50여 바리나 되었는데 경기도의 인부와 말이 거의 다 동원되었다.’고 한다.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면, 유백증도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려 비판한 듯한데, 이에 대해 이경증이 “국가의 짐바리가 5,60필 미만인데, 김류가 어디서 그만큼의 짐바리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김경징의 모친은 병환 때문에 가교(駕轎)가 필요했을 테니, 가마를 타고 갔다는 말은 맞을 것이나, 그 외에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라고 반박하는 내용이 있다.<ref>유백증이 올린 상소문은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04_004 #] 김류 집안의 피난 행렬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서 이경증이 유백증의 상소에 대해 ‘김류 가문의 짐바리가 그리 많을 리 없다.’고 비판하는 것을 보아, 상소문에 그와 관련된 내용도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5_01A_04A_00150_2013_037_XML ... 이경증이 아뢰기를, “이러한 시기에 대신(김류)을 동요시키니, 어찌 잘못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그 상소 내용을 보니, 실정과 다른 설이 또 있는 듯하였습니다. 피란할 때의 짐바리에 관한 말인데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그 당시 신이 궐내에 있으면서 국가의 짐바리를 보았는데 그것도 5, 6십 필 미만이었는데, 영상이 어디에서 그만큼의 짐바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그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이 모친을 모시고 강도로 갔으니, 아마도 병든 모친 때문에 가교(駕轎)도 없이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밖에는 확실한 말이 아닌 듯합니다. ...” 하였다. ...])</ref> 실록에는 ‘피난 당시 세 집(김경징, 이민구, 홍명일)의 짐이 10리에 잇달고 그 집 사람의 행색에 매우 화사하여, 피난민들이 모두 분하여 욕하였다.’는 내용도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9021_002 #] 이를 종합하면, 기록이 실제보다 부풀려졌음을 감안하더라도, 김류 가문의 피난 행렬이 다른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거창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인용문2|(전략) 김경징은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도에 호종했던 영의정 김류(金瑬)의 아들인데, 통진(通津) 나루터에 도착해서는 가속들만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으므로 빈궁과 원손은 이틀 동안이나 통진 나루에서 추위에 떨어야 하였다. 『강도일기』의 기록은 이러하다.<br /><br />:나(어한명 자신)는 곧장 그 사람을 따라가 그(김경징)를 만나 보았는데, 한참을 이야기했으나 나랏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하늘을 쳐다보고 휘파람을 부는가 하면 부채를 들고서 흔들며 말하기를, “무엇을 어찌하겠소, 무엇을 어찌하겠소?”라고만 할 뿐이었다. 조금 후 덕포 첨사(德浦僉使) 조집이 배를 타고 오자 그는 기쁜 얼굴로, “이 사람이 타고 온 배는 필시 튼튼할 것이니, 우리 가속을 태워 건넬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 (후략)|한국 문화사|[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df.do?levelId{{=}}km_007_0070_0030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p.246~247](어한명의 강도일기)}} {{인용문2|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br /><br />"(중략) 당초 강도(江都)로 들어갔을 때에 먼저 제 집안 일행을 건너게 하고 묘사와 빈궁(嬪宮)은 나루에 사흘 동안 머물러 두어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내관(內官) 김인(金仁)이 분을 못 이겨 목메어 통곡하고 빈궁도 통곡하였으니, 이 사람은 전하의 죄인일 뿐더러 실로 종사의 죄인입니다. 