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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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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 문제===
===경제성 문제===
아라뱃길을 논할 때 가장 크게 거론되는 문제점이다.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인공운하를 조성했으나 막상 당초 취지와는 다르게 운하로서 물류 이동은 매우 저조하다못해 없다시피하다. 오세훈이 서울특별시장이었던 시절에 한강 르네상스를 추진하면서 아라뱃길과 연계한 여러가지 구상을 내놨으나 현실은 시궁창. 물동량은 기대하기 힘든 수준에다가 부가적인 목표였던 관광유람선도 거의 사장되었다.
아라뱃길을 논할 때 가장 크게 거론되는 문제점이다.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인공운하를 조성했으나 막상 당초 취지와는 다르게 운하로서 물류 이동은 매우 저조하다못해 없다시피하다. 오세훈이 서울특별시장이었던 시절에 한강 르네상스를 추진하면서 아라뱃길과 연계한 여러 가지 구상을 내놨으나 현실은 시궁창. 물동량은 기대하기 힘든 수준에다가 부가적인 목표였던 관광유람선도 거의 사장되었다.


===환경 문제===
===환경 문제===

2015년 7월 18일 (토) 09:49 판

개요

경인 아라뱃길 또는 경인운하라고 하기도 한다. 한강 하류의 행주대교에서 인천광역시 서구에서 서해바다와 연결되는 운하이다. 길이 18km, 폭 80m의 수로와 바로 옆에는 자전거 도로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나란히 달린다.

서해바다와 연결되는 부분은 경인항 인천터미널과 아라서해갑문,이 자리하고 있다. 한강과 접속하는 부근에는 경인항 김포터미널과 아라한강갑문이 자리하고 있다.

역사

의외로 이쪽 일대에 운하를 파겠다는 계획은 꽤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고려 고종 당시 최충헌의 아들 최이가 건설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조선 중종 당시 김안로가 다시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한남정맥을 관통해야 하는데 암반구간이 발견되어 결국 실패하였다.(당시 굴착의 흔적은 굴포천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 구간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90년노태우 대통령 당시 굴포천 방수로 사업의 기본계획이 수립되고, 이후 김영삼 대통령 당시 경인운하 건설로 변경되어서 민간투자대상으로 지정되었으나 노무현 대통령 당시 경제성을 이유로 나가리되었던 것을 다시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진행하는 공공사업으로 전환하여 틀:날짜/출력 시범운행을, 틀:날짜/출력 공식적으로 개통했다.

논란

경제성 문제

아라뱃길을 논할 때 가장 크게 거론되는 문제점이다.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인공운하를 조성했으나 막상 당초 취지와는 다르게 운하로서 물류 이동은 매우 저조하다못해 없다시피하다. 오세훈이 서울특별시장이었던 시절에 한강 르네상스를 추진하면서 아라뱃길과 연계한 여러 가지 구상을 내놨으나 현실은 시궁창. 물동량은 기대하기 힘든 수준에다가 부가적인 목표였던 관광유람선도 거의 사장되었다.

환경 문제

양쪽에 갑문이 존재하는 특성상 아라뱃길의 수질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교통 문제

김포시와 검단 대부분 지역이 아라천, 한강, 염하(강화해협)에 둘러싸여 김포섬이 되었다.(...) 도심지에서도 지상으로 지나는 철도로인해 단절되는 현상이 교통문제는 물론이고 지역개발에도 큰 걸림돌인데, 하물며 거대한 수로로 가로막힌 김포시는 인천이나 서울로 나가는 도로망이 아라뱃길을 건너는 몇몇 교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