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지중해 세계: 두 판 사이의 차이

(→‎왕정: 로마 건국 신화와 로물루스의 치세 약간 추가했음, 내일 계속 더 추가할 예정)
(→‎로마 세계: 문단 이름 연결)
40번째 줄: 40번째 줄:




==로마 세계==
==[[로마 제국|로마 세계]]==
로마 세계란, 로마 건국(B.C.753)부터 서로마 제국 멸망(476년), 혹은 동로마 제국 멸망(1453년)까지를 말한다. 로마 세계는 유럽에 천주교와 기독교등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유일신 신앙이 뿌리잡히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서구인들의 야만인과 문명인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의 시작이 되었다.
로마 세계란, 로마 건국(B.C.753)부터 서로마 제국 멸망(476년), 혹은 동로마 제국 멸망(1453년)까지를 말한다. 로마 세계는 유럽에 천주교와 기독교등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유일신 신앙이 뿌리잡히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서구인들의 야만인과 문명인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의 시작이 되었다.
===왕정===
===왕정===

2015년 6월 28일 (일) 04:01 판

틀:넘겨주기 있음 Greek-phoenician-colonies.jpg

고대 지중해 세계란?

서양사에서 고대 지중해 세계는 미케네 문명(B.C.1600)부터 서로마제국이 멸망(476년)까지를 말한다. 고대 지중해 세계는 문화, 정치, 사회등 여러 방면에서 이후 유럽의 역사가 발전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에게문명

폴리스 출현 이전

폴리스 출현 이전의 에게문명은 미케네 시대와 암흑시대로 구분한다. 미케네 문명은 펠로폰네소스 동남쪽의 미케네라는 성채의 이름을 딴 문명이지만 미케네에 의해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분할되어 전쟁 중이었다. 오디세이아만 봐도 왕이 넘쳐나잖아 미케네 시대는 모든 고대 국가와 동일하게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이다. 왕을 정점으로 하여 촌장인 파시레우(pasireu), 촌민인 다모(damo), 그리고 노예로 계층화된 사회였다. 미케네 시대의 왕국들의 특징은 오리엔트 국가의 형태와 유사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중심 도시였던 기르수나 마리에서 발견된 점토판의 내용과 미케네 일대에서 발견된 점토판 내용에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는 산악지역이라 노동력을 대규모로 조직할 관개 농경의 필요성이 없었고, 당연히 이는 오리엔트 국가들에 비해미약한 국가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되었다.[1]

미케네 문명이 왜 몰락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통일된 의견이 없다. 바다에서 이주민이 몰려와서인지 아니면 발칸에서 그리스인들이 남하했는지 말이다. 아무튼 미케네 문명은 붕괴되었고, 이는 사회조직의 소멸과 전쟁의 생활화국가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이다. 이때 소아시아 서안으로 이주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란 속에서 지배층이 사라져버리고 전쟁반달의 지속으로 인해서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마지막에 등장한 것이 호메로스오디세이아이다.[1]

폴리스의 탄생과 발전

그리스 세계의 가장 중요한 폴리스의 등장은 앞서 말한 암흑시기의 혼란이 진정된 이후이다. 이 시기 이민족의 이주가 마무리되고 사회는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전보다 많은 곡식을 생산하게 된다. 사회적 안정과 식량생산량의 증가는 인구증가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리스라는 지역이 산악지대가 많고 척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인구는 증가되지만 토지는 부족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2]

인구증가로 인한 식량부족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시도된 방법은 타 지역의 식량을 빼앗는 것이다.레이드가자! 이런 일이 빈번히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식량을 지키기 위해서 언덕을 중심으로 모여서 방비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폴리스의 기원이 되었다. [3]

폴리스 형성 이후 타 지역의 식량을 빼앗기 어려워지자 그리스인 들은 잉여인구를 방출하는 정책을 펼친다. 즉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4]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리스는 잉여 인구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쟁의 과정과 폴리스 형성 과정에서 귀족층들이 형성된다. 이들은 전장터에 나가기 위한 장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전장터에 나갈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이 시기 전쟁은 多 대 多의 전투보다는 일기토같은 형식의 전투가 많았다. 그렇기에 좋은 장비를 낄 수 있는 사람이 전장터에서 유리했고, 이는 당연히 돈 많은 애들이 전쟁을 독점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렇게 형성된 귀족층들이 폴리스의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쟁의 양상이 多 대 多로 전환되면서 귀족들의 위치가 위협받게 되었고, 동시에 전쟁에 참여하게된 평민들은 자신들도 정치에 참여하고자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폴리스 사회의 모순으로 부각된다.