또 영기(令旗)로 제 친한 사람만 건너게 하고는 사민(士民)들은 물에 빠지거나 사로 잡히게 하였으니, 통분하여 견딜 수 있겠습니까. (후략)|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6021_001 인조실록 35권, 인조 15년 6월 21일 무오 1번째 기사]}} {{인용문2|대사헌 유백증이 아뢰기를,<br /><br />“(중략) 만약 빈궁이 3일 동안 건너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김경징을 효수(梟首)했다면 장신(張紳) 등이 어찌 숨었겠으며 강도(江都)가 어찌 함몰되었겠습니까. (후략)|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5_12A_07A_00130_2013_042_XML 인조 15년 정축(1637) 12월 7일(신축) 맑음]}} {{인용문2|(전략)<br />묘사주와 여러 행차는 밤에 김포를 통과하여 사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강화도에 도달했다. 두 검찰 등은 먼저 자기 식솔들을 태워 보냈으나, 빈궁을 비롯한 여러 벼슬아치들 이하는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윤전과 송시영이 해안가에 놓인 배 한 척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 배를 타야겠소.”라고 하자, 이민구가 말하기를, “이 배에 태울 사람들은 바로 나의 식솔들이오. 내가 배를 구했으니 우리 식솔들이 건넌 이후에야 다 같이 건널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대개 검찰은 행차들을 호위하는 것이 임무일진댄 종묘사직의 신주, 빈궁 및 여러 호종신들이 거의 건넌 이후에야 자신의 식솔들을 건너게 해야 할 것인데도, 대소와 선후에 어긋나게 행동함은 말할 것도 없었으니 대체로 황급하여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재주와 식견이 따르지 못한 데서도 나온 것이었다. 송시영이 나(윤선거)를 위해 분개하여 말했던 것이다. (후략)|노서유고|[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373A_0150_020_0010_2003_A120_XML 기강도사(記江都事)]}}<ref>번역은 신달도·정양·윤선거 원저, 신해진 편역, 「17세기 호란과 강화도」, 역락, 2012, 126~127쪽</ref> {{인용문2|(전략)<br />○ 경징이 배를 모아서 그의 가속과 절친한 친구를 먼저 건너가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함께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때문에 사족 남녀(士族男女)가 수십 리나 뻗쳐 있었으며, 심지어 빈궁 일행이 나루에 도착해도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한 채 이틀 동안이나 밤낮을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었다. 빈궁이 가마 안에서 친히 소리 질러 급히 부르기를 “김경징아, 김경징아, 네가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하니, 장신(張紳)이 듣고 경징에게 말하여 비로소 배로 건너도록 하였다. 그때 사녀(士女)들이 온 언덕과 들에 퍼져서 구해 달라고 울부짖다가 적의 기병이 갑자기 들이닥치니 순식간에 거의 다 차이고 밟혀 혹은 끌려가고 혹은 바닷물에 빠져 죽어,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았으니 참혹함이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br />(후략)|연려실기술 제26권|[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270_010_0010_2002_006_XML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 강화도[江都]가 함락되다]}} ==== 강도에서의 만행 ==== 강도로 건너온 이후, 김경징은 검찰사의 업무에서 아예 손을 놓았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안에 틀어박힌 채 서류 쪼가리나 만지는 것뿐이었다. 술에 취해 주정을 일삼을 때도 있었다. 피난 온 선비들이 그 모습을 보고 분통이 터져, ‘옥지(玉趾)가 성을 순찰하고 유신(儒臣)이 성을 지키니 와신상담해야지 술 마실 때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글을 지어 보냈지만,<ref>글을 쓴 선비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실록에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으며, 《잡기(雜記)》와 《병자록(丙子錄)》에는 권순장과 김익겸, 《강도록(江都錄)》에는 심희세와 윤선거, 《일사기문(逸史記聞)》에는 김익겸과 윤선거라고 되어 있다.</ref> 김경징는 이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김경징이 믿고 의지하는 인물은 검찰부사 이민구뿐이었다. 