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욱

權永郁.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9년 6월 15일 전라남도 목포부 온금동에서 출생했다. 이명은 '권소운(權笑雲)'이다. 목포공립상업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던 1929년 11월 7일 광주학생항일운동 소식을 접하고 동창생 최창호, 강영수[1], 이인형, 이광우, 정찬규, 오상록, 박종식 등과 함께 논의한 끝에 11월 19일 목포상업의 한국인 학생을 규합하여 반일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이후 권영옥 등 동지들은 「피감금학생 즉시 탈환」,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등의 구호를 쓴 붉은 목면(木棉) 대기(大旗) 3개와 붉은 색종이로 된 소기(小旗) 약 120개를 만들어 배부하고, 정찬규(鄭燦圭) 등이 등사판으로 격문 약 1,500매를 인쇄하였다.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2천만 피압박 민중 제군이여! 우리 2천만 생령을 사랑하고, 우리 조국을 사랑하는 광주학생 남녀 수십명은 빈사의 부상을 입었고, 철창에서 신음하는 청년 학생 2백명은 불법하게 구속되었다. 그들은 정의를 통하여 가두에서 시위 행렬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광견의 독아에 걸려 쓰러졌다. 우리는 광주학생의 석방을 요구함과 동시에 참기 어려운 피와 눈물로써 시위 행렬을 한 것이다. 피감금 학생을 탈환하라, 총독부 폭압 정치 절대 반대, 교육에 경찰 간섭 반대, 치안유지법을 철폐하라, 지방 혁명 지지, 제국주의 전쟁 절대 반대, 식민지 해방 만세,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거사 당일인 11월 19일 아침, 권영옥 등은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앞에 집결하여 일제히 소기를 흔들고 격문을 살포하면서, "싸우자 2천만 동포여! 광주학생을 탈환하라.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30년 3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대정8년 제령 제7호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2] 이에 불복하여 항소해 1930년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3] 그러나 목포공립상업학교로부터 정학 처분을 받았다.

1932년 7월경 전남 목포에서 박흥복 등과 함께 민족해방과 신사회 건설을 위한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고, 중등학생을 중심으로 한 반제동맹 결성 등을 계획했다. 그러나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1934년 12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공판에 회부되었다.[4] 이후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권영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