폴리스의 발전(아테네)

앞서 서술한 모순점을 해결하는 것이 폴리스의 발전에 중요한 것이었다. 이 모순은 각 폴리스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했다. 그 중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가장 유명하므로 이 둘만 서술하겠다.

아테네의 경우 위로부터 개혁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었다. 기원전 7세기 후반 드라콘은 법을 성문화시켰고, 기원전 6세기 초 솔론(Solon)은 ‘’‘개혁입법’‘’을 통해 새로운 정치체제를 마련하고자 했다. 솔론은 ①인신을 담보로 한 채무금지를 통해 예농을 없앴다. ② 토지 수확량을 기준으로 전 시민을 4등급으로 구분하고 국정 참여의 권리를 차등 있게 규정했다. 일명 금권 정치 이는 기존에는 정치참여 권한이 없던 평민들에게 정치참여권한을 준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귀족층의 반발을 일으켰고, 솔론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 등장한 것이 바로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의 개혁을 계승하면서 중소 농민층 육성과 시민 공동체 의식 강화에 주력하였지만[1] 페이시스트라토스 생전에는 아테네 통치가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사후 아들들의 멍청한 짓으로 붕괴된다. 이후 등장한 사람이 바로 클레이스테네스이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먼저 귀족들의 전통적 세력 기반을 해체하기 위해 기존의 4부족체제를 10부족체제로 전환시켰고, 데모스라는 기구가 기존의 부족의 권한을 대신하게 된다. 동시에 새로운 정무 예심 기구인 500인 평의회를 구성하여 모든 시민에게 참정권을 주었다.[5]

폴리스의 발전(스파르타)

스파르타는 미케네 문명을 파괴한 도리아계 정복자들의 집락들이 결합해서 생겨난 폴리스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은 기원전 8세기 중반까지 라코니아 지역을 장악했고 8세기 말에는 메세니아 평원을 장악하면서 대형 폴리스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정복민들은 비도리아계 주민들은 헤일로타이라 불리는 예속농민이 되었다. 그리고 스파르타인이 아닌 도리아계 주민들은 페리오이코이라 불리는 준시민이 되었다. 완전 시민권은 스파르티아테스라 불리는 소수에게 한정되었습니다. 이들은 스파르타 내 소규모 엘리트 집단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지배체제는 기원전 7세기 중엽 메세니아 반란으로 위기를 직면하게 된다.[1]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되었다. 그는 예속민들의 잠재적 위협에 대응할 군사적 체제가 갖추어져야 되며, 이를 위해서 소수 시민들 사이에 불평등과 불신을 제거하고 일체감을 강화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이러한 인식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스파르타 교육체제이다.


페르시아 전쟁

헬레니즘 세계

로마 세계

로마 세계란, 로마 건국(B.C.753)부터 서로마 제국 멸망(476년), 혹은 동로마 제국 멸망(1453년)까지를 말한다. 로마 세계는 유럽에 천주교와 기독교등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유일신 신앙이 뿌리잡히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서구인들의 야만인과 문명인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의 시작이 되었다.

왕정

로마 건국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종말한 트로이에서 살아남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가 그의 일족을 이끌고 탈출했다고 한다. 이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서 이탈리아 남해안을 지나 시칠리아섬을 돌아 이탈리아 서해안을 북상한 결과, 현재 로마 터에 도달하였다. 이 터에서 아이네이아스가 정착하고 나서 여러 왕들이 치세를 마친 후, 기원전 753년에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하게 된다. 로물루스는 원래 레무스와 함께 쌍둥이였는데, 로마 건국 이후 레무스가 로물루스의 땅을 침범하자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인다.

로물루스의 치세

레무스가 죽은 이후, 로물루스는 도시를 제대로 건설하기 위해 팔라티누스 언덕 근처에 성벽을 쌓았다.

국정 부분에서는, 정치 기관을 3개로 나누었는데, 왕과 원로원과 민회가 바로 그 것이다.

공화정

제정

  1. 1.0 1.1 1.2 1.3 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파주:한울, 2007, pp.29-32.
  2. 멜서스의 인구론이 예언한대로 말이다
  3. 이 시기 폴리스는 성벽이 없는 그냥 언덕이었다,
  4. 참고적으로 여기서의 식민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그리스의 식민은 어떤 지역에 가서 현지인과 어울리는 것이고, 19세기의 식민은 다른 지역을 장악하여 착취하는 것이다.
  5.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그러나 500인 평의회의 권한은 상당히 적었다. 기껏해야 무엇을 건설할지 등의 업무였지 전쟁과 외교업무는 10인회에서 결정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가 정치개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 10인회에 소속된 사람이었고 임기가 10년이었으니 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