어떤 일이든 이민구에게 먼저 물어보고 실행에 옮겼다. 때문에 사람들이 이민구를 김경징의 유모(乳母)라고 불렀다. 당시 강화도의 군권은 강도유수 장신이 쥐고 있었다. 검찰사는 실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경징은 장신에게 명령을 내리며 자신이 상관인 양 행세했다. 검찰사의 권한을 이용하여, 장신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등 내분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 소식은 남한산성에도 전해졌고, 인조는 ‘강화도의 수비는 장신에게 일임한다.’는 교지를 내려 둘의 서열을 정리했다. 그러던 중,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前)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은 “강화도에는 검찰사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하니, 검찰 부사를 호서로 보내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고 의병들을 끌어 모으게 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민구는 가지 않으려 했다. 김경징은 이민구의 편을 들었고, 김상용과 강하게 다투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때 김상용이 “네 아버지가 임금을 받들고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있다. 민구가 너의 유모 노릇한 지가 오래다. 니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이러느냐.”고 꾸짖으니, 김경징이 화가 나서 도장을 땅에 던지며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하고 외쳤다고 한다. 이시직의 행장에도 ‘김경징이 술에 취해 사납게 날뛰며 원로대신을 능멸했다.’는 내용이 있고, 김상용의 신도비명에서도 ‘김상용이 이민구를 호서로 보내려 했으나, 김경징이 대들고 헐뜯으며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윤선거의 기강도사에서도, ‘호서로 가라는 명령을 받자, 이민구는 가기 싫어했다. 김경징은 대신(大臣)이 민구를 보내지 않게 하려 했으나, 대신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구는 어쩔 수 없이 갈 채비를 했다.’라는 내용이 있다.<ref>강화도 방어전은 패배로 끝났으나, 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수가 살아남았다. 생존자로부터 당시 강화도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행장이나 신도비명 같은 전기(傳記)가 고인을 미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음을 고려하더라도, 이시직의 행장과 김상용의 신도비명은 상당 부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연려실기술의 내용도 이 기록들과 비슷하니 신빙성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윤선거는 당시 강화도에 피난 와 있었으므로 역시 그 기록을 믿을 만하다.</ref><ref name="기강도사_일부_구절">항목에서 언급한 기강도사의 내용에 대한 원문은 다음과 같다 : ... 分司令副察使李敏求出按湖西。收拾餘燼。以爲赴援之計。敏求憚行。金慶徵請於大臣勿出敏求。大臣不聽。敏求不得已治舡將行矣。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373A_0150_020_0010_2003_A120_XML 항목 참조]) 좀 더 제대로 된 번역은, 신해진 편역의 「17세기 호란과 강화도」 134쪽; 161쪽 참조.</ref> {{인용문2|(전략) 19일에서부터 21일까지 3일 동안을 계속 분비국(分備局)에 가서 보니, 김경징(金慶徵)과 이민구(李敏求)가 담당하며 일 처리를 하고 있었는데, 별로 하는 일은 없고 단지 문서를 수응(酬應)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후략)|포저집|[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21A_0250_010_0020_2006_004_XML 병정기사(丙丁記事)]}} {{인용문2|(전략)<br />○ 경징이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하려 하자 장신이 이르기를, “나는 지휘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하여 서로 배척하고 알력이 심하였다. 경징은 (중략) 태평스럽게 방종하여 날마다 술만 마셔 대며 주정을 일삼았다. (중략)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큰 소리 치기를, “아버지는 체찰사요 아들은 검찰사니 국가의 큰일을 처리할 자가 우리 집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하였다. 