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게시해주세요.
최신판 | 당신의 편집 | ||
13번째 줄: | 13번째 줄: | ||
{{인용문|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이며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다.}} | {{인용문|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이며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다.}} | ||
심지어 백정의 아이 둘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학교에 입학시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정에 대한 수백년에 걸친 차별대우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었고, 그는 [[ | 심지어 백정의 아이 둘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학교에 입학시키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정에 대한 수백년에 걸친 차별대우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었고, 그는 [[형평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반발을 겪어야 했다. 1923년 5월 25일 탁윤환이란 사람이 형평사 근처의 술집에 가서 술을 달라 했는데 술이 떨어졌다고 하자 "백정 놈들에겐 밥을 팔더니 나한테는 술이 왜 없다고 하는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형평사 사람들이 분노해 그를 폭행했고, 탁윤환은 이에 복수하고자 패거리를 몰고 형평사로 몰려갔다. 동아일보 1923년 5월 30일자 기사에 따르면, 탁윤환 일행은 형평사에 찾아가 강상호를 불러내 두 뺨을 무수히 난타하고 의복을 찢는 등 모욕을 줬다고 한다. | ||
이후 많은 이들이 그를 "신백정(新白丁)"이라고 욕하며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는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재산을 형평사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1924년 4월 25일에 개최된 형평사 발기총회에서 임시의장 및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8월 11일에 개최된 진주노동공제회 집행위원회에서는 회계를 맡았다. 한편 [[신간회]] 진주지회에서는 간사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一新高等普通學校)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 이후 많은 이들이 그를 "신백정(新白丁)"이라고 욕하며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는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재산을 형평사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1924년 4월 25일에 개최된 형평사 발기총회에서 임시의장 및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8월 11일에 개최된 진주노동공제회 집행위원회에서는 회계를 맡았다. 한편 [[신간회]] 진주지회에서는 간사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一新高等普通學校)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