별좌 권순장(權順長)과 생원 김익겸(金益兼)과 진사 심희세(沈熙世)와 윤선거(尹宣擧) (《잡기(雜記)》 및 《병자록(丙子錄)》에는 권순장과 김익겸 두 사람으로 되어 있고, 《강도록(江都錄)》에는 심희세와 윤선거로 되어 있다.) 등이 글을 올려 책망하기를, “와신상담(臥薪嘗膽)이 지금 할 일이요, 술을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였더니, 경징 등이 더욱 노여움을 드러냈다.<br />○ 혹 전해 오는 말에 충청 감사가 적진에서 죽었다 하므로, 대신(大臣)이 임시방편으로 이민구(李敏求)를 대신으로 임명하고, 이어 삼남(三南)의 흩어지고 도망친 군졸을 빨리 모아서 싸움을 독려하도록 명하였다. (중략) 경징도 허락하지 않았다. 김상용(金尙容)이 경징을 불러서 준엄히 꾸짖기를, “너의 아버지는 임금을 받들고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위기가 코앞에 닥쳐 있는데, 네가 설령 임금의 욕됨은 걱정하지 않을지라도 홀로 너의 늙은 아버지마저 생각하지 않느냐. 삼남의 군졸을 독려하는 것이 대단히 급한 일인데 네가 어찌 차마 저지하는가. 민구가 너의 유모 노릇한 지가 오래이다. 너의 나이 지금 얼마인데 어찌 감히 이러느냐.” 하였다. 경징이 노하여 나와 도장을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하였다.(중략)<br />(후략)|연려실기술 제26권|[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270_010_0010_2002_006_XML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 강화도[江都]가 함락되다]}} {{인용문2| (전략) 강도의 제장들은 (중략) ‘천연적인 참호인 강이 여기 있는데 북쪽 군대가 어떻게 날아서 건너온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술에 취해 날을 보내는 이도 있었으므로, 진사 김익겸(金益兼)ㆍ윤선거(尹宣擧) 등은 글을 올려 이를 풍자하였는데, 그 가운데 ‘와신상담할 이때에 술잔이라니[嘗薪在卽 杯盤非詩]’란 말이 있었다. (후략)|대동야승|[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53A_0010_000_0010_2002_014_XML 일사기문]}} {{인용문2|지평 심대부(沈大孚)가 아뢰기를,<br /><br />“(중략) 이민구(李敏求)의 명망과 재주 그리고 조정의 신임이 어찌 김경징(金慶徵)이 견줄 바이겠습니까. 그런데 ‘유모(乳母)’<ref>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종묘(宗廟)의 신주(神主)와 빈궁(嬪宮), 왕자(王子) 등을 강화(江華)로 피난시키면서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이민구(李敏求)를 검찰부사(檢察副使)로 삼아 강화의 수비를 맡겼으나, 이들은 지리(地理)의 유리한 점만을 믿고 방비를 소홀히 하다가 급습한 청나라 군대에 패하여 한 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결국 도주하고 말았다. 강화를 수비할 당시에 김경징이 항상 모든 일을 이민구에게 물어서 행하였는데, 이를 본 강화의 사람들이 이민구를 ‘김경징의 유모(乳母)’라 불렀다고 한다. 《仁祖實錄 15年 9月 21日》 《隱峯全書 卷4 杞平君兪公神道碑銘》</ref>라고 불렸다고 들었을 뿐, 한마디 말을 해서 김경징의 행위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보면, 《춘추(春秋)》의 법으로 단죄(斷罪)할 때 이민구는 마땅히 수악(首惡)이 될 것이니, (후략)|승정원일기|[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P0_A16_03A_22A_00210_2013_044_XML 인조 16년 무인(1638) 3월 22일(을유) 맑음]}} {{인용문2|(전략) [[김상헌|상헌]]이 아뢰기를,<br /><br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이 그의 형에게 글을 보내기를 ‘본부의 방비를 배가해서 엄히 단속하고 있는데, 제지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답니다. 장신은 일처리가 빈틈없고 이미 오래도록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신임 검찰사가 절제하려 한다면, 과연 제지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br /><br />하니, 상이 이르기를,<br /><br />"그게 무슨 말인가. 방수(防守)하는 일은 장신에게 전담시켰으니, 다른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도록 전령하라."<br /><br />하였다.|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12030_003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3번째 기사]}} {{인용문2|(전략) 며칠 뒤에 무인 최상원(崔尙元)이 남한산성으로부터 밀랍으로 봉한 글을 가지고 도착하였습니다. 유지(有旨)에 이르기를 “수륙(水陸)의 방비를 모두 유수 장신(張紳)에게 위임하니 간섭하는 문제가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틀 뒤에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승려가 또 남한산성으로부터 왔는데 유지의 내용은 이전과 같았습니다. (중략) 김경징과 장신이 많은 말로 옥신각신 다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중략) 간혹 군교(軍校)들이 와서 적들의 실상을 보고하고 동료들이 더욱 삼엄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권하는 말을 했지만, 문득 지나친 걱정이며 쓸데없이 겁을 내는 것이라고 여긴 것은 그의 지기가 대단히 사나워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니, 이것도 천운(天運)입니다. (후략)|동주집|[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37A_0340_030_0040_2017_006_XML 답정판서서]}} {{인용문2|선부군(先府君)의 휘는 시직(時稷)이고 자는 성유(聖兪)이며 성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중략) 김경징(金慶徵), 이민구(李敏求) 등이 검찰사(檢察使)로 강도의 일을 관장하고 있으면서, 군대를 징발하여 수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날마다 술에 취해 방자하고 사납게 날뛰며 원로대신까지도 능멸하니, (후략)|동춘당집 제20권|[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66A_0200_010_0020_2011_003_XML 통훈대부(通訓大夫) 봉상시 정(奉常寺正) 죽창(竹窓) 이공(李公) 행장]}} {{인용문2|나([[김상헌]])의 큰형님이신 우의정공(右議政公)은 휘는 상용(尙容)이고, 자는 경택(景擇)이며, 자호는 선원(仙源)이고, 또 다른 호는 풍계(楓溪)이다. (중략) 검찰사와 유수(留守) 장신(張紳) 등은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음을 믿고 군무(軍務)를 등한시한 채 제멋대로 하면서 제 한 몸만 편히 하고자 했다. 이에 공(김상용)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말하기를, “행재소가 포위되어 있은 지가 오래되어 위급한 사태가 조석 간에 있게 되었다. 혹자는 정세규(鄭世䂓)가 패하여 죽어 호서군에 군사(軍事)를 주관할 자가 없다고 한다. 강화도에는 검찰사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하니, 부사(副使)는 마땅히 호서로 가서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고 의병들을 끌어 모으며, 호남의 병사 중에 후방에 처져 있는 자들을 독려하여 위급한 지경에 빠진 군부(君父)에게 달려 나가야 한다. 이 일은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나, 이민구가 눈물을 흘리며 가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또 말하기를, “남한산성과 소식이 불통되었으니 큰상을 내걸고 군사를 뽑아 안부를 묻는 관원으로 삼아 보낼 경우 열 명을 가게 하면 반드시 한 명은 도달할 것이다. 신하 된 자의 의리에 있어서 어찌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김경징 등은 대들어 헐뜯으면서 끝내 시행하지 않았다. (후략)|청음집 제26권|[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99A_0270_010_0010_2008_005_XML 백씨(伯氏)인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 선원(仙源) 선생의 신도비명]}} ==== [[강화도 방어전]] ==== 1637년(인조 15년) 1월 21일, 청군은 민가의 집을 헐어 만든 뗏목으로, 염하수로를 건너 갑곶 나루로 상륙하려 했다. 적습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을 때, 누군가 "뿔피리를 불어 군사를 집결시키자." 하였지만, 김경징은 "사람들이 동요할 것이다."라며 그 의견을 묵살하고, 성 안의 무사들 7~80명만을 동원했다. 갑곶에 모인 재신들은 청군의 홍이포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자 기가 꺾였고, 김경징과 이민구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풀이 죽어 창고 처마 아래 주저앉았다. 충청 수사 강진흔이 휘하의 수군을 이끌고 적과 맞서 싸우는 가운데, 22일 새벽 강도유수 장신의 강화도 함대도 염하수로에 당도했다. 이를 본 검찰사 김경징이 언덕 위에서 깃발을 흔들며 장신에게 싸움을 재촉했다. 그러나 썰물로 인해 수심이 얕아지던 중이었기에, 장신의 판옥선단은 나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대로 뱃머리를 돌려 퇴각하고 말았다. 조선 수군이 흩어지자, 청군은 배를 갑곶으로 전진시켰다. 곧 뗏목 하나가 정박했고, 대여섯 명이 하선하며 화살을 쏘아댔다. 청군이 상륙하자, 언덕 위의 조선군은 순식간에 진영이 와해되었다. 김경징, 이민구를 비롯하여 모든 장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황선신(黃善身)을 비롯한 몇몇 장수들이 소수의 병력과 함께 분투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전멸하고 말았다. 청군은 기세를 몰아 진격하여 강화성까지 함락하였다. 전투가 끝나자 청군은 약탈을 시작했고, 수많은 양민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 자결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개중에는 김경징의 모친과 아내도 있었다. 김경징은 자신의 가솔들도 내버리고 도망쳤던 것이다.<ref>강화지에 따르면,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가 가족들에게 자살을 강요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언제 청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가족들을 모두 자살시킨 후 도망쳤다는 건,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서도 강화지의 기록에 대해 ‘당시의 민심이 김경징에 대해 적개심이 너무 컸기 때문에, 아녀자들의 자결을 왜곡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김경징과 김진표가 식구들을 전부 내버리고 도망친 건 사실이다.'''</ref> {{인용문2|(전략)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ref>예친왕(睿親王).</ref>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강진흔·김경징·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중략)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 패배하여 죽었다. (중략) 노왕이 도로 강을 건너갔는데, 몽병(蒙兵)<ref>몽골 병사.</ref>이 난을 일으켜 거의 남김없이 불지르고 파헤치며 살해하고 약탈하였다.|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1022_008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8번째 기사]}} {{인용문2|(전략) 이른 아침에 김경징(金慶徵)이 군병을 이끌고 갑곶(甲串)으로 나가기에, 내(조익)가 “나도 가겠다.”라고 하면서 차중철만을 데리고 따라 나갔다. (중략)<br />성을 나와 1, 2리쯤 지났을 적에 포성(炮聲)이 진동하는 것이 들렸다. 갑곶에 이를 무렵에 주먹만 한 크기의 포환(砲丸)이 계속해서 날아오자 사람들 모두가 풀이 죽었다. 갑곶의 둔덕 위에 이르러서 바라다보니, 나루의 동편에는 모여 있는 적의 무리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고개 위에 주둔한 병력은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작은 배들이 마치 우반(隅盤)<ref>우반(隅盤)은 소반을 말한다. 쉽게 말해 밥상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된다.</ref>의 모양과 같았으며 크기도 우반을 겨우 능가할 정도였는데, 깃발을 달고서 나룻가에 떠 있는 배들의 숫자도 겨우 30여 척 정도에 불과하였다. 한편 나루의 북쪽을 바라다보니, 아군의 전선(戰船) 4, 5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리고 사시(巳時)쯤 되었을 때에 판옥(板屋)의 대선(大船)이 남쪽에서 올라오는 것이 보였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았다. 이에 사람들 모두가 이것은 필시 남방의 전선(戰船)이 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들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그 배들이 나루를 수백 보쯤 앞에 두고서 모두 정지한 채 전진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바로 장신이 거느린 경기(京畿)의 전선들이었다.<br />변보(變報)를 처음 들었을 때에 어떤 이가 뿔피리를 불어서 군사들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김경징은 그렇게 할 경우에 인심을 경동(驚動)시킬 것이라고 말하고는, 단지 성 안의 무사들만을 모아서 데리고 가려고 하였다. 그 숫자는 겨우 7, 8십 명에 불과하였는데, (중략) 이때 검찰(檢察) 등 여러 사람들은 모두 창고의 처마 아래에 앉아 있었다. 오시(午時)쯤 되었을 적에 적의 선박이 차례로 건너오기 시작하자, 검찰 등이 언덕 위에서 깃발을 흔들며 주사(舟師)의 출동을 재촉하였으나 주사는 끝내 꼼짝도 하지 않았다.<br />적의 선박이 중류(中流)를 막 지나자마자 아군의 조총(鳥銃)이 일제히 불을 뿜었으나 모두 거리가 미치지 못한 채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발사하지 못하는 사이에 적의 선박 한 척이 먼저 도착하여 정박하였는데, 그 배에 탄 자가 겨우 5, 6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건만 그들이 배에서 내려서 나오자 아군은 어지럽게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계속해서 또 두세 척의 배가 정박하였는데, 아군이 화살에 맞아 혹 즉사(卽死)하자 모두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후략)|포저집|[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21A_0250_010_0020_2006_004_XML 병정기사(丙丁記事)]}} {{인용문2|(전략) 정월 21일에 이르러 오랑캐들이 뭍으로부터 배를 끌고 강화도 동쪽 해안에 도착하니 (중략) 사시(巳時) 쯤 되었을 때 적들이 대포를 이용해 서쪽 해안을 연이어 폭격하니 흙과 돌이 부서졌습니다. 작은 배 수십 척이 앞 바다에 떠서 장차 건너오려는 형세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대군께서 도착하셨고, 재상 김상용(金尙容)과 판서 이상길(李尙吉)과 판서 조익(趙翼)과 동지 여이징(呂爾徵)과 참의 유성증(兪省曾)과 헌납 이일상(李一相)과 전적 이행진(李行進) 등 10여 명도 이어서 도착하였습니다. 충청도의 전선(戰船) 7척은 급류에 정박해서 갑자기 제어할 수 없었고, 본부(本府)의 수군 27척은 광성진에서 북쪽으로 올라왔는데 조수가 밀려나가자 전진하지 못하였습니다.<br />이때에 본부의 중군 황선신(黃善身)이 광성진에서 비로소 육군 113명을 이끌고 와서 개펄에서 저지하며 멀리 돌아서 왔습니다. (중략) 적들은 (중략) 황선신의 군대와 마주쳤는데 황선신의 군대는 패하고 말았습니다. (후략)|동주집|[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37A_0340_030_0040_2017_006_XML 답정판서서(答鄭判書書)]}} {{인용문2|(전략)<br />○ 김류의(金瑬)의 아내 유씨(柳氏)(근(根)의 딸)ㆍ 경징의 아내 박씨(효성(孝誠)의 딸)ㆍ 진표(震標)의 아내 정씨(백창(百昌)의 딸) 및 김류의 첩 신씨ㆍ경징의 첩 권씨가 같은 날에 목을 매어 죽었는데, 아울러 정려하였다. 《강화지》<br />○ 그때 경징과 장신의 어머니가 모두 성 안에 있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자기 어머니를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그 어머니가 마침내 적중에서 죽었다. 경징의 아들 진표는 그 아내를 다그쳐 자진하게 하고, 그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성 가까이 왔으니 죽지 않으면 욕을 볼 것입니다.” 하니, 두 부인이 이어서 자결하고 일가친척의 부인으로서 같이 있던 자들도 모두 죽었는데, 진표는 홀로 죽지 않았다.<br />○ 일찍이 경징의 아내 박씨가 경징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주 간하니, 경징이 노하여 말하기를, “[[꼰대|여자가 무엇을 아느냐.]]” 하자, 박씨는 울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깨치고 집이 망하면 또한 여자라 하여 스스로 모면할 수 있는가.” 하더니, 과연 이때에 이르러 한 집안의 부녀가 모두 목을 매어 죽었다. 혹자는, “진표가 다그쳐 죽게 하였다.”고 일컬었다. 대개 인심이 경징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그 어머니와 아내의 절개까지 아울러 깎아 없애려고 한 것일 뿐이다. 정씨는 백창의 딸이니, 그 친정의 혈통을 증험해 보더라도 남에게 닥달을 받아 죽을 사람은 더욱이 아니다. 《강화지》<br />(후략)|연려실기술 제26권|[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270_010_0040_2002_006_XML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 순절한 부인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